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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cafe.daum.net/cgsbong/20xd/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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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인가?
크리스천의 삶은 믿음의 삶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구약에서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하나님께 피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그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믿음의 요소는 무엇인가?
1. 믿음은 마음의 문제
믿음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문제이다.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을 얻는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 눅 8:12; 마 15:8, 9 참조). 구원을 받았지만 잘 믿지 못하는 것도 마음의 문제이다(눅 16:14).
그러므로 믿음은 전인격적인 반응과 결단을 요구한다. 믿음이란 성령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을 조명시키고 우리의 의지를 선택과 결단과 확고부동한 신뢰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마음에 감동을 주지 못하고 행동이 따르지 못하는 두뇌적인 지식만의 믿음은 쓸모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믿는 것이 마음으로 믿는 것인가? 마음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몇 가지 용어를 살펴보자.
마음(heart)
사람은 마음(heart)으로 생각하고 추론하고 계획하고 이해하고 인식하고 의도하고 느낀다. 즉 마음은 지, 정, 의가 자리하는 보이지 않는 속사람 즉 보이는 육체와 대조되는 전인격을 말한다.
마음(mind)
사고와 생각을 강조하는 면으로 사용되지만 heart와 같이 보이지 않는 속사람을 말한다.
양심(conscience)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표준이 되나 이도 마음과 같이 타락하여 오염되어 있다.
육, 육체, 육신(flesh)
몸을 말하기도 하지만 주로 그리스도의 뜻에 어긋나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죄로 물든 전인격, 또는 그러한 삶을 의미한다.
2. 믿음과 지, 정, 의의 관계
가. 지식(지성적인 측면)
먼저 믿음에는 지적인 요소가 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을 믿을 수 없다. 무엇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는 그것(그 사람)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잘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을 만한 충분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5).
바울이 아테네에 갔을 때 아테네인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신을 섬기고 있었다, 이에 바울은 그들이 섬겨야 할 진정한 하나님은 누구시며 무엇을 하신 분인가를 가르쳐 주었다(행 17:23). 구원의 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전도이자 선교가 아닌가?
예수를 구세주로 믿기 위해서는,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며 오직 죄를 회개하고 내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신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여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것이 바로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는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구원에 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믿기 위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는 지식은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지식과는 다르다. 믿음의 한 요소로서의 지식은 어떤 사실을 단순히 믿는 지적인 행위가 아니라 비록 눈으로 보지 못하고 보이지 않지만 확신 있게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신앙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는 것을 믿고 우리는 하나님의 진실성에 의지하여 이것을 확신하고 믿을만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인은 말씀 가운데 계시된 것은 어떤 것이든지 참되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권위가 그것에서 말씀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학문들을 파악하는 데는 이해력과 기억력으로 충분하지만 복음의 말씀을 이해하고 신뢰하기 위해서는 이 복음의 전 영혼을 소유하는 마음의 깊숙한 곳에 확고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 신앙적인 지식이란 확신이 따르는 지식을 말한다. 단순한 정보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전 실존을 뒤흔드는 지식을 말한다. 신앙 지식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전인격적으로 확신하는데 있다.
또한 신앙 지식은 “나와 그것”(I-it)과의 관계가 아니라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나와 그분”(I-Thou)의 관계이다. 지식이라고 하면 금방 두뇌적인 지식을 연상하는 것은 헬라 철학이 기독교에 아직도 깊숙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헬라 철학은 사고력, 판단력과 같은 순수한 이성을 인간 지식의 최고의 수준에 놓았다. 그래서 성경 내용을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교리적인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을 신앙생활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성경은 이러한 지식은 물론 관계적인 지식, 경험적인 지식을 아울러 강조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 3가지 종류의 지식 모두를 포함한다. 우리는 성경 말씀이나 이 말씀을 체계화한 교리를 통해 하나님에 대하여 배운다.
이러한 지식은 살아 계신 인격체이신 예수님을 아는 관문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유명인사에 대하여 아무리 많이 알아도 직접 그 사람과 교제한 경험이 없다면 그 사람에 대하여 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을 직접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두뇌적이고 피상적인 신앙 지식을 경고하신다. 비록 예수 이름으로 기사와 이적을 행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말씀하신다(마 7:23). 신랑 예수를 만나러 간 열 처녀 중 기름을 미리 예비한 다섯 처녀만 잔치에 참석하고 나머지 다섯은 참석하지 못했다. 이들은 예수님께 입장을 간청하지만 그들은 매정하게 거부당한다. “대답하야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마 25:12).
인격체인 배우자나 형제를 알기 위해 수학 공식을 외우고 시험 공부를 하는 사람은 없다. 시간을 두고 서로 사귀면서 공통적인 관심사를 이야기하고 교제하는 동안 서로를 잘 알게 된다.
신앙지식도 마찬가지다. 신앙지식이란 내 삶 전체를 통하여 그분이 나의 구세주이실 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분이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시는 대로 순종하고 실천해나갈 때 얻어지는 체험적이고 관계적인 지식을 말한다. 그러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 17:3).
예수를 믿는 것은 곧 예수를 아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큼 이 세상에서 고상한 지식은 없다(빌 3:8-9상).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나에게 무엇을 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서 예수란 감추인 보화를 산 농부나 상인처럼 나의 모든 것을―그것도 강요가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다 바쳐서 그분을 섬기지 않을 수 없다(마 13:44, 45).
존 칼뱅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통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들의 안내자이자 선생으로 사용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좋은 것을 구하고 또한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려야 한다. 하나님은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절감하여서 무엇을 계획하거나 행할 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린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삶은 사악하기 그지없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순수하고 실질적인 종교이다.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외심과 합쳐진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나. 감정(감정적인 측면)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머리로만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동의하여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때로는 사람의 감정적인 반응을 요구한다. 전통적인 보수신앙에서는 믿음의 지적인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감정적인 반응으로서의 믿음을 소홀히 취급하였다.
이것은 아마 종교개혁 당시 헬라 철학의 부흥을 바탕으로 한 인문주의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 것으로 추정된다. 헬라 철학은 이성을 중시하고 감정을 경시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이 종교개혁기를 거쳐 17세기의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영향으로 지성을 숭상하는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더군다나 역사적으로 수많은 열광주의자들이 기록된 계시인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고 지성적인 교리보다는 감정과 체험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기성보수교회는 감정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견해를 고수해 왔다.
이러한 전통의 결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지 위해서는 복음의 말씀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하기만 하면 된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고 하는 보수주의 학자들도 생겨났다. 이들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회개는 죄에 대한 슬픔이나 미운 감정은 필요 없고 단순히 마음 (생각) 만 변화시키면 되는 것이며 믿음 또한 지적인 동의가 주요 요소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보수주의자들은 감정에 대해 지나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결과 믿음은 성경 내용의 가르침에 대해 지식적으로 동의하여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강조하여 감정적인 요소를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실례를 들어보자. 어느 유력한 성경공부 책에 기록된 말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구원 받는 것을 감정으로 측정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이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말씀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기분에 의해 믿는 것을 비판하는 말이 되겠지만 인간의 고유한 감정과 일시적인 기분을 구분하지 않고 통틀어 감정이라고 표현하여서 순진한 신자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느끼는 것은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가 쉽다.
이들이 감정을 경시하는 주된 이유는 감정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개혁보수주의가 주장하는 완전타락의 교리에 어긋난다. 사람은 죄로 인해 지, 정, 의가 골고루 타락하였다. 타락한 인간의 감정은 물론 지성이나 의지 모두가 골고루 타락되었다는 말이다.
비록 우리들이 무오한 성경을 바탕으로 하여 지적인 작업을 통해 교리를 확립하지만 수많은 교단이 난무하는 것 자체가 바로 인간의 지성 또한 정확한 잣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거하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같은 교단내의 사람들에게도 어떤 특정한 구절을 해석하라고 해 보라. 모두가 조금씩 다른 견해를 제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지성은 타락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감정적인 반응이 없는 것은 믿음이라기보다는 지식적인 동의에 불과하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러한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믿으시오”라고만 하면 그 말씀을 실제로 체험하고 확신하는 것은 당연히 따라 오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지적인 동의에 불과한 것이지 믿음이 아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두려워하여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지성적인 교리는 바르지만 신앙생활은 활기나 생동력이 결여되어 바른 체험이나 바른 행동이 따르지 못하는 메마른 정통, 죽은 정통을 양산하고 있다고 로이드 존스 목사는 경고한다.
예수님은 교리적인 잘못을 저지른 교회는 물론 열심과 뜨거움을 상실한 교회를 많이 책망하셨다. 첫 사랑의 뜨거움과 헌신을 버리고(에베소교회), 교리는 바르나 바른 행동이 따르지 못하며(사데교회),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교회(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오늘날의 정통교회가 아닌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지성을 숭상하고 감정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닌가? 감정에 대해서는 성령충만과 종교적인 감정에서 보다 자세히 살필 예정이다.
다. 신뢰(의지적인 측면)
말씀의 내용을 알고 그 말씀을 감정적으로 반응하여 수용하여서 내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라는 신앙고백, 예수님의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는 크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내 삶 속에서 하나하나 구체화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 들여서 그분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셋이 합쳐져야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는 감정적인 반응과 신뢰는 맹신에 불과하다. 이방 종교에도 감정적인 반응과 의지적인 행동이 따르지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이 섬기는 믿음의 대상이 성경이 말하는 우리들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른 교리는 우리들의 신앙의 지표이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머리로 아는 것을 나의 전 실존 (지성, 감정, 의지) 를 통해 받아들이고 실제로 체험해야 한다. 또한 머리로 알고 실제로 체험한 것을 실생활에서 적용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구세주이자 나의 모든 것이라고 고백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실생활에서는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
물론 지식적으로 알고 감정적으로 체험했지만 말과 같이 실생활에서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평생을 통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어렵다고 하여 편법으로 쉬운 길만을 택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고 할 수 없다.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고백주의신앙은 “값싼 은혜”를 전파하여 행동이 따르지 않는 신앙인을 양산하였다.
야고보는 이러한 위험을 경고한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약 2:26). 신앙은 삶 속에서 증거되는 것이지 입술로 논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도 마찬가지다. 말로 하는 전도도 중요하지만 행함으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보다 확실한 전도이다. 우리가 비록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 믿음의 진정한 믿음이라면 반드시 선한 행위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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