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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blog.daum.net/yhwhroi/168861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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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이 불교인들보다 독선이 강한가?-
임헌준(예은교회 목사, Ph.D)
기독교가 불교보다 훨씬 더 열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종종 기독교인들이 불교인들보다 더 배타적이고 독선이 강한 것으로 비쳐진다. 그 까닭은 대체로 기독교인들이 불교인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더 적극적으로 전도하는 것을 그릇 이해한 데서 오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해탈 성불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전도(포교)를 하지 않는 편이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아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전도한다. 이를 두고 기독교인들이 배타적이라거나 독선이 강하다는 하는 것이다.
1. 기독교의 전도(傳道)
(1) 전도의 의미
전도는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가고 있는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전도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살펴보자.
(1)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하셨다. 또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고 하셨다. 전도는 이러한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2) 전도는 자신의 구원을 밖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성경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롬 10:13)고 말씀한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영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특별한 경지에 오른 일부 소수의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하고, 믿음으로 영접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 확신하며 이를 전하고 증거하는 것이다.
(3) 전도는 이웃 사랑의 실천이다.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고 가르친다(요 3:16; 롬 5:8).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로운 자가 되었다”(롬 3:23-24)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이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히 9:22).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생명의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다”(요 14:6).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죄에서 해방되어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저주와 멸망의 길을 가던 내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전도는 이 구원의 은총, 기쁨을 나 혼자서만 간직하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하려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
기독교인이 적극적으로 전도하는 것은 성경 말씀에 충실한 것이고,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도리이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2) 전도와 종교 간의 마찰
혹자는 기독교인들의 적극적인 전도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종교 간에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염려(?)한다. 그러나 이는 하늘이 무너질까 염려하여 잠 못 이루는 것과 같은 기우에 불과하다. 전도의 시작은 전도하고자 하는 대상자와 먼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이다. 전도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종교분쟁이 야기될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전도를 하다보면 소원하던 관계에서 친밀한 관계로 바뀌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종교 간의 분쟁은 지나친 전도로부터 비롯된다기보다는 소아적인 이기주의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한국 기독교인들의 전도 방법이 모두 다 옳다는 것은 아니다. 가끔 지하철에서 전도하다가 승객들과 다투는 것을 보기도 하는데, 그들의 전도하고자 하는 열정은 이해하지만 방법적인 면에서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도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혐오감을 조성하는 언행은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복음을 전한다기보다 오히려 복음의 빛을 가리는 역효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것이 효과적인 전도 방법일까? 다양한 방안이 제시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전문적으로 조명하는 서적이나 세미나 등이 많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2. 불교의 포교(布敎)
(1) 불교는 타종교에 대해 포용적인가?
불교에서는 ‘전도’라는 용어보다 ‘포교(布敎)’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우리 나라 불교인들은 대체적으로 기독교인들처럼 적극적으로 전도(포교)를 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불교인들이 타종교에 대해 포용적이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불교인들 가운데 ‘불교나 기독교, 모든 종교가 서로 가는 길만 다를 뿐 궁극적으로는 같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비록 말은 그렇게 할지라도, 실제로는 기독교나 다른 종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지향점과 불교에서 추구하는 성불이 같은 것이라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의 가르침에도 해탈(解脫) 성불(成佛)의 길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불타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여 깨달음을 이루어야만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불타의 가르침만이 성불의 길이라는 것이다. 불교가 최고의 길이고, 다른 것들은 그보다 차원이 낮은 것이라고 본다. 불교는 타종교에 대해 결코 포용적이지 않다.
(2) 불교신자가 적극적으로 포교하지 않는 이유
① 해탈 성불에 대한 확신 결여
불교가 최고, 최선의 진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불교인들이 적극적으로 포교를 하지 않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대부분의 불교신자들에게 해탈 성불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해탈 성불의 확신이 없는 불교신자를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부류는 해탈 성불을 추구하되 해탈 성불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불교를 믿는 자신이나 비불교인이나 해탈 성불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점에서는 매 한 가지이다. 불교 승려들 중에서도 해탈 성불의 확신이 없는 이들의 경우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수행을 한다고 해보지만 성불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보니 적극적으로 포교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두 번째 부류는 해탈 성불보다 현실세계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 지향점이 성불이지만, 성불의 길이 너무 멀고 높다보니 많은 불교신자들이 성불보다는 현실세계에서의 평안과 행복을 얻는 데 신앙생활의 목적을 둔다. 그들은 이 땅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종교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은 기독교나 다른 종교도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가르치는 길 가운데 하나이며, 그런 의미에서 불교나 기독교나 다 같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종교라는 이름의 여러 길 가운데 자기에게 맞는 길을 찾아 신앙생활을 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내 종교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생각하는 불교신자가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를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전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이렇게 현실세계에 기초하고 있는 다원주의적 사상은 불교의 틀을 벗어난 것이다. 특히 당시의 기성 사상계를 비판하면서 독자적인 가르침을 펼치고 불교교단을 일으킨 고타마 싯다르타의 가르침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② 불교 가르침에 대한 이해 부족
한국 불교인들이 적극적으로 포교하지 않는 큰 이유 가운데 또 하나는 많은 불교신자들이 불교 경전의 내용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불교신자 가운데 근본불교(원시불교)로부터 대승불교의 가르침까지 그 내용을 개괄적으로나마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전체 불교신자 중에서 극히 작은 비율일 것이다. 이런 현실이다 보니 불교신자 가운데 많은 이들이 불교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진리를 찾아가기보다는 복을 빌기 위해 일 년에 몇 차례씩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것으로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어떻게 적극적인 포교 행위가 나올 수 있겠는가?
3. 맺는 말
불교인들이 현실적으로 포교에 덜 적극적인 이유는 불교의 포용성이나 승려들의 포용적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성불에 대한 자신감 결여와 불교 가르침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교인들이 기독교인들처럼 열정을 갖고 적극적으로 포교하지 않는 근본적인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인들이 기독교를 존중하거나, 기독교가 궁극적으로는 불교와 같은 길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의 적극적인 전도 자세를 두고 기독교인들이 불교인들보다 독선이 강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다. 전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기독교인들은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되, 효과적인 전도 방안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 글의 출전
임헌준, 『아는 만큼 보인다』(서울: 쿰란출판사, 2005), pp. 9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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