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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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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로이드 존스 |
참고 : | http://lloydjones.org/zbxe/Lloydjones02/1565/page/11 |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출33:4)
출애굽기 33장은 구약성경의 위대한 장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떠한 관점에서 보더라도 33장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장입니다. 길고 변화무쌍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 중 사활을 좌우하는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말하듯이 이것들이 기록된 것은 "우리의 본이 되게"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초대 교회,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던 초대 교회 시대에도 구약과 신약을 하나로 보도록 인도하셨던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점에도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대단하고 심오한 가치를 지닌 교훈들과 예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무시하고, 복음과 복음 교훈의 원리들을 신약뿐 아니라 구약에 비추어 보지 못하는 것이 언제나 가장 큰 어리석음이 되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약 기자들이 끊임없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언급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약 시대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출애굽기 33장이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부흥과 교회 내의 영적 각성이라는 문제에 큰 빛을 던져 주기 때문에 33장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면에서 이 이야기는 교회가 메마름과 냉담의 시기에 있다가 다시 각성하고 부흥하는 시기로 넘어갈 때, 교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가를 예증해 주는 구약의 완벽한 예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오랜 교회 역사에서 거듭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33장에서 묘사된 사건의 특징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 온 다른 어느 것보다도 더 분명하게, 부흥이 임하는 방식과, 교회에 부흥이 찾아올 때 아주 뚜렷하게 나타나는 과정과 경로를 인식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명백하게 해 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보편적으로 교회와 교회 내에서의 부흥의 필요성을 다루는 동안, 그것은 동시에 개개의 신자들을 위한 완벽한 메시지도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흥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어떠한 일이 동시에 여러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흥이 오기까지 개개인의 체험을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해 볼 모든 것들은,
제가 묘사하려고 하는 상태에 있는 모든 개인에게 즉시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시사하는 바는, 보편적으로 말해서 부흥이 오는 데는 여러 단계와 과정이 있다는 점입니다. 부흥이 일어난 과거의 모든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생명 없고 거의 죽어 가던 상태에서 갑자기, 단번에 강한 능력과 부흥과 감화력있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은 좀처럼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보편적으로 특별한 단계와 과정들이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있는 이 사건의 영광은, 매우 명백하고 분명하게 하나의 일화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단계들과 과정들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실로 그 이야기 자체가 설교가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삶 속에서 일어난 이 특별한 이야기를 강해하는 것처럼 간단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먼저 그 사람들이 처했던 입장과 조건을 살펴봅시다. 출애굽기 33:1-11은 그 배경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일 중 가장 심각한 타락의 사건 중 하나가 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포로 된 자리에서 건짐을 받았던 바로 그 순간부터 불평하고 원망하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배반하기 시작했음을 여러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시려고 모세를 산으로 부르셨습니다. 거기서 모세는 백성을 남겨둔 채 여러 날 머물러 있었습니다. 아론에게 그 백성들을 맡겨 놓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기록이 말해 주듯이, 사람들은 참지 못하였습니다. "이 사람 모세가 어디 갔느냐?"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애굽에서 나오라고 설득하던 사람, 우리를 이 광야에 데리고 온 그 사람이 어디 갔느냐?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그는 왜 우리를 돌아보지 않는가? 그가 말하던 하나님,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고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들이시겠다고 하던 그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 이 사람에게 무든 일이 일어났느냐? 그들은 전혀 참지 못하고 아론에게 "우리는 지쳤다, 우리는 더 이상 모세를 기다릴 수 없다. 그가 늘외치던 하나님도 기다릴 수 없다. 우리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론은 그들에게 금귀걸이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가 그것들을 불속에 넣어 녹여서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금송아지에 경배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32:4)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섬겼을 뿐만 아니라 뻔뻔스러운 죄를 짓고 사악해졌습니다. 그들은 그 송아지 앞에서 춤울 추었고 아주 배은 망덕하게 행동했습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의 배경의 핵심입니다. 이 이야기는 불순종의 이야기요, 배역의이야기요, 자신들의 신을 만들고 섬긴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거짓된 예배를 발견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의 신을 결정할 권세가 있다고 떠벌립니다. 물론 그것은 결국 죄를 가져오고 부도덕성을 만연시키며 부끄러운 행동을 유발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상세하게 적용시켜 나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지각과 성경에 대한 지식과 지난 100여 년간 교회 역사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 이야기가 바로 이 순간 기독교회의 상태를 너무나도 잘 그려주고 있음을 알것 입니다. 교회는 물론, 자신의 신을 세우는 문제에 있어서 바로 이러한 일을 거듭 시행해 왔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저에게 어떻게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다만 지난 100여 년 동안 소위 성경에 대한 새로운 비평적 자세에서 일어났던 일을 지적하겠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질렀던 그 죄의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더 이상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 계시에 복종하지 않으며, 자신을 계시의 판단자로 세웠고 그 계시가 어떠해야 함을 스스로 결정지었습니다. 그 죄는 금송아지를 만든 죄와 같았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신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저는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경보다 자신을 높이 세웠습니다. 철학이 계시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사람들은 서슴없이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자기들의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에서 교회를 지도하는 탁월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구약의 하나님은 자기가 믿지 않는 모리배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영국에도 스스도 기독교 설교자로 자처하면서 "시내산에 앉아서 공갈을 치는 구약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약의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 마치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오래 머물러 있을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러한 일은 출애굽기 이야기의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똑같은 짓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적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적에 대한 기록은 단순한 신화에 불과한 것이며,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적인 진리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려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동정녀 탄생이나 이적이나 문자적이고 육체적인 부활을 부정합니다. 물론 이러한 모든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행동과 똑같습니다. 그들은 매우 공공연한 방식으로 그러한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자기들의 금귀걸이를 빼내어 눈에 보이는 신상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원리에 있어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신을 만드는 것이고, 자신의 신이 어떠해야 함을 사람이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며, 자신이 누구를 믿어야 할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 일종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늘 그렇듯이, 일단 사람이 그러한 일을 하기 시작하면 틀림없이 도덕적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이사람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경배하는 일만하지 않고 춤추고 마시며 범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엄첨나게 부도덕한 죄들을 접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와 똑같은 일을 주목해 왔습니다. 옛 복음주의적 종교는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서 새로운 신을 세우노라고 하는 이 영리한 사람들, 바로 이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의 도덕적 상태를 낳았습니다. 경건이 없으면, 도덕도 없습니다. 영국에서 가장 도덕적인 시기는 부흥이 일어나 영적 각성이 있은 다음 시기였습니다. 새 신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경배할 때 윤리의 추락을 가져왔고 도덕성의 붕괴를 가져왔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교회와 세상 속에서 똑같은 일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거짓된 예배, 거짓된 종교, 거짓된 신상, 끔찍한 죄와 악의 상태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죄를 징벌하십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린 것이지만, 저는 20세기에 겪었던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지난 19세기의 배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는 적절하게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방식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징벌하셨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백성들의 그 끔찍한 상태를 보았습니다. 그는 진영의 문에 서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출32:26)고 말했습니다. 레위 자손들이 나오며 그에게로 왔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된 후에는 반드시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나팔이 울리고 구분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도 어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하나의 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점에 대해 분명히 합시다. 하나님께 감사한 일은, 언제나 성경에 대한 새로운 자세를 저항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만이 진리임을 깨달아 그 불꽃을 언제나 유지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구분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그 계시와 가르침에 복종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구분이 교회 안에서 내가 인정하는 유일한 구분입니다. 저는 여러 종파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저의 오직 한가지 관심은 "주의 편에 선" 사람들과 자기들의 신과 자기들의 관념과 자기들의 사상들을 섬기는 자들 사이의 구분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이야기 속에서 듣는 첫번째 요점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우리는 모세가 중재한 우리의 당면 문제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가장 영광스러운 진술 중에 하나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출32:31-32). 그러고는 잠깐 쉬고 즉각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기도했습니다.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데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32:32). 모세가 중재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그는 중보자가 되었습니다. 백성들과 하나님의 진노 사이에 서서 "나를 심판하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는 물론 그 백성들의 죄를 짊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무거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고상한 심령이 이 큰 사건 속에서 매우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심을 집중시키고자 하는 것은 모세의 중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33:1-3에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 내고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사실 다음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이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리라고 약속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너에게 말한다. 그들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네가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가라. 그들이 행한 일을 볼 때, 나는 더 이상 너와 함께 가지 않으련다.
내가 이제까지 너희 중에 함께 있었다-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미지를 나타내시되,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나타내셨습니다.-그러나 나는 더 이상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 혹 내가 너희를 진멸할까봐 감히 너희와 함께 있지 못하겠다. 나는 너를 인도할 천사를 보내어 네 앞에서 너희 원수들을 제거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아가라. 내가 너를 지도자로 세웠다. 이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차지하러 들어가라. 그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나는 너와 함께 가지 않겠다. 너를 도울 천사를 보내겠다. 앞으로 나아가라."
그때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흥미로운 것은 그것에 대한 모세와 교회의 반응입니다. 이러한 일은 언제나 부흥에 있어서 첫번째 단계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처한 입장이 어떠했는지를 아십니다. 즉 그들의 죄와 하나님의 선언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아십니다. 부흥의 첫번째 단계는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처럼 자기의 처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배역한 사람들, 그 이름을 모독하고 모세를 비판한 사람들, 아론으로 하여금 금송아지를 만들게 하고 섬겼던 그 사람들이 갑자기 무엇엔가 사로잡혔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자기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무엇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정말 궁극적인 중요성을 가진 문제입니다. 이것을 떠나서는 어떠한 부흥의 소망도 없습니다. 이것은 상황에 대한 각성입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떠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구름이 사라집니다. 불기둥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떠나가시겠다고 말씀하셨고 떠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눈에 보이는 표지와 상징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불만을 깨닫고 인식하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어떤 부흥의 역사든지, 교회에서 일어난 어떤 위대한 영적 운동에 대한 기록이든지 다 읽어 보라고 촉구하는 바입니다. 그러면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언제나 이러한 일이 일어났음을 즉시 발견할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경우, 중세 교회의 어리석음을 조금씩 인식하게 되고, 면죄부 판매와 다른 무모한 행동들을 깨닫기 시작하는 그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그가 다루기 시작한 첫번째 일이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명백히 알기 전에 교회의 섬뜩한 상태를 인식하게 되었고, 교회의 죄와 배은 망덕한 교회의 상태와 교회 속에 들어와 참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우상 숭배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이 사람들이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러한 사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필연적으로 이것은 첫번째 단계입니다. 만일 보편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교회에 이것에 대한 증거가 있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저는 더없이 행복하겠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멈춰서서 사실들을 대면하며, 기독교회의 참된 상태를 보기 시작했다는 어떤 조짐이 있다고 말씀 드릴 수 있다면 저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어떤 증거가 있습니까? 그런 것이 어느 정도 있기까지는 참된 부흥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단계입니다.
복음적인 교파에서도 이것을 많이 볼수 없다고 감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 우리의 한 가지 특유한 위험은 우리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분리시키고, 매년마다 계속되는 집회로 우리 자신을 바쁘게 만들며, 기념회다, 우리가 해왔던 일에 대한 보고회다, 무슨 여름 캠페인이다 등등으로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울 정도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상태를 시험하는 방식은 분명히 잘못된 것과 교회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상태를 시험하는 시금석은 교회를 신약이 말하는 교회상에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아니면 개혁이나 부흥이 일어났던 위대한 시기나,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위대한 영적 표증으로 나타났고 하나님의 임재가 교회 가운데 있었던 시기에, 교회가 어떠한 모습을 취했던가를 살펴보면서 거기에 현재의 교회 상태를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교회가 그러한 교회와 자기들을 비추어 볼때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의아합니다. 영성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차원에서 교회를 평가할 때 어떠한 모습으로 보입니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 하나님의 임제와 우리가 이 연구를 통해 계속 숙고해 나갈 것들로 교회를 가늠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상태에 여러분은 만족합니까? 진리를 믿고, 복음적이며, 자유주의 신학에 속하지 아니한 여러분은 자신의 상태에 만족합니까? 그것으로 충분합니까? 실제적인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합니까?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의 체험을 읽을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우리도 정직하게 그와 함께 일종의 긴장 상태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아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좇아가노라"(빌3:10-14)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긴장감과 근심과 압박감을 느낍니까? 여러분은 그것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바울처럼 우리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죽음을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여러분이 아파 누워 있을 때,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해야만 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느낍니까?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시험하는 방식들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궁핍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는, 부흥을 위한 참된 기도와 중보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이 잘되고 있습니까? 만족합니까? 팔장을 끼고 앉아서 "일들이 놀랍게 진행되고 있다. 그 보고들을 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시점에서 우리는 그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부요하다, 풍족하여 모든 것이 다 잘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들이 가난한 것과 가련한 것과 늙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라오디게아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우리 자신들을 살피고 우리 자신에게 정직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신약에 묘사되어 있는 교회와 우리 자신의 차이를 인식합니까?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시고 불쾌해 하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지난번에 부흥을 통해 자기 백성들 가운데 임하셨을 때가 있었는데, 그러고 나서 그처럼 오랫동안 그러한 역사를 일으키지 않으시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이처럼 섬뜩하게 오랜 기간이 계속흐르는 것은 어쩐 일입니까?
어째서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교회가 어째서 이처럼 보잘것 없게 되었습니까? 어째서 교회가 그처럼 감화력이 없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그처럼 죄 가운데 살며,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첫번째 단계는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일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고심하여 생각하기 시작해야 하며, 이러한 일들에 관심을 갖고 현재 처한 입장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이 단계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두번째 단계, 33:4에서 언급하고 있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여기에 다음 단계, 회개가 나옵니다. 물론 여러분이 사실들을 대면하기 전에는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들을 대면했다면, 문제는 계속해서 회개로 나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전혀 가치없는 피상적인 호기심으로 사실들을 대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후회하는 것과 회개하는 것 사이에는 정말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후회하며 마음 아파하는 사람도 사실들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다. "아 나는 어리석었다,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그렇게 했기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고는 그냥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것은 후회입니다.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회개는 훨씬 더 깊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고린도후서 7장에서 완벽하게 묘사합니다. 거기서 그는 회개의 의미를 고전적으로 진술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7:8-11)
이것이 바로 참된 회개에 대한 완벽한 정의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의 경우에서 그것을 살펴보십시오. 거기에 회개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완벽한 예증이 있습니다. 회개는 단순히 멈춰 서서 순리대로 일이 잘되지 않았으며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아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것의 섬뜩함을 인식해야 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자신들을 미워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 대해서 말한 것도 그것입니다. "너희들이 그 문제를 그저 슬쩍 보지만 않고 너희 자신들을 시험해 보았고 너희 자신들을 스스로 질책하였으며 너희 자신들을 미워하였고 너희 자신들에 대해 복수를 하였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진수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한 일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 우리는 방금 송아지를 만들었고 그것을 섬겼으며 범죄했다. 우리는 스스로 배은 망덕한 짓을 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만든 우상 앞에서 벌거벗고 춤을 추었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깨닫게 되었고 그것을 미워했으며 혐오했고 철저하게 자신들을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이 지은 죄의 심각성을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보아도 이것이 이렇게 나쁘거든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어떠하랴?"
탕자가 바로 자기가 행한 일을 깨닫지 않았습니까? 그는 들에서 돼지와 함께 있기 전에는 자기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맨 먼저 자신을 보았고,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발로 찼고 스스로 자신을 미워했으며 정죄했습니다. 그런 다음 자기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내게도 그렇게 보이거늘, 내가 건방지게 굴면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요구하고 집을 떠났을 때 아버지 눈에는 그것이 어떻게 보였을까? 나는 아버지가 내게 제안했던 모든 것은 다 일축해 버렸다. 그 일이 내게 이렇게 느껴지거늘 아버지께는 어떠하였을까? 내가 돌아가서 아버지를 대면할 수 있을까? 아버지께서 얼마나 고통을 당하셨을까!"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죄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죄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불안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우리는 그것을 재빨리 제거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그 죄가 하나님께 어떠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는 단계를 거쳤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주셨는데도, 우리는 그분께 등을 돌리고, 어리석음과 이기주의로 우리 자신의 신을 만들어 우리의 길로 가지 않았습니까? 다시 부흥에 대한 역사를 읽어 보십시오. 처음에 그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주목하십시오, 그런 일이 그들에게 필연적으로 먼저 일어납니다.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얼마나 무섭고 섬뜩한 것인지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잠시나마 교회의 상태를 잊고 자신의 고뇌를 망각합니다. 하나님앞에서, 죄에 대해서 생각하느라고 말입니다. 그 죄가 얼마나 끔찍합니까? 특별히 처음에 그러한 몇몇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죄의 죄됨을 알아 자신들에 대해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는 그런 상태까지 이르지 않으면 결코 부흥은 없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 날카롭게 느낀 나머지 육체적으로 견딜 수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의 죄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더 나아가 이 사람들이 갑자기 깨닫게 된 것은, 자기들의 죄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를 보시는 방식 때문에 그들로부터 떠나가셨으며 하나님없이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애굽에서 그들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 홍해를 지나 여행할 동안 그분의 능력을 느끼도록 역사하셨던 하나님, 비하히롯과 바알스본 산 사이에 끼여 있었고 뒤에는 바로 군대,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인 상태에 처했던 그들과 함께 계시던 하나님, 그곳에 임하셔서 홍해를 가르시던 하나님,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 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으려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깜짝 놀라게 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슬퍼하게 만든 것입니다.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이 나쁜 소식을 듣고)...."- 정말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그들을 괴롭게 했던 것은 진멸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이 아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지 않을 테니 너희 혼자만 가라. 내가 천사를 보내고 나는 가지 않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오, 이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각성하면, 하나님의 임제를 잃어버리는 것 처럼 심각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저의 진정한 요점을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약속된 땅으로 보내시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겠다. 나는 너희를 종 되었던 자리에서 인도해 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너희를 보내고 있다. 앞으로 가라 모세야. 그들을 인도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할 천사를 보내겠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가지 않으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총명의 진수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취해야 할 입장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갑자기 각성을 하여, 이 엄청나고 심오한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곧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지 않으신다면 어떤 축복을 받는다 할지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인식한 것입니다. 가나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젖과 꿀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그 소유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다른 모든 것보다 더욱 가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교회에 적용시킬 필요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다는 인식이 없이도 우리의 원수들을 이겨낼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 그 일을 해줄 천사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들을 확실히 파멸시키고 우리로 그 땅에 들어가게 할 천사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나안에 있습니다. 젖과 꿀을 얻습니다. 모든 것이 다 옳아 보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해서 말하는 시편 106편에는 섬뜩한 구절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15절) 표면적으로는 풍요롭고 번창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두드러지게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즉 많은 재정과 훌륭한 건물을 가지고 번창하며 많은 회심자들을 얻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또한 원수가 패배당하고 모든 것이 잘되어 나가고 기독교 신문들이 그 사실을 보도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놀라워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거기에 함께 계시는가? 진실로 그가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우리가 올바르게 그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인식하는가? 이것이 바로 이 사람들에게 문제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나안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젖과 꿀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원수들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원합니다."
시편기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그는 축복을 추구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성공적인 복음 전도자였다. 나는 대단히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나는 만족하지 않았다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들은 외적인 번영이나 어떤 유의 성공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을 보상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16:26).
그리스도인들이여, 저는 여러분이 선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여러분이 행복하냐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여러분이 교회 일에 능동적인지, 아니면 다른 기독교 활동에 열심을 내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 계십니까? 그가 진영에 계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지만 하나님은 멀리 계시고 다만 그 천사와 지도자를 통해서만 능력과 힘을 주고 계십니까?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어떤 관계며 인격적으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이 사람들은 회개했습니다. 회개의 목적,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빼놓고는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오, 주여, 주를 떠나서는 그 어느 것도 나를 기쁘게 하지 못하며 고통스럽게 하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이 상황에 대면하였을 뿐 아니라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 성경이 얼마나 완벽합니까? - 그들은 회개했다는 절대적인 증거를 나타냈습니다. 다시 이것은 후회와 회개의 차이점을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단순히 잠깐 지나가는 감정이 아니고, 너무나 심오하여 사람의 의지에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7장에서 말하듯이 회개는 행동을 유발합니다. "너희는 일을 바르게 했다. 그것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실제로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을 하기까지는 결코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일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순식간이라도 너희 중에 행하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 하셨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산에서부터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출33:4-6).
우리가 어떤 형태로나 모양으로든지 우리에게 해당되는 바대로 그러한 일을 하기 전에는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우리의 죄악성, 특히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죄악성이 어떠한가를 이처럼 심오하게 인식하고서,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것을 힘껏 최선을 다해 행하고 싶어하는 열망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죄를 버리고 그의 계명을 행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단장품을 제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단장품들이 그들의 함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들은 금 송아지를 만들 때 쓴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일을 생각하는 것 조차 싫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단장품을 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단장품을 제하였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의 위인 전기나 부흥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어본다면 제가 뜻하는 바를 정확히 알 것입니다. 언제나 이렇게 무언가를 제거하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마 그 자체로는 매우 해로운 일이 아닐지라도 그것이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제해야 합니다. 단장품, 그들은 그것을 제했습니다. 그들은 단장품을 모두 내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께 드리되, 새로운 헌신과 새로운 충성심으로 드립니다. 제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이 바로 회개의 진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행동해야 하는 바를 인식합니다. 우리는 어떤 단계들을 또 취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는 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렇게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는 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렇게 한다면 어떤 사람들에게만 국한시켜 말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제하여야 할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예외 없이 다 그런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술을 마시는 것이나 담배를 피우는 것이나
이러저러한 것을 지적하는 것만 가지고는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삶 속에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즉 어떤 단장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죄악성을 알고, 자기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나 악하기 때문에 교회가 이러한 모습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것을 뜻하는지를 인식하게 되면, 참된 회개를 통해서 각자는 자신을 살피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단장품을 보게 될 것이고, 그것을 거꺼이 신속하게 처리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
그러나 분명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첫번째 단계요, 시초에 불과하며, 그저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으며 심각하게 잘못되었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에 불과합니다. 또한 그것이 경건한 슬픔과 심오하고 깊은 회개의 역사로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십니까? 교회의 상태에 대해서 만족하십니까? 모든 것이 잘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계속 달려나갈 수 있습니까? 회의와 예배와 여러 활동들- 놀랍습니다!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십니까? 그가 생활 가운데 계십니까? 우리와 그와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면해 보십시오. 그것은 참으로 경건한 슬픔과 회개로 이끌 것이고 실제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사 그 상황을 보게 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정직한 마음을 갖고 우리의 내면의 진상을 보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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