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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나요?

논문신학성경 운영자............... 조회 수 5424 추천 수 0 2012.12.06 17: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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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20xd/3090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나요?

 

질문]

저는 모태 신앙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어 '나는 정말 구원 받았는가'라는 질문으로 꽤 방황했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에 대한 세미나에도 참석했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그 앞에 완전히 굴복 되어지지 않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 두려웠습니다. 예수님과 인격적 만남이 한 번도 없었기에 제 속에는 여전히 죄성은 살아 있고 삶이 제대로 변화되지 않으며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변화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만 이렇게까지 변화되지 않는 제 자신이 너무나 싫습니다. 고질적인 죄의 습관들(담배를 피운다거나 남을 미워하는 마음, 판단, 복수심 등...)도 남아 있으며 어려서부터 마음의 상처도 깊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을 쉽게 대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조심하다 보니 소심하게 될 때도 많습니다.

제 본질적인 질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내가 과연 체험할 수 있을까?,  나는 왜 아직도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가, 나의 하나님을 만나야 인격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고 믿음으로 그 분을 확신하며 소망을 갖고 살 수 있다고 말씀으로는 수도 없이 들었는데 왜 나는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가? 또 하나,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지 않는 제 자신을 제대로 고칠 수는 없을까요?  

[답변]

정답은 없다.

아주 많은 신자들이 궁금해 하고 갈급해 하는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선뜻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기 힘든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 말은 저의 대답도 기대한 만큼 속 시원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질문하신 내용 자체가 예수님과의 일대일의 인격적 만남에 대해 갈급해 하는 것인데 그것이야말로 본인과 예수님과의 은밀하고도 개인적인 체험이므로 성삼위 하나님 특별히 성령님의 간섭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 삼자가 아무리 신령하더라도 사람이 도와준다고 해서 이뤄질 일은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만남에 있어 어떤 매뉴얼이 있어 그대로 따르면 만나질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구원을 얻는 체험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물론 크게 보아 성경공부, 기적적인 간섭으로, 전도를 통해,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로 등 몇 가지로 분류는 됩니다만 어쨌든 당사자 개인으로선 자기만의 고유의 체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 받은 말씀이 다 다르며 기적이 일어난 상황과 그 효과 등이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이 세상에 아무리 수십억 명의 인간이 있어도 다른 모든 사람이  없고 오직 그 사람 단 한 명만 있는 것처럼 신자를 대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를 상품이 아닌 당신의 걸작품으로 지으셨고 각 사람의 이름을 당신의 손 바닥에 적으시고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고 계십니다. 정말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깁니다. 인간쪽 측면에서도 살아 온 환경과 품성을 비롯한 지성적 정서적 배경이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자가 하나님을 만나려는 열심보다 사실은 하나님이 신자를 먼저 일대일로 만나기를 더욱 소원하고 계십니다. 그 분이 더 소원하시기에 신자 또한 소원한다면 그 분의 때와 방법에 따라 반드시 만나실 수 있습니다. 각 신자에게 가장 특유하면서도(Unique) - 다른 어떤 사람과의 만남과도 다른 – 도저히 부인할래야 할 수 없고 가장 은혜가 넘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야말로 일대일의 만남이기에 제삼자가 직접 도와줄 수 없습니다. 단지 그 만남의 의미, 과정, 결과 등에 관한 설명과 함께 기도해 주는 일 밖에 해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만나기 소원하는 자도 그 만남에 장애가 될만한 신앙적인 오류를 제거하여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소원으로 바꾸어 더 깊은 열정을 갖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극적인 체험과 예수와의 만남  

가장 먼저 따져 보아야 할 문제는 과연 예수를 일대일로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입니다. 이외로 예수님을 이미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만나지 못했다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만나지 않았는데도 만났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전자는 주로 질문자와 같은 모태 신앙을 가진 자로 극적인 체험이 없어서 신앙 생활이 미지근하고 또 자꾸 시험과 유혹에 빠지니까 주님과의 만남이 없어서인가 보다 오해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상담해 보면 극적인 체험만 없다 뿐이지 분명 구원의 확신이 있어 그 신앙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경우가 더 많습니다. 후자는 일시적인 감정상의 감동이나 기도해서 어떤 일이 극적으로 응답 받은 것으로 예수님을 만났다고 치부해 버리는 경우입니다. 극적 체험은 있지만 십자가 복음의 의미나 구원의 확신에 관해선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이방인처럼 현실의 축복만을 위해 비나이다만 연발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극적인 체험으로 올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느날 기도 중에 예수님 형상을 한 분이 나타나 직접 그 분의 음성을 들었다든지, 교통 사고가 나서 응급실에서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는데 꿈에 예수님을 보고 기적적으로 나았다든지, 기도원에서 작정 기도 중에 자기도 모르게 감격이 몰려 오고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었다든지 하는 것만이 그 만남의 전부가 아닙니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도 요나의 표적 즉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는 구원의 길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마16:4)

그리고 심지어 그런 극적인 체험이 사단에게서 오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사단은 어떻게 하든 인간이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가 가진 초자연적 능력으로 얼마든지 속이고 희롱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케이스별로 구체적인 과정이 다 달라 보편적이고도 객관적인 설명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쉬운 예를 들자면 기도원에서 간절히 기도해 말기 암 같은 불치병은 나았는데도 예수를 믿지 않는 경우 같은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가장 첫째 역할은 예수를 주로 시인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고전12:3) 그런 기적적인 치유를 체험하고도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성령이 역사한 것이 아니라 사단이 병을 고친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믿는 자들이 모인 기도원에 사단이 훼방할 수 있는가, 혹은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었지만”(히6:4) 다시 세상으로 나간 것으로 보느냐는 복잡한 신학적 논쟁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극적인 체험이 예수님과의 만남일 수 있지만 전부가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히 모태 신앙인 자들이나 극적 체험이 없는 자들의 예수님과의 만남은 훨씬 다른 모습으로 이뤄지며 또 그런 모습이 사실은 더 성경적입니다.      

예수님을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의미는?

예수님을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미 그 말 가운데 의미가 거의 다 드러나 있습니다. 제 삼자가 개입되지 않은 정말 단 두 사람만의 개인적인 만남이자 반드시 인격적인 만남이어야 합니다. 두 사람의 만남이기에 반드시 서로에게 만나지는 상대가 있어야 하며 또 그 상대는 인격을 갖춘 존재여야 합니다.

특별히 인격을 갖춘 존재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해 자기 지정의로서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동물의 경우 초보적인 지정의는 갖추었지만 오직 본능에 의해 움직이지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계획하고 결정하지 못하고 또 자기 행동에 책임질 존재가 못됩니다. 인격적 존재란 결국 인간과 나아가 천사와 사단을 망라한 영적 존재들과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과의 만남이 사람이 혼자서 관념상으로 고매한 진리를 깨닫거나, 감정상 특이한 상태에 빠지거나, 종교적으로 어떤 신비한 흥분과 절정의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예수님이라는 ‘실제로 살아 있어서 인간 외부에 객체(客體)로 존재하는 실재(實在)’와 인간이 서로의 지정의를 동원해 자유롭고도 책임지고 반응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구체적인 만남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반드시 어떤 인간의 형상으로 만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도마에게 나타났듯이 당시 입던 의상을 입고 샌들을 신고 어느날 신자를 찾아와 내 옆구리 창 자국에 손을 넣어 보라는 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격적 만남이라고 했지 육체적 형상적 만남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어떤 형상을 보거나 아무런 육신적 체험이 없을지라도 “아 내가 드디어 예수님을 만났구나”라는 고백만 따라 나오면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예수님을 만난다’,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표현은 동일한 체험을 말합니다. 알다시피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그 품성과 능력과 권위에 있어서 동일하신 하나님입니다. 단지 위격과 구체적인 역할만 다르지 동일하신 하나님이자 숫자로 셋이 나눠지는 분이 아니라 삼위 일체의 하나님입니다.

그럼에도 구태여 예수님을 만나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인간 구원을 위한 계획과 뜻이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그 분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 온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복음의 진리를 진심으로 깨달아 그 복음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반응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의 만남을 하나님 입장에서 정의하자면 “창조주 하나님이 죄인 되었던 인간에게 성령으로 그 심령에 간섭하여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하시는 은혜와 사랑을 온전히 깨달아 알게 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쪽에서 보면 “성령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성자가 이루신 사역의 의미를 깨달아 성부 하나님께 되돌아가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것이자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만났다는 확신이 없는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극적인 체험이 있더라도 자기가 정말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며 그 죄를 위해 예수님이 대신 죽었다는 확신이 없이 단지 현실의 축복만 비는 사람은 그 체험이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아닙니다. 문제는 질문자님처럼  복음의 진리는 믿는데 정말 예수님과의 만남에 대한 확신이 없어 그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 변화가 없는 것 같은 의심과 불만을 가지는 자입니다. 그 원인은 개인마다 다 다를 수 있지만 보편적으로 가장 크게는 죄와 구원의 연관 관계를 제대로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사실 다른 것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또 구원이란 한 인간이 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죄가 과연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니까 필연적으로 자기가 받은 구원의 의미도 모를 뿐 아니라 죄 사함 이후의 변화되는 생활에 대해서도 오해하게 됩니다. 또 그 당연한 결과로 구원에 대한 확신 즉 예수님을 만난 것에 대해 회의가 들게 됩니다.  

죄와 구원

죄의 본질이 무엇이며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의미를 간략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아주 세밀한 설명을 요하는 광범위한 내용을 간단하게 줄였으므로 순서대로 차근차근 생각하며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1) 성경에서 인간이 구원을 얻어야 하는 죄는 일차적으로 윤리적 죄가 아닙니다. 세상의 윤리로만 따져도 모든 인간은  단 한명도 의로운 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국민학교 1학년짜리 도덕 교과서도 완벽하게 지켜낼 수 없습니다. 동의하십니까?

2) 나아가 세상의 윤리와 하나님의 윤리는 다릅니다. 살인과 간음이라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형제를 바보라 하면 살인이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입니다.(마5:22,5:28) 세상의 윤리에선 간혹 의로운 사람이 나올지 몰라도 하나님의 윤리 안에선 모두가 죄의 삯인 사망의 형벌 아래 놓여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평가한 인간의 성적표에는 모두가 빵점이며 우등생과 열등생의 차이는 전혀 없습니다.

3) 일반적으로 살인이나 간음처럼 직접적인 행동으로 지은 죄만 중요시 하는데 말과 생각으로 짓는 죄도 사실은 행동으로 지은 죄입니다. 말로 행하는 죄는 이미 입술이라는 인체를 동원했을 뿐 아니라 살인 간음보다 더 참혹한 결과를 맺는 수도 많습니다. 또 사고 활동이라고 말하듯이 생각으로 짓는 죄도 두뇌를 동원한 행동으로 범한 죄입니다. 따라서 윤리적인 죄란 이미 인간이 인식하고 난 이후의 결과이며 그 이전에 그런 행동으로 이끌게 하는 죄의 본질은 따로 있습니다.  

4) 죄의 본질은 인간의 깊은 내면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crime)하게 만드는 어떤 힘과 경향(sin)입니다. 죄란 인간의 지정의로만 통제 되지 않은 더 깊은 내면에서의 인간을 묶고 있는 힘입니다. 알기 쉽게 예를 들면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어떤 개별적 사건을 만나도 긍정적 생각을 한 후 긍정적인 말과 행동이 뒤 따르듯이 인간의 속에는 죄된 마음이 먼저 있어서 죄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5)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관은 바로 이점에서 다른 모든 종교와 다릅니다. 인간이 행동으로(말과 생각의 죄도 포함) 범죄(crime) 했기 때문에 죄인(criminal)이 된 것으로 보는 것이 천주교까지 포함한 다른 모든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선 당연히 그 행동부터 고쳐야 합니다. 그래서 의지를 동원해 죄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며 마음 속의 생각마저 수양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또 이땅에서 수양한 결과를 갖고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서 채점 받아 구원 혹은 심판으로 나눠집니다. 죽을 때까지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오직 성적표를 잘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모든 종교입니다.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는 아무 잘못이 없지만 그런 식의 하나님은 오직 시험 채점관에 불과하지 인간을 사랑하거나 세상 만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6) 개신교에선 인간이 처음부터 죄인(sinner)이었기에 지정의(soul)를 넘어선 마음 즉 영혼(spirit) 속에 죄(sin)가 좌정해 있고 그래서 겉으로(생각의 죄도 포함) 범죄(crime)를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형무소에 있는 죄인(criminal)이나 밖에 있는 일반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sinner)이긴 모두 마찬가지 입니다. 이미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면 구원의 길은 죄된 행동 하나하나를 뜯어 고치거나 생각을 바로 잡으려고 수양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전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듭나야 하고 죽었다 살아나야 하며 또 그런 체험이 있는 자는 이미 이 땅에서부터 언제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7) 그런데 인간 속에 힘으로 죄가 자리 잡게 된 근본원인은 아시다시피 아담의 원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원죄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표면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금령을 어긴 것이 원죄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말한 대로 따지면 원죄가 단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적인 죄(crime)에 국한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후손이 원죄 하에 태어난다는 말도 아버지가 빨갱이면 아들도 빨갱이의 벌을 받는 연좌제 같은 의미 밖에 되지 않습니다.

8)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마음 속에 이미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가득찬 것이 겉으로 행동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합니다. 명령을 위반한 행동 이전에 그 마음이 변화된 것이 죄입니다.  말하자면 원죄(original sin)가 아담의 마음 속에 심어지자  불순종이라는 범죄의 행동(crime)을 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쪽으로 왜곡되게 사용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을 배반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게끔 사단이 교묘하게 작용한 것입니다. 이 구분을 이해하시겠습니까?

9) 그런데 어떻게 해서 아담에게 하나님을 배반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된 것입니까? 거짓의 아비 사단이 “하나님이 선악과를 못 먹게 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까 시기해서 그렇다, 그만큼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더라도 하나님 말처럼 너희는 결코 죽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고 인간을 속인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 아담으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을 의심하게 만든 것입니다.(구체적인 성경 구절 인용은 생략하겠습니다. 창세기 2,3장을 자세하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10) 그러나 하나님이 선악과를 주신 뜻은 그것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또 그 명령을 어기면 벌을 주고 지키면 상을 주겠다는 단순한 뜻도 아닙니다. 간단하게 말해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품안에 거할 때만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지만 그 품을 벗어나면 부끄럽고 두렵게(아담이 원죄를 범한 결과)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참 주인으로 창조주 하나님이 따로 있고 인간이 우주의 주인이 아니다. 그러니 항상 나를 잊지 말고 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라”는 것을 상기 시키기 위해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명령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 속에 하나님을 지워버렸다는 뜻입니다.

11) 따라서 인간 속에 힘과 경향으로 거하는 죄(sin)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외의 곳에서 자신의 만족과 위로와 능력과 기쁨을 찾으려는 경향입니다. 하나님을 벗어나서 반대 방향으로 가는 성향이 죄입니다. 우주의 주인이 인간이며 그래서 모든 인생의 방향을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하나님의 반대쪽에 서 있는 것입니다.  

12)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 자기 뜻대로 하겠다는 인간 중심의 사상과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심만으로 삶을 꾸려 나가는 상태를 두고 원죄 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영혼이 부패되어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자기유익만을 위해 하나님의 반대편으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하신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지 죄를 지어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3) 그럼 어떻게 해야 원죄에서 구원을 받습니까? 하나님을 배반한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에게 돌아가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배반한 마음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충분하게 사랑하지 않는가 보다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서 인간을 구원하려면 “내가 너희를 정말 사랑한다, 선악과를 준 뜻이 절대 너희들 지키지 못할 명령을 주고 범하니까 벌을 준 것이 아니라 정말 내 품 안에 거해야만 참 위로와 능력이 된다는 것을 평생동안 잊지 말라고 한 뜻이다. 그 뜻을 제발 알아다오!” 하면서 당신의 사랑을 인간에게 재 확인시켜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독생자 당신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인간을 향한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간단하게 따져 봅시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구원은 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가 보다 생각해 하나님 아닌 곳에서 충족을 구하려는 경향이며 그에서 파생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정말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도저히 의심하지 않게 되면 구원 된 것이며 또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칭의(稱義)와 중생(重生)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에 확신이 들지 않는 이유는 그 동안 교회에서 죄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 시키지 않고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너무 문자적인 교리로만 가르쳐 왔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단지 “과거에 지은 죄, 현재 짓고 있는 죄, 미래에 지을 죄까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감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시면 이제 주님이 당신 영혼 속에 좌정합니다”라고만 권해 왔습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그런 형식의 영접이라도 본인이 진심으로 자기는 천하의 죄인임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확신하여 성령님이 자기 영혼을 새롭게 해달라고 간절히 소원하고 또 실제로 성령이 역사한다면 중생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절한 자신의 죄인 됨의 고백과 죄 사함에 대한 갈급한 심령 없이 단순히 의지적으로 믿어 보려고 교리에 수긍, 동의, 결단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구원의 기쁨과 확신이 없으며 예수님과의 만남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에서 죄인인 인간이 도저히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의 공로에 나타난 예수님의 의를 인간에게 전가하여 하나님이 의롭다 칭해 주었으니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 측면에서 죄인된 인간을 죄와 분리해서 구원해 주셨다는 의미이지 인간 쪽에서 구원 받을 때에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한 내용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선 자체이므로 죄와의 공존이 불가능하므로 당신의 법대로 하자면 다 죽어야 마땅한데 그러면 아무도 구원 받을 자가 없으니 예수로 하여금 그 형벌을 감당케 해 죄는 사하면서 죄인 된 인간은 용서해 주셨다는 하나님의 구원 원리입니다.

그래서 인간 쪽에서 단순히 의지적 결단으로 이 교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고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3장에 밤중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온 사건에서 보듯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니고데모로선 어떤 믿음의 결단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도 모르고 그런 거듭남에 대한 갈급함이 없었습니다.

만약에 그 때 예수님이 로마서의 설명대로 “나의 의로 칭의 된 것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준다”고 했더라면 니고데모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만약 성령의 간섭이 없었다면 두 가지 가능성 뿐입니다.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했거나 단순히 무조건 믿고 보자는 의지적 결단 둘 중에 하나를 택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단순하게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로만 전도 받았을 때에 보이는 반응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했습니다. 이미 죄인 된 인간의 영혼을 성령님이 먼저 바꿔주어야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전 하나님과 에덴 동산에서 함께 교제하고 동행하던 그런 상태로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 죄인이 자기 전 존재와 삶과 일생을 오직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기를 원해 그 분의 사랑의 품 안으로 되돌아 오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구원에는 칭의와 중생이 반드시 함께 일어나야 유효한 구원이 됩니다. 바울 사도도 그래서 로마서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설명한 후에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3,4) 또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산자로 여길찌어다”(롬6:11)고 했습니다. 이전에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절차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 거듭난 후에 새 생명 가운데 행해야 한다고 합니다.                

중생의 참 의미

따라서 자신이 거듭났다는 확신이 있으면 구원을 받은 것이자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대다수 교인들이 죄와 멀어져 거룩해지지 않으면 마치 중생하지 않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윤리적인 죄와는 완전히 담을 쌓는 것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으로 생각하며 그것만을 신앙의 전부이자 목표로 삼습니다. 담배를 피워도 안 되고 세상의 죄악과 시험에 넘어가면 전혀 변화가 되지 않은 것으로 오해하고 구원의 확신이 점점 약해져 갑니다. 심지어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했고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옛 사람은 원죄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여 자기 멋대로 살려고 했던 인본주의적인 인간 내면의 본성을 말합니다. 모든 의사결정을 자기 지정의 범위 내에서 한정시켜 자기가 계획하고 검토하고 결단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는 모습입니다. 단순하게 술 담배하고 방탕한 잘못을 저지르던 습성이 옛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만약 옛사람을 그렇게 정의하면 새사람이 되려면 범죄를 하나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거룩한 성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그럴 수 있는 자 아무도 없습니다. 신자가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삼 말씀 드리지만 ‘윤리적 범죄(crime)’는 ‘하나님을 등진 마음(sin)’이 겉으로 드러난 결과입니다. 모든 윤리적 죄는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이 인간사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 분의 선하고 거룩하신 뜻이 현재 세상을 움직이는 배후의 힘이 아니다”라고 믿는 사상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구원과 심판은 없고 이 땅이 전부이고 당연히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가 됩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누가 빨리, 더 많이, 더 좋은 것, 더 편하게 차지하느냐의 싸움이 항상 있게 마련이고 바로 그런 경쟁에서 살인, 강도, 간음, 거짓, 폭력, 사기, 등의 죄가 파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선언으로 시작하며 또 십계명에도 가장 먼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을 삶과 인생의 중심으로 삼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그 분의 뜻 안에 살기를 소원하기에 성령의 인도와 간섭으로 살게 되고 자연히 윤리적 죄와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되었다고 윤리적 죄에서 완전히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닙니다. 십계명은 이미 신자가 된 자에게 준 계명이지 그대로 완전히 지켜야만 신자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마저 신자라도 살인, 간음, 도적 등의 죄를 지을 충분한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런 윤리적 죄는 항상 하나님을 떠나 있기에 짓게 되므로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으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을 했다는 것은 인간을 묶고 있는 하나님의 반대 편에 서겠다는 경향이자 힘을 말하는 원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신자가 이미 거룩해졌거나 더 이상 죄를 안 지을 실력을 갖추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으로 방향만 바꾸어 섰다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이 따로 있으며 그 분의 뜻대로 모든 인생이 진행되어진다는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이며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중생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대로 산다는 것이지 하나님과 상관 없이 윤리적 죄만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 성령으로 거듭나면 도덕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사실은 딱 하나 있습니다.  성령이 항상 내주하므로 알게 모르게 죄를 지으면 자연적으로 자신의 영이 눌리고 자꾸 괴로워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죄를 즐겼고 설사 조금의 양심의 가책은 있어도 단순하게 자기 혼자 반성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미안한 것만 사죄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불신자 시절에는 온갖 얼룩이 묻은 옷을 입고 어둠 속에서 똑 같이 얼룩 묻은 자들끼리만 있었기에 아무런 의식이 없다가 이제 빛 속으로 나와 얼룩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사람들 속에 있으니 자기가 더러운 줄 더 확연하게 느끼게 됩니다.  

질문자님처럼 윤리적 죄에 대해 아주 민감해지고 그 죄들이 하나님 앞에 죄이므로 그 분께 먼저 회개하겠다는 분명한 의식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사실은 중생한 증거입니다. 중생이란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라 가치관이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로 바뀌며 사단 쪽으로 향했던 내 영혼이 하나님 쪽으로 방향만 바뀌어 선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더욱 깊이 알아나가 품성과 인격에서 변화 받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열매를 맺어 가는 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중간에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이전에 사단에 묶였던 영혼의 부패된 본성이 일종의 습관 내지는 타성의 모습으로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나님 쪽을 향해 어느 정도 산 중턱으로 올라온 지점에서 넘어졌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반대 방향으로 가다 넘어져 산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위를 보고 앞으로 넘어졌기에 어쨌든 그 때까지 온 만큼의 그 장소에 잠시 엎드러진 것 뿐이지 미끄러져 뒤로 후퇴한 것은 아닙니다. 얼룩 묻은 옷을 빨아 입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어지간히 희어져도 마음에 안차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결론적으로 내가 두 번 다시는 하나님을 모르고 내 멋대로 살았던 인본주의적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확신이 서 있다면 극적인 체험과는 상관 없이 예수를 만난 것이자 중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고 경배하며 그 분께 내 삶과 존재와 인생을 의탁하는 일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이 있으면 구원 받은 것입니다. 왜 아직도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죄를 짓고 있고 변화되지 않는가 괴로워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 쪽으로 그 인생의 방향을 돌렸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예수님 만남의 실제적인 의미

그러나 여기까지 설명한 내용을 복음에 대해 공부하신 분들은 어지간히 알고 믿지만 여전히  개인적인 체험이 없어 안타까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를 아주 쉽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 서두에서 말씀 드린 대로 두 인격체 간에 분명한 조우(遭遇)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혼자서 믿고 만나 보기로  결단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만났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완전한 예는 아니지만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한국 국민이라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선 누구나 잘 압니다. 그분의 신상명세 뿐 아니라 보도를 통해 정책과 생각까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노무현 대통령을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학교나 동네 친구로 노대통령 그분도 나의 신상 명세를 알고 어디서 만나던 반갑게 알아볼 수 있어야 아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만난다는 것의 가장 근본적인 뜻이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알아 나가는 노력과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라는 존재를 개인적으로 분명히 알고 계시며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을 가지면 그 분을 만난 것입니다

쉬운 예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해 암이 나은 자라면 절대자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었고 자기를 불쌍히 여기어 인간이 고칠 수 없는 암을 고쳐 주었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알고 있다는 확신이 서므로 자기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고백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자기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신하게 된 경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 139:1-4에서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나의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나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 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이런 고백을 언제 어디서 누구 앞에든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자라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 같은 천하의 죄인도 하나님이 아시고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셨으며 이제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있던 담배를 피우든 시험에 빠지든 죄를 짓든 간에 나를 사랑하고 계시며 내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으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신자를 만나 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신자를 알며 나아가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시겠습니까? 쉬운 말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기도드릴 수 있는 자는 예수님을 이미 만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절실한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나를 찾아 와 주셔서 당신께서 나를 알고 모든 죄를 간과하시고 그런 허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연약한 모습이기에 더욱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심어달라고 간절히 매어 달리는 수 뿐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기억할 것은 단순히 열심과 소원과 갈급함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라고 말했습니다. 가난한 마음이 되어야 천국을 차지한다는 것 즉 구원을 얻고 죄사함을 받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하게 겸손하거나 검소한 마음 가짐이 되는 품성적, 인격적, 윤리적 뜻이 아닙니다. 심령 즉 인간 내면의 지정의를 포함하여 그 너머 있는 내면 전체 영혼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헬라 원어로 가난하다는 표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삯꾼 노동자처럼 상대적으로 가난한 것과 불구자처럼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어 오직 외부의 도움으로만 연명해 가는 가난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후자의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돌아서서는 단 한 시도 살아갈 수 없다는 고백으로 완전히 그 분 앞에 항복하고 나오는 것이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의 선행, 공적, 능력, 자격 그 어느 것으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천하의 죄인 중의 괴수로 오직 주님의 자비와 긍휼만 의지합니다라고 자기의 전부를 내어 드리는 가난입니다. 더 이상 내려 갈데라고는 하나도 없이 철저하게 낮아진 데서 하나님을 찾아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쳇말로 말하듯 앞발 뒷발 다 들고 통째로 벌거벗고 까뒤집어진 육신과 정신과 영혼을 가지고 주님 앞에 완전히 엎드려야 합니다. 주님이 정말 흉측스런 죄인인 자기를 그래도 알고 계시며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매어 달리십시오. 그 길 말고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지름길은 절대 없습니다. 징조, 말씀, 기적, 마음 속의 확신, 성령의 미세한 음성, 감정의 충만, 직접적인 음성이나 환상, 꿈 어떤 형태가 되어도 좋으니 주님 제발 한 번 나에게 보여달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보여주실 때까지 소망을 갖고 실망하지 말고 기다립시오. 중간에 절대 포기하지 말고 심지어 전 평생이 걸려도 그런 만남이 있을 때까지 기도하면서 기다리셔야 합니다. 완전히 가난해져서 기다릴 각오만 되어 있으면 주님은 질문자님께 가장 적합한 당신만의 때와 방법으로 반드시 찾아 와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질문자님께서 이미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과거의 상처나 사단의 방해로 의심과 갈등의 늪에 빠져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사단은 인간이 갖는 약점을 가장 잘 이용하며 그 약점으로 가장 적합한 것이 과거의 상처나 담배 피우는 것 같이 아직도 벗지 못한 잘못된 습관입니다. (담배 피우는 것과 예수님을 만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문제는 제 홈페이지 성경상담 코너에 다룬 적이 있습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단은 자꾸 신자에게 “아니 네 주제에 신자라 할 수 있느냐? 교회 다닌 지 십년이 넘는데 아직 담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느냐? 과거에 너가 저지른 그 큰 잘못을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용서해 줄 수 있겠느냐? 네 양심에 찔리지도 않니? 도대체 네가 하루에 기도를 얼마나 하며 성경을 몇 페이지나 읽는다고 신자라고 어디 가서 이야기하느냐? 교회 봉사하고 헌금한다고 너가 할 바를 다 했는 줄 아느냐? 네 꼴을 보라 하나님이 쉽게 용서해 주겠느냐? 벌써 네 마음에 확신이 없고 기쁨이 없지 않느냐? 네가 예수를 만난 적도 없지 않느냐?” 등등 끊임 없이 속이려 듭니다.

자꾸 윤리적인 죄와 종교적 의무감으로 죄책감이 들게 하는 것은 사단이 하는 짓입니다. 사단의 유일한 목표는 사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못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윤리적 선행과 종교적 제사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어 당신께서 그 멍에와 짐을 다 부담하셨다는 뜻 아닙니까? 그 복음의 의미와 은혜와 능력을 조금이라도 약하게 만들기 위해 사단은 심지어 선행을 하라고 부추기고 말씀과 기도에 더 열심을 내라고 독촉하기도 합니다. 그런 시험과 방해가 있을 때마다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복음의 진리를 되새기기 바랍니다. 사단의 방해를 물리쳐 달라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대적하며 사단을 꾸짖으십시오.

모든 수단을 다 써보았는데도 안 되더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는 절대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리고 신자가 십자가에 죽기는커녕 정말 땀이 핏방울처럼 되도록 까지 기도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리고서 모든 것을 다 했다고 말하면 하나님 앞에 크나큰 교만입니다.

질문자님께 간절히 부탁 드리겠습니다. 혹시라도 지난 상처가 주님과의 만남에 자꾸 방해가 될 수 있으므로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면서도 정말 신뢰할 수 있는 크리스찬 상담가와 터 놓고 내적 치유를 병행하십시오. 그리고 구원의 확신이 있었는데도 혹시 윤리적 죄나 종교적 의무의 태만으로 자꾸 의심이 간다면 복음의 진리를 다시 깊이 묵상하시고 확실하게 붙드십시오, 그리고 사단은 언제나 문 밖에서 삼키려고 노리고 있으므로 무시로 그 방해를 물리치는 기도를 이왕이면 큰 소리 내어 입술로 시인하며 하시고 성령의 전신갑주를 입기를 소원하십시오. 그래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진짜 가난한 심령으로 완전히 주님 앞에 무릎 꿇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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