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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너희는

출애굽기 임보라 목사............... 조회 수 2787 추천 수 0 2012.12.01 23:22:36
.........
성경본문 : 출1:15-18 
설교자 : 임보라 목사 
참고 : 향린교회 http://www.hyanglin.org/ 

출1장 15-18; 막2장 1-12 

어찌하여 너희는

 
[기독교의 이중의식 1-한국찬송가공회]


많은 분들이 가사만 들어도 멜로디를 떠올릴 수 있는 찬송이 있습니다. “일곱 번씩 일곱 번 넘어져도 약속을 굳게 믿으며”만들어진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가는 “희년을 향한 우리의 행진”이라는 찬송 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매 주일 쓰고 있는 21세기 찬송가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찬송가를 새로 발간할 때, 한국인들이 만든 찬송을 많이 넣겠다고 했고, 그 결과, 실제로 한국인이 만든 새 노래들이 120여곡이나 수록되었습니다. 하지만, 희년의 해로 선포했던 1995년을 앞두고 역사의 현장에서 드려진 신앙 고백으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애창했던 이 찬송은 물론이요, 그 외 많은 찬송들이 편집인들의 기호에 따라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습니다. 대신, 당시 찬송가 편집 회장들이 각기 가사를 쓴 노래는 새로운 곡이라는 명목으로 수록되었습니다.

 

가만히 들추어서 실 끝을 잡고 살살 끌어 당기다보면, 뒷면에 얽히고설켜 있는 것들이 줄 지어 나옵니다. 권력, 이권개입, 야합, 편협, 독선, 배타, 파당 기타 등등. 한 단어씩 돌아가면서 대어 봅시다! 하고 여기 있는 사람들끼리만 시작해도 몇 바퀴는 족히 돌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 해, 4월 말, 하늘뜻 펴기를 한 이후, 1년 2개월 만에 강단에 서면서, 새삼 이 찬송 이야기를 들먹이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는, 희년을 향한 우리의 행진 가사를 ‘세 번씩, 세 번을 넘어져도 약속을 굳게 믿으며’ 라고 바꿔 불러보면서 여러분과 새롭게 목회에 임하는 각오를 나누기 위해서 이고, 또 다른 하나는, 빙산의 일각 이지만, 상당한 큰 이권이 개입되어 있는 찬송가 편찬 과정 만 봐도 알 수 있는, 권력화되어 오만하기 그지없는 기독교의 이중성을 되짚어 보기 위함입니다.


[안식년 후, 새 임기를 맞으며]


한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라 할지라도 한 주 휴가내기 조차 쉽지 않은 현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물며 부목사로 하여금, 일 년 동안 쉬도록 하면서, 생활을 책임을 져주는 교회를 남한에서 찾는 일은 어렵습니다. 물론 다양한 이유로 사회적 지탄을 받는 대형교회들이 그들만의 교리를 확대 재생산하고,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목사에게도 맞춤형 안식년, 보장성 유학을 제공한다고 들은 적은 있지만, 6년 동안의 목회를 통해 부족하다고 여겼던 것,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있도록 개방형 1년 안식년을 제공하는 경우는 제가 아는 한 거의 없습니다.


그렇게 배려해주신 덕에, 지난 번 전교인수련회 때 장장 한 시간에 걸쳐 사진과 동영상을 통해 보고한 것과 같이, 더 배우고, 더 경험하고, 더 만나보고 싶어서 목말라 했던 갈증들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공사다망(公私多忙)”이라는 말이 있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마음이 생각할 여유가 점점 없어져만 가던 ‘망(忙,바쁠 망)의 6년’을 보낸 후 얻게 된 ‘1년’이라는 긴 쉼표는 정말 빨리도, 그리고 너무도 달콤한 맛을 남기고 지나갔습니다. 전혀 낯선 환경은 아니지만, 둥지를 틀고 거주하기 위해, 제 나라가 아닌 곳에서 빠듯한 살림을 살아내고, 다양한 언어, 문화, 습관 등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느라, 간간히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하느님의 이끄심을 체험하는 여정이었노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 있어서 ‘3’이란 숫자가 완성과 완전함을 의미하듯, 3년 임기를 세 번째 시작하는 발걸음을 떼었으니, 굳게 손잡아 주심으로 용기도 불어 넣어주시고, 넘어지려할 땐 부축도 해주시고, 소심하게 잰 걸음으로만 가려할 땐, 크게 내딛도록 등도 힘껏 밀어내주십시오. 더불어 목사를 하나의 완벽한 완성품으로 보는 환상은 깨시고, 향린 울타리에서 괜찮은 작품 하나 빚어간다, 여기시고 그 창조적 행위에 보다 적극적으로 함께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저대로, 앞으로 주어진 시간을 부족한 것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기회 알고, 채워 가겠습니다.


짧다고 해도, 지난 1년, 하루하루를 지내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했겠습니까? 두루두루 다짐한 것도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생각들과 다짐한 것들을 차곡차곡 챙겨 담아온 마음 보따리, 보기만 해도 혼자 흐뭇해지는 지난 1년의 흔적들이 가득 담긴 자료 상자, 입만 열면 그 소리한다 할까싶어 아껴두고 있어서 그렇지 얼마나 할 얘기도 많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이것을 미처 풀기도 전에, 바로 광야로 끌려나와 있는 느낌입니다. 한숨 돌릴 새도 없이 광야의 훈련은 계속 되어야 한다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각오를 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각오를 단단하게 하고 있다고 해도, 한 입에 잡아먹기 위해 기회를 노리며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찬 채, 무례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혀를 낼름거리며 다가오는 실체를 맞닥뜨리면 저도 모르는 새 움찔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기독교를 앞세우고, 신앙을 앞세워 전투할 태세로 달려들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기독교의 이중의식 2-붉은 악마와 천사 응원단]


제가 당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일단 다음 기회로 미뤄두고, 한 기독교단체에서 유포하고 있는 광고 이야기로 옮겨 가겠습니다. 어제밤, 월드컵 경기를 보시느라 늦게까지 못주무신 분들이 많을 텐데요. 이 월드컵과 관련해서 한 기독교 단체가 “전국교회에 부탁드립니다!” 라는 제목으로 도처에 광고를 뿌렸습니다.


어제 오늘 있었던 내용은 아니지만, 붉은 악마로 대변되는 월드컵 응원문화를 기독교식으로 대치하기 해야 하니, ‘천사응원단’이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월드컵 응원 장소로 제공하자는 운동입니다. 평소 꼭꼭 닫아 놓았던 교회 문을 지역사회를 위해 활짝 여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붉은 악마를 악마문화숭배로 규정하고, 이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제2의 신사참배'가 될 것이라는 둥, 이런 영적타락현상에 교회가 회개를 해야 하고, ‘기독교식’으로 응원을 해야 하니, 이를 위해 이번 주일에는 ‘월드컵 응원문화’에 대한 설교를 해야 한다는 목회지침까지 인터넷 게시판, 이멜 등으로 대량 유포하는 것을 보며 헛헛함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낸 문구들은 하나하나 반박할 수 있는 내용 입니다. 너무 허술하기 그지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기독교적 관점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면, 순수한 응원 열기를 이용해 잇권과 자본, 그리고 정치적 의도가 결탁되어 있는 것에 정면도전 해야 마땅 할텐데, 이권과 자본 앞에서는 할 말이 없는 기독교인지라, 그것을 파헤치기에는 역부족이었겠지요.


[생명을 택하라!]


오늘 함께 읽은 제1성서, 제2성서의 말씀은, 여러분이 익히 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내용을 떠올리면서 머리 속에 한번 그려 보십시오.


장면 1입니다.


배고픈 사회의 하류 계층을 지칭하는 하비루(habiru), 아피루('pr)와 동의어인 히브리('ibri). 이들은 억압을 받아도 번성해갔다고 성서는 적고 있고, 그것이 두려워 지배자들은, 그들의 삶을 더욱 쓰디쓰게 만들기 위해서, 아니 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 착취를 위해서 히브리인들을 쥐어짜댑니다. 이집트 탈출 사건을 실제적인 연도를 따져가며 재구성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만, 이집트 탈출 전의 혹독한 고난의 시기는, 전쟁을 준비하는 출정기지로 만들기 위해 한창 대규모 건축 사업을 벌였던 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종족적 개념이 아닌 사회 계층적 개념으로서의 히브리, 다시 말해 법망을 피해 다니며 살아야 했던 이들, 포로민, 노예 등등 사회의 주변에서 뿌리 박지 못하고, 떠돌아 다녀야 했던, 몸 밖에 가진 것이 없던 그들에게 영아학살명령이 내려집니다.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했고, 한손이라도 더 필요한 때에 장차 노동력을 제공해 줄 아이를 낳자마자 죽이라는 명령은 일면 모순이 있기는 하지만, 싹부터 잘라내야 한다는 혹독한 분위기를 대변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장면 2는,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한 병자에게 ‘죄를 받았다’고 선언하는 예수가 등장합니다. 중풍병자는 아프기도 했지만, 가난하기도 했습니다. ‘요’라고 번역된 말은, ‘가난한 사람의 침대/잠자리’를 의미하는 단어(krabattos)로 씌여져 있습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서러움을 당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닌데, 이제는 병자가 되었고, 종교적, 사회적으로는 죄인이라고 낙인까지 찍혔습니다. 그런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에게 공동체 안으로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예수가 열어주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의 질문입니다. 원래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대놓고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속으로’ 했잖아요. 이게 어떤 상황인지, 우리도 잘 알잖습니까? 경험이 많으니까요. ‘아유..저 사람 왜 저래?’ ‘무슨 말을 저렇게 해?’ ‘에그머니나, 위험한 사람 같으니라구’ ‘지가 잘난 줄 알어...쯧쯧’ ‘저런 빨갱이를 경찰은 안 잡아 가고 뭐하나’ 등등.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오만가지 생각과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죠. 들릴 일 없이 속으로 하는 말이니 별별 말을 다 하고 있는 와중에 율법학자들의 생각은 ‘하느님을 모독 한다’로 까지 이어졌습니다.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무식쟁이, 시골뜨기가 했다며,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을 뇌까린 것이지요. 신성모독죄는 레위기 24장을 참조해 볼 때, 사형감입니다. 온 공동체가 돌을 던져서 죽여도 된다는 정당성이 부여될 정도의 중죄입니다. 속으로 말입니다, 신성모독죄을 운운하며 정죄를 해대고 있는데, 갑자기 예수께서 정곡을 찌르셨습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순간 얼마나 화들짝 놀랐을까요? 소름이 쫙 돋지 않았을까요? 못들을 줄 알고 한 말을, 소리 내어 되받아치니, 기절하기 직전이었을 것입니다.


신성모독죄라는 올가미에 씌울 것이 뻔한데도, ‘용서의 선언’을 멈추지 않은 것은 마르코 1장의 표현대로 ‘측은히 여기는 마음’ 때문 이었습니다. 이 측은함에는, ‘분노’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대체 누가 누구를 죄인으로 낙인찍고 추방한다는 말인가? 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는 ‘측은한 마음’이, 자기 죄는 볼 줄 모르면서, 죄인, 죄인하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손가락질 해대는 사람에게는 ‘분노’가 불이 일듯이 일어난 것입니다.


다시 장면 1로 되돌아 가 봅니다.


이미 짓밟히고 또 짓밟힌 이들을 죽이지 못해 안달인 자가 내린 명령을, 당시 누구에게서나 존경을 받았던 산파들이 어겼습니다. 생명의 길을 터주는 산파들에게 생명을 죽이라는 명령을 했으니, 상대를 잘못 선택한, 애초에 실패가 예견되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와 권력에 기대어 자신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먹힐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우스운 명령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생명을 짓밟아 버리라는데 왜 내 말대로 하지 않느냐며 윽박지릅니다.


장면 2입니다. 한 사람이 그대로 죽게 생겼는데, 이를 보다 못한 친구이 지붕을 들어내고 병자인 친구를 내려 놓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정성과 간절함에 공감한 예수가 합세해 중풍병자를 옭아매는 죽음의 사슬을 끊습니다. 아픈 것만으로도 서러운데, ‘죄인’이라는 딱지까지 붙여 생명을 거스르는 행위는 온당치 못하다, 그래서 ‘용서’의 선언을 한 것인데, 또 ‘정죄’를 하다니, 대체 뭐가 잘못되고, 뭐가 못마땅한 것이냐?고 정곡을 찌릅니다.


파 라 오의 ‘어찌하여 이런 짓을 하였느냐?’ 라는 질문, 그리고 예수가 물은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여러분은 이 질문의 의도가 각기 어디에 있는지 이미 눈치 채셨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음에도 도착하기 전에 이미 출산해 버린다며 기지를 발휘한 산파들. 엄청난 죄목을 덧씌우는데도 전혀 흔들림 없이 ‘용서’를 선언하는 예수. 권력을 휘둘러대는 파 라오, 꼬투리 잡을 만한 것이 없는지 찾느라 눈이 벌게져 가는 율법학자.

이제 장면 1,2의 등장인물 사이에 선이 확실히 그어졌습니다. 누가 생명을 선택했는지 말입니다.


[자기성찰과 소통/기독교의 이중의식 3-6.25전쟁 60년 평화기도회]

 

이미 성인이 된 사람들을 어떻게 교육할지 그 방법론과 내용을 고민하는 성인 교육학을 공부하면서, 평생을 노조 조합원 교육에 바쳐 온 마이클 뉴먼이 쓴, “저항을 가르쳐라”라는 책과 캐더린 슐레 교수가 쓴 “사회변혁을 위한 교육”이라는 논문을 비교 분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두 분 모두 ‘페다고지’를 쓴 프레이리를 따르는 민중교육자입니다.


이때 제가 관심했던 주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중 의식]이었습니다. 원래 [이중의식]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동시에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는 탈식민주의론에서 발전된 개념입니다. 지배문화에 속한 이들은 피지배자들의 존재를 인식하기 어렵고, 피지배자들은 지배자들의 언어, 생각, 정체성, 가치를 수용하여 억압을 자기 안에 내면화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중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우리 안에 혼재되어 있습니다. 지배자, 피지배자가 딱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피지배자로서 억압을 당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지배자가 되어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이 혼란의 시대에서 ‘자기성찰’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두 분 모두 강조 합니다. ‘자기 성찰’은 바른 선택을 통해 올바른 실천을 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굳이 기독교식으로 표현하자면, ‘기도’,‘묵상’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지배자들은 자신들로 인해 억압당하는 피지배자가 있다는 것을 자기 성찰 과정을 통해 인식해야 하고, 억압당하는 자들은, 혹시라도 내 안에 내면화되어 있을 수 있는 지배자들의 언어, 가치 등등을 자기 성찰을 통해 걸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한, 내 안으로부터의 자기성찰을 거쳐, 평등하지 않고 정의롭지 못한 이 지배 시스템을 감지할 수 있도록, 저항할 줄 알게 하는 ‘교육’ 그리고 대화를 통한 ‘소통’, 이 두 가지가 우리들의 이중의식을 극복하도록 이끌어 주는 열쇠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하늘뜻펴기에도 언급 되었지만, [6.25전쟁 60년 평화기도회]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남한의 주류 기독인들 덕에 평화의 사도로 탈바꿈한 부시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소개 되었습니다. “매일 아침 찬양과 기도하고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이고, “재임 기간 중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중대결정을 내리고 세계 각국을 성공적으로 이 전쟁에 동참시킨 분”.


그 기도회에 모인 6만4천명(주최 측 집계)은 이렇게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나님, 우리는 전쟁이 싫어요. 하나님, 우리는 평화를 사랑해요”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전쟁을 막아 주시고 원수도 갚아 주실 것입니다.” 남한의 대표적 기독교 지도자들로 비기독인들에게 조차 알려져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자신들이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인지 자각하지 못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한편에서는 ‘전쟁’을 시작하고, 그것도 모자라 세계 각국의 민중들을 살인의 향연에 불러들인 사람을 치켜세웁니다.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이 싫다고 하면서,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을 초청한 것을 영광으로 여깁니다. 전쟁을 막아달라고 하지만, 원수는 갚아달라고 합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들이 서로 소중히 보듬어갈 수 없도록 파괴하고 억압하는 지배구조에 항거하는 것이 예수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하느님의 뜻이자,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러나 남한의 기독교를 소위 쥐락펴락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반 기독교, 반 예수 탑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아가고 있습니다. 참 기도가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니, 자기 성찰도 없고, 소통할 줄도 몰라서 지금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는 것 조차 알지 못합니다.


반면, 새로운 대안 기독교를 위해 성찰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있는데 그 소리를 경청하고 실천해 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중의식]을 극복하지 못하는 장애물이 바로 내 안에도 있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소수이니, 정말 들어줄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대며 몸집은 커져버린 괴물이 온 사방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오늘날, 기독교에는 ‘어찌하여?’라는 반문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의문이 생길 때 물을 수 있어야 제대로 알 수 있을 텐데, 물으면 믿음이 없다고 하고, 의심을 가지면 신성모독이라고 하고, 저항하면 사탄이라고 죽일 음모를 꾸밉니다.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위선자’(pokritai)란 구경꾼들을 위해 자신이 맡은 배역을 연기하거나 시를 해석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여성이 대중 앞에 설수 없던 시절이라, 이 위선자들 중, 남자가 여성 역할을 연기할 때는 가면을 쓰곤 했답니다. 연기를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위선자라는 말이, 성서에서는 ‘외식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쓰입니다. 속에 담겨 있는 것들을 가면으로 가리고 있는 사람들. 이중의식에 갇혀 있는 사람들. 거울을 통해 나를 비추어볼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으면서, 남을 향해서는 거대한 거울을 비추어 주느라 바쁜 사람들.


새로운 눈으로 재해석하는 새 빛 비추기를 거부하고, 빛의 양, 각도, 온도를 딱 고정화해 놓고, 조금이라도 그것을 벗어나면 큰 일 나는 줄 아는 종교. 전쟁 없는 것만을 평화로 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위협당하고, 오만가지 이유로 행해지는 차별행위가 평화를 훼손하는 행위라고 선포할 줄 모르는 종교. 생명, 생명 말만 하지, 숨 막히도록 박제화 되고, 아집만 남아있어 도리어 죽임에 앞장서는 종교. 그 종교가 바로 오늘날의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은 비단 [6.25전쟁 60년 평화기도회]로 모인 사람들 탓만은 아닙니다. 이중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들도 오늘날의 괴물 기독교를 키우는데, 일익을 감당했습니다.


1년 동안의 성찰 과정 중 한 꼭지를 차지했던 것이 [이중의식]입니다. 향린교회에 온지 8년째가 되는데 저를 포함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이중의식]을 제대로 보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민중과 연대하는 교회’라고 우리 교회를 고백합니다. 어찌보면 우리는 많은 경우, 지배자의 편에 서있는 것은 아닌지요? 위선자들이 했던 것처럼 가면을 쓰고 역할극하기에 급급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예배만큼 이중의식을 깨는데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성찰을 할 수 있고, 거기에서 비춰지는 것을 갖고 어떻게 오늘 하루, 그리고 이 한 주간을 살 수 있을지 결단하는 중요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냉랭하고, 거만하고, 무례하고, 무감각하고, 우유부단하고, 타협하고, 거짓을 일삼고, 시기, 질투, 중상모략, 또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그것은 이 정부, 거대한 기독교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들에게만 있는 것 입니까? 우리들에게는 전혀 없는 것 입니까? 나의 어떤 모습이 찔리십니까?


우리의 생각을 알아차린 이가 이렇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생각을 품느냐!’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만인을 위해 땀 흘려 힘껏 일할 때,

만인을 위해 함께 싸울 때,

만인을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릴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안으로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면서,

제 자신을 속이고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이 순간부터,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중의식과의 투쟁을 시작 하십시오.

예수를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런 몸부림에서부터 시작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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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61 마가복음 쇠하는 길과 흥하는 길 막9:30-37  김필곤 목사  2010-10-18 2786
15760 사도행전 편견의 늪에서 벗어나기 행10:9-23  김필곤 목사  2009-12-13 2786
15759 요한복음 쉴만한 물가로 요7:37-39  한태완 목사  2007-11-08 2785
15758 이사야 회복해야 할 3가지 진실 사29:1-13  이한규 목사  2010-09-12 2784
15757 사도행전 옥중에서의 감사와 찬양 행16:25-26  한태완 목사  2012-05-31 2783
15756 출애굽기 광야 훈련의 교훈 출2:16-25  김필곤 목사  2010-11-19 2783
15755 마태복음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마5:8  이한규 목사  2010-07-01 2783
15754 마태복음 희생의 열매와 기쁨 마6:33∼34  노강국 목사  2010-06-11 2783
15753 출애굽기 두려움과 믿음 출14:15-31  정용섭 목사  2010-04-21 2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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