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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의 무속신앙

목회독서교육 이종전 교수............... 조회 수 2709 추천 수 0 2012.12.06 14:3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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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20xd/2439 

교회 안의 무속신앙              

 이종전/대한신학대학원 대학교 교수
 
 
    혹, 교회 안에 무속적인 요소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나라 5천년 역사를 말함에 있어서 어느 한 시대에도 무속신앙으로부터 자유했던 시대는 없다. 그리고 여전히 민족적 정서(情緖)의 깊은 곳에는 무속적 세계관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증언하여 주고 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첫째는 건국신화인 단군 설화가 무속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고, 이 땅의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교육되었다는 사실이다. 민족의 정서로 계승되는 무속적 세계관은 물론이고, 국민교육을 통해서 무속적인 세계관을 가지도록 교육을 했다는 것은 우리민족이 가지고 있는 무속적인 가치관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둘째는 우리나라의 문화적 현상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뿌리가 무속신앙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나라의 역사는 유사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약 1,000년을 지배했고, 유교가 약 500년을 지배했다. 하지만 불교는 무속적 불교로 변질되는 과정을 통해서 토착화했고, 유교도 역시 한국의 무속적 유교로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때 얼마나 무속적인 의식(意識)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외래종교들을 국교(國敎)로 받아들여서 그것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군주정치를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종교들이 무속신앙에 의해서 변질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우리민족의 의식 가운데는 무속신앙과 그 세계관이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으면서 이 나라 사람들의 가치관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현상들을 통해서 다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무궁화 위성을 쏘아 올리는 일을 맡고 있는 우리나라의 최고의 두뇌들이 모인 카이스트의 박사들이 위성을 발사하기에 앞서서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관공서에서 큰 사업을 시작할 때, 영화촬영을 시작할 때, 더 나아가서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수능고사를 보기에 앞서서 학교에서는 고3 학생들을 위해서 역시 돼지머리를 준비하고 고사를 지낸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무속적 세계관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우상숭배를 거부하기 때문에, 또 교회에서는 그렇게 교육되기 때문에 무속신앙이 없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것은 역시 잘못된 판단이다. 이 땅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다면, 어느 구석에라도 무속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단지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무의식중에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즉, 한국교회의 신앙적인 특징은 먼저 기복적(祈福的)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복을 궁극적으로 구하는 신앙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오해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표현일 뿐이지 복의 개념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고, 그 뜻은 하나님이 영원히 가지고 계신 것이며, 인간을 지으실 때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자신의 신앙은 물론 삶의 목적과 일치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독교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개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거나 조금 넓은 의미로 지역, 혹은 국가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신앙적인 수고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무속적인 세계관을 넘어서지 못한 모습이다.
 
그리고 교회의 목사를 구약의 제사장이나 샤먼(shaman)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현실이 가장 확실하게 증명하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목사가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에서 신자의 소원을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신자들이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부정하거나 제한하는 결과에 이른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그리고 종교개혁 신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이 어떻게 한국교회에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복음에 대한 충분하고 바른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고, 동시에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식(宗敎意識)이 무속적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는 소위 용하다는 목사, 권사를 찾아다니는 현상이 동반된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의 자세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또한, 한국교회의 무속적 현상은 기독교 신앙이 다분히 주술적(呪術的)인 현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그 자체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은 오직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는 분으로서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다. 때문에 그 분의 마음을 거슬려서는 안된다는 의식(意識)으로 행동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소원을 쟁취하기 위한 주술적인 기원을 한다. 그것이 때로는 예배일 수 있고, 기도일 수 있고, 봉사도 그 중에 한 방편일 수 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란 어떤 조건도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분 앞에 서는 자세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자신의 인격과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며, 범사에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술적이라는 말은 단지 신앙의 의식적(儀式的) 형태를 지적하는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인간관계나 사회, 자연과의 관계에서 윤리의식과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함께 지적하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무속적인 종교의식(宗敎意識)은 윤리적 가치를 동반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무속적인 종교의식이 지배하는 가운데서는 사회가 변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사회에서 신자들의 역할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문제다. 즉, 밤을 새워서 기도하고, 금식도 하고, 은혜도 받았다고 법석을 떨어도 예배당을 나가면서 같은 신자를 흉보고 모함하고 시기하는 말을 거침없이 한다. 아무런 의식이 없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확인했다면, 자신의 삶도 하나님 앞에서의 삶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신자들에 의해서 사회적인 변화를 기대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또 하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이 보여주는 이기적인 태도이다. 자신의 기복(祈福)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세를 보이지만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할 때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같은 기독교 신자라 하더라도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의 경우와 다른 교회에 다니는 사람의 경우가 다르다. 이 말은 기복이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기적인 기복신앙은 한국 무속신앙의 특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 국민의 정서 속에 잠재해 있는 기복적인 의식이 자연스럽게 기독교신자들의 의식에도 작용하여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왜곡시켜서 형성하게 하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한국 기독교 신자들의 의식 가운데 내재해 있는 무속적인 의식(意識)은 신앙생활의 구체적인 현상으로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예를 생각해 본다면 아마 한국기독교의 상태가 얼마나 무속적 터전에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즉, 한국교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 가운데 염려스러운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목회자를 절대적 샤먼으로 인식시키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서 “능력의 종” “불의 종” “신유의 종” 심지어는 “선지자” “사도”라는 말로써 목사, 혹은 집회를 인도하는 사람의 격(格)을 절대화한다. 이것은 그렇게 강조되는 만큼 오히려 예수님의 중보적 위치는 약화되는 것이고, 나아가서 또 다른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결과에 이르게 되는 모순을 낳는다.
 
그리고 한국교회에서는 제사신앙이 여전히 성행을 하고 있고, 많은 신자들이 이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으로 신앙적인 충족감을 누린다. 그 예가 1천 번제이다. 최근에는 3천 번제도 등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기독교 신앙은 더 이상 제사신앙을 요구하지 않는다. 만일 제사신앙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부정하거나 제한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중세의 신앙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문제가 남겨진다. 그럼에도 제사신앙은 성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문제의 제기가 없으며, 오히려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으로 각 교회가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의식은 무속적 제사신앙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수용된 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밖에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각종 작정기도 특별집회도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이미 필자는 기독교 신앙이란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임을 전제했다. 하지만 그 관계가 없는 종교적인 행위는 주술이 된다. 그 연장선에 1천번제도 있게 된다. 그런가하면, 교패를 비롯해서 교회에서 사용되는 것들이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무속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것도 문제다. 더욱이 입시 때가 되면 교회 안에서도 합격 엿과 합격 떡이 돌아다닌다. 운전을 직업으로 하는 신자들이 자신이 운전하는 차에 십자가나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을 부착하고 다닌다. 그것을 붙이는 신자들이 어떤 의도를 가진 것인지 절대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다분히 부적(符籍)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신자들의 일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성경책을 신성시하거나 능력의 상징으로 이해해서 머리가 아프면 베고 잔다든지, 부인들이 식사를 준비할 때, 특히 밥을 풀 때 십자가를 먼저 긋고 푸면 소화가 잘 된다고 믿는 일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교회 내에서도 제단의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강대상을 중심으로 신성시하는 경향은 아직도 지배적이다. 따라서 함부로 접근조차 못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자연히 강대상에서 사용되는 물건들에 대해서도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다.
 
무엇보다도 신자들의 의식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인과응보적인 보응(報應)의 가치관이 바뀌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무속적인 신앙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라 할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은 어떤 상황의 변화가 있다 해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무속적인 것으로 변하게 만든다는 것이 우리나라 신자들에 의해서 자증(自證)되고 있다. 따라서 신자들의 세계관이 창세기의 세계관으로 바뀌어야만 하며,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그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신앙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만 하는것이 모든 무속적인 요소들을 교회와 신앙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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