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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적 신앙

디모데후 로이드 존스............... 조회 수 5243 추천 수 0 2012.10.16 18:4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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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딤후1:6 
설교자 : 로이드 존스 
참고 : 출처 : http://lloydjones.org/zbxe/Lloydjones02/1777/page/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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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딤후1:6)

 

이 주제 역시도 영적 침체라는 주제 하에서 적용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비참한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 다시 말해 본질적인 신앙에 있어 잘못된 그리스도인의 경우를 진단하고 처방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 성경전체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역시도 그리스도인은 매우 간교하고 힘있는 대적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원수는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더 잘 알고 또 더 많은 것을 압니다. 더군다나 그의 큰 목표와 노력은 하나님의 영광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또 낙심시키는 것보다  이일을 할 수 있는 더 효과적이고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세상이 우리 안에서 보는 바에 따라 여전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판단하고 또 우리가 그렇게 한다고 저들을 책망만 할 수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요구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가 하나의 요구이자 곧 도전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에 집착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간 과거에 대하여 염려하게 함으로 미래에 대해서도 두려움과 예감에 사로잡히게끔 함으로써 현재에 낙심하도록 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관점 때문에 유발되는 두려움과 불안과 매우 관련이 있는 모든 감정의 문제, 곧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불행의 원인으로써 바로 이 감정의 문제가 그렇게 자주 대두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정의 문제들로 끊임없이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상담의 요소 가운데 이러한 부분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슬픔과 기쁨, 고통과 행복, 이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오는 본성입니다. 아무도 비참해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즐겁게 사는 것 같지만 비참하고 또 불행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저는 믿음과 관련해서 마음과 지성의 우선권을 강조하는 것을 사역의 소명에 응답하는 큰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올바르게 처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타난 대 황폐 현상이나 비극, 그리고 세상에서 발견된 비참함이나 사악함은 단순히 사람들이 자신들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할 줄 몰랐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감정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참으로 중생 혹은 신생이 우리를 위하여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마음과 정서와 의지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것이라고 말할 매우 좋은 사례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주제를 분석하면서 일보 전진하여 그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결코 아무도 그것을 간단하게 취급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주제에 대한 이해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아무튼 예비적으로 지적해 두어야만 될 한가지 요점이 있는데, 저에게는 매우 흥미 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특별한 문제와 또 미래에 대한 신경질적이고 걱정이 되는 또 다른 문제 사이에 이상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병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일들이 감정을 다루는 문제에서 동시에 발견됐다 할지라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디모데가 본래적으로 염려가 많은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침체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같은 사람에게서 종종 두 가지의 일들이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천성적으로 침체에 더 잘 빠지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만 하겠습니다.

 

저는 이 전체적인 고찰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있는 매우 중요한 진술을 재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비록 회심하고 중생 했다고 하지만 전에 다른 사람보다 더 낙심하길 잘했던 사람이 회심 후에도 더 많이 투쟁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의 삶에 따른 어떤 공통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역시 특별한 문제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받은 바 은사가 각각 다릅니다. 우리가 모두 똑 같은 달란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어려움의 문제는 정확하게 똑같습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자신의 슬픔을 인지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특별히 고통을 주는 그 무엇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성격 혹은 본래적 성품의 영역에 속하는 그 무엇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나면서 부터 내향적이거나 침울하고 침체된 성품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때에 그 점을 마음에 새겨야만 합니다. 그 같은 사람에게 나타날 위험성은, 특별히 감정의 문제와 연관될 때 침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보기에 우리가 해야만 될 가장 유익한 일은 이 주제를 일반적인 방법으로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특별한 방법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정과 또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에 대하여 말하는 수많은 진술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직면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감정은 어디에서 유입될까요? 감정의 좌소는 어디입니까? 그리스도인의 경험 속에서 그것의 입장은 어떠해야만 합니까? 지금부터 이에 관련된 수많은 일반적 진술들들 정리해 보겠습니다. 분명히 첫 번째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험 속에서 감정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저들 역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 17절을 통해서 로마인들에게 말씀하는 그의 진술을 생각할 때 그것을 보게 됩니다. 큰 강조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너무 위대하고 영광스러워서 그것이 단순히 인간의 한 부분이 아니라 전인을 일으켜 세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마음과 의지뿐만 아니라 또한 감정이 능동적으로 개입되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기초부터 다시 한번 점검해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만일 워즈워드 같은 시인이라면 자연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승화된 사고에 대한 기쁨으로 나를 뒤흔들어 놓는 어떤 임재를 느꼈습니다." 신비적인 시인이었다면 그런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과 저라면 복음이나 메시지, 구세주, 하나님에 관해서 얼마나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더군다나 하나님의 성령과 같은 능력과 감화력을 가지고 말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기쁨이란 그리스도인의 경험 가운데 매우 실제적인 부분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발견하지 못한 채로 신약성경을 읽어 내려갈 수는 없습니다.

 

회심이 하는 매우 고무적인 일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를 매우 무서운 구덩이로부터 건져내고 우리의 발을 진흙에서부터 반석으로 옮겨 놓은 일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을 입가에 언제나 새로운 노래를 주어서 흥얼거리며 즐겁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감정이 개입되었음을 뜻합니다. 복음이 우리 속에 들어 올 때 그것은 우리의 전인 속에 역사합니다. 그가 영광스러운 진리를 볼 때 그것은 저의 심령을 감동시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은 똑같은 방법으로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의 의지를 감동시킵니다.

 

제가하고 싶은 두 번째 진술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들은 매우 쉽고 기본적인 사항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망각함으로 말미암아 종종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둘째는 우리가 감정을 지어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대로 명령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것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당신은 자신 안에서 스스로 감정을 창출할 없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억지로 울고 눈물을 자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필요성이 진정한 감정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정서와는 거리가 먼 거짓 감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그 무엇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그것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당신은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스스로 감정을 조작하려고 하면 할수록 당신은 그만큼 비참함 속에 빠져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인간은 자신의 주인일 수 없습니다. 그는 감정을 창출하거나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시도하는 것은 오히려 고통만 증대시킬 뿐입니다. 우리의 감정만큼 자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변덕을 부리도록 만드는 것이 없음이 분명합니다. 우리에게 속하는 모든 것 중에 감정은 가장 변덕스럽습니다. 그것들이 그렇게 많은 요인들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감정에 영향을 끼치는 것들이 매우 많습니다. 성질뿐만 아니라 육체적 상태 또한 영향을 끼칩니다. 옛날 사람들은 감정이 신체의 여러 기관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저들이 옳습니다. 저들이 말하는 점액질과 우울질의 경우에 그렇습니다. 황달에 걸린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노랗게 보이는 법입니다. 진리의 요소가 여기에 있습니다. 육체적 조건들이 우리들에게 깊이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자가 된다는 조건이 결코 이 모든 타고난 경향들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고찰해야만 합니다. 그것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요인들 때문에 우리의 기분이 바뀌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들 때문에 놀랐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우리는 스스로 침울한 기분에 빠지거나 아니면 그 전날과 매우 다른 상태에 처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어제는 완벽하게 행복감을 느끼며 또 다른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새날을 꿈꾸며 잠자리에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침에 일어나서 침체되고 좋지 않은 기분 속에 잠겨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의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감정은 변화 무상하다는 말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것에 의해서 통제를 받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성격의 경우에도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지 똑같다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는 모두 성격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그분은 우리 중에 두사람도 똑같지 않도록 지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서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품이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잘못되거나 또는 불신자라도 우리의 성품으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다스리도록 허용할 만큼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항상 내 마음을 말합니다. "나는 언제나 내 생각을 말합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 의로 다른 사람들의 감수성을 짓밟을 때 나타나는 해약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들은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들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은 저들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성격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들이 자신들의 성격을 조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말해서 성품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하지만 타락의 결과 죄때문에 성품이 제위치를 지켜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놀라운 선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조절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감정과 매우 똑같습니다. 우리의 감정은 언제나 우리 자신을 통제하려고 추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깨닫지 않으면 저들은 틀림없이 그렇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분이나 변덕스러움을 말할 때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기분은 우리 자신에게 내려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곳에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통제하고 사로잡을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좋지 않은 기분 속에서 잠을 깹니다. 그러면 그날 하루 종일 그 같은 기분에서 지내게 되고 또 우리를 바로 잡아줄 그 어떤 일이 일어날 때까지는 그 같은 기분에 젖어 있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매우 좋은 사례가 나오는데 이스라엘 왕 사울의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위험은 우리 자신들이 자신의 감정에 복종하고 또 그것들로 하여금 우리를 명령하고 통치하며 주관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 전체를 통제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같은 맥락에서 본인이 우리는 어떤 특별한 형태의 감정이나 경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하는 위험성에 관심을 돌리고 싶습니다. 영적 관점으로부터 나온 이것은 이런 상태에 대한 가장 평범한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는 지금 간증을 할 동안 어떤 놀라운 느낌을 증언하는데 "그런데 저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제가 이미 말씀드린 바를 다시 한번 반복하고 싶습니다.

 

감정이란 진정한 기독교 속에도 개입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특별한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는 단순한 사실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뜻할 필요성은 없습니다. 감정은 실제적입니다. 하지만 혹시 우리가 어떤 특별한 감정을 실제적인 것으로 가정할 때 우리는 마귀의 매우 좋은 희생물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우리의 모든 삶을 불행과 비참함과 협소함 속에서 보내고 말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모든 시간을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고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저로서는 이것이 매력적인 주제입니다. 하지만 본인은 스스로 본 주제를 벗어나 지엽으로 흐려는 유혹을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특별한 부분이 성품의 문제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극적인 문제를 일으킬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기독교 신앙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일반적으로 켈트족에 속합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기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는데 까지 너무 앞서갑니다. 저들은 감정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행복이나 기쁨의 감정은 거의 거짓된 것으로부터 기인된다고 말할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그런 유형의 사건은 민족에만 국한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어떤 교단의 특징으로도 역시 나타납니다.

 

매우 엄격한 침례교 창설자들 가운데 하나인 필포트가 전파한 설교가 있습니다. 그 설교의 제목은 "어두움 속을 행하는 빛의 자녀와 빛가운데 행하는 어두움의 자녀"였는데 그것은 이사야서 50장 마지막 두절을 근거로 한 것이었습니다. 설교에서 그는 "당신이 거짓된 감정의 촛불을 켤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신이 놀라운 종류의 불이 역사하도록 할수 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는 그가 자기 자신의 마음의 역병과 자신의 죄악성 때문에 이 세상을 무겁고도 고통스럽게 살아가며 또 자기 자신의 죄와 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광대하심을 언제나 의식하며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의 주요 강조점에 큰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 설교에서 그렇게 위대하고 경건한 설교자께서 너무 지나치게 나갔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인상은 만일에 당신이 행복하다면 당신에게 마치 무슨 잘못이 있거나 아니면 당신이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지나치다는 말입니다. 틀립없이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경험은 영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심리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공허하고 천박한 행복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아닙니다. 하지만 기쁨이란 결코 그리스도인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가서도 안됩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그리고 이런 감정의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취급해야만 할까요? 제가 많은 것을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것은 매우 낙심한 상태라면 당신은 기쁜 감정의 부재상황에 따른 분명한 이유가 없음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혹시 당신에게 죄책감이 있다면 당신은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죄인의 길은 힘이 듭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그의 규례를 범한다면 당신은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면서 자신의 지지에 충실하고 또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따라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신앙생활은 비참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논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밤이 낮의 뒤를 따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습관적인 죄에 안착하고 있거나 혹은 성령께서 당신의 양심을 통해 정죄하고 있는 그 어떤 일을 계속해서 붙들고 있다면, 당신은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유일하게 당신이 할 일은 그것을 고백하고 인정하며 회개하고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당신의 죄를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아무 것도 숨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당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로 하여금 다른 요인들에 대한 목록을 만들게 함으로써 저와 당신의 시간만 낭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올무에 걸려들지 모릅니다. 그에 대해서 완벽하게 분명히 하도록 합시다. 당신의 양심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말하도록 하십시요. 당신 안에 계신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만일에 저가 그의 손가락으로 그 무엇을 만지고 있다면 그것을 떼어버리십시오. 당신은 자신이 어떤 죄에 머무는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또 그것이 원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본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감정에 너무 지나치게 집중하는 실수를 만들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드는 무서운 잘못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것을 반복하여 설명하는 것을 결코 역겨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넘어지게 하는 요인이라는 사실을 너무 자주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감정이란 결코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결코 중심 축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것들을 그 같은 위치에 둔다면 당신은 불행하게 될 필요성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작정하신 그 질서를 당신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감정이란 언제나 어떤 일이 있은 다음에 나오는 결과입니다. 성경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특별한 잘못에 어떻게 빠져드는가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34편 기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당신이 맛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맛보기 전에는 느낄 수 없습니다. "맛보아 알지어다" 그것은 마치 밤이 낮을 이어 뒤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맛보기 전에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성경 도처에서 끊임없이 강조되는 진리입니다. 결국 우리가 성경에서 얻은바가 진리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정서적인 충동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그 진리는 마음속에 선언되고 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매우 값진 선물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또 우리 자신들을 진리에 복종할 때 감정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저는 가장 먼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에 대해서 무엇을 느끼는가?" 제가 먼저 할 질문은 오히려 "내가 그것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그것이 나를 사로 잡는가?" 좋습니다. 제가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감정에 너무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됩니다. 당신 자신의 맥박이 영적 성품이기나 한 것처럼 그것을 느끼려고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감정을 분석하고 평가하는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써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병적 상태로 접어드는 고속도로일 뿐입니다 이 모든 문제는 매우 간교한 것이고 또 그 간교함이 종종 이 같은 방법으로 유입된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모든 제기를 통해서 활동했던 위대한 성자들의 생애를 읽고 저들 모두가 자기 검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신학적인 특별한 견해에 대해서는 존경할 수 없지만 저들은 이 같은 점에서 모두 한결같습니다. 저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그렇게 살아왔다는 사실은 우리 역시 자연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우리 자신들의 감정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들은 우리가 신학적 논쟁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지성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을 확실하게 해 두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들은 우리가 도덕 규범에만 흥미를 가지는 도덕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을 확실하게 해 두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저들을 따르는 데에 있어서 우리는 너무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언제나 나타납니다.

 

성자 헨리 마틴은 이에 대한 분명한 사례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고전적인 사례는 17세기 미국에서 살았던 토마스 쉐퍼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곤고한 자로 만들었던 완전한 사례가 될 것입니다. 그는 영국의 심장부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땅을 밟고 또"열 처녀의 비유"라는 훌륭한 책을 썼던 가장 위대한 성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가엾은 사람은 끊임없이 침체된 채로 살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감정에 너무 집착하고 또 거짓 감정의 위험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곤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적하고 싶은 다음 요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뻐하는 것과 행복을 느끼는 것 사이에 큰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서정시 인 빌립보서를 읽어보십시오. 거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기뻐하라는 것은 명령입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기뻐하는 것과 행복한 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할 수는 있습니다. 당신이 언제나 주안에서 기뻐한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행복은 우리 자신들 안에 있는 그 무엇입니다. 하지만 기뻐함은 주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과 행복하게 느끼는 것 사이에 나타나는 큰 차이점을 명확하게 구별짓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을 펼쳐 보십시오 거기에서 당신은 그 대사도가 놀랍게 비교하는 대조법을 통해서 모든 것을 매우 분명하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그 순간 사도가 매우 행복감을 느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그 순간 그는 전혀 행복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육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행복한 사람의 모델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두 상태에 대한 차이점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점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우리 자신을 감동시키는가를 아는 것이라는 매우 실제적인 면에 이르게 해 줍니다. 그것이 바로 이 문제에 대한 전체적인 핵심입니다. 제가 당신에게 상기시킨 바대로, 그 분위기가 당신에게 젖어들 때에 나타날 위험은 우리가 그것으로 하여금 우리를 압도하고 또 우리가 패배하여 낙심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으로 구원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하여 아무 조처도 취하지 않습니다.

 

그 사도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사를 불일듯 일으키기 위하여..."

우리는 나태함과 우울증을 멀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에게 말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리고 싶은 것은 당신이 자기 자신에게, 이 공포스러운 자신에게 말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십시오 그리하면 은사가 불일 듯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 자신에게 어떤 것을 상기시키십시오. 당신 자신에게 자신이 누구이며 또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를 확인해 보십시오. 당신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너에게 지배받지 않겠다. 이런 기분이 나를 통제하지 못한다. 나는 벗어나겠다. 그리고 나는 쉬겠다."

 

그러므로 일어나서 걸어 보십시오. 그리고 무엇인가를 시도해 보십시오. 은사를 불일듯 일으켜 보십시오. 바로 이것이 끊임없는 성경의 권고입니다. 만일에 당신이 이런 기분으로 하여금 자신을 통제하도록 한다면 당신은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마십시오. 다시 말하건대 게으름을 멀리하십시오. 하지만 그 일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방법으로 해 보십시오. 당신이나 제가 할 일은 감정을 선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믿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가 감정으로 구원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들은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저희가 구원을 얻으리라." 결코 감정을 최우선적인 자리에 위치시키지 마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결코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들로 하여금 믿도록 상기시킬 수는 있습니다. 나는 자신으로 하여금 믿도록 권고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시편기자가 42편에서 했던 대로 자신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너는 바라라, 너는 믿으라, 너는 신뢰하라, 그것이 바로 방법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의 감정이 자신들을 돌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들을 인하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신에게 말하십시오. 비록 마귀가 당신이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제시할지도 모릅니다. 그때에 이렇게 말하십시오. "아니다 나는 아는 것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느끼든 느끼지 않든 나는 성경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또 내 영혼이 말씀 위에 머물리라. 그리고 나는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바울은 믿음을 첫 번째 자리에 위치시키고 또 그것을 계속 유지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필포트는 그 점에 있어서 옳았습니다. 빛의 자녀가 종종 어둠 속에서 걷고 있는 것이 발견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계속 걷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저앉아서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빛의 자녀가 어둠 속을 걷는 그런 경우입니다. 그는 이 경우에 있어서 주의 얼굴을 뵙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분이 거기에 계신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그가 계속해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설명 드리는 것이 차라리 낫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참으로 행복하고 복되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기쁨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한다면 여기에 비법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자가 복된 사람이 아닙니다. 스릴이 넘치는 것을 찾지 마십시오. 차라리 의를 추구하십시오.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해 보십시오. "나는 감정에 대해서 염려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나는 그 외 다른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나는 행복하고 싶다. 하지만 그보다 의롭고 싶다. 거룩하고 싶다. 나는 나의 주님을 닮고 싶다. 나는 그분이 이 땅에서 사셨던 것처럼 살고 싶다. 나는 그분이 걸어가셨던 그 길을 일생 걷고 싶다."

 

당신은 요한이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말했던 대로 그분이 이 세상에 계셨던 것처럼 이 땅에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목적을 의로움과 거룩함에 두십시오. 만일 당신이 그렇게만 한다면 당신은 복될 것이며 채워질 것이고 또 당신이 그렇게도 열망하던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행복을 찾아보십시오. 당신은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의를 추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이 행복하게 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행복이 당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심지어 당신이 그것을 찾기도 전에 그곳에 오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것을 이렇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당신은 놀라운 기쁨을 알고 싶습니까? 당신은 묘사할 수 없는 행복을 경험하고 싶습니까? 하실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그를 찾으십시오. 그분 자신에게 마음을 돌이키십시오. 주예수 그리스도께 돌이키십시오. 만일에 당신이 위축된 감정에도 불구하고 주저앉아서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어떤 다른 것을 시도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에 대한 단순한 본질입니다. 그 분에게 직접 나아가서 그 분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마치도 어린아이가 누가 자신의 기쁨을 빼앗아 가거나 파괴할 때에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달려가듯이 그렇게 한번해 보십시오. 만일 당신이나 제가 이 같은 상황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면 오직 한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그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만일에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그를 찾는다면, 당신이 행복이나 기쁨에 대해서 염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기쁨이요, 우리의 행복입니다. 그는 역시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는 생명이시고 모든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충동과 우리의 감정을 중에서, 이 큰 탁월성에 부여시키려는 사단의 유혹을 피하십시오. 중앙에는 오직 저기에 계셔야만 될 유일하신 분인 영광의 주님을 모십시오. 그분은 당신을 사랑하사 십자가를 짊어지고 또 당신의 죄와 행위에 따른 징벌과 부끄러움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그를 찾으십시오.

그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이 당신에게 더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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