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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믿음과 행위, 구원과 행위와의 관계

논문신학성경 운영자............... 조회 수 2619 추천 수 0 2012.12.06 17:5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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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20xd/3558 

믿음과 행위, 구원과 행위와의 관계

 

1.  진리와 행위와의 관계

 

흔히 “진리의 문제가 아니면 목숨 걸고 싸울 필요가 없다” 라고들 한다. 이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행위와 삶의 문제는 진리에 관한 교리보다 절대로 중요한 문제일 수 없다는 의미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상 교회에서 구원의 교리를 다룰 때 항상 문제가 되었던 것은 행위에 관한 것이었다. 교리를 믿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교리를 삶과 올바로 연결시키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더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무엇보다 삶과 행위가 결여된 교리는 하나님 편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개신 교회 안에 아무런 이의가 없다. 그리고 진실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선한 행위를 열매로 맺는다는 점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여전히 율법주의 가르침에 대한 경계가 있다. 반면에 형식적이고 외선적인 교회의 모습에 실망이 폭발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단순하고 분명하지만,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고 설명할 때는 지나치게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그 원인은 성경을 이해할 때 하나님과 인간의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이해하지 않고, 지나치게 단면적이고 지식적인 교리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영원토록 살아계셔서 변함 없이 신실하시고 사랑이 많으셔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모든 말씀을 진리로 믿는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과 결과를 초래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진리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또 다른질문이다. 삶의 세세한 문제들은 대부분 구원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많은 내용들을 보면 행위가 구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문제는 외면적인 행동은 내면적인 인격과 신념의 표출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삶은 진리에 관한 믿음을 표출하는 현장이다. 따라서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는 무엇을 믿는가 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이다.

 

2.  구원과 행위(율법)와의 관계

 

이 주제는 순서상 뒤에 놓여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항이기 때문에 먼저 다루겠다. 행위와 구원은 상관이 없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행위는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 누구를 또는 무엇 믿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믿고, 어떻게 그 믿음을 유지하는가도 동일하게 중요하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행위는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려는 노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행위이다.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스스로 구원을 성취해 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열심은 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거나 부정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거역할 뿐만 아니라 대항하는 역겨운 모습으로 나타난다(롬 10:2,3). 우리는 결코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다. 하지만 믿음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었다가 삼 일 후에 다시 부활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 기능이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가르침과 삶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를 구원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와 함께 세례를 받아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살아서 자신을 값으로 산 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행위와 구원의 관계에서 항상 갈등하고 있고, 잘 조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행위를 강조하면 율법주의라고 정죄를 하고, 삶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면 그것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니 목숨 걸고 논쟁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반대로 믿음만 구원의 방편으로 강조하다 보니 변화되지 않는 삶이 문제가 된다.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문처럼 반복적으로 외쳐지는 은혜의 교리는 너무 무가치하게 취급을 당한다. 이 교리는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본받고 따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의해 교묘하게 악용되어 왔다. 예수님의 무서운 경고의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고 그의 삶은 본받지도 않으면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주장하며 예수님의 이름과 믿음을 악용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마 7:15-26). 단순히 이신칭의의 교리로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의 구원을 논할 수 있는가? 이신칭의의 교리로 볼 때 마 7장에 나오는 위선자들은 구원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신약 성경에서 율법주의를 경계한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는 모든 종류의 율법 준수를 통해 의롭게 되려는 헛된 노력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죄 사함과 거룩하게 됨을 붙잡게 하려는 것이다. 둘째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의식법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행해야 한다고 고집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신약 성경이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의 기준인 율법 자체를 부정하고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율법과 자유는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처럼 서로를 보완하고 완전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모든 율법의 핵심과 요약인 십계명은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는 성도의 삶의 기준이다. 교회는 위의 두 가지 주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모든 성도가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도록 항상 가르치고 요구해야 한다. 이러한 요구를 율법주의라고 정죄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성도들이 전적으로 하나님만 신뢰하고 사랑하며 섬기도록 가르쳐야 하며, 부모와 형제자매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거짓되지 행치 않고, 범죄치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러한 거룩한 삶이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은혜와 율법을 서로 상충하는 개념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이 잘 조화되는 것처럼 서로를 보충하고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 흔히 선행을 강조하면 율법주의에 빠지고 은혜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항상 은혜를 받고 누리기 위해서는 거룩한 삶에 대한 요구를 해서는 안된다는 말과도 같다. 은혜로 받는 구원을 강조하기 위해 거룩한 삶을 구원의 서정에서 간과하는 것이 값 싼 은혜라면, 항상 은혜 속에서 살기 위해서 거룩하고 의로운 삶에 대한 요청을 거부하는 것은 거짓 은혜이다. 진정한 은혜는 비록 자신은 값 없이 선물로 받았지만, 그 선물에 담겨진 무한한 가치와 의미를 이해하면서 받고, 그것에 감사와 사랑과 헌신으로 보답하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한 삶은 은혜를 받은 자의 당연한 삶의 자세이어야 한다. 이것은 성도가 받은 은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어떤 은혜를 받았는가? 죄를 용서받는 은혜를 받았다. 자신의 노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 없이 의롭고 거룩해졌다. 그러면 당연히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획득한 의와 거룩함을 잘 지키고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은혜를 받은 자의 올바른 자세이다.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거룩하고 의로운 삶에 대한 요청을 받을 때, 그것을 율법주의라고 정죄하며 부담을 느끼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 요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죄성 때문이다. 도리어 우리는 은혜를 받은 이후에도 끊임 없이 죄와 싸우며 하나님의 거룩한 자유의 율법의 요청, 즉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는 신구약의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가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것들의 억압과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가 죄를 이기고 지배하며, 주권적으로 율법을 우리의 거룩함을 이루어가는데 사용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행위가 불신자의 구원이 아닌 성도의 구원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용하는지는 다음 주제들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3.   이신칭의와 행위와의 관계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는가? 이 질문은 다른 형태로 교회 역사에서 줄곧 제시된 질문이다.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달리 표현된다. 한 번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자가 구원의 여정에서 이탈할 수 있는가?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이 타락할 수 있는가?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답변하고 있다. 히 10:26절 이하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참고 히 6:4; 벧후 2:20, 21) 칭의는 누구에게 어떻게 주어지는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칭의는 믿는 자에게 절대적으로 완벽한 구원을 보장하는가? 성경을 통해 얻은 답은 그렇지 않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과 인간의 책임을 항상 동일하게 강조한다. 성경은 절대로 한쪽으로만 치우지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성경이 성도의 구원에 대해 언급할 때 결코 이신칭의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항상 삶의 문제, 더 나아가 구원의 문제로 전진하고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칭의와 구원은 서로 다른 단계에 있으며, 칭의가 구원으로 이행될 때 칭의는 꽃을 피운다.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의 이행이며, 마음의 결단에서 행동으로의 이행이다.

 

비유하자면, 칭의는 구원의 문으로 들어오는 과정이지 이미 구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선고 받은 칭의와 구원은 좁은 길을 따라 끝까지 종착지까지 나아감으로써 지켜지고 보장되는 것이지, 좁은 길을 버리고 돌아서는 자에게까지 보장된 것은 아니다(마 13:10-30).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려고는 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회복과 확장에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세상과 짝하여 자신의 행복과 영광만을 추구하면서도 마치 자기에게 구원이 보장된 것처럼 착각하는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경고로 주신 주님의 비유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구원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책임을 간과하지도 않고,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은혜를 무의미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리고 성경이 인간의 책임과 의지와 행위를 강조하지만 한 번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지와 섭리를 거스릴 만큼 절대적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성경은 이신칭의와 행위의 문제를 아주 정교하게 조화시키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다. 타락한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자신의 더러운 의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과 부활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은혜로 선물해 주셨다. 우리의 믿음은 단순히 그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은혜를 완성하기까지 이루어 가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믿음이다. 성경에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경고는 하나님과 화목하며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명령은 성경이 말하는 이신칭의 교리와 모순되지 않지만, 행위를 무시하고 이신칭의만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충돌을 일으킨다. 구원에 있어서 이신칭의와 행위와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행위가 구원에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고, 또 해서는 안된다고 결정해 놓고 논쟁을 시작한다. 하지만 행위는 구원과 아무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넬료를 예로 들면 하나님은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 고 말하고 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들고 믿은 것은 후에 베드로의 방문과 설명을 통해서였다(행10장). 구원에 있어서 이신칭의와 의로운 행위를 항상 대립적인 관계로 보는 사람들은 고넬료의 의로운 행위와 믿음의 시간적 순서, 그리고 고넬료의 경건함을 보시고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결정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고 할 때 이것은 어떤 부흥사들이 강단에서 외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무나 구원할 자를 선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무나 사람들을 선택해 놓고,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정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에 있어서 최선을 다해 일하고 계신다. 고넬료의 행위가 구원에 이를 만큼 완전한가? 그것은 절대적으로 아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구원을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의 구원은 절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주어진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람을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자주 바울 사도가 이신칭의를 강조한 의도를 왜곡시키고 있다. 바울의 강조점은 이신칭의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율법주의자들의 행위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며,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구약의 가르침과 신약의 가르침은 하나도 상충되고 모순되는 것이 없다. 심지어는 율법도 복음과 대립적이지 않다. 율법은 몽학선생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사람들에게 죄를 깨우치고,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신약에서 폐기된 것처럼 보이는 구약의 율법 의식들도 실은 폐기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 그것들은 단지 그림자였는데,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성취되고 완성된 것이다. 이것을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구약에서 이신칭의에 대립되는 행위 구원을 강조한 것처럼 보이는 구절이 많이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한 것이다.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믿음 못지 않게 행위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그의 모든 심판의 근거는 사람들의 행위에 의한 것이다. 에스겔 3:17-21 “…...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 ” 의인이 타락하는 것은 구약만의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신약에서도 분명하게 다루어지는 사건이다. 행위가 심판의 기준이라면 구원에 있어서도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내가 말하는 행위란 은혜와 믿음이 배제된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

 

4.  믿음과 행위와의 관계

 

믿음이란?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정의한다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여 그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기며,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의지하고 바라며 그분의 도우심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마 6:25-34).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확신하며 바라고 기대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이다(히 11:1).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은 분명하지만,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을 처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반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다. 히 11:1을 믿음으로 정의하든, 믿음의 성격으로 정의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믿음이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으며, 믿음은 항상 지적이고 의지적인 것을 뛰어넘어 위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행위를 씨앗처럼 품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결실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서에서 보는 것처럼 성경은 항상 행위가 없는 죽은 믿음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순종하여 이삭을 번제로 드린 것은 그의 믿음에 생명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이 반드시 어떠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수 없이 많지만 결국에 그 믿음의 성취를 체험한다는 점에서 생명력이 있다. 아브라함이 백 세가 되어서 이삭을 받은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다리는 그의 삶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삶의 세세한 행동의 발자취로 구성된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삶의 모든 발차취가 믿음에 의해서 옮겨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삶의 개별적인 발자취가 모두 구원과 직접 관련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총체적인 발자취는 그의 삶의 목표와 방향, 즉 구원을 결정짓는다. 우리가 좁은 길을 가다가 잠시 길을 벗어난다고 구원을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아예 좁은 길을 벗어나서 넓은 길로 간다면 절대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심지어는 한 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자비와 구원을 간청한 강도도 그 구원의 서정이 극도로 짧았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길을 버리고 이 좁은 길을 통과한 것임은 분명하다.

 

인간의 선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선한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당연히 하나님을 복종하며,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복종하는 한 그 자체로 선한 존재였다. 그리고 인간의 선한 행위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서 사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며,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복종하지 않고 행해지는 선한 행위란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을 닮지 않은 선한 존재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삶 자체는 하나님의 형상이어야 하며, 하나님을 닮은 선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신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불복종은 단지 그가 단 한 가지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께서 잔인하게 자신의 의로우심을 기준으로 하여 심판하시고 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선한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와 타락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그리스도인이든 불교인이든 무슬림이든 미신을 믿는 존재이든, 심지어는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모두가 선한 행위를 해야 한다. 그것은 물론 구원을 받기 전이든, 구원을 받은 이후이든 하나님의 선한 형상인 인간이라면 마땅히 선한 행위를 해야 한다. 하지만 선한 행위, 즉 믿음의 열매가 없이는 구원도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선한 행위가 없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는 것이며,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5.   행위와 심판

 

마 5:20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본문은 이신칭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 즉 성도의 인격과 삶이 얼마나 높은 수준이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는 구원에 도달하지 못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성도가 구원에 이르는 의는 최소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위선적인 인격과 삶보다 못한 성도는 참 성도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산상수훈을 비롯한 신구약 모든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성도의 기준은 인격과 삶을 통해서 나타난다. 시 24:3-6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무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롬 2:6-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심판과 보응이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롬 2:6-8이 말하는 것처럼 평생 각자가 추구하는 삶에 대한 심판과 보응은 단지 불신자들에게만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시행된다. 성경이 이신칭의를 언급하지 않고 삶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이신칭의 교리만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초보에서 더 이상 진보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은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칭의를 선고받은 그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 가는 것이다. 심판은 내면의 상태와 인격의 모든 비밀을 드러내고, 모든 행위를 달아보는 것이다. 아무런 생각이나 행위가 없이는 심판도 보응도 없다.

 

심판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불신자들에게는 불신과 양심과 악행이 심판의 기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며 죄를 회개치 않는 죄인들에 대한 심판은 기정 사실이다(요 2: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불신자들의 죄에 대한 심판은 그들의 양심과 행동이 근거가 된다. 롬 2:14-15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둘째,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을 따르는 인격과 삶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람들 알에서 시인(고백)하지도 않고,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형식적이고 외선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심판과 보응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과 믿음에 대해서만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삶에 대해 집행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이 이신칭의에만 관련이 있는 것이 니라 믿음 이후의 인격과 삶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6.   결론

 

믿음과 행위, 이신칭의와 행위, 구원과 행위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행위의 문제는 어느 것 하나와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처럼 조화되는 관계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어떤 관점에서 강조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상당히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는 방법은 조화와 균형이 이루어지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천국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거룩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산 사람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의로워지지 않은 성도를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거룩한 삶을 살지 않는 성도를 생각할 수 없다.

율법과 율법주의를 혼동할 필요가 없다. 율법은 성도들의 삶에 여전히 선악을 구별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의 기준을 알려주고 인도하는 표준이다. 하지만 율법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에 비하면 초보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높아짐을 위하여 낮아지셨고, 우리의 부하게 됨을 위해 가난해지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가 진실하게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면 우리는 세상을 향한 욕심과 야욕, 쾌락과 안일함, 세상 영광의 추구를 배설물처럼 던져버리고, 단호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거룩한 삶을 통해 구원을 성취해 나가야 한다. 말세에 재물축적과 세상의 안락에 눈 멀어 삼손처럼 모욕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재산도 많고 성도도 많아서 나는 부자다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만과 무지에 빠진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영적 소경이 되어서는 안된다. 안티그리스도들에게 치부가 드러나 처참하게 짓밟히고 비난당하는 무기력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대한 처음 사랑과 충성도 팽개쳐 버려 더 이상 교회라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세상과 음란하게 짝하고 세속화되어 실상 죽어 있는 교회가 되어서도 안된다.

 

하나님은 촛대를 옮기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성도의 믿음만 살피시는 분이 아니라 또한 행위를 살피시는 분이시다. 특별히 목회자인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삶의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바울처럼 다른 사람의 구원을 도모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구원과 쓰임받음을 위해서도 절제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 9:26-27에서 바울의 외침은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 목회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설교를 중요한 일과로 삼으면서도 복음에 합당치 않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죽음에 이르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가 아니라 성경의 최고의 가르침이다. 주님이 오늘날에도 교회의 온전한 모습과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 하시는 음성이 있다면 그것은 회개하라는 것이다. 회개하라는 외침은 단지 불신자들에게만 들려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진실되게 따르지 않는 모든 성도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과 교회들은 회개해야 한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거룩하고 정결하며 충성된 증인이신 그리스도의 삶의 발자취를 따르며, 열심을 내어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는 사람, 행함이 없는 사람을 결코 사용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인의 마음을 잘 알고 착한 마음으로 충성하는 종들만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가장 영광스러운 칭찬과 보응을 받도록 더욱 낮아짐과, 더욱 가난해짐과,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참여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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