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20:14-15 |
---|---|
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07-08-26 설교 -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설교자는 누구인가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눅 20:14-15)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죽을 때까지 필연적으로 마주 대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설교자일 것입니다. 그 설교자가 매주일 말씀을 전하면서도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밝히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설교하다보면,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자신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설교자가 누구이며, 그가 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가 당해야 하는 고난이 무엇이며, 또한 그 시대를 향한 그의 외침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돌보아주는 성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즐겨 쓰는 용어는 ‘설교자’라는 말 보다는 ‘목회자’일 것입니다. ‘목회자’라는 말은 원래 ‘양을 치는 목자’라는 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교인들의 모든 삶을 신앙의 차원에서 교훈하고 돌보는 직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는 반드시 안수 받은 목사가 아닐 수 있습니다. 혹은 전도사일 수도 있고,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이것을 위해 부름 받은 평신도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목회자’라는 말이 ‘설교자’라는 표현보다 포괄적인 용어이기는 하지만, 설교가 그의 목회의 여러 사역에 있어서 어느 한 부분에 속하는 기능 정도라고 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내 양’이라고 하셨습니다(요 21:15-17). 따라서 모든 교역자는 하나님께서 양떼인 신자들을 목양하시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교자의 의무는 양떼들로 하여금 자신의 구속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분을 사랑하도록 설교로 돕는 것이며, 양의 의무는 큰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기 위해 그의 세우신 설교자들을 존중히 여기고 그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설교자라는 직분은 심방, 상담, 행정 등 목회를 돕는 다른 직분과는 달리 특별한 소명을 받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가장 영광스럽고, 또 그만큼 심판받을 일이 많은 두려운 직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해야 한다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듣는 회중들과 차별이 없는 죄인으로서 같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아주 분명한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경험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선포자로 부르셨다는 분명한 신적 부르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이 직무를 빼놓고는 도저히 자신의 존재와 삶을 생각할 수 없는 필연적인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설교의 사명이 ‘질그릇에 담긴 보배’와 같이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이를 위해 생명을 버리는 고난도 기꺼이 받을 수 있는 헌신의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이 부르심에 대한 복종적인 응답에 대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가 이 설교사역에 종사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로잡으심이 그 이유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소명에 대해서 찰스 스펄전(C. H. Spurgeon) 목사님은 “설교자로서 소명을 느끼십니까?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하십시오. 도망할 수 있는 데까지 도망가십시오. 그것이 가능한 한 그 부르심은 진정한 소명이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할 수 없이 하나님의 소명에 붙잡힌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손에 사로잡힌 사명자, 그가 바로 설교자입니다. 그 자신도 비록 그들과 다름없는 한 마리 양이지만 평신도들과 구별되어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여러분들은 역사 속에서 비정상적인 교회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가 가진 비극들이 많이 있지만, 가장 두려운 참상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가 신앙과 교회생활의 중심이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영광스러운 시대를 맞이할 적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가 모든 모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십시오.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홀로 있을 때 기도하시고, 군중들 앞에 섰을 때는 설교하시는 모습입니다. 바로 기도하는 설교자의 모습입니다. 복음서는 이 설교자이신 예수님의 생애와 그 분의 설교를 모아 놓은 책입니다. 사도행전 속에서 사도들과 헌신된 전도자들의 삶을 보십시오. 그들의 삶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홍보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외치며 선포하는 설교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지나간 곳에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영광을 회복하고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던 종교개혁시대에는 매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매일같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인파들로 줄을 이었습니다. 예배에서 설교에 대한 위치가 존중히 여겨지던 시대마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슴 속에는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진리에 대한 사랑이 충만했습니다. 중세 교회시대의 암흑은 교회가 설교를 업신여기고 미신적인 미사에 빠짐으로써 시작되었으나, 이 암흑은 교회의 설교회복과 함께 종교개혁의 새벽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자로 부름 받은 거룩한 소명 앞에서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예배가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되게 하십시오. 설교가 여러분의 예배의 중심이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가장 풍성한 만남을 갖게 될 것을 기대하십시오.
그렇다면 이러한 말씀을 맡은 설교자는 누구이며, 진정 그는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았으며, 또한 그가 당하는 고난은 무엇이며, 그 시대를 향한 그의 외침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답변을 듣고자 합니다.
I. 유대인이 복음을 거절한 방법 - 설교자의 권위를 의심함
어느 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며 설교하셨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모두 그 분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떼를 지어 다가옵니다. 이 세 부류의 무리들은 당시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이 힐책하듯이 예수님께 한 질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눅 20:1,2)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이렇게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눅 19:48)
이들 종교지도자들로 하여금 이토록 비상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게 만든 것은 예수님의 설교가 틀림없는데, 그 설교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20장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20장 1,2절에서는 “하루는 예수께서 … 복음을 전하실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말하여 가로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실 때 이들이 예수님께 질문해 왔던 것입니다. 그 질문의 요지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 복음을 설교한 권세를 말하라, 두 번째 그 권세를 누가 주었느냐를 말하라 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질문은 했습니다만 그들은 여기에 대답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권세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치 않으려는 불신앙을 감추려는 것입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전형적인 반응입니다.
설교자를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선포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려고 하는 불신앙적인 태도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사도바울의 설교를 거절하고 이단으로 들어서고자 하던 수법이었습니다. “바울, 그가 과연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증거가 무엇이냐? 예수님이 직접 택하시지도 않았는데 그가 사도일 수 있는가? 그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다.” 직분과 사명에 대한 이 같은 의심을 통해 갈라디아 교인들이 얻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울을 통해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거절하고 거짓 선생들의 이단적인 교훈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패역한 이 시대가 설교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방법도 동일합니다. 설교, ‘하나님 말씀의 선포’를 ‘목사님의 말씀’으로 바꿉니다. 또 ‘전도사의 말씀’으로 격하시킵니다. 급기야 교역자의 인격을 의심할 수 있는 기회가 오게 될 때, 그와 함께 그가 외치는 모든 설교를 ‘사람의 말’로 치부해 버립니다. 특별히 그 선포가 더 진실한 복음을 외치는 것일수록 더욱 강력한 의심과 반대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복음은 유대시대 뿐 아니라, 어느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복음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열렬히 환영받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대부흥과 각성의 시대에서도 이 복음의 선포와 역사적 흐름에 극단적으로 대치하던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오직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살기어린 도전에 직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많은 유대 종교계의 실력자들 앞에서 호위해 주는 이 하나 없이 외롭게 둘러싸여 서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이 시대의 올바른 설교자의 모습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II.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 본 설교자
이들 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을 지혜롭게 끝내신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거절하고 급기야 당신 자신까지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예언하시면서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비유를 통해서 설교자에 대해서 주시는 중요한 교훈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A. 설교자를 보내신 목적
첫째로 이 비유는 설교자를 보내신 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포도원을 만들어 소작인들에게 주고 간 주인은 대단히 인정 많고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저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라고 되어 있지만, 마태복음의 같은 기사에서는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마21:33)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포도원을 경작하면서 생활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준 것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그 주인이 ‘때가 이르자’ 포도원 소출 중 소작료를 받기 위해 종들을 보내었습니다. 아무 때가 아니라, 열매를 거둘만한 때가 되자 종을 보냈던 것입니다. 이사야서 5장 7절은 이 포도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더라”(사 5:7)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통해 교훈하고 싶으셨던 것은 하나님과 그의 자녀된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였습니다.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 타락하고 신앙을 버린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을 바로 농부들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설교자를 보내시는 것은 공평과 의로움을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공평과 의로움,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으며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당연한 몫인 것입니다. 이것을 깨우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시대에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종, 설교자들을 통해 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로움은 모든 설교자들의 설교 속에서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그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의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설교자의 영광은 결단코 세상이 자기를 인정해주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소망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가 비같이 내리는” 것입니다(호 10:12).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보내신 목적이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공의로운 삶을 살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직 심판만을 선고하는 비정한 선포가 되어서도 안 되지만, 하나님의 사랑만을 전함으로 신자들로 하여금 준엄하신 하나님을 잊게 하는 오류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설교자에게는,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지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저버릴 때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자기 형제들에게 외쳐야 하는 그런 고통이 있습니다.
B. 설교자의 고난과 하나님의 사랑
둘째로 이 비유는 설교자의 고난과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1. 설교자의 고난
본문에는 세 명의 종들이 나옵니다. 첫째는 “심히 때려서” 보냈고, 둘째는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보냈고, 셋째는 “상하게 하고 내어 쫓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죽임당하는 종과 더 많은 능욕받은 종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약의 설교자인 선지자들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처음엔 “심히 때리기”만 했는데 다음에는 “심히 때리고 모욕을 주어” 보냅니다. 세 번째는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게 상처를 입히고 밖으로 던져 버렸다”고 했습니다. 급기야는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한 가지는 시대 속에서 고난 받는 설교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을 전하는 설교자는 어느 시대건 그 시대 사람들, 그것도 하나님을 믿는다 자처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반드시 핍박과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설교자의 고난은 어디서 오는 것이겠습니까? 영혼들의 유익을 위하여 진리를 전하는 그가 왜 고난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자신들의 삶을 칭찬해 줄 때 그들은 진리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항상 자신들의 편을 드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누구의 지지 없이도 스스로 옳은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그들을 책망할 때 그들은 진리를 미워합니다. 공평과 의로움 앞에서 자신들의 패역이 드러날 때 반발심을 느끼며 진리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그 미움은 진리를 전하는 설교자에 대한 미움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단순한 미움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주인의 목소리를 전하러 온 자들을 때리고 박해하고 결국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설교자의 위로는 회중들이 자신이 전하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변화되는 것이지만, 설교자의 고난은 늘 진리를 싫어하는 자들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전합니다. 설교자가 고난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의로움, 그의 백성의 공의로운 삶을 설교하지 않을 때 암흑이 찾아왔습니다. 가난한 농민들의 고혈(膏血)을 짜내어 호화롭고 방탕한 삶을 영위하던 러시아 귀족들에게는 말씀으로 귀에 자장가를 부르듯 설교하고, 학대받는 농민들에게는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준엄한 설교를 하던 제정 러시아교회 설교자들의 말로(末路)는 오늘날 설교자들에게 두려운 경고를 줍니다. 동토의 땅 러시아에서 1917년 2월과 10월 두 번의 대혁명이 발발했을 때 귀족들과 함께 제일 먼저 농민들의 도끼와 낫에 무참히 학살된 사람들이 바로 설교자들이었습니다. 설교자가 그 시대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운 삶을 외치지 않을 때, 교회에는 흑암이 깃들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는 어두움에 사로잡힌 역사가 진리를 외치지 아니한 교회를 무참히 심판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사실을 러시아 교회사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그 시대의 교회와 역사 앞에서 책임을 지도록 부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강한 정치가의 편에 서도 안 되고, 연약한 민중의 편에 서도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편에 서서 그분께서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강철 같은 용기로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죄악된 삶에 마주서서 두려움 없이 외칠 수 있는 하나님의 열정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설교자들의 이 같은 용기와 열정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깨닫게 되는 또 한 가지는 이것입니다. 종들이 매 맞고 능욕 당하고 상해서 돌아오는 과정을 모두 보시면서도 계속해서 그 종들을 보내시는 포도원 주인의 모습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종,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 말씀의 설교자,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입었고 그분과 깊은 사귐을 가졌던 이들이었습니다. 소명을 받은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그는 누구보다도 그분을 신뢰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매를 맞고 돌아옵니다. 수없이 두들겨 맞고 능욕까지 당하고 옵니다. 그러면 그만 두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계속해서 보내십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는 종들을 보면서도, 죽어서 돌아오는 시체를 보면서도, 다시 보내도 그 농부들이 순종치 않을 줄 아시면서도 또 보내십니다. 하나님은 왜 그토록 사랑하는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처참한 고난과 능욕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당하게 하시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을 향한 눈물겨운 사랑 말입니다. 끊임없이 설교해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거절하고 공의로운 삶을 짓밟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이키기에 그토록 인색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왜 설교자를 보내셔서 지금도 설교하게 하시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당신의 종들을 고난 받게 하더라도, 차라리 당신의 설교자들이 능욕 받게 되더라도, 급기야 당신의 외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시는 아픔을 통해서라도 여러분들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와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의로운 삶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종, 설교자들을 고난당하게 하셨습니다. 채찍에 맞을 뿐만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당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완악한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외치던 설교자 스데반을 돌에 맞아 죽게 내어 주셨습니다. 공의를 버리고 사망으로 달려가는 조국, 그 역사의 비탈길에서 외치던 설교자 이사야를 톱에 켜서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역사 속에서 죽어간 수많은 설교자의 비명소리 속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까지 십자가에 죽이시면서까지 공의로운 삶을 구하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설교자들의 희생, 고난과 죽음이 크면 클수록 의로운 삶의 소작료를 내지 않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더욱 높게 쌓여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자기의 종들과, 마지막에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이 사랑이 바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여러분들을 돌이키게 하기 위해 아낌없이 고난에 내어 준 바 되어야 하는 사람, 그 고난과 순교 속에서도 그분의 백성들이 의로운 삶으로 돌이키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 그가 바로 설교자입니다.
C. 설교자는 죽어도 설교는 남는다.
셋째로 설교자는 죽어도 설교는 남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16-18절은 끝까지 하나님의 종, 설교자들의 선포를 거절한 그의 백성들이 당할 심판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18절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로 가루를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눅 20:18)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앞부분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실 때 그에게 와서 오해하고 부딪히고 거치는 자들이 심판받는다는 뜻이고, 뒷부분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믿지 않는 원수들을 심판하고 멸망시킬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세 명,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종들이 주인의 뜻을 전하고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이 죽임 당하기까지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결코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큰 교훈을 받습니다. 설교자는 배척을 받아 사라져도, 그 설교는 영원히 남아서 그 말씀을 들은 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설교자의 외침은 사라져도 그 선포를 들었던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 듣는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그토록 엄숙하고 진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III. 결론과 적용
설교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말씀의 선포, 그것이야말로 그가 생명을 건 영광스러운 사역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는 이 땅에 살아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이 공동체의 묵은 땅, 여러분의 굳은 심령이 기경되고 하나님의 의의 비가 폭포처럼 내리는 영광스러운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과 다름이 없는 한 마리의 연약한 어린양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설교단상에 오를 적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제가 이 양떼들에게 말씀을 외치는 설교자이기 이전에 저도 이들과 똑같이 주님의 위로와 용서가 필요한 한 마리의 어린양입니다.” 설교자, 그는 인격적으로 흠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가슴 아픈 일로 낙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붙드심이 없으면, 그 붙드심을 간구하는 여러분의 기도가 아니면, 하루아침에 모든 감화력을 잃어버린 힘없는 설교자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설교자는 위로부터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아래로부터 올리어지는 여러분의 기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외치는 일이 가능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설교자의 모습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설교자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따뜻한 격려가 필요합니다. 부족한 허물을 덮어주십시오. 여러분의 변함없는 사랑이 그에게 힘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선포 속에서 의로움을 구하시는 하나님과의 풍성한 만남을 기대하십시오. 그것이야말로 그가 살아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 나눔의 시간
1. 지난 주간의 말씀“자녀들의 회심을 위해 애쓰라”(잠 20:11)를 듣고 실천했던 삶이나 한 주간 받은 은혜를 말해 봅시다.
2.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배와 설교의 중요성에 대한 경험을 말해 봅시다.
3. 설교자를 보내신 목적에 대해 나누어 봅시다. 진리전달자로서의 설교자의 위치를 말해 봅시다.
4. 진리를 전하는 설교자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설교자의 고난이 어떻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주게 됩니까? 2007-08-26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