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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시1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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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 참고 : | 2007-11-07 설교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선악의 판단기준(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14:1)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자연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그 질서를 이해하고 그 질서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순간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이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안에서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 하는 삶인가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행동 하나하나마다 이것이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삶은 악한 삶이 된다고, 그런 사람의 마음은 심히 부패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세상에서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은 법입니다. 법이 어떤 것이 선이고 악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때문에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수한 법률들 속에서 왜 그것이 선한 것이고, 왜 그것이 악한 것인지 판단하는 근거를 주는 것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할 때, 자연법사상과 실정법 사상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I. 선악의 기준자
A. 자연법 사상
실정법은 실제로 법이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며, 법률로 정해진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법률이란 사회공동체의 규약이기 때문에 국가가 이러저러한 기준에 의해 법을 만들면 더 이상 그 근거를 요구할 것 없이 따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정법의 문제는 그것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라, 세월이 지난 후 보면 우리나라 독재정권 때나 나치즘처럼 아주 나쁜 법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법사상은 인간 속에 시대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흐르는 이치가 있다는 근거로 만들어 집니다. 우리는 흔희 이것을 ‘경우’라고 말하는데, 법으로는 명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경우’라고 하는 것이 글로 쓰여 명시되진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하고, 이것으로 부터 자연법이라고 하는 것이 나오게 됩니다. 이러한 자연법으로 궁국적인 선과 악의 판단이 가능한가에 대해 로마시대 『키케로』는 ‘선악의 목적들, 선악의 궁국적 끝’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책을 썼는데, 선악의 궁국적인 기준이 존재하며, 그것은 인간 본성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간의 본성이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 본성 안에 궁국적인 법들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은 왜 이렇게 혼란스럽습니까? 그래서 자연법사상으로는 자연법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에 대해 많이 연구하지만, 답은 하늘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 이루어진 세상은 다양성을 보여 주시만, 이 다양성 안에 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 창조주께로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께 답을 찾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위기와 회심의 문제에서 역력히 나타납니다. 인간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에 대한 문제가 너무 많을 때 문제 하나하나의 해결책을 찾아야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를 내려놓고 하나님 바라보고, 그 하나님에 대해 이해하게 될 때 인생의 문제에 대해 눈을 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연법사상 또한 궁국적인 선악의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궁국적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B. 성경의 사상
성경은 처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 됩니다. 성경전체를 대표하는 요절은 요한복음 3:16이지만 이것을 올려놓는 토대는 창세기 1:1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할 수 있었고, 예수님이 구속하러 오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요한복음 3:16 전에 요하복음 1:1에서 창세기1:1을 되풀이 한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하나님께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어떠한 것을 처분할 권한은 소유한 사람에게 있고 이것을 인정하면서 사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양심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인정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인정하는 것 이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복종의 의무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하면 세상은, 나는 누구의 것인가? 하나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 주인에게 물어보고 사용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침범당할 때 사람들은 분노하고 살인까지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소유권을 침범하는 것은 자신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고, 이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선악과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인정하는 모든 사람은 즉각적으로 그분께 복종하고 살아야 할 의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말은 이정하지만 실제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은 실천적 무신론자 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 우리를 창조하셨고 창조의 목적을 정해놓으셨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II. 선악의 판단기준
무엇이 필요합니까? 목적지를 갈 수 있는 구체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깊은 회심을 통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놀라운 결단과 각오를 갖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배향하고 살던 사람이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것이 참된 회심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깊은 지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하신 목적과 어떻게 그 목적대로 살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놓인 처지입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은 창조세계에 하나님의 창조의 빛이 현저히 사라졌고, 인간의 영혼도 어두워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읽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주신 안내서가 바로 성경입니다.
아직도 지성이 약하여 성경을 봐도 창조의 목적을 다 알 수 없고, 사물의 이치를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 한걸음, 한걸음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창조주에 대한 초월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는 가장 중요한 동기와 원천이 진실한 사랑, 초월적인 사랑입니다. 이 초월적인 사랑은 단순이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것만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사랑은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에 부어주시는 은혜작용의 결과인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혜의 사랑이 우리 안에 지순의 사랑으로 넘쳐나게 하심으로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매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창조의 목적으로 인도하는 길잡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순종할 때 지혜를 주셔서 실제적으로 그것을 따라 살게 하십니다.
성경을 뒤로하고, 이 세상의 이치만을 깨닫거나 자신의 노력으로 창조의 이치를 깨달아 창조의 목적대로 살겠다고 하면 절대 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창조의 목적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가 무엇인지 남겨두셨지만 그것은 성경의 빛을 받을 때, 신비한 빛을 발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로는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는 자연적, 특히 도덕적 질서를 충분히 보여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세계를 향해 당신 안에 있는 표준과 당신의 마음을 인간이 충분히 알고 좇아 살아갈 수 있도록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뜻, 계획, 창조의 목적, 내가 사는 이유 등을 성경을 통해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아멘’하고 믿는 것이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것을 믿어야 하는 이유와 더 잘 믿고, 의무를 더 잘 수행하기 위해 지식을 탐구하여 더 많은 지식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우리 안에 더 놀라운 사랑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합니다. 마치 지식은 사랑은 모닥불을 더 활활 타오르게 하는 장작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들이 현재 왜 이렇게 냉담해져 있는지 살펴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을 아는 것에,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 실증을 느끼므로 사랑의 불이 점점 꺼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법사상은 양심이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창조의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너는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느냐’라는 불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인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하신 상세한 내용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인간의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성경 안에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악의 판단 기준이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 할 때는 불분명하지만, 성경 66권 안에 있다고 할 때는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성경을 늘 연구하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알아가야 합니다. 2007-11-07
선악의 판단기준 2 2007-11-14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14:1)
지난주에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란 질문에 사람들이 세운 기준은 상대적으로 어떤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간단히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맞는 답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선악을 판단 할 수 있는 행위에 관한 수많은 규칙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전체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법들도 무엇인가로 향하는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하위의 법이 상위의 법과 충돌을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권위가 낮은 하위의 법률이 보다 권위 있는 상위의 법을 건드려, 누군가 문제가 있다고 제기하면 하위의 법을 무효가 되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하위에 있는 것들이 상위에 있는 것과 연결되게 해야지 한 국가가 가고자 하는 이상이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성경 또한 행위에 대한 수많이 규칙들로 이루어져 있고 어떠한 한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판단을 내리기 위한 모든 상세한 규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가 만나는 삶의 모든 상황에서 선과 악의 모든 경우를 다 다루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성격은 과연 선악의 판단을 위한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가?“ 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책만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성경의 규칙을 잘 이해하면 성경이 다루고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한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지식을 정확히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성경이라는 법을 만드셨는데, 이 성경이라는 법은 수많은 규칙들을 담고 있고 선악에 대한 기준에 있어 어떤 길로 가야할지 교훈하고 가르쳐 줍니다. 많은 규칙들은 한 곳을 향하는데 그것은 창조의 목적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 창조의 목적을 염두하시고 이 모든 세계를 설계하시고 창조하셔서, 그 창조세계를 질서롭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자연적 질서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질서가 도덕적 질서입니다. 이 질서를 따라서 성경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천지창조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는 피조물은 유일하게 인간밖에 없습니다. 동물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자기 이하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인간 이하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한 인간이 인간이하가 될 가능성까지 인간에게 부여하셨고, 인간이 인간이하가 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본 따려고 하다 그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하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흉내 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이것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악은 하나님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이럴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러한 악을 행하는 것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악을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도덕적인 능력 자체가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고, 그래서 인간만이 창조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성경만 주셨는가 하면 이러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이 없는 나라나 성경이 없던 시대에도 법, 규칙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본성에 의해 생겨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안에 있는 규칙들이 표출되어 사회의 질서가 만들어지고, 이 질서가 마지막으로 가고 싶어 하는 최종적인 곳은 바로 창조의 목적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는데 어떻게 창조의 목적을 이해하며 창조의 목적을 따라 갈 수 있는가’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인간의 영혼 안에는 창조의 목적을 향해 가고자 하는 것이 세팅 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마음 안에 놀랍게 도덕적인 질서가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질서, 도덕적인 질서에서 이탈하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며 본래의 위치로 돌아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 그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며 그러한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질서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이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다, 다른 것들과 어울리지 않는 구나’라고 느끼며 괴로워하는 것이 양심인 것입니다.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한 두 사람만이 아닌 모든 인간에게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한 법을 주셔야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안과 밖 두 곳에 법을 새기셨습니다. 하나는 돌 판에 하나는 마음에 새기셨습니다. 마음에 새긴 것이 양심 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 질서를 따를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안과 밖에 법을 주셨는데 왜 이 세상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지 못하는가? 처음에는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이 있었으나 죄가 들어오며 이것이 끊어진 것입니다. 이 법이 유익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어두워지고 지성이 어두워져 그것을 볼 수 없고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타락한 욕망으로 인해 마음을 흐리게 하고, 지성은 더러워져 하나님이 주신 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범한 인간으로써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며 그것이 잘 못된 것임을 인식하지도 못한 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세상의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하는 이유는 ‘양심’은 사회 현상에 의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사회현상으로 인해 양심의 빛은 현저히 흐려지고 창조의 목적을 이탈했는데도 자신이 이탈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만 올바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바른 질서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을 이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심의 빛만을 가지고는 살 수 없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통해 이해했다고 해도, 이해한 것과 그렇게 사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선악을 위한 판단을 양심에 의해 아무리 내려준다 해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선을 기쁘게 따를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알면서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해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따라 그 자리가 어디인줄 알고 그 자리에서 섬김으로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는 쉼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초월적인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창조 세계 내에 있는 모든 질서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모든 도덕적인 질서들과 행위들이 모든 세계와 연결되어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대로 흘러가도록 자신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월적인 사랑, 그것이 덕의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창조의 목적 전체를 받아드리게 하는 그 무엇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창조의 목적대로 살기 위해서는 ‘대체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자’라는 태도를 가지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처음은 아주 조금 창조의 목적에서 틀어진 것 같으나 그 결국은 엄청난 차이를 내며 다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온전히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초점과 목적은 정확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랑으로 전심으로 살아가고, 자신의 모든 방면에서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모든 것이 성경에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면 실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은혜의 힘을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전하여 주는 책입니다. 성경을 많이 탐구하고 성경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은 선악을 정확하게 판단할 뿐만 아니라 선악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성경이며, 이것은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매일매일 이러한 삶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200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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