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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의 기도

에스라 빛의 사자............... 조회 수 2966 추천 수 0 2012.11.13 11: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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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스9:6-15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에스라의 기도

본문: 에스라 9: 6- 15

 

에스라라는 이름의 뜻은 '도움' '나의 원조자' 또는 '조력'이라는 의미입니다. 에스라는 아론(제사장 지파)의 16대 손으로(스7:5) 시드기야 왕 때 대제사장이던 스라야의 아들이며, 제사장이요, 모세의 율법에 정통(숙달) 한 서기관입니다.(왕하25:18-21, 스7:6)

 

1. 에스라는 어떤 인물입니까?

 

주전 5세기 경에 바사(페르샤)의 고레스 왕이 이스라엘 포로들을 귀한 시켰습니다. 이 때 두 영적인 지도자가 있었는데 한 분은 정치적인 지도자인 느헤미야(바사제국이 임명한 총독)이고 또 한 분은 신앙의 지도자인 에스라(제사장이면서 서기관)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재건한 쌍두마차와 같습니다.

에스라는 율법책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낭독함으로 신앙을 새롭게 회복하기를 열망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느8: 1- 3)

 

1) 에스라는 율법에 능통한 학사입니다.(스7: 5-6, 느8:1)

 

또한 바벨론에서 2차 포로귀환 때 백성들을 이끌었던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큰일을 앞두고 하나님께 먼저 무릎을 꿇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많은 헌물로 인한 강도의 위험에 대해 군사적인 호위를 받지 않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보호를 믿는다고 하면서 군사적인 도움을 받는 것이 믿음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스8: 22) 또한 죄에 대해서도 민감했는데, 이는 백성들이 이방 여인과의 혼합 결혼을 통해 지은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하나님께 재 헌신하도록 촉구했던 모습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스9:5, 10: 10-11) 그는 말씀으로 유대민족을 회개․개혁시켰습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스라야의 아들로 대제사장 아론과 엘르아살과 비느하스를 거치는 사독가계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당시 에스라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 1세 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모세 율법에 능통한 학사였기 때문에 서기관으로 봉직하고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약 80년 전(B.C. 537년) 제1차 포로 귀환 때 스룹바벨의 인솔하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유대인들의 생활이 퇴폐하고 신앙생활마저 엉망이라는 소식을 듣고 여호와의 율법(모세의 율법)을 바로 세우려고 하나님께 선하신 도움을 원했습니다. 그의 소원은 잃었던 고국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명령, 즉 여호와의 율법에 따른 지도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바사 왕 아닥사스다 1세에게 청원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스라를 축복하셨으므로 그가 요구하였던 것이 조서를 통하여 허가되었습니다. 귀환에 앞서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한 뒤 1,754명의 유다인을 인솔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습니다.(B.C. 458년)

 

2) 에스라는 율법대로 실천한 개혁자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에스라는 무엇보다 먼저 유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고 안식일을 준수하며 성전에 예물을 바치도록 지도했습니다. 아울러 세금에 관한 사회제도를 제정하고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시켰습니다. 더 나아가 에스라는 이미 이방 여인과 결혼한 자들에 대해서 이방 아내 및 자녀들을 추방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같은 에스라의 개혁 조치는 너무 극단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방의 우상 세력과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에스라의 단호한 태도를 통해 그의 성품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당시 이방 아내들과 그녀의 자녀들은 우상 숭배에 깊이 물들어 있었으며 아내를 따라 유대 백성들도 우상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칫 방치했다가는 유대 민족의 순수성이 사라지고 바벨론 포로의 원인이 되었던 우상 숭배가 또다시 유대 땅에 만연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유대 신앙공동체의 성결을 위해서 혁신적인 개혁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처럼 에스라는 율법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율법대로 사회를 정화시킨 종교 개혁가였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신29:9)

 

3) 말씀으로 돌아가자

 

에스라의 회개 및 개혁 운동은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인 율법을 낭독하고 그것을 강론하는데서 부터 출발했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면 누구든지 죄악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반성하거나 혹은 사회를 개혁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 지부터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연구한 학자요 제사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에스라는 당시에 알려진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인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의 총애를 받던 신하였습니다. 그는 왕에게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을 수 있는 자로서 왕의 측근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당시 세계 최고의 권력 주변에서 세상적인 유익과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라는 세상적인 권력과 세상이 주는 만족함에 안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에스라 7:10을 보십시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의 이러한 결심은 율법학자로서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학자적인 양심을 자주 이야기하지만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자기 이기적인 욕심을 위하여 행동하는지 오늘 우리나라에서도 잘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분에 전문가 또는 학자라는 이름으로 기업의 이익을 위하여 여론을 그들이 원하는 쪽으로 이끌어 가기도 하고,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도 불구하고 두둔하는 글을 쓰기도 하는 자들이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고대세계에서도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당시에 페르시아의 권력주변에 머물러 있으면서 왕의 총애를 받으며 그의 생애 동안은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라는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개인의 미래가 있고 국가의 미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에 성전을 완공하였지만 외형적인 성전이 완공되고 그 안에 출입한다고 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기 전에 지금 지은 스룹바벨 성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화려하게 지은 솔로몬 성전이 있었습니다. 이 솔로몬의 성전은 당시 메소포타미아와 애굽의 문화권에서 온 왕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장엄하고 화려하게 지었습니다. 특히 스룹바벨 성전의 기초를 놓았을 때 첫 성전의 화려함을 목격한 세대의 사람들은 대성통곡하기도 하였습니다(스3:12). 그만큼 솔로몬 성전은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나라는 망하였습니다. 문제는 외적인 성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성전에 출입하는 자다운 합당한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성전이 완공되었지만 성전에 출입하는 자다운 삶을 살아야 개인의 미래가 있고, 국가의 미래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사실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이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꿈을 가졌습니다. 그는 이 꿈을 가지고 당시에 율법학자요 제사장 가문이면서 동시에 당시 세계 최고의 제국이었던 페르시아 왕궁에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을 정도로 신임이 두터운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그 위치에 있는 것만으로도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삶을 포기하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통하며 자기 백성에게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며 그것을 가르치려는 거룩한 비전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본문의 역사적 배경입니다.

 

믿음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있습니까? 말씀을 순종하는지의 여부가 여러분의 미래와 번영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적용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일이 왜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지 체험적으로 배우게 될 것입니다.

 

2. 에스라의 기도

 

1) 기도의 시작

 

에스라는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율법책을 가지고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었습니다.(느8:1- 3)

에스라는 기도를 시작하면서 심히 애통해 하며 탄식합니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에스라9:3)

절박한 심정으로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에스라 9:5)

 

2) 기도의 내용

 

에스라의 기도는 처음에는 나의 하나님(6절)에서 우리 하나님(9, 10, 13절)으로 호칭이 바뀝니다. 그리고 친밀성에서 공동체성, 연대성으로 바뀝니다. 즉 에스라의 기도는 개인적인 기도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한 중보기도와 간구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에스라 9:6)

 

3)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에스라가 페르시아에서 돌아와서 보니 그가 염려하던 대로 성전은 완공되었지만 그들의 도덕적인 삶은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다운 삶이 없었고 세상의 유익에 따라 세상의 문화와 습관을 좇아 세속화되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를 에스라서 9:1-2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가로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과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과 애굽사람과 아모리 사람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백성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인 제사장들과 성전을 봉사할 레위사람들이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분리되어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 등 그 땅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딸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백성의 특성을 버렸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이미 모세를 통하여 신명기 7:3-4에 말씀한 바가 있습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그러면 왜 이들과 혼인하지 말라고 하였을까요? 신명기서에 있는 말씀처럼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방 결혼이 세상의 잘못된 문화를 받아들이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 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이방결혼을 한 것은 단순히 여자의 미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 엥겔스(Engels)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이라는 책에서 자본주의의 발달에 의하여 축적된 재산을 보호하고 물려주기 위하여 결혼제도가 생겨났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오늘날의 결혼풍속도를 보면 결혼을 신분상승의 방편으로 많이 이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당시에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보다는 그들의 이익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보고 에스라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에스라 9:3-4에 보면 에스라와 당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이에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 이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인하여 다 내게로 모여 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이 말씀에서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라는 표현은 극심한 회개를 표현하는 행동입니다. 그는 회개하며 기가 막혀서 앉아 있었습니다. 에스라의 이러한 태도가 죄에 대하여 보여야 할 태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죄에 대하여 너무 무감각하고, 이 죄로 인하여 임하게 될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에스라가 왜 이러한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치명적인 결과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개인이나 이스라엘의 미래에 치명적인지는 에스라의 기도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에스라 9:6-1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시각에서 볼 때, 이 죄를 가볍게 여길 수도 있고, 당시의 문화사조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이 죄의 심각성과 함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치명적인 결과가 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에 보면 이 죄로 말미암아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있었던 사실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9:7을 보십시오. "우리의 열조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열방 왕들의 손에 붙이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 같으니이다." 에스라는 이 기도에서 조상 때부터 오늘까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과 관습을 따른 결과로 이방 왕들의 손에 붙인 바가 되고, 칼에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사로잡히기도 하였다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생존하여 성전을 건축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에스라 9:8-9를 보십시오.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깐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로 종노릇하는 중에서 조금 소성하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복역하는 중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바사 열왕 앞에서 우리로 긍휼히 여김을 입고 소성하여 우리 하나님의 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퇴락 한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을 주셨나이다." 에스라가 역사를 해석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이 지금 노예로 살았던 페르시아에서 다시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돌아오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실은 어떻습니까? 과거에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의 큰 특권과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았던 그 삶을 그대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 9:10에 보면 그 안타까움을 표현하기를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배반하였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에스라 9:14-15을 보면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일을 행하는 족속들과 연혼하오리이까 그리 하오면 주께서 어찌 진노하사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롭도소이다.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인하여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과거 역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의 잘못된 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금 돌아오게 하셨는데도, 이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데 어찌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악을 가지고서는 개인의 미래도 없고 국가의 미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시 이스라엘의 미래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율법학자요 제사장이었던 에스라가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데 있었습니다.

 

에스라 9:11-12을 보십시오. "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로 명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 그런즉 너희 여자들을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저희 딸을 너희 아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강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왕성하여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에게 유전하여 영원한 기업을 삼게 되리라 하셨나이다." 에스라는 한 개인의 번영과 국가의 번영과 미래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일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에스라의 기도에 나타난 이 역사해석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이나 후에나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일은 한 개인의 미래사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결정합니다. 구약시대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룹바벨의 인도로 성전을 지었습니다. 성전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출입하는 자는 여기에 합당한 윤리적인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구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사야 1:10-13을 보면 성전에 출입하며 제사하는 자들을 책망하는 말 가운데 잘 볼 수 있습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오늘날 교회당에 출입하면서 그 삶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다운 특성을 상실하고 세상의 가치에 따라 돈과 권력과 쾌락을 따라 가고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4) 죄에 대한 고백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징벌의 결과를 인정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기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이다’(에스라 9:7)

 

5) 하나님의 은혜

 

에스라의 기도는 어제의 슬픔에서 오늘의 현실로 다가옵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에스라 9:8)

에스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현실을 직시합니다. 우리가 노예였으나 이제 종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에스라 9:9)

 

에스라는 거룩한 모습으로 살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한 탄식의 기도를 합니다.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에스라 9:10)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일부에게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케 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못된 행실대로 다 보응하지 않으시고 죄악보다 형벌을 줄이신 하나님의 자비하신 마음을 알고 감사의 고백을 합니다.

 

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에스라 9:13)에스라는 악한 행실과 큰 죄 중에도 이스라엘 백성 중에 살아남은 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잃거나 갖지 못했어도,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나의 나 된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에스라 9:15)

 

에스라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약속하신 언약대로 다 행하셨으므로 의로우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반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끝까지 범죄하여 누구 한 사람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그는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부당하다는 불평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만이 우리를 우리 되게 하신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생명을 보존하여 주셨을 뿐 아니라, 바벨론의 종노릇 하는 데서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의 눈을 밝히사 소성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계시의 빛을 비추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주만물과 특히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향하여 눈을 돌리시고 귀를 기울이시며 관심을 보이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먼저 우리를 구원하여 지옥의 형벌을 피하게 하신 은혜를 기억하고, 또한 우리를 소성케 하신 은혜를 기억해야 하며 우리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울타리를 쳐 보호하여 주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에스라처럼 개인의 안일과 가족의 평안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교회와 민족공동체의 죄악된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애통해 하며 중보기도 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자비하시고 감사하신 하나님,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알고 말씀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민족을 위해 중보기도하며 살았던 에스라를 기억합니다. 하나님, 우리들의 삶 속에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과 순종으로 사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이 고달프고 쓸쓸해도 항상 기뻐하게 하시고 쉬지 말고 기도하게 하시며 범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찬송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에스라의 믿음과 행실을 본받아 우리도 말씀대로 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 모습 그대로 여기 있습니다. 부정하고 연약하고 미련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일뿐입니다.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다시 한 번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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