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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blog.daum.net/yhwhroi/168861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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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준(예은교회 목사, Ph.D)
1. 시작하는 말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다. 개인의 생각이나 행위는 그 개인 한 사람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나의 선한 생각이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기도 하고, 반대로 나의 그릇된 생각이나 행위가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불교를 비롯한 종교 경전들에서는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거나 불행하게 되지 않고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인간관계에 관한 여러 가지 실천 덕목들을 제시한다. 그 가운데 기독교의 제일 항목은 ‘사랑’이고, 불교의 제일 항목은 ‘자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기독교의 '사랑'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그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냐고 질문하는 율법사에게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레 19:18)는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2:35-40).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일 4:19).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요 3:16; 요일 4:9).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요일 4:10).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인간이 응답하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내신 사랑을 본받아서 인간관계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15:12)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가르치셨고, 몸소 실천을 통하여 사랑을 보여주셨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고(마 5:44),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으며(눅 23:34),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자 생명까지도 주셨다(고전 15:3; 사 53:6).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와 같은 다른 이를 위한 희생적인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이웃 사랑의 모범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이다(창 1:27).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이기적인 욕망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희생적 사랑을 본받아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이웃’이 누구인가? 이웃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지만, 특별히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 질문하는 율법교사에게 강도 만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너도 가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 만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권고하신다(눅 10:29-37).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서 주님은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를 자신과 동일시하신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고(40절),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주님께 하지 아니한 것이다(45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요일 4:21).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보지 못 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요일 4:20). 사랑은“율법의 완성”(롬 13:10)이며, 영원불멸의 진리이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3. 불교의 '자비'
‘자비(慈悲)’라는 말에서 ‘자(慈)’는 ‘불쌍히 여기다’는 뜻의 범어 ‘마이트리’(maitri)에서 온 것으로 ‘온갖 생명체를 사랑하여 애지중지하며 즐거움을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비(悲)’는 ‘동정, 공감, 함께 슬퍼하다’는 뜻을 지닌 범어 ‘카루나’(karuna)에서 온 것으로 ‘온갖 생명체를 불쌍히 여겨 괴로움을 없애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불교 경전에서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자(慈)이고, 불행을 없애주는 것을 비(悲)라고 말하지만, 자와 비는 거의 같은 심정을 나타내며 마이트리 또는 카루나가 ‘자비’로 번역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슬픔을 함께 나누는 감정을 통하여 모든 생명 있는 자 위에 확대하여 가는 자비는 불교에서 보편적인 사랑의 근본 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자비는 다른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사는 이 세상에서 인간 관계에 대한 불교의 실천 원리로 강조된다. “비천한 짓을 해서 지혜 있는 자의 비난을 받지 말고, 오직 자비만을 닦으라.... 마치 어머니가 그의 외아들을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 같이 살아 있는 모든 것 위에 한량없는 자비의 마음을 내어라.... 서 있거나 걸을 때나 앉아있거나 누워서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의 마음을 굳게 지녀라”(小部經典, 經集 1, 8. 慈經).
나에게 나 자신이 가장 사랑스럽고 귀한 존재이듯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 자신이 가장 사랑스럽고 귀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해롭게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생각은 어디에나 갈 수 있다. 그러나 어디에 간다해도 자기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찾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사랑스럽다. 그러므로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相應部經典 3, 8 末利).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불교에서는 종종 동체자비(同體慈悲)라는 말을 쓴다. 다른 사람을 나 자신으로 여기고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화엄경에서 말하는 사종법계(四種法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화엄경의 우주관에서는 현상과 본체와의 상관관계를 사법계(事法界), 이법계(理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등 4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사법계는 모든 차별 있는 세계, 곧 현상계를 가리키고, 이법계는 우주의 본체로서 평등한 세계를 가리킨다. 이사무애법계는 이(理)와 사(事), 즉 본체계와 현상계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걸림 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음을 말한다. 사사무애법계는 현상계의 각 사물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걸림 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음을 말한다. “모든 사물에는 개체가 있고, 또 작용이 있으며 제각기 연기(緣起)하여 자기의 자성(自性)을 지니고 있지만, 사(事)와 사(事)를 서로 상대시켜 보면 다연(多緣)이 서로 상응하여 일연(一緣)을 이루고 있으며 또 一緣은 널리 두루 多緣을 도와서 서로 그 역용(力用)이 교류하게 되고, 사사무애(事事無碍)하고 중중무진(重重無盡)이 된다”는 것이다.
사사무애법계의 관점에서 보면, ‘나’와 ‘너’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관계가 성립된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이다. 나와 너가 한몸(동체)이다. 인간관계에서 이러한 이치를 깨닫고, 나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 듯이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동체자비이다.
4. 맺는 말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간관계에서 사랑과 자비는 행복한 세상을 이루기 위한 대강령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전개된다. 그에 비해 불교의 자비는 현실세계의 인간관계에 대한 관조(觀照)로부터 출발하여 이웃에 대한 자비로 전개된다. 사랑과 자비는 이렇게 출발점이 다른 만큼 그 지향점도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둘은 인간이 다른 사람의 삶을 도외시하고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공통된 주제를 지니고 있다. 이 사랑과 자비의 동심원을 가족관계에서 이웃으로, 사회로 확대시켜 나갈 때 이 세상은 보다 행복하고 아름답게 될 것이다.
*이 글의 출전
임헌준, 『아는 만큼 보인다』(서울: 쿰란출판사, 2005), pp. 159-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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