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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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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http://www.john316.or.kr |
데오빌로의 꿈과 비전
(누가복음 1장 1-4절)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인류가 소장한 가장 위대한 유산입니다. 성경이 왜 그토록 위대한 책일까요? 그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빼버리면 창세기는 신화가 되고,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서가 되고, 시편은 탄식의 시가 되고, 아가서는 연애소설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있기에 생명과 구원의 진리가 됩니다.
믿을 때는 판단력이 결여된 감정적인 믿음을 가지면 안 됩니다. 또한 헛된 꿈이나 자기 계시를 믿어도 안 되고, 믿거나 말거나 식의 황당한 체험을 믿어도 안 되고, 이단사설을 믿어도 안 됩니다. 믿을 때는 철저히 성경을 근거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계시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결국 참된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성경이 어떻게 있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기록자들의 ‘기록’을 통해 있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 중의 하나도 ‘기록’이고, 가장 큰 힘 중의 하나도 ‘기록’입니다. ‘기록’은 ‘기억’을 훨씬 능가합니다. 아이큐 200인 사람보다 기록 습관을 가진 사람이 더욱 성공적인 인생이 됩니다. 기독교가 2천 년이 지나도록 복음이 왜곡되지 않은 것도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기록한 복음 기록들 때문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이 구절에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란 표현은 진리의 객관성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당시 어떤 기록자는 지나친 논리적 비약을 했고, 때로는 사건을 임의로 축소하거나 확대시켰고, 때로는 특정 종파의 교리를 따라 사실을 왜곡하거나 신비한 얘기를 꾸며냈습니다. 신앙이 내면적이고 영적인 진리지만 그래도 진리의 3대 기준인 객관성, 보편성, 타당성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진리는 들을 때도 객관성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진리를 주관적으로 들으면 부작용도 많고 시험 가능성도 커집니다.
어느 날, 한 목사가 새벽기도회 후 목양실로 가자 한 교인이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오늘 새벽에 험담하지 말라는 얘기를 저 들으라고 했지요? 도대체 누가 고자질했습니까? 누군가 고자질하지 않았으면 목사님이 그 일을 어떻게 압니까?” 그때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성도님! 저는 성도님의 얘기를 듣지도 않고 또한 성도님이 들으라고 한 말도 아닙니다. 그리고 성도님이 새벽기도에 나온 줄도 몰랐습니다.”
인간은 다 부족하기에 설교에는 가끔 자기에게 콕 찔리는 말씀이 주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때 상처를 받았다고 목회자에게 찾아가 따지지 말고 객관적이고 전체적인 시각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처럼 자기 주관이나 편견에 빠지지 않고 폭넓게 객관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좋은 일꾼이 됩니다. 주관적인 사고와 감정에 빠지지 말아야 일을 시키는데 부담도 없고 후유증도 없게 됩니다.
‘네 생각’이 ‘내 생각’인 객관적인 시야가 통할 때 관계가 깊어지고 풍성해집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그런 관계였습니다. 신기하게도 디모데의 생각은 늘 바울의 생각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사역과 사람을 믿고 맡긴 것입니다. 객관적인 시야를 가지고 그렇게 서로의 통찰력과 능력과 진실을 믿어주는 관계를 만드십시오. 그처럼 인간관계에서도 객관적인 시야가 중요하지만 진리 문제에서는 더욱 객관적인 시야가 중요합니다.
왜 초대교회 문서 중에 객관성과 정확성이 부족한 기록들을 ‘외경’으로 여겼습니까? 외경들이 정경이 되지 못한 것은 기록에 인위적인 요소를 가미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실 이상이 되어도 안 되고 사실 이하가 되어도 안 됩니다. 복음은 사실 그대로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누가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표현은 복음은 확실한 사실이란 뜻도 있고, 복음의 목적이 온전히 이뤄졌다는 뜻도 있고, 또한 누가복음이 객관성이 담보된 문서란 뜻도 있습니다.
< 붓을 든 사람의 힘 >
그처럼 진리 문제에서는 사실도 중요하고 사실의 성취도 중요하지만 그 사실의 전승도 중요합니다. 역사를 누가 이끌어갑니까? 사실의 전승을 위해 ‘붓을 든 사람’입니다. 인생은 유한하지만 붓은 그 유한성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이끌어 가고 역사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은 대개 ‘붓을 든 사람’입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이 구절에서 ‘처음부터’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부터’란 뜻입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과 함께 한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해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누가도 그들 중 한 명이었는데 마태나 요한과는 달리 누가는 예수님을 친히 뵙지 못해서 복음서 기록을 위해 예수님과 함께 한 사도적 증거를 가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정확한 사실 그대로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과 동역하며 당시 교회의 최고 리더십을 가진 예수님의 직계 제자들과 그 외에 예수님의 사역에 직접 참여한 70인 전도대와 같은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누가는 자신의 기록에 도움을 준 사람들이 ‘예수님의 목격자’이고 ‘예수님 말씀의 일꾼 된 자’라고 언급함으로서 문서에 권위를 부여하고 내용에도 전혀 하자가 없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처음부터 그들이 전해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했다고 강조함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해 전해진 구전과 전승과 기록을 자기 임의대로 더하거나 빼지 않고 기록했음을 강조합니다. 그처럼 ‘목격자’도 중요하고 ‘말씀의 일꾼 된 사람’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붓을 들고 기록한 사람’도 중요합니다.
왜 의사였던 누가가 뒤늦게 붓을 들었을까요? 그는 앞서 기록된 기록들의 불완전함을 지적하거나 더 나은 기록을 남기려는 경쟁심으로 붓을 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좀 더 방대한 정보와 심도 깊은 연구를 통해 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담은 상세하고 정확한 복음서를 기록하려고 붓을 든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얘기들도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누가는 다른 기록들도 참고해 복음서를 기록했는데 그 중에 제일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은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쓴 마가였을 것입니다. 누가와 마가는 바울의 첫 투옥 때 접촉했고, 2차 투옥 때도 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둘은 바울을 중심으로 긴밀한 친분을 나눴기에 서로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복음서에는 중복된 내용도 많지만 그만큼 두 문서가 객관성이 보증된 정확한 문서란 뜻입니다.
< 누가와 데오빌로 >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 어떻게 기록했을까요?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누가는 고등교육을 받고 고등지식을 가진 헬라인 의사로서 전승된 구전과 기록들을 깊이 묵상하며 그 근원부터 살폈습니다. 그처럼 면밀한 심층 연구와 정확하고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깊은 묵상 중에 누가복음을 기록했고 그 복음이 널리 전파되도록 데오빌로에게 역사적 사실을 시간 순서대로 복음서를 써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데오빌로는 누가가 기록한 두 성경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수신자로 명시됩니다. 사도행전 1장 1-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이 구절에서 ‘먼저 쓴 글’은 누가복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후편>으로 불립니다. 누가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드로아에서부터 바울을 따르면서 바울의 평생 동역자가 됩니다. 그 후 바울의 제 3차 전도여행 때는 바울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갔고(행 20:5-6), 바울이 로마로 호송될 때도 동행했습니다(행 27:1-28:16). 그리고 바울의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의 곁을 신실하게 지켰습니다(몬 24, 딤후 4:11).
바울은 백내장을 앓았고, 일설에는 간질병도 있었습니다. 그런 바울에게 하나님은 의사인 누가를 붙여주어 바울의 건강도 살피게 하시고 교회사의 생생한 증언자 역할도 감당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능력이 탁월한 사람도 부족한 부분이 있게 하심으로 그 부족한 부분을 신실한 동역자를 통해 채움 받게 하십니다. 그래서 ‘동역’이 중요합니다. 동역후원자는 비전 성취의 최대 요소입니다. 바울이 바울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누가와 같은 신실한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데오빌로는 누구일까요? 그가 누구인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상징적인 인물이란 견해도 있고, 당시 상황을 고려해 가명을 썼다는 견해도 있고, 도미티안 황제의 조카이자 상속인이었던 클레멘스란 견해도 있습니다. 데오빌로란 이름은 ‘데오스(theos, 하나님)’와 ‘필레오(phileo, 사랑하다, 친구가 되다)’의 합성어로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 혹은 ‘하나님의 친구’란 뜻인데 누가가 각하란 명칭을 붙인 것을 볼 때 그는 실존 인물로서 예수님을 영접한 로마 총독이나 그에 버금가는 높은 공직자였을 것입니다.
당시에 책을 명망 높은 개인에게 헌정함으로 책의 권위를 높이려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헌정하는 형식을 빌려 복음서를 기록했지만 실제로 누가복음은 그에게만 헌정된 책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의 전반적인 흐름이 이방인과 약자에 대한 따뜻한 손길을 강조하는 선교마인드로 넘쳐 있고 탈유대적이고 범세계적인 것임을 고려할 때 결국 누가복음은 데오빌로나 헬라인 성도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성도들을 위해서 쓰인 책입니다.
< 누가의 후원자 데오빌로 >
누가가 복음서를 쓰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을 받아들인 데오빌로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서였습니다(4절). 어느 날, 데오빌로는 복음을 접하고 깊은 마음의 평강과 치유를 체험한 후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때 그는 감동 중에 구원과 영생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고 싶다는 사명감을 가졌습니다. 게다가 복음을 더 자세히 알고 싶었고 많은 일반 대중들을 위한 복음서의 필요성도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물질과 지위를 통해 위대한 기독교 문서를 남기기로 작정하고 복음을 잘 알고, 학식도 있고, 문필도 있는 헬라어에 능통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만난 사람이 누가였습니다. 어느 날, 둘이 서로 만났을 때 위대한 영적인 스파크가 일었습니다. 그때 데오빌로가 제안했습니다. “누가 선생님! 제가 복음서 기록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다 댈 테니 위대한 복음서 하나를 남겨주십시오.”
결국 데오빌로의 후원으로 지금까지 2천 년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위대한 누가복음이 기록된 것입니다. 당시에 누가복음은 데오빌로는 물론 초대교인들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에 대한 구전 기록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영지주의를 비롯한 수많은 이단들이 임의로 잘못된 기록을 남기는 경우도 많아서 정확하게 기록된 정경 문서의 필요성이 점차 커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도 필요하고 말씀을 잘 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록된 말씀(로고스) 자체’입니다. 기록된 말씀인 로고스는 이단사상의 바람막이가 되고 수많은 영혼들에게 안식과 평안을 제공하는 쉼터가 됩니다. 결국 누가복음으로 데오빌로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구축할 수 있었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을 믿음의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기록된 문서만큼 영향력이 큰 것은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열정은 대단합니다. 그 열정이 한류를 만들어냈습니다. IMF 때는 결혼반지와 금반지까지 내놓으면서 위기를 단번에 극복했습니다. 우리는 신명 나면 못할 것이 없는 민족입니다. 문제는 그런 열정적 감정은 지속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소중한 일도 후대까지 지속되거나 전승되지 않으면 효과는 반감됩니다. 그래서 거룩한 이성적인 생각으로 기록된 말씀인 로고스(logos)가 필요합니다.
살면서 즐거운 축제도 필요합니다. 축제는 풍선처럼 부푼 답답함과 스트레스를 일거에 날려 보내고 숨 막힐 듯한 삶의 틀에서 잠깐의 해방감을 줍니다. 그래도 축제에 함몰되거나 집착하면 안 됩니다. 화려한 축제 중에서도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심정도 살피고 자기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이성적 자세도 있어야 그 축제가 씁쓸한 뒷맛을 남기지 않는 기쁜 축제가 됩니다. 축제와 같은 신앙생활에서도 감정과 열정이 필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하나님 중심적인 거룩한 생각을 따라 기록된 말씀인 로고스입니다.
< 데오빌로의 꿈과 비전 >
결국 복음의 영향력 증대를 위해 문서 선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지금 저희들은 천년영향력의 비전을 가지고 성경 66권 전권 설교파일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 성경 전권 설교파일이 누가복음처럼 많은 사람들을 믿음의 반석 위에 놓고 이단 사상의 바람막이 역할을 하는 문서가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옛날부터 성경 중에 누가복음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누가복음을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앞으로 완성될 성경 66권 전권 설교파일 중에 제일 분량이 많으면서 제일 마지막에 완성될 파일은 누가복음 파일이 될 것입니다. 이제 한 달쯤 후에는 출애굽기 설교파일이 37번째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지금 추세로 가면 11년 후인 2023년에는 성경 전권 파일이 완성될 것이고, 2040년에는 영문으로 된 성경 전권 파일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 비전을 위해 데오빌로처럼 문서선교의 비전을 가진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데오빌로가 없었다면 누가복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데오빌로가 있었기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란 위대한 정경문서 2개가 빛을 볼 수 있었고 현재까지 ‘2천년 영향력을 가진 문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데오빌로가 누구인지 역사적인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는 자신의 물질과 지위를 선하게 사용해서 누구보다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제 데오빌로의 꿈과 비전을 가지십시오. 비록 그의 이름은 역사에서는 희미하게 남았지만 성경에서는 찬란하게 남아 있습니다. 아마 천국에 가면 데오빌로가 누군지 보고 싶을 것입니다. 바울도 위대했지만 바울의 건강도 챙겨주면서 바울의 사역을 힘써 도와주었던 누가도 위대했고, 누가를 후원해서 위대한 문서탄생에 일조했던 데오빌로도 위대했습니다. 바울이 되십시오. 아니면 누가가 되십시오. 아니면 데오빌로가 되십시오.
< 준비하면 축복의 때는 옵니다 >
얼마 전까지 건물은 교회성장을 위한 최대 요소였습니다. 그러나 건물로 인한 교회성장은 오히려 한국교회를 부실하게 만들었습니다. 건물로 얻은 성장은 건물의 수명만큼 짧습니다. 당대 최고의 설교가로 이름을 떨쳤던 스펄전 목사님의 저작은 지금도 도서관에서 빛을 발합니다. 앞으로도 그의 문서는 반영구적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설교했던 거대한 예배당은 나중에 20-30명만 예배하는 낡고 초라한 예배당이 되었습니다.
문서는 건물을 능가합니다. 문서는 사람 숫자도 능가합니다. 교회의 외적인 크기가 영향력의 크기를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요새 큰 교회 목사님이 자주 하는 말이 “교인은 많아도 진짜 일꾼은 별로 없다!”는 말입니다. 교인은 많아도 주님을 위해 기꺼이 종이 될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행복한 주인의식을 가진 종’이 많아야 하는데 요새는 ‘상처 많은 종 의식을 가진 주인’만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영향력은 오히려 약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외형이 작아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현재까지 완성된 36개의 파일들을 소중하게 보십시오. 그 파일들은 숨은 제자와 같습니다. 앞으로도 그 제자가 매년 2-3개씩 계속 늘어날 텐데 그 제자들을 통해 뻗쳐나갈 영향력을 생각하면 마음이 들뜹니다. 그런 천년영향력을 생각하고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나가면 실망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처럼 누구든지 뚜렷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자기 사명에 충실하면 얼마든지 작품 인생이 가능합니다.
일전에 한 성도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설교는 초대형 교회의 아무개 목사님 설교와 내용이나 예화가 비슷한 것이 많습니다. 베끼십니까?” 저도 30대 때까지는 설교 잘한다는 유명한 목사님들의 책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도에 인터넷 말씀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분들의 설교는 아예 보지도 않습니다. 저희 설교파일들이 점차 한국 목사님들에게 알려지면서부터는 그 문제에 더욱 경각심을 가지고 임하는 편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도 저작권이 90년까지 보장되는 사회가 오는데 저작권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새 논문 카피 문제로 뒤늦게 유명인들이 얼마나 큰 곤욕을 치릅니까? 그런 상황이기에 천년 영향력을 꿈꾸는 파일을 준비하면서 그런 문제의 소지를 남기면 안 되겠다고 여기고 지난 10여 년 동안 유명하다는 목사님들의 설교는 아예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영문 설교는 끊임없이 듣고 보면서 통찰력을 얻는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성도님에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성도님! 작은 교회 목사가 큰 교회 목사 설교를 카피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세요. 오히려 거꾸로인 경우도 많아요. 누가 설교 준비할 시간이 많겠어요? 큰 교회 목사님 중에는 좋은 설교와 예화를 발굴해주는 팀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경우에는 대부분 남의 글들을 뽑아주는 것이죠. 저작권을 걸으면 그분들이 걸릴 겁니다. 아무튼 저는 그분 설교를 지난 10여 년 동안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어요.”
요새는 인터넷을 통해 한 단어까지 상세히 검색되기에 저작권 문제를 소홀히 하면 나중에 창피를 당할 수 있습니다. 남의 설교를 참고해 설교하는 것이나 동영상을 게시하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그것을 자기 설교처럼 인터넷에 글로 공개해 게시하면 거의 정밀 검색에 걸립니다. 그처럼 자기 글이 아니면 함부로 인터넷에 올릴 수 없는 세상이기에 저도 그 문제에 특별히 신경 쓰며 설교파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제 데오빌로만 만나면 그 준비된 문서들이 활짝 꽃 피는 때가 올 것입니다. 누구든지 거룩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준비하면 가장 적절한 때에 하나님이 그 꿈과 비전을 뒷받침할 데오빌로를 보내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말고 거룩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계속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준비하십시오.
지금 인터넷 말씀사역을 통해 은혜 받은 분들 중에도 누군가 데오빌로의 꿈을 가진 분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데오빌로가 나오길 바랍니다. 특히 사업하는 분들은 그런 비전을 가지고 사업하십시오. 비록 그 이름이 역사적으로 찬란히 빛난 것은 아니지만 데오빌로의 역할도 위대한 역할이었습니다. 아무나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물 곁에는 언제나 헌신적인 동역후원자들이 있었습니다.
드라마 <대조영>을 보면 발해 건국 직전에 당나라를 탈출한 백성들이 천문령에 도달하도록 후방을 지키는 결사대를 맡는 ‘죽는 일’에 대조영의 부하들인 걸사비우와 계필사문과 흑수돌은 다 서로 자기가 그 죽는 일을 맡겠다고 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대조영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룩한 꿈과 비전은 선구자와 동역자가 굳게 잡은 손을 통해서 멋지게 성취됩니다. 이제 바울과 누가가 되든지 아니면 크게 성공해서 바울과 누가를 돕는 데오빌로가 되든지 해서 천년 영향력의 발판을 놓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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