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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욥에게 말씀하시다

욥기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469 추천 수 0 2012.11.04 23:03:14
.........
성경본문 : 욥38:1-1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2.10.21 주일설교 http://dabia.net/xe/617860 

jys.jpg 정용섭 목사

 

여호와께서 욥에게 말씀하시다

욥기 38:1-11, 창조절 여덟째 주일, 2012년 10월21일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8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9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10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11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교회생활을 어느 정도라도 한 사람들은 욥 이야기를 잘 압니다. 그 이야기가 아주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살던 욥이 사탄의 시험을 받아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가족, 재산, 건강까지 모든 것을 잃고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이전보다 더 행복하게 살았다는, 전형적인 해피엔딩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은 아주 간단해서 욥기의 처음 두 장과 마지막 한 장에 다 담겨 있습니다. 전체 마흔두 장 중에서 겨우 세 장에 해당됩니다. 나머지 서른아홉 장은 주로 욥과 친구들의 논쟁을 다룹니다. 친구들은 욥을 향해서 욥이 불행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 뭔가 잘못한 게 있기 때문이니까 회개하라고 주장하고, 욥은 회개할 게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논쟁이 지루할 정도로 반복됩니다. 그 논쟁은 끝날 수 없었습니다. 나름으로 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논쟁은 여호와의 개입으로 끝납니다. 그 내용은 욥 38-41장에 나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바로 그 대목의 첫 부분입니다.

 

폭풍우 가운데서

 

욥 38:1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런 진술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어떤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하나님이 실제로 사람에게 나타나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물론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대목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예컨대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모세도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다시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말씀을 들었다는 이들의 경험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런 말씀을 자칫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처럼 성대와 입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친구와 대화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귀로 들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표현하는데, 저는 직접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제가 잘못 말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도 틀린 말을 한 게 아니고 저도 성경을 틀리게 해석한 게 아닙니다. 이런 문제를 오해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의 관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1장 1절과 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이 구절에 두 개의 서로 다른 ‘말’이 나옵니다. 하나는 예레미야의 말이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의 말과 여호와의 말씀이 분명히 구별되었습니다. 이 둘을 일치시킬 수는 없습니다. 다른 성경도 이와 똑같습니다. 마태복음은 마태라는 사람이 쓴 마태의 글입니다. 마태의 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아닙니다. 바울이 쓴 로마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혼란스러우신가요? 외교관의 역할을 생각해보십시오. 뉴욕 주재 한국 대사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뜻을 미국 대통령에게 전해야 합니다. 외교문서에 대통령의 뜻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말로 설명해야 합니다. 단순히 설명할 뿐만 아니라 서로 밀고 당기는 논쟁도 해야 합니다. 그 대사의 말이 대통령의 말과 문자적으로 무조건 일치되는 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것이 곧 하나님 말씀 자체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서 전하는 문서입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음식을 담은 그릇입니다. 그릇과 음식이 다 중요합니다. 그릇을 먹는 것은 아니지만 그릇이 없으면 음식은 음식이 될 수 없습니다. 된장찌개를 끓여서 그릇에 담지 않고 밥상에 그냥 쏟았다고 해보십시오. 둘 다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은 그릇이 아니라 음식입니다. 곧 성경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성경의 표현은 성서기자들이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하나님은 절대적인 능력이십니다. 궁극적인 생명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셨다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곧 욥이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어떤 절대적인 경험을 한 겁니다. 이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경험입니다.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경험입니다. 성경 이야기는 온통 그런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욥의 경우에 그 하나님 경험은 친구들의 논쟁을 중단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 경험은 바로 그와 같습니다. 사람들의 온갖 주장을 폐기시킵니다. 칼 바르트는 신학자의 실존을 가리켜 하나님의 행위가 너무 놀라워 입을 다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경험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사실 앞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침묵해야 합니다. 재산이 많고 적음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연봉의 차이도 가소로워집니다. 심지어 윤리 도덕적인 가치 판단도 무의미합니다. 저 사람이 좌파냐, 우파냐 하는 정치적 논쟁도 불식되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오늘 밤에 우리가 모두 죽는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경험은 바로 이와 같은 절대적인 사건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설명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실감이 가지 않는다고는 생각할 겁니다. 오늘 밤에 우리가 죽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그게 그렇게 확실한가요? 오늘 밤이 아니라면 내일 밤은 어떨까요? 또는 50년 후의 어느 날 밤은 어떨까요? 그 순간은 속히 옵니다. 우리의 모든 꿈, 의지, 망상, 욕망 등을 완전히 해체하는 그 순간, 그 사건이 득달같이 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걸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기독교 영성은 사람들이 막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성서기자들은 끊임없이 그 사실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하나님이 가까이 오셨다고, 심판의 날이 임박했다고 말입니다. 분주한 일상을, 공허한 논쟁을 멈춰야 할 그 순간이 마치 주의 사자가 문을 두드리듯이 가까이 왔다고 말입니다. 이것을 종교적 의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은 모든 인간적인 이해타산과 논리가 작동되는 일상을 멈추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사실 앞에 직면하라는 요구입니다. 이럴 때만 진정한 의미에서 안식이 가능합니다.

 

땅의 기초

 

욥을 향해서 여호와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보십시오. 여호와는 ‘땅의 기초’에 대한 것으로부터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4절은 이렇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이 세상이 얼마나 신비로운지를 좀 보라는 겁니다. 바다와 육지, 산의 경계, 사막과 숲, 그리고 그 안에 사는 모든 것들, 밤하늘에서 빛나는 별들이 모두 신비롭습니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이 2-3광년이나 떨어져 있다거나 137억 년 전에 빅뱅이 일었다는 사실을 알면 아득한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지난 2012 런던 패럴림픽 개회식 개회식에 참석한 스티브 호킹 박사는 장애인들을 향해서 ‘망가진 자신의 수족만 보지 말고 하늘의 별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별이 빛나는 우주의 차원에서 보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는 없습니다. 궁극적인 사건 앞에서 사람의 차이는 없습니다. 그런 궁극적인 사실이 곧 본문이 말하고 있는 땅의 기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대목에서 혼란스러워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지금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어느 세월에 땅의 기초에 대한 것을 생각하느냐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시간이 남아돌거나 공부를 많이 한 사람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주의 신비를 가리키는 ‘땅의 기초’는 특별히 시간이 많은 사람이나 가방끈이 긴 사람만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정직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저절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 세상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무(無)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리고 세상은 왜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왜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후손을 낳고, 하는 방식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우리와 만물의 마지막은 무엇일까요?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욥을 향한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질문에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분들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세상의 억압과 유혹에 길들여진 겁니다. 돈과 소유에만 마음을 두는 사람에게 땅의 기초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성서의 진술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욥의 이야기에도 관심이 없을 겁니다. 기독교인으로서는 불행한 일입니다.

 

둘째, 어떤 기독교인들은 ‘땅의 기초에 대한 이야기’를 신앙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예수 영접하고, 회개하고, 교회생활 잘하고, 세상에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건전하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도 대개는 이런 정도로 생각합니다. 파렴치하고 비상식적인 일들로 기독교가 욕을 먹고 있는 오늘날 이런 정도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은 아닙니다. 건강한 신앙도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땅의 기초를 생각한다는 것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다가 다시 우리에게 오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하늘은 어딥니까? 부활은 생명의 완성입니다. 부활이 우주의 완성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생각하지 않으면서 부활을 믿을 수 있을까요? 더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바로 땅의 기초를 놓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즉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의 기초’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우리가 모두 물리학자나 생물학자가 되자는 게 아닙니다. 그런 지식을 자랑하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땅의 기초를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습니까? 완전하게 아는 건 세상 끝날 까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중심 주제도 아닙니다. 땅의 기초를 생각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잘못을 회개하라는 친구들의 닦달을 거부하던 욥은 땅의 기초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뒤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6)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즉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을 티끌과 재로 낮춥니다. 거기에 참된 해방과 평화와 안식이 임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여러분은 절감하실 겁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실제로 티끌과 재의 운명을 감당하시고 구원의 길이 되신 분이 계십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보십시오. 그분에게 일어난 일들을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믿으십시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은 ‘여호와께서 욥에게 말씀하신다.’는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 경험입니다. *


댓글 '1'

코리도라스

2012.12.01 21:33:37

'137억년전 빅뱅'은 부적절한 비유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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