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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십자가

갈라디아 로이드 존스............... 조회 수 3878 추천 수 0 2012.10.16 18:47:01
.........
성경본문 : 갈6:14 
설교자 : 로이드 존스 
참고 : http://lloydjones.org/zbxe/Lloydjones02/1570/page/11 

554589.jpg"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4)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주소서.

당신의 성전을 다시 세우기를

사모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 주소서.

당신의 사랑이 내 속에서 넘쳐나 구속받은

나의 영혼을 휩쓸게 하소서.

 

세월을 아껴 구세주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하여

사용되어지기를 원하나이다.

오직 나의 호흡인 당신의 사랑이

이 사역 감당케 하나이다.

 

은혜로우신 주여!

복되신 당신의 손으로 나를 받아주소서.

생명의 말씀 전하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으로 살게 하소서.

드려진 모든 순간이 죄인들의 친구를 삼게 하소서.

 

측량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로 내 심령에 채우시면

주께서 가지신 열정으로 이웃을 사랑하오리이다.

양들을 위해 죽으신

목자이신 주님 품으로 인도하리이다.

- 찰스 웨슬레

 

위의 찬송가 가사와 같은 생애를 살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살기를 갈망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 점이 문제가 됩니다. 여기 적힌 모든 가사가 진실인 것처럼 친구되신 주님을 찬양하는 일에 여러분의 모든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여러분의 간절한 바람인지요?

 

그렇다면 그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사도 바울의 서신인 갈라디아서를 소개해 드립니다. 갈라디아서 6:14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지금 이 말씀은 "그러나"라는 단어가 앞 절에서 서술한 말씀과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12절과 1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제가 여러분에게 방금 상기시켜 드린 것처럼 이 진술은 갈보리산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관하여 왜 바울 사도께서 그 같은 논리로 말씀하셨는지를 깨닫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읽어보면 훨씬 쉽게 납득되어질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마무리 짓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직접 전도하고 가르쳐서 그리스도인들이 된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다른 선생들이 그들 가운데서 돌아다니며 그들을 혼란한 상태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르치기를 "여러분이 복음을 믿는 데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전적으로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고 진실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할례도 받아야 하며 옛 유대법도 지켜야 합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이 서신을 쓰게 된 것입니다. 지금 그는 서신 마지막 부분에서 그가 무엇을 말했는지 다시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갈라디아 교인들과 또 이들을 통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한 참 진리가 무엇이며 원리들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성도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첫 번째 내용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란 아주 진지하고도 매우 중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참 삶의 길이란 이 세상이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는 따위의 삶이 아닙니다. 참다운 인생은 순간적인 쾌락에 따라 가볍게 즐기면서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근본적으로 심고 거두는 문제입니다. 즉,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확실한 도덕법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책임을 지닌 존재들로서 언젠가는 모두 죽게 될 것이며,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육체 가운데 거하면서 행한 행위에 따라 판결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이 육체의 삶과 이 세상에서의 삶 속에서 무엇을 했느냐에 따라서 판정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은 엄청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체로 심었는지 아니면 성령으로 심었는지에 따라서 이 땅의 추수와 영원의 추수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고려해야 할 중요사항은 어떻게 성령을 위하여 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즉, 어떻게 이 세상에서 기쁨과 행복, 그리고 평화를 누리는 복을 거두며 살며 또 이것들이 영원히 이 세상에 지속되도록 하겠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만, 불행하게도 사도 바울이 지적해 주고 또 그의 전체 서신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처럼 문제는 몹시 복잡합니다. 왜냐하면 거짓 교사들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생긴 이같은 문제는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도 아직 존재하고 있습니다. 많은 일들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일어나지만, 기독교와 정반대되는 헛소리들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며 기독교 교회에 속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만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을 터무니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첫 번째 일은 어떤 것이 참된 메시지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거짓된 것과 참된 것을 어떻게 구별하시겠습니까? 바울 사도가 다른 서신 속에서 대답하는 것처럼 이 서신 속에서도 그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 전체가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참된 메시지가 과연 어떤 것이겠습니까? 기독교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에 관한 것이란 어떤 것을 말합니까? 복음이 선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바로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성령을 위하여 심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거둡니까? 우리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동요되지 않고, 죽음의 면전에서 웃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아무 두려움 없이 담대히 설 수 잇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찬란한 영광 속에서 우리가 영원히 기쁨과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이같은 것들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엄청나고도 위대한 진술을 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못박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자랑거리였습니다. 이것이 그가 전파한 전부였습니다. 저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설교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오직 이 한가지 메시지만 있을 뿐입니다. 그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십자가를 전하고 십자가 상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파하는 것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며, 기독교 메시지의 진수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과 그가 자랑하려고 하는 한 가지에 여러분 모두가 동의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것들 위에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입니다.

 

이것은 제가 여러분에게 전파하려는 것처럼 사도 바울 자신이 늘 전파했던 말씀입니다. 또한 이것은 다른 모든 사도들이 설교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나 제가 교회의 참된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알기 원한다면 우리 모두는 초기 기독교로 되돌아가야만 합니다. 기독교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그들이 전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당시에 사도들이라고 불리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바로 기독교 교회를 세운 장본인들이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자기들의 생각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었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독교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려고 할 때 우리는 사도들에게로 돌아가야 하며 또 사도들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관찰해야만 하겠습니다. 바로 이것을 지금 제가 전하고자 합니다. 저는 그 메시지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음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제가 지금 강조하려는 점은, 그들이 무엇을 증거했으며 그들의 증거가 대중을 모을 만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메시지를 전했는가"란 것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설교는 결코 대중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 역사상 복음이 그렇게 된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전파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또한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12절)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설교는 언제나 핍박이 따랐습니다. 갈라디아서의 서두에서도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장애물들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사람들을 불쾌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1세기에도 사람들은 십자가의 메시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환영받는 것도 아니고 대중에게 인기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모든 사도들이 전파한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십자가를 증거했고 결국 순교까지 당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십자가에 대한 그들의 메시지는 기독교 교회의 중심 교훈이 되고 핵심이 되는 내용으로 정착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아직도 이 메시지가 기독교 메시지의 전부라는 것을 가슴 깊이 느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믿습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먼저 부정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겠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기독교 교회가 증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복음의 진수가 우리 주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의 진수가 주님이 교훈하신 말씀이라고 주님은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모든 세대를 통해서 태어난 인물 중 가장 훌륭한 종교적 천재이며, 철학자들보다도 훨씬 뛰어난 분으로 평가합니다." 산상수훈을 살펴보라.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이 윤리적 가르침이야말로 보약 중 보약이다. 이것을 우리는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전해야만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사람들에게 먼저 있어야 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설교한다면 인간사 제반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으며 오히려 더욱 문제를 악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런 설교는 여러분에게 공허한 것이며 오히려 해를 끼칩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등을 설교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윤리적 가르침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했거나 또는 "내게는 산상수훈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모범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자주 강단에서 외쳐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라고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복음서들을 읽어보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라고 합니다. 주님이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자고 강조합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만, 그러한 것들은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이 결코 아닙니다. 그 교훈들이 기독교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처음부터 전해야 할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이 맨 처음부터 설교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도 맨 처음부터 이것을 증거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증거한 것은 바로 십자가 상에서의 주님의 죽으심이며, 그 사건의 의미였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선언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오직 나만의 주장이며 다른 모든 설교자들처럼 자기만이 옳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서는 비난만 퍼붓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저의 의견이 아닙니다. 사도들과 그들의 사도적 권위로 말미암아 씌어진 신약성경을 통해서 이 같은 귀중한 진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약성경을 읽고 난 후에 무엇을 발견하셨습니까? 우리 주님의 가르침 한가운데에 바로 서 있는 십자가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잘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두드러진 예가 성경에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라 하면 먼저 무엇이 떠오릅니까? 여러분은 거기서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라고 물으실 때, 제자들은 여러 가지 대답을 드렸습니다. 그 다음 주님께서는 또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이 때, 베드로가 앞으로 나서면서 말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답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속해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16:13-18)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을 읽어 보십시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1-23).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멋진 신앙고백 후에 즉시 주님께서 그의 죽으심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제자들은 전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베드로 혼자만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 모두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시고 다시 설명하십니다. "너희는 이해하지 못하는도다. 너희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 자체가 너희를 구원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 일을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물론 또 다른 기록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도 이같은 주님의 놀라운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주님은 "이 모든 문제들을 재음미해 보라. 나는 왕이다. 나의 왕국이 있다. 그러나 내 왕국은 사람들의 왕국과는 다른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높은 사람들이 다 섬김을 받는다. 하지만 나는 섬기려고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최후의 만찬 장면을 살펴봅시다. 주님께서 이 일을 준비하셨고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지 정확하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만찬을 나눌 때 주님은 떡을 취하여 쪼개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19-20)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이것은 "나 자신을 주는 것이며 내 몸은 상하게 되고 내 피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것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의 가르침 속에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십자가가 들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우리가 자세히 음미해야 하는 다른 기록들이 또 있습니다. 변화산 위에서 일어났던 놀라운 광경을 기억하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 때 그들 앞에서 변형되시자 제자들이 놀라운 모습으로 주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모세와 주님이 나누신 대화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또 엘리야가 주님과 토의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벽 바깥쪽에서 이루어지게 될 출애굽에 대해서 토론하신 것입니다.(역자주 : 예수님의 죽으심을 제2의 출애굽으로 본 것임) 그들은 주님과 더불어서 그의 죽으심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죽으심에 대하여 주님과 함께 이야기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생명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후에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해 주님이 정확히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모습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통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매우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사복음서들을 읽으시고 연구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의 죽으심에 관한 기록이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주목하여 보십시오. 비록 그 기록들이 간략한 것들일지라도 주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지를 주목하여 살펴 보십시오. 얼마나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떤 분이 지적한 것처럼 이 기록들은 생생하고 자세한 표현들입니다. 주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는 망치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왜 이것이 그렇게 두드러지게 나타납니까? 그 이유는 이것이 바로 가장 핵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들 안에는 이 기록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무엇을 발견합니까? 사도행전13:14-41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이 문제에 대해서 너무나 선명히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안디옥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바울은 이 사실들을 되풀이해서 증거하였고 특히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그 후 바울은 자신의 설교를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그들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즉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것"(38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17장에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방문한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십시오.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행17:2-3)고 바울은 증거했습니다. 다른 모든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어디를 가든지 이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 다음 여러 서신들을 살펴보십시오. 성경 여러 곳에서 말씀하는 이 말씀에 대한 구절들을 인용함으로써 여러분들에게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입증해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 말씀드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한 구절이 로마서 3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롬3:20-25)라는 말씀입니다.

 

보혈! 십자가의 피! 이것이 모든 서신들의 주제입니다. 로마서 5장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5:6-9)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저는 계속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인용해드릴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의 서신 첫 장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2-23)라고 말합니다. 제2장에 가면 계속해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변함없는 설교요 증거입니다. 만일 이 사실을 여러분이 믿을 수 없다면 바울 스스로가 고린도전서 15장 서두에서 뭐라고 고백했는지 읽어보십시오. 그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고전15:1-3)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3-4)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설교 중에서 유난히 강조하였던 말씀임을 여러분들이 주지하였으리라 믿습니다. 이것은 메시지의 핵심이요,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위해 죽으셨는지를 선명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어디에서나 이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풀어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내 자신의 권리로 전하는 것이 아니다. 내 자신의 권리나 희생으로 너희를 방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 이것이 내가 가진 모든 지위인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과연 무엇이 바울의 메시지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러한 말씀들을 계속 인용해 드리고 싶지만 여기서 멈추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증거하려는 것은 기독교 복음의 중심 메시지, 가장 본질적인 것이 바로 이것이란 사실입니다. 끝으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한 계시록의 말씀을 인용하겠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계1:4-5)

 

바로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며,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대주제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느 누가 감히 일어나서 무슨 권리로 그리스도의 보혈에 멸시와 증오를 쏟아 부을 수 있겠습니까? 무슨 권리로 "십자가는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약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갈보리 십자가 상에서의 죽으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기독교 복음의 핵이요, 중심 주제이며, 구원의 복된 소식 전부입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이 증거를 더 원하신다면 떡과 잔을 나누는 성찬식을 생각해 보십시오. 떡과 포도주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로지 한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고전11:23)라고 바울은 대답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명령하신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교훈하여 주신 그 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날 밤에 자기를 따르던 무리들과 함께 성찬을 나누신 그분이 명령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행하라. 언제나 내 백성들은 이것을 행하여라. 와서 떡을 떼고 잔을 마셔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사도들이 우리에게 교훈하신 대로 이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이 사실을 선언하며 전파하고 또 가르치고 설교해야 합니다. 그의 가르침이나 그의 모범을 우선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잊어버리지 않도록 제정된 성례식의 골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며,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도 바울이 왜 이것만을 설교했는지에 대한 최상의 이유인 것입니다. 바울이 왜 이것만을 자랑한다고 합니까? 그가 이것만을 자랑하는 이유는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놀라운 일입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정말로 자유하게 하며 구원을 이루어주는 것이 바로 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절대적인 생동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주님의 죽으심은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시대를 통털어서 나타난 최고의 비극적인 사건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여러분과 제가 모방해야 할 것도 아닙니다. 이러 것들은 십자가에 관해서 설교할 때 언급되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종종 이런 말들을 듣게 됩니다. "아! 정말로 십자가는 뜻하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어나서도 안되고 일어날 수도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어리석고 몰인정한 정치적 기질이 다분한 유대인들, 질투심으로 가득찬 무리들, 자신들이 행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주님은 파악하고 계셨고 더 잘 가르치셨음을 볼 수 있었던 바리새인들이 이 비극적인 사건을 낳게 한 장본인들이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사건입니까!  왜 그같은 사건이 벌어졌는지요? 바로 이같은 무리들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전에 없었던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에 대해서는 가급적 조금만 말합시다. 다만 주님을 찬양하며 그의 가르침과 모범들을 찬양합시다."

 

이와 같은 주장들은 신약 성경 전체가 가르쳐 주고 있는 사실과 전혀 반대되는 것들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상에서 우리 주님이 죽으심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또 이것은 교묘하게 변명하며 발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시야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거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 은닉해 둘 만한 것도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 메시지의 중심이 되게 하십시오.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미 말씀한 것처럼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이것을 전파하십시오. 바울은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의 행위를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밝히 보이거늘'이란 말씀으로 매우 감동어리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이 그의 설교의 중심이요, 핵심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그것을 애써 잊으려고 한다거나 우상화하지 마십시오. 또 미사여구를 써서 아름답게 장식시키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나는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이것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정말로 우리가 구원받게 되엇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있음은 십자가 상에서 확실히 발생된 사건 때문이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실 때 우리가 구원을 입게 된 바로 그 사실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지 않으셨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전파해야 될 복음도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사건이며, 우리의 구원이 성취되는 결정적인 구속행위입니다. 이것이 곧 사도 바울이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이것은 아이삭 와쯔가 '주 달려 죽은 십자가'를 노래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우리에게 구원이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사실을 확증시키는 증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누가복음을 읽어봅시다. 부활하신 이후에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5-48). 그리고 바울 사도가 안디옥 사람들에게 그의 설교를 다음과 같이 끝맺는 것도 주목하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13:38-39). 이것이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원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첫 부분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1:3-4)

 

이 말씀은 본 서신 끝 부분의 요점과도 일치합니다. 바울은 언제나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의 중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행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다 이루었다고 선포합니다. 이 일은 이미 결정된 일이었고, 십자가 상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구원의 사건이었기에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고백하였고 오직 이것만을 설교한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럼 이제 다음 원리로 넘어가 봅시다. 이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합니까? 구원은 누구든지 십자가로 말미암아 받게 되었다는 뜻이며, 하나님과 이제는 화목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성도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며, 그의 축복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진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영광스러운 기업을 상속받게 되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십자가가 우리를 어떻게 구원한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질문 중의 질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것을 읽어보십시다. 바울은 대답하기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은 신실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이삭 와츠처럼 주님의 놀라운 십자가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금 십자가를 그려보십시오. 예루살렘 밖 '갈보리'라고 불리우는 언덕 위에 놓여진 세 개의 십자가들을 바라보십시오. 그중 중앙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거기에 달려서 죽어가고 있는 그 사람을 바라보십시오. 그가 너무 빨리 운명하신 것에 대해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계신 그 분이 누구였는지를 분명히 파악하지 않고는 십자가 상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중요성을 여러분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운데 십자가에 달려있는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한 인간이셨습니다. 여러분이 그 분을 바라보면 그는 양 옆에 달려 있는 다른 두 강도들과 같이 한 인간이셨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분은 정말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나사렛 지방에서 목수로 성장했습니다. 그 곳에서 30세가 될 때까지 목수로서 일했습니다. 그런 후에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가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상한 선지자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고 말했습니다. 실로 그는 주목받아야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보기 드문 뛰어난 종교적 천재였습니다. 어쩌면 정치적 선동자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 대답은 하나님의 아들, 즉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때 예수님께서 "네 말이 옳도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가 오로지 육신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내 안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다만 한 인간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 너는 그 이상을 보고 있다. 너는 내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임을 알고 있구나. 이것이 내 아버지께서 계시하여 주신 바로 그 진리이다"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주,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복되신 삼위일체 중 두 번째 위(位)에 속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같은 진술을 듣고 여러분은 의아해 할는지 모릅니다. 만일 그 분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 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란 의문이 제기될 것입니다. 이 사람이 과연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한 곳으로부터 제한된 곳으로 오신 분이며, 인간의 몸을 취하시고 인간이 되신 분이라고 한다면 왜 그분이 죽어야만 했습니까? 왜 하나님이 죽으십니까? 십자가 상에서 모든 인간들을 위해 하셨던 일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분이 그런 곳에 달리게 되셨습니까? 저는 이 시간에 어리석기 그지없는 현대인들의 주장이나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들을 말함으로 여러분들의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한 평화주의자의 죽음이 아닙니다. 잘못 언도된 한 착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도 아니며, 자신을 변명하기에는 너무나도 힘이 없었던 한 인간의 죽음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그 죽음을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그 분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중상모략을 당한 것이 사실입니다만 십자가 상에서 자기가 무엇을 하셨는지 주님은 말씀합니다. 제가 이미 인용을 했습니다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그는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주님이 오심은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단호한 자세로 그의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그가 설명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못하시도록 간하였습니다. 이 사실들이 성경에 아주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13:31-33). 주님은 침착하게 자기가 어디로 가야할 것인지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는 자기가 이 세상에 무엇하러 오셨는지를 아신 것입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적들에게 포위당하였을 때 그의 안전을 염려한 제자들은 "우리가 가서 검을 사올까요?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 일이 주님에게 생기지 않도록 막아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중의 하나가 검을 휘둘러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짤라 버렸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26:53)라고 주님은 묻습니다. 즉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을 겪지 않고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했다면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즉각 열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들을 보내셔서 내가 온 그곳으로부터 천사들을 통하여 그 영광스러운 곳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음을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만 만일 내가 그렇게 하면 어떻게 내가 의를 성립시킬 수 있겠느냐?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셔서 이루라고 하신 그 일을 어떻게 이룩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하면 일의 성사를 이룰 수가 없다. 나는 분명히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왔노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아주 놀라운 기록이 히브리서 2:9에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 무엇 때문입니까? -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을 인하여" - 우리는 지금 주님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상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가 하늘에서부터 이 세상에서 죽으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기 위하여 그는 잠깐 동안 천사들 보다 못하게 하심을 입었습니다. 그가 인간의 모습을 취하심도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나 교묘하게 발뺌하여 변명되어질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절대 필요한 것이며 많은 사람의대속물이 되기 위해 그의 생명을 내던지신 사건입니다.

 

왜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성경 전체는 여기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 한 구절 속에도 그 이유가 들어 있습니다. 그가 오심은 죄 아래에서 허덕이는 여러분이나 저를 포함한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진 죄인들을 위함입니다. 주님은 최후의 심판과 멸망당하기로 운명되어진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 모두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세상의 사람들일 수밖에 없고 이 세상에서 태어나 세상의 운명을 짊어지고 그대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를 바 없이 다 죄를 범하였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착한 사람, 악한 사람, 성인 군자나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착하게 사느냐 못사느냐 하는 문제들은, 외형적인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에서 최고로 존경함을 받는 사람일지라도 버림을 받은 자요 비참한 처지에 빠져 있는 죄인으로 저주받아 소망없는 인간으로 취급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덕적인 성인군자같은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불신자라면 하나님의 눈에는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사회적인 지위의 높음도 하나님 앞에서는 하등의 가치가 없습니다.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에게는 무의미합니다. 그것들은 아무리 좋아도 더러운 넝마조각에 불과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좋아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가 없단 말입니까? '잘못 했습니다'하고 뉘우치는 사람을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용서하지 않습니까?" 이 질문도 역시 성경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으며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처지와는 달리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분 속에는 전혀 어두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이런 속성들이 우리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더럽고 불결하며 추악하고 죄악이 가득 차 있는 피조물들입니다. 우리는 전혀 하나님의 의로움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입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십자가의 보혈을 믿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현대인들은 의(義)가 무엇인지, 정의가 어떤 것인지, 또한 율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징계도 믿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점점 지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며, 법을 제정하신 분이시오,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는 죄악을 쳐다볼 수조차도 없는 순결하신 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목격한 적도 없다고 가장할 수도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똑똑히 보고 계십니다.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 때문에 죄를 벌하셔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누차 우리에게 죄를 벌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은 죄인이요, 하나님은 죄와는 무관하신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두 가지가 함께 거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어떻게 대답이 될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제가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아주 간략하고도 명백한 답변을 가능한 한 간단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 질문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구약성경을 읽으실 때 자주 눈에 띄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에 관한 제사들입니다. 사람들은 수송아지를 대제사장에게로 가져오고 대제사장은 수송아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습니다. 그 다음에 수송아지를 잡아 죽여 피를 하나님의 거룩하신 제단에 바치게 됩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행위는 분명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셨을까'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위에서 말씀드린 것같이 죄의 삯은 사망이요,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행한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의 손을 수송아지의 머리에 얹으므로 그들의 죄악들이 그 짐승에게로 전가됩니다. 그래서 죄들은 그 수송아지가 덮어 쓰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그 짐승을 죽여 제단에 제물로 바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악을 짐승에게 전가시켜 잡아 죽인 다음 그 피를 봉헌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일을 매일 성전에서 했습니다. 그들은 흠이 없고 깨끗한 어린양을 취하여 죽이고 피를 흘려 제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할 때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 놀라운 밤에 죽음의 사자가 찾아 왔을 때 애굽의 처음 난 모든 것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살아남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문설주 기둥에 피를 발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을 잡아 피를 흘려 전날 밤에 문설주와 문기둥에 발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신을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들은 형벌을 받지 않았으며, 그들의 생명은 구원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왜 오셨는지에 대해 세례 요한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오직 한 가지만을 반복해서 설교하였습니다. 그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그의 신들매 풀기도 합당치 못한 자니라. 보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증거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그림자요, 모형들이요, 방향제시의 예시(豫示)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희생제물을 예비하셨던 것입니다. 그 제물은 하나님의 어린양인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이 일이 갈보리 언덕 십자가 상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죄악들을 취하여 그의 아들 머리 위에 얹어 그를 채찍질하고 벌하셨으며 죽음을 당케 하신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상에서 일어난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저와 여러분의 죄악들을 그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덮어 씌워 우리의 죄값을 치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이 일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어린양으로서 저항하지도, 신음도, 불평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들의 죄짐들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는 이 일이 이루어지도록 허락하고 자신을 기꺼이 내던지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저는 여러분들에게 사도 바울이 말씀한 바를 상기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1:4). 이것만이 아닙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증거가 갈라디아서 2장에 있습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19-20)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 죽음에 이르도록 -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바로 이것 때문에 주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자랑한다고 바울은 고백했던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는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당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시킨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은 셈이 된 것입니다. 율법이 주님에게 지워짐으로 우리는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를 주셨고,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설교의 내용입니다. 즉 우리를 구원해 준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메시지를 믿는 것뿐입니다. 그외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진리를 발견치 못한 자들입니다. 여러분이 더 멋있는 남성, 더 아름다운 여성이 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것은 하고 저것은 안해'라는 식의 말도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아직도 진리를 발견치 못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오직 한 가지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13:38-39)는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됨을 보리라.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존재였는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비시디아에 있는 안디옥에서 설교한 사도의 말처럼 저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나는 여러분을 개인적으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설교자로서 자기의 회중들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할 필요성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러분 개개인에 관해서 꼭 알아야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여러분 모두가 지독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신분이 어떠한지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범한 죄악 중 특별한 죄목을 지적하는 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많습니다만 설교자는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지은 죄의 목록들을 나열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것들이 무엇인지도 알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매우 주목할만한 것도 있을 것이고 또한 아주 악질적이며 극악무도한 더러운 죄악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내가 여러분에게 곡 말해야 하는 것은 여러분이 아무리 지독한 죄인이요,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나 여자일지라도, 비록 지금 이 수간까지도 죄악의 수렁텅이에 빠져 살고 있더라도 한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의 아들이요, 십자가 상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아 죽으신 분 - 임을 믿는다면, 바로 그 순간 여러분이 저지른 모든 것으로부터 전적으로 완전히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됩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이 사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전적으로 그 분을 힘입고서, 곧 그가 십자가 상에서 이루심을 의지하여 우리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죄가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 전에 결코 죄를 범한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의 의로움으로 옷 입혀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완전한 자로 간주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메시죠, 기독교 복음이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이십니다. 그 분 이외에는 우리를 구원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 감옥 간수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곤경에 빠졌던 이 간수가 자살하려고 할 때 바울이 막았습니다. 그 때에 그가 바울과 실라에게 와서 말하기를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리하여 간수는 믿게 되었고 구원을 받았으며 그 순간으로부터 큰 기쁨이 그에게 넘친 것입니다.(행16:30-31).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이유입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 줄 메시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극악무도하고 불결한 인간들이라 하더라도, 또 전혀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또한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존귀한 사람들이나 착하기 그지없는 사람, 멋 있고 아주 친절한 사람들일지라도 이 모두에게 전해 줄 소식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기탄없이 증거할 수 있습니다. 상하고 찢겨 죽임당하는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전해 줄 똑같은 복음이 바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소식을 믿는 자는 즉각 온전케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했던 똑같은 질문을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나갈 때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더 듣게 해달라고 이방인들은 간청하며, 더 듣기를 갈망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더 듣기를 열망하십니까? 저는 이 놀라운 주제를 계속해서 증거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진리에 대하여 어렴풋이나마 알아차렸다면 이 말씀을 더 듣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사도 바울이 경고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찌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행13:40-41). 어떻습니까?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시고 한없이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이 아들을 자랑하는 데 여러분의 모든 시간을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보내지 않겠습니까? 우리 자신들을 반성해 봅시다. 여러분이 남자든지 여자든지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대답하여 보십시오.

 

끝으로 200년 전에 챨스 웨슬레가 대답해 준 것을 읽으므로 이 말씀을 맺겠습니다.

 

구주의 보혈로 구원을 얻게 되네

그의 죽으심 내가 남긴 상처라네

날 위해 피흘린 나의 구주 하나님

놀라운 그 사랑, 그 은혜 찬미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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