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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학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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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임영수 목사 |
참고 : | 영락교회 |
거룩한 중심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에 개입하실 때 거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ㅇ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인간 역사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ㅇ 말씀은 일정한 때와 상황 안으로 들어 오십니다.
ㅇ 말씀이 한 개인 또는 공동체에 들려집니다.
ㅇ 들려진 말씀은 구체적인 사건을 만듭니다.
주전 520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 이년 여섯째 달, 그 달 초하루에 예언자 학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학개라는 사람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후 가장 먼저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가 예언자로 활동하게 된 것은 그 개인의 신념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 학개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언 활동을 하던 시대적 상황은 새로운 국제 정치 질서로 나라를 잃은 유다 백성에게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희망의 지평이 열렸던 시기였습니다.
유다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던 바벨론 제국은 페르시아왕 고레스에 의해 대 제국의 운명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주전 537년 경이었습니다. 바벨론을 점령한 고레스 왕은 조서를 내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고레스는 정복된 주변 국가들에게 자치제를 허락하여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주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였던 유다인들도 고레스왕의 그러한 정책에 의해 본국으로 귀환해서 성전을 건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다인들은 주전 536년경에 성전 기초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사마리아인들과 주변 민족들은 성전 완성이 지니는 정치적, 종교적 의미를 두려워하여 적극적으로 그 계획에 훼방을 놓았습니다.
고레스 왕 당시에는 그들의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다가 고레스 다음 캄비세스에 시작해서 스메르디스에게 와서 성곽 재건 공사를 진행시키지 못하게 하는 칙령을 받아 내게 되었습니다. 그후 성전 재건 공사는 14년 동안 중단 상태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후 새로 왕위에 오른 다리우스 1세는 그가 통치하는 제국내의 종교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의 재위 2년 주전520년에 학개가 예언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개는 성전공사의 지연이 대적자들 보다는 유대인 스스로의 태만과 직무유기 때문임을 지적하였습니다.
그 당시 포로 생활로부터 귀환한 유다인들의 생활상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들의 지도자 스룹 바벨과 여호수아 만이 그래도 제대로 된 집에서 살았고, 나머지 유다인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본문 10-11에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산위에도, 곡물과 새포도주 위에도, 사람과 짐승위에도 한재(가뭄)가 들었다."고 했습니다. 가뭄으로 인해 경작하는 일과 가축 사육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극도의 굶주림 가운데서 고통하게 되었습니다.
예언자 학개는 그렇게 그들의 생활이 피폐하게 된 근본 원인이 성전 건축 중단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속히 성전 재건 공사를 시작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8절에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하였습니다.
표면적으로 생각하면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서 곤궁과 핍절 가운데서 살게된 것이 성전을 짓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기 때문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유다 백성이 어렵게 된 것은 아닙니다.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성전 건축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7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포로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다 백성에게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는 일은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적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과 함께 그들 선조에게 약속한 내용을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그러한 약속 보다는 오히려 변방에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 민족의 훼방을 더욱 크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훼방에 유다 백성은 의기소침해지고,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있는 그들의 새로운 미래를 생각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언자 학개는 그러한 뜻에서 성전 재건을 재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백성은 그 약속하신 분을 믿고 그 약속의 내용대로 모험을 해 가지 않으면 그들의 현실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그들이 원하는 현실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들의 현실은 황폐한 예루살렘 그대로 남아있게 됩니다. 유다 백성의 번영은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 가운데 있습니다.
한편 오랜 포로 생활을 한 유다 백성에게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재건할 물질적 재원도 없었고, 비전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재건을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이 폐허가 되어 있는 유다백성 자신을 재건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습니다. 유다 백성을 일으켜 세우는 데는 먼저 그들에게 그들의 삶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거룩한 중심이 있어야 하였습니다. 그 거룩한 중심은 피폐해진 유다 백성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이 세워질 때 그곳으로부터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확인하게 되고, 그 약속 가운데 있는 희망의 시간을 내다보게 되고, 약속을 성취해 갈 수 있는 힘을 부여받게 됩니다.
예언자 에스겔이 본 환상의 내용과 같이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마른 뼈들에게 힘줄이 생기고, 살이 입혀지고, 살갗으로 덮히고, 그것들에 생기가 들어가서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통해서 이루어 집니다.(겔37:4~6)
예언자 학개가 본 유다 백성의 모습은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마른 뼈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폐허의 땅을 옥토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매마른 폐허의 땅에는 그 어떤 것도 생산해 낼 수 있는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예언자 학개는 거룩한 중심이 세워지지 않으므로 인해 그 결과로 나타난 유다 백성의 현실의 비참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성전이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지금 너희만
잘 꾸민 집에 살고 있을 때란 말이냐?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살아온 지난 날을
곰곰히 돌이켜 보아라.
너희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했으며,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품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난 주머니에 돈을 넣음이 되었다."(4-6)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너희는 먼저 그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입니다.
본문 7-8절의 내용을 의역한다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지금까지의 너희의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보아라. 왜 너희는 너희에게 허락된 축복의 약속을 포기하느냐?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너희가 새로운 영광의 날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 삶의 중점을 바르게 잡는 일입니다. 중점을 바르게 잡는 일은 천막을 치는 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큰 대형 천막을 세울려고 할 때 먼저 중심의 핀을 세우고 나서 가장자리의 핀들을 꽂아야합니다. 중심의 핀을 세우지 않고 가장자리의 핀을 꽂게 될 때 그 천막을 세울 수 없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인간의 삶에서 중점을 잘못 잡으면 모든 삶 전체가 잘못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바른 중점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한 나라에서 중점을 나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정당에 두게 되면, 모든 것이 잘못되어 버린다. 한 국민이 서로 싸우는 계급, 서로 대립하는 사회 계층으로 보이는 한, 그 나라는 참된 의미에서 번영할 수는 없다. 나라의 일부 사람들의 이익만을 증대시키려는 정당이 있는 한 , 그 일부의 사람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좋은 정치는 바랄 수가 없게 된다.
정치가 특권 계급의 특권 유지만을 겨냥한다든가, 사회의 밑바닥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서만 움직이게 된다든가 하면, 어느 경우에든, 그러한 움직임은 좋은 정치라고는 말할 수가 없다. 좋은 정치는 중점이 부분이 아니라 전체에 놓였을 때에만 비로소 운영될 수 있다.
가정에서 중점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에 놓이게 되면, 모든 일은 잘못되어 버리고 만다. 가정이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해서 생각하게 되고 이만한 수입이 있으면 이만한 것을 살 수가 있다거나 좀더 수입이 있으면 좀더 향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가정에는 반드시 문제가 일어날 것임이 틀림없다.
먼 옛날 히브리의 어진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언 15:17) 가정을 만들고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사랑임을 잊을 때, 그 가정은 위험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에서의 중점이 봉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놓이게 될 때, 모든 것이 잘못되어 버리게 된다. 자기가 바라는 자리를 얻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또는 교회의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되었으므로, 현재의 임무를 벗게 해 달라는 경우가 흔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교회를 손상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훼손시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상처입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상처나게 하는 사람이다. 결국 그러한 사람은 패배자로서 마칠 수 밖에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금년으로 우리가 8. 15을 맞이 한지 쉰여섯번 째 해가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역사의 변천을 거쳐왔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를 경험해왔습니다. 지금의 시점에서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들을 우리들 끼리 싸우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시켜왔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역시 그러한 삶의 형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에 와서는 진보와 보수의 대결로 그 양상이 점점 축약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의 갈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길은 중점을 바르게 잡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중점을 "그 나라와 그 의에 두어야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모두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점에서 어느 지역의 승리로, 어느 정당의 승리로는 우리가 바라는 희망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향한 생각은 심판과 저주가 아닙니다. 희망과 평강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거부하면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약속된 미래를 현실적 사건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중점을 바르게 잡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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