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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산 (1) 절벽서 투신하려다 찬송듣고 기도
 
[역경의 열매]  국민일보   [2007.04.03 22:23]         
 

1966년 봄 군에서 제대한 나는 만화 창작을 계속할 수 없는 세상을 비관하면서 자포자기에 빠졌다. 초등학교 교사로 안면도 섬마을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삶을 마치기로 결심하고 낚시질로 소일했다. 그래서 여자관계나 신앙생활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68년 어느 가을날. 그 날도 저수지에서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는데 언덕에 자리한 전원교회에서 갈래 머리 여성이 내게 다가왔다.

“낚시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주일이니까 예배당에 오셔서 하나님을 믿어보세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그저 양심껏 살다가 저세상으로 갈 겁니다.”

그녀는 매주일 예배가 끝나면 낚시터로 찾아왔지만 나는 이름 석자도 묻지 않았다. 불평스런 원망만 뿜어내기 일쑤였다. 내 머리에는 ‘어차피 만화가로 살지 못해서 외딴섬 벽지 학교에 부임했는데 홀가분하게 살다가 뼈를 묻으면 그만이지’라는 생각만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매주일 안타까운 눈빛으로 내게 다가왔다. 목석 같은 내 마음을 녹여 하나님께 인도하려고 기도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2개월쯤 지난 어느 날부터 ‘총각 선생이 동네 아가씨와 쑥덕공론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나는 ‘원 세상에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아가씨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손 한번 잡아보지 않았는데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해명해주셔야지’라며 하나님까지 원망하게 됐다.

그런 소문이 들린 후 그 여성이 보이지 않았다. 은근히 그녀를 기다렸으나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 나는 밥도 못 먹고 밤잠도 이루지 못했다. 속이 답답하고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차가운 얼음을 가슴에 넣어도 시원하지 않았다. 상사병에 걸린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부모님께 찾아갔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딸에게 “믿지 않는 청년이므로 관계를 끊어라”고 엄명했다. 결국 속절없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지금도 그녀는 내 뇌리에 구원의 여인상으로 아련하게 남아 있다.

실연한 나는 잠 못 이루는 밤이 두렵고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려 바닷가 절벽에서 투신하려고 결심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극동방송 라디오에서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 양’이라는 찬송이 흘러나왔다. 순간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됐다. 이튿날부터 새벽기도와 주일예배에 출석했다. 그리고 1970년 2월 고향인 연기 연세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70년 3월, 대전 문화초등학교로 전보돼 대전 산성교회에 등록한 뒤 집사 직분을 받고 교회학교와 성가대에서 봉사했다. 그 후 속장과 부장으로 헌신하다가 83년 3월1일 장로 장립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공주대 학장으로 학교일에 매달리느라고 24년간 교회 일에 온전하게 헌신하지 못했다. 그 불충을 속죄하기 위해 나는 가족의 동의를 얻어서 그동안 모아온 만화기념관 건립 기금을 산성교회 건축기금과 장학헌금으로 헌납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는 신앙생활에 헌신하기 위해 2003년 목회학 박사를 취득하고 지난 3월초 한국기독교대학신학대학원협의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문화 사역과 예술 선교의 소명을 온전히 수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임 대표는… 1942년 충남 연기에서 출생했다. 한남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충남대에서 교육학·미술학 석사, 대전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초·중·고교 교사를 거쳐 82년부터 공주대에 재직 중이다. 90년 공주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창설을 주도하고 만화애니메이션 학회장, 대학영어 교육학회장, 새교육공동체위원, 문화산업자문위원, 한국간행물윤리위원 등을 역임했다.

2003년 미국 오클라호마주 오럴 로버츠대에서 목회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지난 3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임청산 (2) 기도 응답받고 만화가 삶 시작 

 

나는 1955년 공주사범학교 병설 중학교에 입학, 일반 고교 진학을 꿈꿨다. 그러나 유학자인 선친은 “사범학교 본과에 들어가 선생이 돼야 한다”고 미리 내 진로를 못박으셨다. 원하던 대학 진학이 좌절된 것이다. 난 실망했지만 선친이 워낙 엄해 별 말씀을 못 드렸다. 하지만 사범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대학 진학을 포기하지 못했다.

 

당시 하숙집에는 공주고등학교에 다니던 이기원(후에 약사가 됐으며 소년한국일보 신인 만화상 수상자)군이 만화를 매우 잘 그렸다. 그를 흉내 내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던 게 만화와의 첫 인연이었다. 그후 내 작품이 서울신문과 동아일보의 ‘독자 만화 코너’에 당선됐다. 만화 그리기를 본업으로 삼고 싶은 욕구가 더욱 커진 계기가 됐다.

 

만화참고서나 만화학원조차 없던 시골에서 ‘꺼벙이’ 작가인 길창덕 화백과 서신을 교환을 통해 기초적인 표현기법을 터득했다. 때론 동네 교회에 나가서 성경 이야기를 들으면서 만화 스토리를 구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앙생활이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19세의 어린 나이에 교단에 선 뒤 ‘교육자료’와 ‘새교실’ 같은 교육 전문지에 ‘개나리’라는 여교사 만화를 취미로 연재하면서 만화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했다. 63년 여름에 군에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사역병으로 차출되지 않으려고 군인교회에 가끔 나가기도 했지만 여전히 믿음은 미약했다. 자대 배치 후 비무장지대에서 미군과 함께 근무하는 행운을 얻었다.

 

미군들로부터 ‘성조기’와 ‘플레이보이’, ‘카툰’ 문고판 같은 만화를 수집, 세계 만화 자료를 스크랩할 수 있었다. 이처럼 철저한 준비를 해놓고 66년 제대했으나 만화가로 전업할 수 없었다.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안면도에서 총각 선생으로 안주하면서 낚시질로 소일하면서 남 모르게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낚시터에서 만났던 아가씨의 전도로 69년 봄 하나님을 영접했으니 전화위복이었던 셈이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 성격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대전 시내로 나가서 만화를 계속 그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다가 70년 3월, 마침내 기도응답을 받았다. 대전으로 전근해서 중도일보에서 ‘개구리’라는 아동 만화를 연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교사로서 신문만화를 담당하자니 무척 버거웠다. 71년 나는 절필을 선언했다. 그리고 방송통신대에 입학, 중등 영어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계절제 대학원 과정을 밟으면서 만화영상을 연구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산성교회 월보에 ‘투가리’집사를 연재하고 만화 전도지를 몇 편 제작하기도 했다. 대학원 과정을 마친 뒤 공주전문대학 영문학 교수로 자리를 옮기고 학보 만평을 담당했다.

 

90년 국내 최초로 만화예술학과 창설을 주도하고 92년 4월에 대전 둔산동에 청산만화예술관을 건립했다. 그리고 대전국제만화연구소도 개설하고 대전국제만화영상전을 개최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공주문화대학과 공주대 학장으로 일하면서 만화영상을 연구, 문학박사와 목회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시게 하는 등 넘치도록 복을 부어주셨다.

 

반세기에 걸친 만화 창작 활동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진리를 생활신조로 삼고 살아온 내 신앙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임청산 (3) 유교집안 온가족 기독교로 개종 

 

내 고향은 충남 연기군 남면 양화리 가학동이다. 집성촌인 우리 마을에는 신화와 전설, 민담과 설화, 민간신앙과 우상숭배 등의 구습과 악폐가 들끓어 기독교가 전파가 사실상 어려웠다. 나도 조부와 선친이 연기 향교의 전교였던 유교 집안에서 엄하게 자랐다. 20세 초등 교사 시절까지도 서당에서 무릎을 꿇고 사서삼경을 배워야 했다. 고루하고 답답한 유교의 보수성과 선친의 허례허식에 가까운 폐습에 염증을 내곤 했던 기억이 난다.

 

6·25전쟁 직후 나는 선친 몰래 동네 사랑방교회에 나갔다. 어린 시절부터 의젓하게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 일이 지금도 매우 아쉽다. 선친은 우리 4형제의 이름을 수(洙)자 항렬에 유교의 황금률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붙여서 지었다. 3남인 내 아명은 자동으로 예수(禮洙)가 됐다.

 

친구들은 '예수님'이라고 부르면서 놀려댔다. 그래서 만화에는 임(林)씨에 잘 어울리는 청산(靑山)이란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했다. 오늘날 현대문화와 선진예술을 창도하는 내 신앙적 개혁 마인드는 오로지 유교적 악습에 대한 반발에서 연유했음을 고백한다.

 

1964년 11월 군 복무 중 아버지가 낙상으로 갑자기 작고하셨다. 우리 가정에 시련과 역경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집안에 빚쟁이들이 들끓었다. 큰형님이 재산을 대충 정리해 빚잔치를 치르고 가족을 돌봤다. 그러다보니 형제가 모두 고학으로 대학에 진학해야 했고 가족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남동생은 서울대 입학을 포기하고 가정교사를 하며 서울교대에 다니다가 군에 입대했다. 그 고난은 우리 가족을 주님께 인도한 하나님의 역사였다.

 

1969년 먼저 하나님을 영접한 남동생이 군 후송병원에서 기도를 간청하는 바람에 온 가족이 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어설픈 합심 기도였지만 하나님께서 들어주셔서 동생을 치유해주셨다. 우리 형제는 선대에서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지 못하고 처소에서 각자 믿었기 때문에 교단과 교파가 모두 다르다.

 

둘째형 의수 집사는 시골에서 통합측 연세장로교회를 건립하고 4남1녀 가운데 박사 2명과 사장 2명을 배출했다. 나는 교수와 장로로 대전산성감리교회를 섬기면서 1남2녀를 외국에 유학 보내고 목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섬기는 동생 지수 장로는 서울흥인초등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1남2녀를 교사로 진출시켰다. 매부 정호원 목사는 개혁총회측 벧엘장로교회에 시무하면서 3남1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길러냈으며 매제 정규창 집사는 청주서문성결교회를 섬기면서 2남을 의사와 화가로 만들었다. 지금은 사촌과 육촌들도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반세기만에 전통적인 관혼상제를 고수하던 유교 집안이 한 가정도 빼놓지 않고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다. 우리 집안에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임청산 (4) 평생교육 즐거움 하나님 통해 터득 

 

나는 33세라는 늦은 나이에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62세까지 학부 과정(교육학사 문학사) 대학원 석사과정(교육학석사 미술학석사) 대학원 박사과정(문학박사 목회학박사)을 밟으며 교육학 영어학 영문학 미술학 목회학 등을 30년간 공부했다. 이런 다양한 학문연수는 모두 만화 예술과 만화 영상을 학문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욕구 때문이었다. 만학의 어려움도 겪었지만 평생교육의 즐거움도 체득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수석을 다퉜던 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대학 진학이 쉽지 않은 공주사범학교에서 초등교육학을 이수했다. 그리고 야간제로 편입학한 한남대와 충남대 교육대학원에서 영어교육학을 전공했다. 4학기 과정의 교육학 전공과 4단계의 교사자격 연수는 나중에 초중고교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교육학은 교회학교를 비롯해 성경공부와 설교준비, 선교사역에도 매우 유용했다.

 

한남대 학사 과정과 충남대학원 석사 과정을 거쳐 대전대 박사과정에서 영문학을 전공, 문학박사를 취득했다. 이런 공부도 후에 학생지도에 큰 도움이 됐다. 요즘 이런 전공들을 바탕으로 나는 다양한 콘텐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인터넷과 외국인 접촉, 원서 강독은 물론 영어성경과 영어예배 같은 교회 활동을 위한 콘텐츠를 개발할 계획이다.

 

나는 정규 미술과정을 이수하지 못했다. 만화를 좋아하다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학한 미술공부로 중등학교 미술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하기도 했으며 1990년에는 영문학 교수로 국내 최초로 만화예술학과를 신설하고 학과장이 됐다. 오래 전부터 나는 정규 신학과정이 아니더라도 야간제 계절제 휴일제 통신교육 등을 통해서라도 평신도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학문과 예술 활동으로 연기되곤 했다.

 

뒤늦게나마 오순절 신학의 총본산인 오럴 로버트 대학에서 2003년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실 평신도들이 일생 동안 목회자들의 지도만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묻어두는 처사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학문과 예술을 전공한 평신도들의 달란트가 땅에 묻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다.

 

교회를 개척하고 운영하는 단독 목회로는 민족 복음화와 해외 선교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것도 내가 뒤늦게 신학을 공부한 계기 중 하나다. 그래서 일반 성도들이 평신도 신학을 이수하고 각자가 속한 학원과 직장, 지역에서 자비량으로 선교 사역을 펼칠 수 있는 소프트 웨어를 개발 중이다.

 

또 내가 공부한 교육학 영문학 미술학 목회학 등을 만화영상학 연구에 원용하거나 학제간 연구로 기독교 관련 콘텐츠를 개발할 계획이다. 30년간의 기나긴 공부를 뒷받침해준 아내와 가족, 친지, 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협조에 감사할 뿐이다. 무엇보다 신개념의 문화 사역과 예술 선교 사역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서원한다.

 

임청산 (5) 믿음으로 하나된 아내 신앙 동지돼 

 

평생 독신으로 살려고 마음 먹은 적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새 생명으로 거듭나면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하기 시작했다. 1970년 3월 대전으로 전근오면서 조명호(전 경기연회 감독)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대전 산성감리교회에 출석했다. 교회 학교와 찬양대에서 믿음을 불태웠다.

 

결혼이 늦어지고 있었다. 맞선을 봤다. 1971년 봄에 담임 목사가 자신의 처제인 부안 유치원에 근무하는 권성숙 선생을 소개해줬다. 그녀는 통통하고 복스러운 모습에 명랑하고 활달한 성격이었다. 첫눈에 반했다. 무엇보다 독립유공자로 순국하신 권원호 목사의 유복녀였기 때문에 신앙 유산을 본받고 싶었다. 주말마다 만나 신앙적인 교제를 나누었다. 우리는 그 해 6월12일 양가의 축복 속에 약혼식을 치렀다.

 

9월25일 산성교회에서 목원대 이사장이던 도익서 선교사의 주례로 결혼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짝지워주신 반려자로 맞았다. 신혼 여행을 속리산으로 다녀와 단칸 전셋방에서 신혼 살림을 차렸다. 아내는 1989년 장로가 됐다.

 

결혼 이야기를 했으니, 내 자녀들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이 없었더라면 내 인생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2녀1남을 두었다. 아내가 유치원 선생인 관계로 양가의 모친들이 번갈아 돌봐주었다. 1973년 가을 큰딸 은영이가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났다.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면서도 교회음악 서클과 찬양 지휘 활동에 열심이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로열한의과대학에서 한의학을 전공해 미국 한의사 자격을 취득했고 미션스쿨인 미국 로스앤젤레스 홉국제대학원에서 결혼·가족상담 치료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재미교포 청년과 결혼해 1남을 두고 리버사이드 카운티의 사회복지사로 근무하고 있다. 한인 교회의 전도사로 아동부의 영어 예배와 악기 지도를 하고 있다. 전공한 식품영양학, 한의학, 음악학, 상담치료학 등을 융합하는 성서 건강학을 연구하고 있다. 1976년 여름 작은딸인 보영이가 태어났다. 보영이는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실내악단의 플루트 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언니와 함께 홉국제대학원에서 결혼·가족 상담치료학 석사를 취득해 대학 상담센터 연구원으로 기독교 상담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또 새벽선교회의 미주본부 선교국장을 맡고 있다. 미국 수능시험(SAT) 교육기관의 상담역을 맡고 남가주 사랑의교회 청년부에서 행정국장을 맡아 학습 교재를 만들면서 리더 훈련에 참여 중이다.

 

1982년 겨울엔 외아들 재환이가 태어났다. 대전 예술고등학교 미술부를 졸업했고, 공주문화대 만화예술학과를 졸업했다. 2004년 4월에는 일본 교토 세이카대에서 카툰을 전공하면서 매주 교토의 개척교회와 오사카교회의 청년부 예배에 참석하는 열성파로 성장했다.

 

아들 재환이는 공주대학교 대학원에서 만화학석사를 취득했다. 지난해에는 자전거 투어로 선교 활동을 벌였다. 8월15일 서울역을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일본 도쿄역에 무사히 도착한 후 “하나님 만세”를 세 번 불렀다. 자전거로 한달 동안 5000리 길을 완주한 것이다. 최근 주님과 동행한 ‘웰빙 사이클 여행기’ 출판을 준비중이다. 지금은 카투사에 입대해 원주에서 근무하고 있다.

 

자녀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고 있다. 각자의 직분과 달란트에 따라 하나님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 인생을 살면서 아내와 가족, 친지 교인들의 기도의 힘이 뒷받침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관심 속에 문화 사역과 예술 선교 활동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있는 것이다.

 

임청산 (6) 영어 성경반 열자 학생들 몰려 

 

나는 1960년대 초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했다. 보령 개화초등학교가 초임지였다. 그곳에서 햇병아리 교사로 2년을 근무한 뒤 도서 벽지인 서산 안중초등학교로 전보됐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재미있었으나 만화에 대한 욕구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고뇌 속에서도 아이들과 만화를 그리는 것으로 욕구 불만을 해소했다. 그때 제자들이 지금도 가끔 나를 찾는다. 70년대 대전으로 나와 대전문화초등학교와 서대전초등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만화 수업과 특기·적성 교육에 힘썼다.

 

칠판에 만화를 그려가면서 재미있고 쉽게 가르쳤더니 아이들이 공부시간을 무척 좋아했다. 만화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가까운 교회에 많이 출석시키기도 했다.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밤에는 한남대 영어교육과에서 공부했다. 주경야독이었다. 한남대를 무사히 졸업하고 서산 근흥중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에서도 만화로 재미있게 영어를 가르쳤다.

 

학생들은 “미술 선생도 아닌 영어 선생이 어떻게 저렇게 만화를 잘 그리지”라며 의아해했다. 때로는 한문도 만화로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해 복음을 전했다. 부여 여자고등학교로 부임해서도 만화를 이용해 영어를 가르쳤다. 수업시간에 잠을 자는 학생이 하나도 없었다. 특활시간에는 영어성경반을 운영했다. 영문으로 된 4복음서를 독해하면서 오르간 반주에 맞춰 영어 복음성가를 신명나게 가르쳤다. 학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나는 교내뿐 아니라 학교 밖에서도 화젯거리가 됐다.

 

나는 공부를 계속해 충남대 교육대학원에서 1급 영어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80년대 초 공주전문대 영문학 교수로 부임했다. 교양 영어를 담당했다. 거기에서도 만화를 그려가면서 쉽게 강의했다. 학생들이 만화 강의에 매료돼 수업 효과가 매우 좋았다. 그러면서 틈틈이 교내 기독 동아리를 탐방, 활동을 격려했다. 1990년, 수년간 기도한 보람으로 국내 최초로 만화예술학과를 개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그후 공주문화대 학장으로 선출돼 4년제 공주대와의 통합을 적극 추진했다. 당시는 대학간 통합 정책이 수립되지 않았을 때라서 교육부와 청와대, 국회 등 유관 기관을 찾아다니면서 내가 일일이 제안하고 건의해야 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로 공주대와 통합을 이뤄내고 영상보건대학장과 영상예술대학원장을 역임했다.

 

대학 구조조정에 힘쓴 공로로 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 6년간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가장 보람찼던 일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펼쳤던 ‘사계절 연중 꽃피는 대학’ 운동이다. 교육환경 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이 운동 때문에 캠퍼스에 1년 내내 꽃향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46년 동안 오직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해왔다. 만화를 이용한 수업으로 큰 성과를 거둬 우수 학급과 우수 교사라는 평판도 얻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수업 시간과 기독동아리 모임, 학생 개별 상담 등을 통해 학생들의 신앙 지도에 힘쓰고 있다. 좋아하는 만화를 그리게 하시고 평생 교육자로서 한길을 걷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다

 

임청산 (7) 순교자 가정 돌봐주신 하나님 

 

아내 권성숙 장로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교한 권원호 목사님의 유복녀이다. 장인이 일경에 체포되자 처가는 곤경에 처했다. 권 목사님이 담임하던 교회 교인들은 목자 잃은 양처럼 방황했고 옥중에서 순교하셨다는 통고를 받고도 수습할 사람조차 없었을 정도였다. 핍박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광복이 되자 유가족들은 자유를 찾아 월남했다. 하지만 고난은 계속됐다. 서울 부산 진천 청주 대전 등지를 떠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모님인 윤순덕 사모는 막내딸과 힘들게 생활하시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기도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

 

1971년 결혼 후 나는 장인이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반대하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교하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처가는 정부로부터 포상은커녕 독립유공자 가족으로서 혜택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인의 독립 유공 사실을 찾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한국교회사 기록과 기독신문잡지 기사, 인우증명서, 연회록, 증언록 등을 상세히 조사한 뒤 82년 포상을 신청했다. 하지만 ‘증거 자료 미비’라는 통고를 받았다. 실망했지만 다시 재판기록과 수형자 인명부 등을 찾아나섰다.

 

그러다가 82년 10월, 하나님의 은혜로 치안본부에서 장인의 신분장(재소자의 호적과 이력 등을 기록해 놓은 책)이 발견됐다. 기뻤다. 곧장 재심을 청구했다. 이듬해 장인이 돌아가신 지 40년만에 장모님이 장인을 대신해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89년에는 서울지방법원 지하 창고에서 재판기록과 판결문이 발견돼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88년 8월초 천안군수가 천안공원 묘소에 독립유공자 공덕비를 세우면서 장인의 행적을 새겨놓았다. 하나님은 순교자의 가정인 처가 가족을 버리지 않으셨던 것이다.

 

시계 장사를 하면서 이곳저곳을 떠돌던 처남 권성준 장로도 보훈장학금으로 2남4녀들의 학비 걱정을 덜었다. 공부방조차 없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자손들에게 지혜와 명철을 주셨다. 장손 광영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삼성생명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차손 창영도 서울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 서부지원 판사로 근무하다가 현재 미국에서 연수 중이다. 장손녀 애영은 인천교대를 나와 서울시립대 염인호 교수와 결혼했다. 하나님께서는 순교자의 자녀들에게 복을 쏟아부으셨다.

 

순교자의 큰딸인 권성렬 사모는 평택제일감리교회 조명호 감독과 결혼해 2남1녀를 뒀다. 외손자 조계성은 목원대 신학과와 감리교신학대학원을 나와 안산주암감리교회 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또 다른 외손자 조계훈은 한국 미국 일본 3개국 대학에서 공부한 뒤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공항에서 근무하고 있다.

 

외손녀 조은희는 정세영 목사와 결혼해 서울 충신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다. 그리고 차녀로 내 아내인 권성숙 장로는 슬하에 1남2녀를 뒀다. 17년간 모셨던 장모님을 86년 10월 천안공원 묘지 장인 어른 곁에 안장했다. 60년간 흘린 처가 식구들의 눈물을 말끔히 닦아주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임청산 (8) 만화예술학과 최초 개설 ‘기도응답’ 

 

대학 진학이 어려워진 나는 만화를 그리면서 불만을 배출해냈다. 청소년기를 불만 속에 보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서 보다 긍정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 만화가는 박학다식하고 다재다능해야 했다. 또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와 풍자, 해학도 풍부해야 했다. 다른 사람은 만화적 발상을 위해 줄담배를 피워댔지만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아이디어를 찾았다. 하나님께서 시시때때로 주신 능력으로 만화예술을 할 수 있었음을 고백하며 감사드린다.

 

저질 불량 매체의 대명사였던 만화·애니메이션·영상·게임학과를 국내 최초로 개설한 일은 우연이 아니었다. 80년대 초 한 기독교 종합대학에 만화 영상 관련 학과 개설을 제안했으나 얼간이 취급만 받았다. 만화를 예술이나 산업으로 대접하지 않을 때였고 더욱이 문화산업이나 콘텐츠 산업이라는 말조차 없을 때였으니 당연한 귀결이었다. 나는 크게 실망했지만 기도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1989년 공주전문대 교직원들의 협조를 얻어 교육부에 만화예술학과를 신청했다. 미술협회와 만화가협회의 추천서까지 첨부했다. 하지만 담당 부서에서는 윗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당시 정원식 교육부 장관과 장기욱 차관이 만화산업을 이해했던 것인지 만화예술학과 개설인가가 발표됐다. 몇 개월간 매스컴에서 화젯거리가 됐다. 가슴 벅찬 나날이었다.

 

나는 일찍부터 세계 각국의 관련 자료를 분석하고 만화산업 애니메이션산업 캐릭터산업 등 고부가 가치의 신종 산업과 유망 업종에 대해 연구해왔다. 그 결과 만화예술학과 교육과정에 몇몇 전문학원에서나 다루던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디지털 영상을 국내 최초로 편성하는 데 성공했다.

 

정보기술(IT) 강국인 우리나라 벤처업계에서도 선호하는 만화 영상 고급 전문인력을 양성하게 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지금은 일본 중국 등에서 우리나라의 만화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어 영상산업과 게임산업 인력 양성을 서둘렀으나 학내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께 매달린 끝에 영상학과와 게임디자인학과를 국내 최초로 개설했다. 이들 학과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문화콘텐츠산업과 연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국내 최초로 만화학 박사과정도 개설, 공주대 특성화분야로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다.

 

후속 사업으로 관련 학회와 연구소, 단체 결성을 추진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매달린 결과 1987년 한국대학영어교육학회를 결성했다. 초대 회장을 맡아 학회에서 소외됐던 전문대 영어 교수들의 위상 제고를 위해 힘을 쏟았다. 교양영어 교재를 발간하고 실용영어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앞장섰다. 또 96년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초대 회장으로 선임돼 만화 영상 학문화와 산업화 등에 일조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큰 어려움 없이 진척됐다. 하나님은 때마다 내게 감당할 수 없는 복을 부어주셨다.

 

부천국제학생 애니메이션 페스티벌도 성공적으로 개최해냈다. 92년 4월 대전 월평동 청산예술관에 대전국제만화연구소를 개설하고 만화 영상 관련 논문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또한 대전국제만화영상전(DICACO)을 16년째 개최해오고 있다. 이 대회는 세계 각국에서 수백명의 만화작가들이 참가하는 국제적인 행사이다. 뒤돌아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임청산 (9) 만화·영상 ‘선교 콘텐츠’ 개발 심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1990년, 국립 공주대에 만화예술학과를 국내 최초로 개설했다. 갑자기 매스컴에서 화제의 인물로 떠올라 어리둥절했다. 신문과 잡지에서 인터뷰를 요청하고 방송에 잇달아 출연했다. 연말에는 KBS 코미디 대상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나는 만화의 저변 확대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홍보를 위해 초청에 적극 응했다. 정부 기관의 문화예술 정책, 지방자치단체의 만화애니메이션 행사, 다른 대학의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개설, 기업체의 만화영상사업, 언론사의 만화애니메이션 심사, 학부모의 자녀 진로상담 행사에 초청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나는 ‘만화 전도사’ 역할을 자임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하나님께 지혜와 능력을 달라고 기도했다. 만화영상산업이 우리 사회에 점차 널리 알려지면서 정부에서는 나를 문화산업자문위원과 한·일 문화교류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만화 애니메이션 캐릭터 게임 영화 음악 공연 방송 인터넷 모바일 등 콘텐츠 개발에 초점을 맞췄다. 한편으로 문화예술 장르와 매체를 성경공부와 설교자료 등 기독교 관련 콘텐츠로 제작, 하나님 사업에 활용하려는 시도도 계속됐다.

 

94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현대교회 장로로서 서울대 교수, 이화여고 교장 등을 역임한 정희경 만화심의분과 위원장을 만났다. 정 위원장은 내게 부군인 이연호 회장이 추진하고 있던 덕림공업전문대학 설립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나는 “고부가가치의 문화콘텐츠를 연구 개발하는 문화산업 계열 소프트 관련 대학으로 특성화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결국 내 제안이 받아들여져 처음 설립 계획이 전면 개편됐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였다.

 

96년 설립자의 아호를 교명으로 삼아 문화산업을 특성화한 청강문화산업대학이 개교했다. 신앙 가족인 정 이사장과 이수형 학장이 운영을 맡고 있으며 유니베라 이병훈 사장이 지원하고 있는 믿음의 대학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대학으로 정평이 난 이 대학에는 현재 영상애니메이션 만화콘텐츠 게임산업 공연산업 디자인산업 정보통신산업 생활문화 휴먼케어 등 8계열에 24개 학과가 설치돼 있다.

 

다른 대학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만화영상도서관과 만화역사박물관도 설립, 관련 행사를 개최하는 등 한국 만화영상계에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인간과 자연, 문화를 사랑하는 청강학원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져주실 것으로 믿는다. 98년 공주문화대학장과 새교육공동체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국회의원이던 정 이사장 성원으로 지역대학간 통합과 정부의 교육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직업교육 분과에서 문화산업과 관련된 신종 산업과 유망 업종을 창출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전국 각급 학교를 순회하면서 교육 현장을 살펴보고 대학 운영과 국가 정책에 반영했다. 이런 노력으로 교육자 연공상과 녹조근정훈장(2002년)을 받았다. 침체된 한국 교회의 부흥을 위해 21세기에는 새 문화산업을 기독교 관련 콘텐츠로 개발해 선교에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임청산 (10) 만화+기독교육 연구로 박사학위 

 

1997년 박사학위도 없던 내가 공주문화대 학장을 맡게 됐다. 교수들이 직선제로 선출했지만 당시 대학사회 풍토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 스스로도 '기적 같은 하나님의 역사'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하며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학장에 취임하자마자 공약 사항이었던 '문화대학 4년제 승격'을 기도하면서 추진해 나갔다. 하나님께서는 '공주대와의 통합'으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 교직원과 지역사회 모두가 축하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학장으로 선출되자 박사학위 취득 문제가 급선무가 됐다. 하지만 교수 생활과 대학 운영에 바빠 논문을 쓸 시간이 없었다. 하나님께 지혜와 명철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하면서 만화와 문학, 신학과 연계한 학제간 장르간 매체간 통합 연구를 시도했다. 전 세계적으로 처음 시도된 일이었다. 대전대 대학원에서 영문학으로 박사과정도 밟아나갔다. 그러면서 '문학과 만화를 연계해서 글과 그림으로 비교할 수 없을까'란 생각을 하게 됐다.

 

곧 문학과 만화영상의 표현 내용이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해냈다. 짧고 이미지적인 시와 카툰, 길고 스토리적인 소설과 코믹 스트립스, 동적이고 연출적인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을 서로 비교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98년 '문학과 만화의 상관성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마침내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문화 사역과 예술 선교를 펼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임열수 총장님 추천으로 미국의 오럴로버츠대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과정에 등록했다. 문학박사 학위 논문을 쓸 때처럼 신학과 만화를 연계해 기독교 교육에 만화영상을 활용하는 방안을 집중 연구했다.

 

이를 위해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구두 설교와 기록 영화, 애니메이션 실사극영화 등을 5분씩 제시하고 선호도와 반응을 분석, 대안을 마련했다. 논문 심사 과정에서 브렌켄리치라 교수로부터 "처음 보는 내용의 논문"이라는 칭찬과 격려를 받기도 했다.

 

2003년 '만화영상을 활용한 기독교교육'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는 논문을 쓰면서 평신도신학과 문화신학, 예술신학, 미래신학 등이 신학대 교육과정에 편성돼야 한다고 느꼈다. 목회자들이 현대 기독교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고 활용해야 교회가 부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사회는 영어가 세계적인 언어로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교회마다 영어성경과 영어예배 등으로 청소년을 교육시키고 있다. 따라서 영어 및 기독교 교육과 관련된 만화게임 콘텐츠를 개발, 교회학교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양한 학문과 예술을 전공한 평신도들이 각자의 은사를 활용, 교회 부흥과 민족 복음화에 헌신해야 한다. 나도 앞으로 배운 것들을 활용해 각종 콘텐츠를 개발해낼 계획이다. 앞으로 가족 친지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축복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문화 및 예술 선교 사역에 헌신할 작정이다.

 

임청산 (11) 동생 치유기도하다 온가족이 믿음 

 

우리 가정은 전통적인 유교 집안이어서 기독교로 개종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은혜로운 일이 일어났다. 군대에서 병을 앓던 남동생 지수가 간절한 기도를 요청하면서 모두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이다. 동생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가족 전도가 저절로 됐다. 다른 가정에서 보기 드문 하나님의 특별하신 구원 사역이었다. 나는 앞에서 밝혔다시피 20대에 대학을 진학하지 못하고 만화가의 길도 늦게 들어섰다. 가정과 세상을 원망하다가 젊은 날을 허송세월하느라고 인생의 출발이 늦어졌다. 30대에 대학에 들어갔고 믿음이 좋은 권성숙 장로를 만나 결혼했다.

 

아내 권 장로는 독립운동으로 순교한 권원호 목사의 유복녀였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항상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했다. 내가 장인 어른의 독립유공 사실 발굴을 위해 애썼던 것도 이런 아내의 아픔 때문이었다. 아내는 아버지 얼굴조차 모르고 자랐다. 그 흔한 사진 한 장도 없었다. 장모님은 때때로 “아버지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돌아가시기 직전 네 얼굴을 보고 싶어하셨는데 형편이 어려워 면회를 못 간 것이 못내 아쉽다”며 눈물을 흘리시곤 했다.

 

아내는 월남 가족이라 호적이 미비해 사범학교마저 진학할 수 없었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주문진에 사시던 이모부 우종오 장로님을 만났다. 다행히 이모님댁에는 금강산 교역자 수양회에서 기념촬영한 장인 어른의 사진이 보관돼 있었다. 아내는 22년만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뵐 수 있었다. 아내는 그후 대전 산성교회 에덴유치원에서 20년간 봉직하면서 뜨겁게 신앙생활을 했다.

 

큰딸 은영이는 한의학을 전공하면서도 교회음악을 이수해 현재 한인교회 전도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둘째딸 보영이는 어려서 무척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러다가 대학에 입학, 기독교학과에서 상담치료학을 전공하면서 성령 체험을 하더니 활달한 성격으로 변했다. 현재 미주선교센터와 한인교회에서 근무 중이다.

 

40대에 들어서서 막내아들 재환이를 낳았는데 14개월만에 갑자기 장이 꼬여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이삭처럼 제물로 바쳐야 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목숨을 건지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하나님께 매달린 덕분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막내아들과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다. 2003년 8월, 나와 재환이가 경부고속도로에서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가 나는 바람에 중앙분리대와 충돌하는 큰 교통사고를 겪었지만 살아남은 것이다. 재환이에게 “우리 부자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셨으니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하자”고 다짐하면서 귀가했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현재 재환이는 카튜사로 군복무 중이다.

 

내 형제들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둘째형님은 시골교회를 지어서 헌납했다. 누님은 목회자의 아내로 내조하고 있다. 남동생은 장로로 출석교회를 섬기며 서울 흥인초등학교 교장으로 복을 누리고 있다. 여동생 지순은 교육자의 아내로서 두 아들을 의사와 화가로 길러냈다. 이처럼 가족들이 모두 하나님의 도구와 일꾼으로 쓰임 받으며 살 수 있음을 하나님께 정말 감사 드린다. 내가 늦게 공부를 하면서 직장과 교회를 섬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믿음의 가족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임청산 (12·끝) 24년 장로직 은퇴 목사 길로…  [2007.04.16 17:21]         

 

2003년 5월3일 미국의 오랄로버츠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박사를 취득했다. 학위 논문을 작성하면서 새 시대에 걸맞은 문화예술 선교 활동으로 교회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소명을 갖게 됐다. 21세기형 기독교의 문화 사역과 예술 선교 활동을 펼쳐 한국 교회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소명이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과학기술적 미디어와 문화예술적 장르를 융합해 활용하는 일에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 문화와 예술을 창출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사명인데도 말이다. 문화·예술계의 핵심에 있는 나 같은 사람이 담당해야 할 일들이다.

 

21세기는 ‘평신도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신도들은 요즘 개인적인 부담이 적은 대형 교회로 몰려가 기독교 문화를 즐기는 데 안주하는 경향이 짙은 것 같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최근 교회 문화와 예술이 부상하면서 새 시대에 부응하는 복음 전도와 선교 전략이 교회마다 펼쳐지고 있기도 하다. 은사 계발과 팀워크 훈련으로 다양화 전문화 특성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성도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일이 있다. 신앙공동체적 사랑과 나눔, 섬김의 문화예술 선교 사역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해야 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개개인의 특기와 적성 취미 소질 재주 능력 등 천부적인 탤런트와 은사를 갖고 있다. 목회자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또 새로운 기독교 문화를 창조하고 기독교 예술을 활용해 교회 부흥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

 

그리고 평신도들은 전도와 선교 교육 상담 치유 복지 구제 봉사 건강 체육 취미 오락 등 각종 문화선교 영역에서 헌신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문학과 음악 미술 화상 영상 무용 연예 영화 등 예술선교 분야에서 봉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도들은 섬기는 교회뿐 아니라 각자가 속한 학원과 직장, 지역에서 문화예술 선교 활동을 적극 펼쳐야 한다.

 

나는 지난 3월3일 24년간 섬긴 장로직을 은퇴하고 서울 이화여대에서 한국기독교대학 신학대학원협의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만화를 비롯한 문화예술 선교 사역에 더욱 매진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대전시 선화동 현대빌딩에 ‘세계문화예술센터’를 개설했고 ‘한국문화예술선교회’와 ‘한국문화예술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평신도들을 상대로 문화 사역과 예술 선교에 관한 신앙 강좌를 열고 있다.

 

또 평신도 개개인의 탤런트와 은사에 따라 행동하는 체험적 신앙생활을 교육하고 있다. 이와 함께 21세기의 문화 신학과 예술 신학, 그리고 평신도 신학과 미래 신학을 특성화하는 평신도 사역과 문화예술 선교 활동을 전개할 방침이다. 앞으로 문화예술 선교의 신학적 체계화와 선교회의 조직화, 교육설교 자료의 콘텐츠화가 목회자인 내가 감당해야 할 연구 과제로 남아 있다.

 

그동안 부족한 저의 간증을 읽어주신 국민일보 독자들에게 감사 드린다. 앞으로 하나님의 섭리 아래 펼쳐질 문화예술 선교 사역에 기도와 관심으로 동참해주시길 부탁 드린다. 21세기의 문화예술 선교 사역을 위해 이 한 몸 바칠 것을 하나님께 서원한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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