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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을 위한 이사야의 기도

이사야 로이드 존스............... 조회 수 5137 추천 수 0 2012.10.16 18: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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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63:7 
설교자 : 로이드 존스 
참고 : http://lloydjones.org/zbxe/Lloydjones02/1559/page/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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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사63:7)

 

우리는 이사야 63장의 처음 여섯 구절을 상고하면서 이사야가 환상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격려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 이사야는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가 이 시간 연구하려는 주제가 바로 이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63장 7절 부터 64장 끝까지 계속됩니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큰 대목들을 살펴볼 수는 있습니다. 제 관심은 여러분에게 선지자의 기도를 제시하고 그것에 대해 단순하게 논평하며, 그 기도의 주도적인 원리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 모두는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 배울 필요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기도와 기도의 모든 방식에 대한 기록을 달고 있는 성경은 우리가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음을 명백하게 해줍니다. 그래야만 중언부언하지 않고 마음으로뿐만 아니라 이성적으로 기도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게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기도들은 언제나 체계와 조직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어떤 맥락이나 순서없이, 두서없이 해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질서와 순서가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들이 매우 효력이 있는 것으로 입증되었으니, 그 기도들을 연구하고 본받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침체기에 교회가 드려야 할 위대하고, 전형적인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흥을 위한 위대한 기도요,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자기 백성들을 하감하사 다시 한번 찾아와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사야 선지자의 방식을 따를 때, 그가 했던 첫번째 일은 스스로 하나님의 성품을 상기하는 일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도 상기시켜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7절의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이것이 바로 참된 기도의 비밀입니다.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과 그 성품을 인식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가 단순히 어떤 심리학적인 마음의 위안이나 평안 정도를 발견해 내려는 시도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가 어떤 경건한 소망이나 염원을 드리는 것이거나 단순히 우리의 두려움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만일 기도를 진정으로 드리고자 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첫번째 일은, 우리의 말을 들으시는 분이 누군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모든 행보와 모든 분야에서 명백합니다. 지적인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대화 상대자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 합니다. 그의 배경과 지식, 관심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아야 합니다. 기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품을 스스로 상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가 바로 그렇게 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또한 그가 이러한 것들을 단수 형태로 나타내지 않고 복수 형태로 나타낸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모든 자비들", "찬송들", "그 긍휼들...  그 많은 자비들....큰 은총들"이라고 말합니다.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단수로 번역되어 있음- 역자주) 그는 거듭해서 여러 자비들을 말하면서 스스로 하나님의 이러한 성품들의 충만함을 상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심과 긍휼과 선하심과 인애하심으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그 많은 자비를 따라." 하나님은 얼마나 선하십니까? 이사야는 스스로 그러한 것들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특히 이사야가 기도한 상황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들의 충만함을 상기하는 가치를 알수 있습니다. 그들이 처한 곤경은 절망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버림받은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중 많은 사람들이 투덜대며 불만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자기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에 관해서 완전한 확신을 갖는 것임을 인식했습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현재 상태와 조건을 어떠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내가 알기로는 하나님은 이러한 자비와 선하심과 긍휼과 연민과 찬송들로 가득하신 분이다."

 

저와 여러분은 개인적인 기도든 교회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든 간에 이러한 방식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산하심에 대한 어떤 의심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기도하는 것이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귀가 와서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며 우리를 돌보시기 않는다는 암시를 던질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마음을 깨뜻게 하고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어떤 의심이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어떻게 나타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걱정스러운 염려, 마음을 짓누르는 근심을 어떻게 피합니까? 그는 말합니다. "아무것도 염러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감사함으로! 매우 괴롭고 모든 것이 우리를 대적하는 것 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 관심이 있으신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들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생각을 깨끗하고 곧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어떤 의심이든지 도사리고 있다면 우리 기도는 이미 소용이 없습니다. 선지자처럼 시작하십시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를 말하리라."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145:9)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문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며, 이것은 영구하고 불변합니다. 그는 영구히 자비와 긍휼과 선하심과 인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서부터 출발했듯이 그 진술의 끝에서도 그 점을 되풀이합니다.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우리의 개인적인 상태나 현재의 보편적인 교회 상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나 긍휼이나 인애하심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선지자는 바로 이 점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점에 관해서 분명하지 못하다면 앞으로 계속 나아간다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만일 마음과 생각속에 하나님을 비판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기도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그것은 무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거나 우리에게 불공평하시다고 느낀다면, 거듭 말씀드리지만 기도를 멈춰야 합니다. 다른 기도의 말을 계속 해나가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며, 능력과 위엄과 모든 권세와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아룀으로써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그가 우리에게 은혜롭게 계시해 주신 그 거룩한 본성의 탁월함을 언급해야 합니다. 이것이 언제나 우리의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선지자는 그런 다음 계속해서 다른 것을 해 나갑니다. 그는 그 점을 상세하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상세하게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스스로 상기한 다음,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를 관조합니다. 이것은 8-14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선지자의 기도 방식과 관련하여 제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선지자들에게서 그 점을 발견할 것입니다. 시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기자들은 자기들이 난관에 처해 있음을, 당시의 교회인 이스라엘 나라가 원수들에게 둘러써여 고통받고 패배당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한결같이 과거를 되돌아 보면서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 그때는 그랬는데 왜 우리가 지금 이러한 상황에 있는가? 어떻게 해서 우리가 이러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는가? 그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지혜의 진수임이 분명합니다.

 

저는 그것을 이렇게 나타내고 싶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과 기도의 유익에 대해서 말할 때, 단순히 학문적인 지식의 영역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처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최초의 사람들이 아니며, 우리들만 어려움에 빠진 것이 아님을 상기해야 합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과거 여러 세기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기록한 긴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가 처음 생겨나고부터 계속해서 말입니다. 바로 이 역사를 잘 아는 것보다 우리나 교회에 다 가치 있는 것은 정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지 않고 역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하신 일에 대한 기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위해서 말로 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뒤를 돌아보면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떠한가? 이 이야기의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이것을 행한 방식을 생각해 봅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를 가르치면서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거울)로 기록하였느니라"(11절)고 말합니다. 사실 그는 "어째서 광야의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우리를 도와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런 방식으로 다루셨으니 우리도 교훈을 배우자. 하나님은 여전히 같으신 분이다. 인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원리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들이 기록된 것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자 함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사야서의 이 대목을 연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보충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자기 백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원리를 살펴보기만 할 뿐 아니라, 기독교회 전체 역사로 돌아가 그것을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우리의 입장과 훨씬 더 유사함을 알수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교회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현 시대에 너무 얽매여 있어서,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한 교회사의 교훈들은 너무나도 풍부하고 다양합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교회가 오늘날과 같은 처지에 있었던 때가 종종 있었다고 말한다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어쨋든 그것이 제게는 큰 위안이 됩니다. 오늘날 가장 침체된 사람들은 바로 그 사실을 잊은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난제만 생각하는 사람들, 라디오나  텔레비젼이나 공산주의에 대해서만 말하는 사람들을 저는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아, 여기에 문제가 있다." 마치 그전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해결하는 방안은 교회사로 되돌아가 보는 것입니다. 현재 상태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습니다. 새롭게 보이는 것은 다만 그 난제가 모습을 드러내는 특별한 형태뿐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깊은 시궁창 및바닥에까지 떨어져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곧 끝장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사로 돌아가 연구합시다. 선지자가 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 갑시다.

 

그가 시작하는 방식은 이러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8절). 그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루신 역사를 재고합니다.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백성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내서고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음을 발견합니다.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까? 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이라 하는 사람을 불러내시고 그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심으로 존재케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를 약속의 땅으로 이끄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저희는 내 백성이라"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칭하신 것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자 우리가 포착해야 하는 근본적인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다른 족속들과는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 우리는 그의 백성들이다." 그러므로 그가 그들을 불러내셨고 이 일을 그 백성들 안에서 시작하셨으니, 그분은 그들의 구원자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공포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았음-역자주) 라는 말이 여기 와서는 안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러므로)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그들이 거짓을 행치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 그들은 거짓을 행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냈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에게로 불러내셨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인식해야 하는 첫번째 요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인간의 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여러 제도들과 공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고대 세계에서 여러 민족들 중 한 민족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듯이 말입니다. 아니, "교회는 물과 말씀으로 하나님이 새롭게 지은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교회의 기원 전체는 하나님의 목적의 결과입니다. 교회를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과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루시는 처사를 생각하도록 합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9절).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우리들, 이스라엘 자손들을 보라. 갈대아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도성을 함락시켰고 파멸시켰으며 우리를 포로로 잡아갔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하나님께서 이 특별하고 기이하며 놀라운 것들을 주신 백성들이다."

 

그런 다음 계속해서 기원과 시작,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신" 과거의 때를 스스로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또한 그들을 찾아와서 도왔던 언약의 사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읽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의 사자"이며, 의심할 여지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그 특별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신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가장 다정 다감한 진술이 나옵니다.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이것은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우리 스스로 상기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아시겠습니까? 선지자는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와 같은 입장에 있다. 그러나 나는 여러 시대를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끄시던 때로 돌아가 본다." 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나르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들어 나르셨고 광야와 사막 지대를 거쳐, 바다와 강을 건너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바로 과거에 하나님께서 그러한 방식으로 백성들을 다루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선하심이여!

 

기독교회가 그 기원으로 되돌아가 살펴보면 이와 같은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다시 읽어 보고, 아무런 자랑거리도 갖고 있지 않던 소수의 사람들을 살펴보십시오. 대체 그들은 왜 거기에 있습니까? 어째서 우리는 그들을 교회라 부릅니까? 그들을 택하신 이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그들을 불러냈고, 그들을 그러한 위치에 세우셨으며, 그들에게 그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온 세상 사람들이 반대하는 소수의 무리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과 지도자들과 당국자들과 이방인들이 그들을 반대했습니다. 온 세상이 그들을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복을 주셨는지를 살펴보십시오. 그 앞에 있는 사자와 성령의 능력을, 힘없고 방어력 없는 작은 무리의 사람들로 이룩된 작은 교회들을 보고 ㅡ그들이 승리하고 이기며 앞으로 진행해 나가되,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인도하시며 그들에게 능한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여러 세기에 걸친 기독교회의 역사를 보십시오. 그러면 이와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초기 역사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 않습니까? 마르틴 루터 같은 한 사람이 자기를 대적하는 그 모든 사람들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기들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그 강력한 반대자들에게 이 소수의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나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교회의 위대한 부흥의 시기마다 일어났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로 되돌아가서, 교회가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고, 하나님의 위대한 권위와 선하심의 능력과 권세에 전율하던 모습을 살펴보는 것만큼 감격적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기원이 있습니다. 시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는 언제나 축복의 역사요, 하나님의 선하심이 따르는 역사였습니까? 선지자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10절)

 

자, 여기에서 여러분은 구약의 기록에 거의 끝없는 주제로 거듭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속에서 일어난 격렬한 변화입니다. 그들은 잘 출발했지만 넘어져 거의 멸절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언제나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그처럼 부르심을 받고 그처럼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배역했고 하나님의 성신을 근심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이러한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풍성한 복락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른 족속들을 시샘하고 다른 신들을 부러워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종교가 너무 편협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십계명,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먹지 못하게 하고 있어, 우리가 좋아하는 자들과 결혼할 수도 없어, 우리는 좋아하는 대로 일주일의 일곱 날들을 살 수 없단 말이야." 그들은 하나님께 배역하면서 "이 종교는 관용이 없어, 이 멍에는 우리가 질 수 없는 것이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신들에게 돌아섰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거스르고 범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거룩한 율법을 상세하게 주심으로써 그것에 대해 하등의 의심도 하지 않게 하셨지만, 그들은 그 모든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죄에 빠져 다른 족속들을 본받았고, 그들의 신상과 우상을 세워 놓고 그 앞에 절하고 경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그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배역했고 하나님의 성신을 근심시켰으며 괴롭혔습니다.

 

그들의 지나온 이야기는 우리에게 거울이 되도록 기록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배역하지 않았거나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해서 축복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들이 넘어지는 것을 보면 언제나 그 이유는 같습니다. 그들이 믿음과 행실에 있어서 하나님을 배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현재 입장의 가장 중추적인 요점에 이르게 됩니다. 어째서 오늘날 교회가 이 모양입니까? 오늘날 이 나라의 10퍼센트의 사람들만이 기독교와 공식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도 그 중 절반만이 교회에 정규적으로 출석하며 꾸준함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오늘날 이 땅의 예배 처소는 100여년 전의 상태와 왜 그렇게 다릅니까? 100여년 전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당시 새로운 교회들이 지어져 가는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교회가 비좁아 이전에 있던 건물들을 개조해야만 했습니다. 동시에 스펄젼은 템즈강의 남쪽에서 수천의 사람들을 태버너클 교회로 모여 들게 했습니다. 런던에 있는 모든 예배 처소가 가득 찼습니다. 나라 전체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1859년에 일어난  위대한 부흥은 나라 전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전부터 백성들을 축복해 오셨습니다. 18세기의 부흥이라는 위대한 복락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종교는 흥왕했습니다. 교회는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정치가들까지 교회에 관심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들은 비국교도의 양심에 대해서 말했고, 비국교도의 투표권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교회가 말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했습다. 교회는 흥왕했고, 하나님의 복락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날 상황은 어째서 달라졌습니까? 바로 우리 앞에 당면한 문제가 이것입니다. 어째서 우리가 지금은 침체되어 있습니까? 어째서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있습니까?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이처럼 위대하고 복된 백성들이 어째서 이와 같이 낮아지게 되었습니까? 원리적으로 이것은 선지자가 당면한 문제와 똑같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대답은 여전히 같습니다. 이스라엘, 교회가 고통에 빠지고 황폐해지며 버림받는 것은 언제나 교회가 배역하고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일을 했듯이 하나님의 교회가 과거 100여 년 동안 그러한 일을 했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이유입니다.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문제는 원수들이 그들을 공격한 데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아니다. 그 이유가 아니다"라고 선지자는 말합니다. 물론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이 선지가의 기록을 읽어 보십시오. 다른 선지자들의 기록과 시편들을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언제나 이것만을 말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낮아지고 패배당한 이유는 원수의 세력과 힘때문만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었다면 원수가 아무리 강력해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들에게 이김을 주셨을 것입니다. 원수들이 강하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낮아지고 패배당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자신이 배역하고 어리석고 하나님의 성령을 괴롭히고 근심시켰기 때문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성도들이여, 오늘날의 상태에 대한 진단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이유입니다. 교회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이 새로운 원수들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언제나 존재해 왔습니다. 공산주의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나 라디오나 텔레비젼이나 영화가 각축을 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반대하는 것들은 언제나 존재해 왔습니다. 이 세상의 상황은 언제나 변화가 없고 항상 그 모양 그대로 입니다. 일어난 일은, 교회 자체가 이루 말할수 없이 어리석어 하나님을 배역하고 성령을 근심시킨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믿음과 행실에 있어서 행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서 등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개념과 상념으로 다른 신들에게로 돌아섰습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한쪽으로 밀어 제치고 자기 자신의 신을 만들었습니다. 교회가 지난 100여 년 동안 한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의 상태와 교회의 상태를 바르게 설명하는 길은, 지난 19세기에 교회가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했고 하나님의 계시의 자리에 철학을 놓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 일을 한 것은 교회였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 책, 성경을 비평하기 시작했고 스스로를 권위자들로 세워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의 어떤 면들을 부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그들은 그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영광의 주님을 단순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고, 동정녀 탄생과 이적, 속죄,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했으며, 성경을 단순한 하나의 윤리나 도덕책으로 전락시켰습니다. 교회가 이런 상태에 처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교회는 교리와 믿음에 있어서 반역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지혜 대신 사람의 지혜를 세웠습니다. 교회는 학식과 지식을 자랑하게 되었고, 설교자와 교회의 종들에 대해 묻는 것도 더 이상 "성령이 충만한가? 하나님에 대한 살아 있는 체험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그가 교양이 있는가? 어떤 학위를 가지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제가 꾸며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이 문자 그대로의 역사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개념과 상념을 하나님의 계시와 교훈의 자리에 놓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행했던 일을 똑같이 반복한 것입니다.

 

물론 더 나아가서 그것은 믿음과 교훈에 있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행실과 품행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옛 복음주의적인 삶의 방식이 너무 편협하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보다 더 광범위한 사고 방식과 삶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행실에 있어서 하나님께 등을 돌렸고 자기들의 의지를 따라 살았습니다. 물론 원수가 들어왔습니다. 단순한 하나의 조직체로서 교회는 세상과 맞서 싸워 이길 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패퇴당합니다. 교회가 자기 조직체만으로 세상을 이기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또한 세상에서 어떤 것들을 끌어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십시오, 교회는 극적인 것들을 도입했습니다. 이것저것 다 도입해 보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연히 교회는 그와 같은 일들을 할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은 일들을 할 수 있고, 훨씬 더 잘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입니다. 교회는 다만 한 가지 힘의 원천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입니다. 교회가 이것에 대해 등을 돌리고 반역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넘어지고 질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징벌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반역했고 근심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의 원수가 되어 그들을 대항하여 맞서 싸우셨습니다.

 

자,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정확해야 합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처음에 저는 하나님의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이며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들이기 전에 경고하셨습니다. 그는 축복의 산 그리심산에서 "만일 너희가 나를 복종하면 내가 너희에게 축복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주의 산 에발산에서는 "너희가 나를 복종치 않으면 내가 너희를 저주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11:26-28 참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고 또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내 법을 복종치 않고 나와 합하여 행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를 저주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자기 백성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저주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이 백성들은 하나님께 반역한 다음 자신들이 하나님과 싸우고 있음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대적하여 싸우신 것입니다. 구약 역사는 이 점에 대한 실례들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갈대아 군대를 일으켜 예루살렘을 멸망하도록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원수를 일으키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백성을 징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상징적으로 그들의 원수가 되어 그들을 낮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복종시켰습니다. 오랜 동안 구약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그러한 일을 반복적으로 행하셨습니다.

 

저는 주저하지 않고 기독교회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여러 번 그와 같은 일을 행하셨다고 말씀드립니다. 만일 교회가 꾀를 내어 하나님을 반역하고 성령을 근심시키며 하나님께 등을 돌린다면, 자기 마음대로 하도록 아무 간섭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원수를 일으키셔서 공격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교회의 원수가 되사 응징하시고 교회를 낮추실 것입니다.

 

저는 서슴없이 오늘날 우리가 바로 그런 일을 목격하고 있다고 역설합니다. 교회는 여전히 겸비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반역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러한 행동을 하게 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1세기 전의 파괴적인 고등 비평운동에 대해서 회개하는 조짐이 있습니까? 그들은 그 운동에 대하여 등을 돌렸습니까?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했습니까? 아니, 여전히 그 결과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아무런 일도 해내지 못함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다른 것을 첨가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회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대적하는 원수들을 일으키십니다. 언제나 그렇게 하셨고, 계속해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것이 이야기의 끝은 아닙니다.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때에......"(한글 개역 성경에는 없음-역자주))라고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 때에) 백성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 영광의 팔을 모세의 오른손과 함께하시며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로 갈라지게....하신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11-13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고 그들을 대적하는 원수를 일으켜 그들을 낮추시고 복종시켜 철저하게 패배당하고 절망과 낙담에 처하도록 하셨을 때, 백성들은 갑자기 자신들을 바라 보면서 모세와 옛적의 날들, 그리고 그들의 존재의 기원을 기억했습니다.

 

신약성경에도 우리에게 전체적인 안목을 주는, 구약 이야기에 대한 완벽한 짝이 있습니다. 그것은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멸시하고 돈이 가득한 주머니를 가지고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자기가 아버지보다 휠씬 더 잘해 낼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길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고집대로 살아 보았지만 결국은 돼지와 쥐엄열매가 있는 들판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갑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여기서 무얼하고 있는가? 나는 내 아버지의 아들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 집을 생각하고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괴로움을 당하고 나서야 결국 자기 어버지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누더기를 입고 헝클어진 머리에 지갑은 비고, 배는 고파, 거의 죽어갈 즈음에 자신을 돌아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그는 기억하고 일어나 자기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집으로 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교회가 부흥을 체험하기 전에 언제나 이러한 일이 교회에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자신을 바라보고, 교회가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 상기해야 합니다. 즉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백성이요, 이적적인 방식으로 생성되었고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교회는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런 다음 그는 회개하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 기도는 얼마나 놀라운 기도입니까? "백성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며 가로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자, "그가 어디 계시뇨?"라는 대목을 보십시오. 모세가 목자였을 때, 어느날 오후, 산에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그가 어디 계십니까? 모세의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엘리야의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그처럼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 우리가 이 모양인데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이것이 바로 그들의 기도였습니다. 그들은 돌아서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는 여전히 동일하신 하나님이다. 우리는 그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째서 우리는 이 모양인가?"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드린 그 간구를 여러분들에게 거듭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 영광의 팔을 모세의 오른 손과 함께 하시며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하사 그들 앞에서 물로 갈라지게 하시고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그들은 말했습니다. "오, 이 능력의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뇨? 그러한 가르침을 주셨던 분이 어디 계시뇨?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던 그 하나님이 어디 계시뇨? 우리로 쉬게 하셨던 분, 영광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뇨?" 이것이 바로 그의 성품이요, 그가 행하신 일입니다. 또한 교회에 안식을주고 영광을 주실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바다도 가를 수 있고, 강도 가를 수 있으며, 광야에서 만나도 주실 수 있고, 그에게 불가능한 것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여기서 황폐하고 버림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모든 현대의 원수들을 흩어 버릴 수 있는데 그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옛적 원수들을 흩으시고 입기운으로 그들을 내쫓아 버리신 그분이 어디 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교회의 기도요,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원수들을 바라보면서 어리석게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떤 새로운 조직을 세울 수 있을까?"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말합니다. "아니다. 이 옛적 사람들이 자신들을 보았을 때 취한 행동을 나는 발견한다. 그들은 말했다. "만일 우리가 그를 찾을 수만 있다면!  그분은 어딘가에 계시고,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어디 계신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를 찾고 그 얼굴을 구하기 위해 분발하였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자,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그는 15절에서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라고 기도함으로써 그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찾읍니다. 다른 것은 다 내려 놓읍시다. 오직 그분을 찾고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입시다. 우리는 급박하게 그 일을 합시다. 모세의 하나님, 그들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던 하나님, 그들을 인도하시고, 원수들을 이기게 하시며, 바다를 가르시고, 그들을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시던 그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그를 찾는 것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탕자는 말했습니다. "그렇다. 나는 일어나 내 아버지께 가리라. 내가 가서,"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15:18-19). 이것이 기도입니다. 완전히 겸비한 자세로 우리의 반역과 어리석음과 미련한 교만과 수치를 인정하고 일어서서 아버지께 나아갑시다. 우리가 그를 만나는 순간, 그는 여전히 자비와 긍휼과 인휼과 사랑과 인애와 우리가 필요로하는 모든 것으로 충만하신 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의 능력은 쇠하지 않습니다. 그가 우리를 돌아보시며 다시 축복하실 때, 우리는 그의 백성들이 되며 원수는 흩어지고 시온은 주님의 영광으로 다시 충만케 될 것입니다. 그분이 어디 계십니까?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마음의 부르짖음입니까? 교회의 사람들이 이러한 부르짖음으로 충만해지기까지 교회에는 어떤 소망도 없습니다. 오직 그를 아는 것과, 그와 바른 관계를 맺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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