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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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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2005-07-29 http://www.nosuchjesus.com/ |
주기도문(13)-욕심을 채우며 살아라
마태복음 강해 (81) 주기도문 강해 (13) 10/26/200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한국 신자의 결정적 약점
한국 신자들의 신앙 생활을 살펴 보면 기도와 찬양을 뜨겁게 하고 은혜 받은 체험이 있고 선교와 전도에 열심인 것 등 좋은 점이 많다. 반면에 결정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는 것이다. 읽어도 건성으로 읽어 치운다. 정확한 의미를 분석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려 하지 않는다.
오늘의 본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시험에 들지 않는 것과 악에서 구해지는 것 둘 다 뭉뚱그려서 단순하게 신자더러 죄 짓지 말라는 것이라고 간주해 버리고 만다. 두 구절은 서로 다른 뜻이다. 벌써 단어가 다르면 그 의미가 다르다. 시험과 악은 분명히 다른 뜻이다. 또 ‘들게 하지 마는 것’과 ‘구해 주는 것’도 서로 다른 동작을 나타낸다.
말씀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따진다고 해서 절대 신앙이 논리적, 지성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말씀의 정확한 내용을 알게 되어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해진다. 말씀이 정말 살아 있는 말씀이 되어 역사하는 능력이 생긴다. 성경을 순전히 자기의 감(感)과 생각에 의지하여 판단한다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 되며 그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오늘은 우선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만 따져 보기로 하자. 이 말씀을 그 문장 자체의 뜻만 따져 보면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한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시험을 들게 할 수 있는데 그 시험을 거두어 달라는 것과 하나님 외 다른 곳에서 오는 시험이 있는데 그것을 막아 달라는 것이다.
그럼 당장 여러분 중에 의아한 생각이 든 분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친히 아무에게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약1:13)라고 했다. 사단의 시험을 막아 주는 것은 몰라도 하나님은 시험하지 않는데 시험을 거두어 달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러니까 성경을 구체적으로 따져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험의 세 종류
우리 말로는 모두 시험이라고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성경은 세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영어로 보면 더 이해하기 쉽다. 사단이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먹게해 죄악에 빠트리고 멸망시킨 시험이 첫번째로 영어로 하면 Temptation우리 말로 하면 유혹에 해당한다. 둘 째 Trial은 하나님이 욥에게 온갖 불행과 고난과 질병을 허락했지만 결국은 그의 믿음을 정금 같이 변화시킨 시험으로 흔히 우리가 연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의 인생 말년에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 세우기에 적합한지 확인하려고 모리아산에 외아들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게 했다. 말 그대로 시험치는 것(Test)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조금 좁혀졌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허락하는 연단과 시험을 그만두게 해달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믿음이 자라는 것을 바라지 않거나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것이 싫지 않는 한 그런 기도나 바람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날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6,7)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과 시험은 신자라면 오히려 크게 기뻐해야 한다.
왜 잠간 근심한다고 했는가?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과 시험은 신자를 절대 실패하게 하거나 손해 보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신자의 유익이 된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결과가 보장되어 있다. 정답이 이미 밝혀져 있다. 실력을 쌓아 큰 일을 한 자가 뼈를 깎는 노력과 불 같은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자는 없다. 욥이 당한 연단과 아브라함이 겪은 시험처럼 하나님은 신자를 대할 때에 더 엄격하게 하신다.
성경은 분명히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표현했다. 누구나 어쩔 수 없이 근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렵지 않은 연단과 시험이 없다. 그것을 초연해 하고 아무 것도 아닌 양 쉽게 넘어갈 자 아무도 없다. 모세는 그 인생의 2/3 인 80년을 실패자, 낙오자로 살았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승리 때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남은 여생을 계속해서 큰 어려움 속에서 살았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좀 쉽고 편하게 살도록 내 버려 두시거나 복을 좀 주시면 안 되는가?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대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도저히 비교가 안 되게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껏 먹는 것과 마시는 것 해결하려 들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신령과 진정의 거룩한 종으로 만드시기 원하신다.
당신의 환난은 어디에 해당하는가?
성경을 진지하게 분석했으면 실제 생활에서도 그 분석된 말씀을 심각하게 적용해 보아야 살아 있는 말씀이 된다. 여러분이 지금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과 환난은 이 세 가지 종류의 시험 중에 무엇에 해당하는가? 사단으로부터 온 유혹인가?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 내지 시험인가? 쉽게 판별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두 가지 질문들 중에 어느 것이 맞는지 한 번 솔직히 속으로 답해 보라.
하나님은 신자에게 어려운 시험과 환난을 주실 수 있는가 없는가? 언제나 만사형통케 해야만 하나님인가? 현재 겪고 있는 여러분의 환난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겠는가 모르고 계셨겠는가? 알고 있다면 그 환난이 하나님의 여러분을 향한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인가 아닌가? 그 환난을 통해 여러분을 정금 같이 변화시키며 반드시 합력해서 선으로 바꾸실 수 있는가 없는가?
만약 하나님이 알고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그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아닌가? 그래도 끝까지 하나님이 이 일을 알고 있다는 부분에 자신이 없다면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본 적이 있는가 없는가? 그렇게 간절히 여러 번 기도 드렸는데도 하나님이 모르신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알고 계시다면 가만히 모른척하시겠는가 대책을 세우고 있겠는가?
여러분의 답안지에 어떤 결론이 나왔는가? 이미 해결책이 다 예비 되어 있다는 것 아닌가? 신자와 불신자가 다른 점은 저들은 환난 가운데 분명한 해결책을 갖지 못해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하며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눈 깜짝 안하고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폭력적인 죄악마저 동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몰라도 그 결과는 알고 있는 자다. 그래서 가만히 기다리며 주님의 영광을 소망할 줄 아는 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신자가 실패하고 넘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잠간이 도대체 얼마나 걸리는 잠간인지 궁금해 해서 그렇다. 이 환난이 일주일 안에, 한 달 안에, 일 년 안에 끝나는지 빨리 결과를 달라는 것이다. 그 잠간을 못 참고 하나님의 때를 알려고 하고 하나님에게 자꾸 단축시켜 달라고 하니까 그렇다. 그 잠간이 정말 잠간이 되는 것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 달려 있다.
다시 한번 두 가지 질문들을 해보자. 현재 겪고 있는 환난 중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신령과 거룩과 의를 절대 놓치지 않고 끝까지 지키고 싶은가 아닌가? 환난과 고통이 어서 빨리 끝나기만 기다리는가 아니면 그 환난 가운데도 내가 정금 같이 변화되는 것을 더 소원하는가? 이 환난이 분명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한 과정이며 나를 더욱 큰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기 위한 준비임을 확신하는가 아닌가? 어떤 형태가 되었든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하고 싶으며 그 일에 내 일생을 기꺼이 바치겠는가 아닌가?
구태여 제가 정답을 말하지 않아도 이 질문들에 분명한 성경적 확답을 했다면 이미 그 해결책을 알았을 것이다. 여러분의 환난을 ‘잠간’ 지나가는 것으로 만드는가 아니면 평생 동안 계속해서 반복되는 ‘오래’로 만들 것인가는 하나님에게 달려 있지 않다. 신자가 그저 기도하고 기다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불 같은 연단과 시련을 기쁘게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 소원이 없으면 그 잠간이 절대 잠간으로 그치지 않는다.
시험의 실제적 근거
아직도 내가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이 하나님이 준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가? 그럼 사탄이 준 환난과 시험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이 기회에 신자가 분명히 알고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사탄은 신자를 직접적으로 조종하거나 방해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오해는 마셔야 한다.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 그러나 신자가 방금 드렸던 그 모든 질문에 온전히 믿음에 찬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사단이 절대 훼방하지 못한다. 감기마저 감기 귀신의 소행이라고 몰아 부치는 어떤 이단처럼 모든 나쁜 일의 배후에 사단이 있는 것이 아니다. 힘들고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마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할 필요가 없다. 최소한 하루 3번씩 식사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진정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자는 사탄이 근처에 얼씬 거리지도 못한다.
하나님의 연단과 시험은 기쁘게 감수해야 하고 사탄에게서 오는 유혹도 그렇게 많지 않다면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라는 기도의 구체적 뜻은 무엇인가? 야고보서 1:14,15로 가보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자기 욕심에 끌려 시험에 빠진다고 했다. 그럼 이 야고보서와 주기도문을 연결시키면 어떻게 되는가? “내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지 말게 해주시옵소서.”
한 마디로 욕심부리지 말게 해 달라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하나님더러 어떻게 해달라는 뜻인가? 내 속에 있는 욕심을 완전히 빼내어 달라는 것인가? 예쁜 여자를 봐도 아무 감각이 없게 하든지 그런 여자가 나타나면 순간적으로 봉사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인가? 고급 차 좋은 집을 아무리 봐도 전혀 부럽지도 않고 덤덤하게 해달라는 것인가? 아예 세상의 까마귀 노는 골 근처에 백로가 가지 못하게 막아달라는 것인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표현이 참 재미있는 것 같다. 동작의 주체가 누구인가? 신자가 시험 쪽으로 의도적으로 찾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시험이 신자 쪽으로 오는 것인가? 하나님을 아는 자가 고의적으로 시험을 찾아가는 법은 거의 없다. ‘시험에 들게하지’라는 표현은 신자 쪽에서 보면 수동형이 된다.
시험은 항상 언제, 어디, 어떤 일에서든 있다. 신자가 세상에 살아 있는 한 구태여 따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 속의 욕심과 세상의 유혹이 만나 스파크가 일어나면 어느 누구나 시험에 빨려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인격과 신앙 실력과도 크게 상관 없다.
욕심이 시험에 들게하는 근본 원인이라고 해서 욕심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무소유와 무욕심으로 살려면 절간으로 가야 한다.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다. 모든 사람이 전부 아무 욕심 없이, 아무 소유를 갖지 않고 산다면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한 것은 너무나 큰 낭비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자녀를 낳고 찌지고 볶으며 열심히 돈을 벌며 살아야 한다. 시험에 들고 유혹에 넘어갈 때가 있더라도 그것들을 멀리하려고 삶 자체를 등한히 할 수는 없다. 설령 실패하고 죄를 짓더라도 다시 회개하고 돌아 올 수 있고 그런 때마다 우리를 이 모습 이 대로 받아 주시는 주님이 있기에 정말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또 그런 시험과 유혹 중에 오히려 신자를 영육간에 강건하게 해 주시고 넘치는 은혜로 인도하여서 하나님의 더 큰 일을 감당케 하신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 대해 경외하여야 하고 한 번 뿐인 인생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으로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의 욕심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시험에 들지 말라고 해서 욕심과 감정을 완전히 다 빼고 사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세상에 시험과 유혹이 많더라도 신자는 그것들을 세상 사람과는 다르게 대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생을 살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세상의 욕심으로 하나님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추잡한 욕심으로 내 자신을 채워 세상 속에서 살찌우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욕심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나는 세례 교인입니다.
찰스 린드버그가 1930년 프로펠러 단발기로 대서양을 세계 최초로 횡단했다.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지만 당시로선 여객선으로 수주가 걸리는 거리를 서른 몇 시간 만에 건넜으니 세계적인 영웅이 되었고 파리에는 그를 환영하는 수십만의 인파가 모였다. 한 담배회사에서 자기 회사 담배 갑을 들고 담배 한 개비만 입에 물거나 손에 끼우고 있는 사진 한 장을 찍는 조건으로 5만 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지금으로 치면 수백 만 불의 가치가 되는 돈이다.
그러나 그는 “나는 세례 교인입니다”라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그 사실이 보도되자 곳곳의 신자들이 10만 불이나 되는 헌금을 보내 왔다. 신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저 5만불 거절했더니 하나님이 10만 불 채워주셨다는 사실에만 신경을 쓴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결과와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고 말씀 드렸지 않는가? 시험과 유혹의 결말을 궁금해 하고 염려할 것 없다. 대신 그가 어떻게 그런 큰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는 종교적 의무감으로 거절한 것이 아니다. 크리스챤이 메스컴의 선전에 얼굴을 비취는 것이 죄가 아니다. 세례교인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모셨다는 뜻이다. 무엇을 먹든 마시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기로 헌신한 자다. 인생의 가치관과 삶의 목표가 완전히 새롭게 바뀐 자다. 돈을 벌어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벌고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쓰는 자다.
린드버그가 대서양을 횡단 한 것은 영웅이 되어 인기를 얻고 돈을 벌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소명을 가지고 이 세상을 더 편하고 아름답게 변화시키려 했다. 당시로선 정말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단독으로 대서양을 횡단하다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선구자적 사명감으로 그 일을 감당한 것뿐이다. 아무리 5 만 불이 대단한 액수지만 신자에게 죄악시 되는 담배 선전에 세례 교인이 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는 없었다.
세상의 시험은 항상 그 장소에 그 크기로 있어 왔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다. 아마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다. 광고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사람으로 하여금 전혀 필요 없는 물건을 가장 필요한 물건인양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건강에 백해 무익한 담배가 세계적 영웅의 멋진 장식품처럼 보이게 만든다. 텔레비를 한 서너 시간만 시청해 보라. 사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전부가 없으면 당장 남에게 뒤 쳐지는 실패자처럼 여겨지고 마치 생활이 불편해 죽을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얼마 전 통계에 의하면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제조업 직종의 일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공장 자동화가 급속히 이뤄졌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물자가 남아 돈다. 안 쓰고 버리는 물건들이 쓰는 물건보다 더 많을 지경이다. 세계의 공장이라는 중공에서 나오는 물건만으로 전 세계 인이 다 쓰고도 남는다.
이런 지경이니 회사들이 살아 남으려면 더 교묘한 방법으로 소비자를 유혹하고 시험할 것이다. 꼭 물건뿐 아니다. 온갖 세상의 재미, 오락, 쾌락, 심지어 죄악 마저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건강에 좋다는 그럴싸한 핑계로 치장하여 무차별로 공격해 올 것이다. 그 때 과연 우리의 의지력으로 욕심을 죽이려 해서 그 시험과 유혹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
욕심을 채우며 살아라
사람들은 욕심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정확히 잘 모르고 있다. 무조건 양적으로 많이, 질적으론 고급한 것을 갖기를 소원하면 욕심이라고 친다. 특별히 신자들은 물질을 보기를 돌 같이 보아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신자가 벤즈차를 타고 월 수입 몇 만불 벌면 마치 큰 죄악을 짓는 것처럼 생각한다.
욕심이란 질, 양의 많고 적음과 상관 없이 자기 분수를 넘어서는 것이다. 재벌 회장이 벤즈 차를 탄다고 아무도 욕심 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제 갓 대학 졸업하고 입사한 신입사원이 아버지가 부자라고 벤즈를 타는 것은 욕심이다. 자기 분수, 능력, 위치, 지위를 초과한 것이다. 자기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탐내는 것이 욕심이다.
그럼 신자의 욕심은 무엇인가? 신자의 신자 된 근본적인 신분, 위치, 소속, 능력, 특권, 은혜 등을 넘어서면 욕심이다. 세례 교인이 세례 교인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욕심이다. 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의 참 의미를 놓치면 욕심이다. 복음의 능력을 의심하거나 믿지 못하면 욕심이다.
신자란 자기의 모든 삶이 하나에서 열까지 그 전부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한다. 전 평생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과 섭리 안에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범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에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연단과 시험도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하나님의 일을 감당케 하려는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그것을 기쁘게 감수해야 한다.
신자가 그러지 못하고 단지 현재의 고통만 없애 달라고 하는 것은 욕심이다. 왜 이 환난이 빨리 끝나지 않는가? 내가 그래도 교회 봉사 열심히 하고 헌금도 많이 했는데 왜 이리 고달픈 일이 끊이지 않는가? 이런 생각에 휩싸여 그저 불안하고 염려하다 못해 오직 고통만 빨리 없애려는 욕심으로 세상적 방법을 동원하고 세상의 재미와 가치를 찾게 되면 바로 시험에 넘어가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재미와 쾌락과 죄악을 쫓아 안락하고 편안한 것만 찾아 가더라도 신자는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과 정의와 빛을 발견할래야 할 수 없기 때문에 거들떠 보지도 말아야 한다. 비록 내가 그들에게 낙오자요 앞뒤가 꽉 막힌 고리타분한 자로 비췰지라도 말이다. 그것이 세례 받은 신자의 삶이다. 신자가 벤즈를 타고 월 수입 백만 불을 번다고 욕심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돈을 벌며 그 돈 버는 과정에도 복음의 향기가 드러나 많은 어려운 사람들이 함께 풍부해지고 영혼이 살아나는 일이 있다면 천만불 일 억불을 벌어도 욕심이 아니다. 그러나 단 돈 5불 10불이라도 세상의 부정과 부패의 더러운 냄새가 붙은 검은 돈을 받는다면 그것은 욕심이다.
시험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신자가 자기 인생에 대한 생각과 가치관을 바꾸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욕심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자기의 신자 된 위치를 항상 잊지 않고 실제로 그렇게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 은혜와 긍휼 안에 붙들려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주 안에서 머물러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비록 내 연약한 심성과 육신이 세상의 교묘하고 치사한 속임 수에 당할 때도 간혹 있겠지만 그럴 때마다 세례 받은 교임임을 자꾸 확인해야 한다.
신자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대로 한다면 그것은 욕심이다. 바로 그 때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켜 버린다. 신자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즉 하나님을 아는 자답게 산다면 시험에 넘어갈 리가 없다.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를 다른 말로 바꾸면 “저는 하나님의 모든 연단과 시험을 기쁘게 받아 신령하고도 성숙한 자녀로 변화되어 당신의 일에 쓰임 받기를 소원합니다”라는 기도다. 바울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장차 올 지극히 큰 영광과는 도저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음을 확신합니다.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내 삶을 통해 나타나길 소원합니다”라는 고백이 신자의 것이 되어야 한다.
도덕적 종교적 책임감으로 유혹과 싸워 한 두 번 이겼다고 신령한 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세상 사람의 더러운 욕심은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욕심으로 내 생각과 영혼에 가득 채워야만 한다. 생각을 바꾸어야 삶이 바뀌며 시험과 유혹에서 이길 수 있지 시험을 이긴다고 생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하고도 신비한 당신의 계획 안에서 내 삶을 다루고 계시며 이미 완전하고도 선한 정답을 분명히 갖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는가? 매일 이것을 점검하는 것이 바로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라는 기도문의 참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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