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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왕하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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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2012.7.29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
탈출(4) 절망으로부터
열왕기하4:1-7
외팔로 파도를 타는 서핑을 하는 유일한 프로선수가 있습니다. 베서니 패밀턴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미국 하와이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다섯 식구와 함께 평온하게 살았습니다. 프로 서핑 선수가 되는 것이 베서니의 꿈이었습니다. 그녀는 8살 때부터 아마추어 서핑 선수로 활동을 했습니다. 금발머리의 예쁜 외모에 활달한 성격과 서핑 실력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답니다. 어느 날 단짝 친구인 알라나와 그의 아버지와 함께 한적한 바닷가로 향하였습니다. 유난히 암초가 많아 조심스럽게 바다 한 가운데로 향하는데 갑자기 상어의 공격으로 한 쪽 팔을 잃었습니다. 순식간에 그녀에게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친구와 함께 서핑을 하기 위해 바닷가로 나아가 서핑보드에 몸을 눕혔는데 그 순간 갑자기 상어가 다가왔습니다.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진 베서니는 두 차례에 걸친 수술을 받았습니다. 상처가 아물자 베서니는 당당하게 서핑 보드를 들고 바다에 뛰어 들었지만 한 팔로는 중심을 잡고 보드 위에 서는 것조차 불가능했습니다. 처음에는 3초 만에 떨어졌지만 연습을 계속하여 보드 위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시간이 1분으로 늘어났습니다. 보드 위에서 떨어지기를 수천, 수만 번을 거듭하면서 거친 파도를 다루는 법을 배워갔습니다. 그러나 한 팔로 프로 서핑 선수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답니다. 그녀는 포기하고 울분을 터뜨리며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어째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를 회의하고 태국 푸켓으로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쓰나미가 할퀴고 간 참혹한 바닷가 마을에 가서 봉사하는 데 어린 아이를 만났습니다. 부모를 쓰나미에 잃은 아이는 바닷가에 가까이에도 가지 못했답니다. 그 아이를 설득하여 서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마을 아이들이 베서니가 가르쳐주는 서핑으로 인하여 웃음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로 다시 할 수 있다는 믿음과 용기를 얻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여 또다시 서핑 대회에 출전을 하였습니다.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미국학생서핑협회 여자부 경기에서 5위에 올랐습니다. 세계적인 서핑선수를 꿈꾸던 그녀의 꿈은 물거품이 되는 듯했지만 다시 꽃으로 피어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위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해밀턴은 어떤 편의나 혜택도 거부하며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하여 주기를 바랄 뿐 거친 파도와 당당하게 맞서 싸워갔습니다. 드디어 2008년 세계주니어 선수권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녀의 감동 스토리는 자서전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소울 서퍼’라는 영화를 통해 희망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난 서핑하기 위해 태어났다. 매일 새벽녘에 일어나는 이유이다. 배가 아프고 암초에 베이고 녹초가 되어도 참는 이유이다. 인생도 서핑과 같다고 배웠다. 파도가 부서지는 곳에 빠지면 바로 다시 올라와야 한다. 파도 너머 무엇이 올지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만 있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무엇이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요즈음 우리 사회를 보며 점점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가계부채 지난해 말 현재 912조9000억 원으로 국민 한 사람당 1822만원, 가구당 5218만원의 빚을 지고 있다고 합니다. 빚을 갚을 길이 없어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1년 사회조사 결과'를 보면, "일생 동안 노력한다면 본인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가능성이 높다"고 응답한 비율은 28.8%에 불과했습니다. 2년 전 조사 때의 35.7%보다 훨씬 줄었습니다. 반대로 "상승 가능성이 낮다"는 응답은 48.1%에서 58.8%로 훨씬 많아졌습니다. 국민 58% "평생 노력해도 제자리"라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한참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30대 65%가 "계층상승 못할것"이라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때로는 베서니처럼 절망적인 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부도로, 때로는 질병으로, 때로는 가족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때로는 원치않는 사고로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상태에 처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사라집니다. 자신이나 어느 누구도 불행이나 고통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자신을 부담스러운 존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절망의 종착역은 죽음입니다. 절망은 자살사고를 설명하는데 우울보다 1.3배 정도 중요한 변수라고 합니다(Beck). 희망이 인간 삶의 중요한 동기라는 점에서 희망이 없음은 죽음과 같습니다.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기대도, 기대에 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생을 포기합니다. 하루에 절망으로 1100명이 자살을 시도하고 그 중 36명쯤이 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1년에 13,000명이 사망합니다. 아무도 나를 도울 사람이 없다고 절망하기 때문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규정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절망에서 희망으로 인생을 역전하며 일어서는 가정이 나옵니다. 우리가 살면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크고 작은 절망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요?
1. 우리는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만나 절망에서 탈출해야 합니다.사람이 절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 문제를 해결해 줄 분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때 절망합니다. 내게 지금 닥친 문제를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 때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홀로된 여인을 보십시오. 엘리사가 교장인 선지학교에 다니는 신학생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돌아가셨습니다. 여호와를 잘 경외하는 남편이었습니다. 그런 남편이 빚만 잔뜩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남을 도와주다 빚을 졌는지, 아니면 질병을 치료하다가 빚을 졌는지는 잘 나와 있지 않아 모르겠습니다. 이 여인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마 날마다 빚쟁이에게 시달렸을 것입니다. 빚을 지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습니까? 그것도 갚을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절망에 처하게 됩니다. 빚을 갚지 못하자 빚을 준 사람이 찾아와 아이 둘을 종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 하나님을 그렇게 잘 믿었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하느냐고 원망하며 절망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아이들을 불러 차라리 노예 생활을 하느니 죽자라고 하며 연탄불을 피워놓고 집단 자살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을 내팽개쳐버리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술집에 나가 몸을 팔며 자포자기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양심을 접어 버리고 모든 것을 정리하여 야반도주를 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전 신문을 보니까 1995년 직업 군인으로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사는데 아내가 씀씀이가 커 1억의 빚을 진 사람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2003년 전역을 했는데 도저히 낭비가 심한 아내와 살 수 없어 이혼하고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 8000만원을 갚고 두 딸을 데리고 살았답니다. 건설현장에서 벽돌을 나르거나 트럭을 몰았답니다. 그것도 안되어 식품회사의 영업직으로 일했지만 빚을 갚기는커녕 생활비, 교육비 대기에도 빠듯했답니다. 올 초 생활비가 없어 사채업자 6명에게 1400만원을 빌려 한 달 이자만 250만원이었답니다. 사채업자의 빚 독촉으로 장기를 팔려고 했는데 "2억원에 신장을 사겠다"며 먼저 검사비용이 200만원을 달라고 해 또 빚을 내 200만원을 건넸지만 브로커는 잠적해 버렸답니다. 초등학생인 두 딸을 더 이상 키울 수 없어 어머니 댁으로 보내고 자살을 하려고 한강 근처에 갔지만 두 딸이 걱정되 딸들은 돈 걱정 없이 살게 하고 싶어 아파트에 침입했다가 경찰에 잡혔습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 여인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별별 생각을 다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남의 것을 훔치로 가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절망적인 순간에 어떻게 절망으로부터 탈출합니까?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엘리사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부르짖었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이나 체면을 다 접어 버리고 절망적인 상황을 소상하게 숨김없이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지 인간 엘리사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 간 것이 아닙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간 것입니다. 엘리사가 믿고 있는 하나님께 도움을 받기 위해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순간도 하나님께 나아가면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다윗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진 듯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골리앗 앞에 설 때, 장인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적국에 도망갔을 때, 밧세바를 범했을 때, 아들 암논이 배다른 딸 다말을 겁탈했을 때, 압살롬에게 반역 당했을 때 참으로 수렁에 끌려들어가는 것과 같은 수많은 절망적 상황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런 절망적인 상황이 올 때마다 어떻게 그 절망에서 탈출하였습니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40:1-2)"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 28:7)”
모든 절망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우리 하나님께 있습니다. 가난의 절망, 질병의 절망, 소외의 절망, 걱정의 절망, 심지어는 죽음의 절망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우리 하나님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여 년 전인 1859년에 유명한 책 세권이 발행되었습니다. 먼저는 찰스 다윈이 발표한『종의 기원』입니다. 자연과학의 큰 변화를 일으킨 책입니다. 이 책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동물에서 진화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인간에 대한 생각의 대 변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둘째는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의 모태인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을 발표했습니다. 사회과학계의 큰 변화를 일으킨 책입니다. 셋째는 인문학계의 기념비적 저작인 『자조론(Self-Help)』이 나왔습니다. 스스로를 돕는 것은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주장하는 책입니다. 이 세 권의 책은 사람들의 관심을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 돌려놓았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삶, 하나님 중심의 삶이 아니라 물질 중심의 삶으로 방향을 돌려놓았습니다. 사람이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경제가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과학의 발전이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신은 인간의 허구적 창조물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한계를 초월하기 위한 투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현실의 고통을 이상적으로 풀기 위한 출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환상적 행복으로 인간을 기만하는 민중의 아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하며 기독교 도덕은 노예 도덕에 불과하다는 주장합니다. 불가지론자들은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안 믿는 것과는 무관하게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는 것처럼 행동을 합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하시지 않고 실제적 삶에 간섭하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과학문명이 극도로 발전된 정보사회에서 인간의 행복과 복지를 보장하는 것은 복지사회를 만드는 정부이고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보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라고 말합니다.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 양심의 문제는 단지 물질의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심리 치료를 통해 인간은 죄의식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고, 죽음을 극복하고 양심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경제가 희망이다.'라고 합창합니다. 경제만 잘되면 세상은 행복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경제만 잘되면 만사형통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합니다. 그러나 세계적 대공황을 거치면서 양식있는 사람들은 경제 발전이 희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시 실업률 25% 였습니다. 1929년부터 33년까지 약 4천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습니다. 대공황 직전 금융시장 붐으로 부를 쌓은 상위 5% 부자들의 수입이 미국인 전체 수입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최근 금융위기 전에도 상위 5%의 수입은 미국인 전체 수입의 38%에 달했다고 합니다. 전 세계 상위 2%에 속하는 부자들이 전 세계 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하위 50%가 차지하고 있는 부는 전체의 1%에 불과합니다. 상위 10%가 전 세계 부의 85%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먹지 못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이 한 해 2,000만 명이고, 하루 1달러 미만 생활자가 12억 명나 된다고 합니다. 글자를 읽지 못하고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20억 인구가 있습니다. 2달러 미만의 식비로 하루를 연명하는 빈곤층 인구가 전 세계 인구의 45%에 해당하는 28억 명에 이릅니다. 경제발전이 희망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과학이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은 편리함을 주었지만 지구는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언제 사형선고를 당할지 모릅니다. 과학이 선하게 사용되면 인류에게 많은 유익을 주지만 궁극적으로 과학 역시 인류의 희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진정 희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다. 절망의 순간 다른 길로 나가지 말고 우리는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만나 절망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2. 우리는 내가 가진 것으로 시작하여 절망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사람이 절망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내 스스로 그 문제를 풀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풀만한 돈도, 재능도, 실력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엘리야를 찾아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 여인에게 엘리야는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왕하4:2)”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를 내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빚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여인에게 무엇이 있는 지를 물어봅니다. 잃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망을 탈출하게 하는 하나님의 관점이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절망을 탈출하라는 것입니다. 여인은 기름 한 그릇 외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그 기름 한 그릇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잃었다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 희망의 씨앗이 남아 있습니다. 이 여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올리브 한 병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생명이 있습니다. 엘리사를 찾아갈 기력도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작은 믿음이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어머니에게 철저히 순종하는 아들이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릇을 빌려줄 만큼의 신용도 남아 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40년 동안 왕궁에서 후계자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느 날 명예도 권력도 부도 다 잃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세를 불러 사용합니다. 무엇을 들고 사용하십니까?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입니다. 그 지팡이로 이적을 행합니다(출4:17; 7:10) 나일강을 핏빛으로 바꿉니다. 홍해를 가릅니다. 그 지팡이를 들고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반석에서 물을 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골리앗 앞에 모든 백성이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 때 다윗이 사용한 것이 무엇입니까? 다윗의 물맷돌(삼상17:40)입니다. 보잘것없는 것 같습니다. 조롱받는 것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물맷돌이 하나님이 손에 붙들리니까 골리앗을 넘어뜨립니다. 장정만 5천명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 때 예수님을 보십시오. 겨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5천명을 넉넉히 먹이시고 12바구니를 거두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보며 절망하지 말고 남아 있는 것 하나님 손에 붙들림 받아 희망을 가지고 일어나야 합니다. 남아 있는 것이 희망의 씨앗입니다.
일본에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이 심했던 한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18세 때, 그녀는 어머니를 잃고 사는 것에 회의를 느껴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 4지 중에 손가락 3개만 붙은 오른팔만 남게 되었습니다. 손발이 없었고, 살 기력과 희망도 없었던 그녀는 극도의 절망감에 빠져 수면제를 모으며 완벽한 자살을 준비했습니다. 어느 날, 타하라 아키토시란 한 신학생의 병원전도를 받고 성경을 읽다가 이런 말씀을 봤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 말씀을 보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오른팔에 손가락이 무려 3개나 붙은 사실이 감격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점차 그녀의 내면은 아름다워졌고 그 아름다움에 반해 한 남자가 청혼했습니다. 바로 그녀를 전도했던 타하라였습니다. 결국 둘은 가정을 이루고 두 딸을 낳고 지금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녀가 바로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는 책의 저자 다하라 요네꼬입니다. 그 책에 있는 '감자와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녀가 음식 준비를 위해 감자 껍질을 벗기려는데 손가락 세개만 남은 오른팔을 비웃듯 감자가 손을 벗어났습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식칼을 들고 감자를 따라다녔지만 감자의 비웃음은 계속되었습니다. 무서운 절망감 때문에 그녀는 식칼로 자신을 찌르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습니다. 그때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도 남편과 자녀를 주신 사랑의 하나님! 사랑하는 남편과 자녀를 위해 감자 요리를 하게 도와주세요." 곧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감자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식칼로 반을 잘랐습니다. 그때부터 감자는 순한 양처럼 얌전히 한 곳에 정지된 채 있었습니다. 그 감자껍질을 위부터 살살 벗겨 맛있는 감자요리를 해서 그날 식탁은 더욱 풍성한 식탁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지금도 요리, 청소 등 거의 모든 살림을 혼자 하면서 절망한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의 몸을 보여주며 말합니다. "힘내세요. 하나님은 나 같은 장애인도 사랑합니다. 당신이 귀한 것을 잃었겠지만 그래도 남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 자신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살면 삶은 여전히 황홀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기대되는 것이 없다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절망의 터널을 빠져나오게 하는 하나님이 사용하는 희망의 씨앗입니다. 이것은 마중물과 같은 것입니다. 펌프 사용할 때 한 바가지의 물을 펌프에 붓고 저으면 많은 물이 나옵니다. 씨감자와 같은 것이고 씨앗과 같은 것입니다. 꽃은 아무리 작은 꽃일지라도 초라하지 않습니다. 씨앗은 아무리 못생긴 씨앗도 생명만 있다면 아름다움 꽃을 피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내게 있는 것 부끄럽거나 초라하게 보며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하다고, 못생겼다고, 키가 작다고, 학벌 없다고, 나이 들었다고, 병들었다고, 인기 없다고, 능력 없다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빈그릇이라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빈 그릇이라도 준비되어 있으면 언젠가 채워질 날이 있습니다. 올해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고 열리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올해 꽃이 피지 않았다고 내년에 피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으로 시작하여 절망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3. 우리는 믿음과 순종으로 절망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사람이 절망하는 이유는 그 문제를 풀 방법이 없기 때문에 절망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할 아무런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며 절망하며 포기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를 보십시오. 기름 한 병밖에 없다고 절망하는 그녀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왕하4:3)”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는 것입니다. 조금 빌리지 말고 많이 빌리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빌리라는 것입니다. 이것 말이 됩니까? 지금 뭐하자는 것입니까? 동네 사람들에게 조롱받고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남편 죽고 빚쟁이 되었더니 결국 미쳤구먼?”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만큼 큰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릇의 수많큰 하나님이 채워줄 것을 믿고 많이 많이 빌리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문제시하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를 문제시하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문제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은혜가 부족하면 은혜를 받을 만한 그릇을 믿음으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능력이 부족하면 능력을 받을 만한 그릇을 믿음으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물질이 필요하면 물질을 받을 만한 그릇은 믿음으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이 필요하면 사람을 받을 만한 그릇을 믿음으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건강이 필요하면 건강을 받을 만한 그릇을 믿음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6절에 보십시오. 담을 그릇이 없을 때 기름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기름이 문제가 아니라 그릇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준비된 그릇만큼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물을 부어도 물은 그릇만큼 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망적인 순간이 올 때 믿음으로 그릇을 준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절망적인 순간이 올 때 왜 나만 이런 어려움을 당하냐고 믿음 다 팔아 먹고 불평과 원망을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도 절망에 처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고 가나안 땅에 갔는데 기근이 임하였습니다. 요셉도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여 갔는데 형제들에게 인신매매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여 갈리리 호수를 건너갔는데 풍랑을 만났습니다. 욥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는데 재산을 다 잃고 자식을 잃는 심각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순간에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이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에스더처럼, 느헤미야처럼, 더 큰 믿음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금세기 초 세계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있습니다. 그는 원래 첼로주자였는데 연주 중에는 악보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심한 근시였다고 합니다. 연주자로써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 때 그는 연주 때마다 악보를 다 외워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연주회를 앞두고 악단의 지휘자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였답니다. 그때 악보를 모두 외우고 있던 토스카니니가 선발되어 임시 지휘자가 되었답니다. 그릇을 준비한 것입니다. 이것을 계기로 그는 세계적인 지휘자가 된 것입니다. 토스카니니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어려울 때 힘이 되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해서 불평하지 말자. 좋은 환경만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아담은 에덴동산과 같은 좋은 환경에서도 타락하지 아니했는가. 눈물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리자. 눈물 있는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더 똑똑히 바라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힘이 되어주신다”.
이 여인은 그릇을 준비하는 엘리사의 말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을 했습니다. 믿음으로 그릇을 준비한 이 여인에게 또 엘리사는 무엇이라고 말합니다.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왕하4:4)”라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지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엘리야의 지시를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인이 물러가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그들은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왕하 4:5)” 엘리사의 말을 믿고 그대로 순종을 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반드시 따라야 할 것입니다. 순종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왕하4:6)” 순종이 기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니까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절망을 이기는 방법이 어떤 경우에도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기름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릇이 문제입니다. 기름은 그릇의 수에 따라 결정된 것입니다. 그릇을 준비하고 따르는 믿음과 순종이 문제인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면 믿음만큼 그릇은 채워집니다. 가나 혼인 잔치집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잔치 중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종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워 담으라고 합니다. 이성적으로 순종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종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그 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믿고 순종하면 마침내 어떻게 되었습니까? 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빚만 다 갚은 것이 아닙니다. 두 아들과 함께 생활할 만큼 풍요가 찾아 왔습니다. 절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경제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절망이 소망으로 변한 것입니다. 절망의 순간은 변장된 축복입니다. 절망의 순간은 믿음을 키우고 순종의 순도를 높이는 계기입니다. 욥은 인생의 절망적인 순간을 통과하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 23:10)”
예수 믿는 사람에게 절망적 순간은 절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한두 번 실패했다고 절망하며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망의 늪에서 과감하게 빠져나와야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성공에 가려 실패가 잘 보이지 않을 뿐이지 성공한 경우보다 실패한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다섯 살 때까지 말을 하지 못했으며, 여덟 살이 될 때까지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학교에서 퇴학당했고, 취리히 과학기술전문학교에 입학을 시도했으나 거부당했습니다. 월트 디즈니는 아이디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신문사 편집장에게 해고를 당했고, 디즈니랜드를 세우기 전에 여러 차례 파산을 경험했습니다. '전쟁과 평화'의 작가 레오 톨스토이는 대학생 시절에 성적 불량으로 퇴학을 당했고,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다섯 번이나 실패하였습니다. 농구 천재로 불리는 마이클 조던은 고등학교 팀에서 대학 입단 시험을 치렀을 때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고, 대학에서 보결선수로 뛰었습니다. 링컨은 사업가로서 2번 실패했으며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주 선거 및 전국 선거에서 6번이나 낙선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우상숭배자였으나 아브라함은 아버지의 늪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사기꾼이고 욕심쟁이였고 네 명의 부인을 둔 사람이었지만 요셉은 그 불행한 가족사에 함몰되지 않았습니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아버지는 매독에 걸렸고 어머니는 폐결핵으로 시름하였습니다. 아들이 넷이 있었는데 하나는 병으로 죽었고 나머지 셋은 결핵에 걸렸습니다. 이 때 임신한 아들이 베토벤입니다. 그는 17세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아직 어린 소년이 동생까지 부양해야 했던 사람입니다. 30세부터 음악가의 생명인 귀가 이상하기 시작하여 만년에는 완전히 듣지 못했습니다. 베토벤은 그 절망의 과정을 통해 신앙이 깊어졌습니다. 베토벤은 젊어서는 신앙이 없었으나 나이를 먹을수록 신앙의 깊은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주어진 환경과 과거의 경험은 태도만 바뀌면 절망의 독이 아니라 얼마든지 희망의 약으로 쓸 수가 있습니다. 시궁창에서도 꽃을 피는 것입니다.
순간 순간 다가오는 절망의 늪을 어떻게 탈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만나 절망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으로 시작하여 절망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순종으로 절망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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