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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 모세를 예비하심

출애굽기 김강호 목사............... 조회 수 2139 추천 수 0 2012.12.12 20:4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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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2:1-25 
설교자 : 김강호 목사 
참고 : 은혜와평강교회 http://www.gap.or.kr 

제 3 강 구원자 모세를 예비하심

  

성경을 해석할 때 우리가 쉽게 빠지는 함정이 있다. 뭐냐면 그냥 차례대로 읽어 가면서 해석을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완결된 계시를 가지고 있고 역사의 정점에서 앞뒤로 해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우리는 출애굽기가 완전히 기록된 책으로 주어졌다. 그러니까 출애굽기의 전체적인 윤곽을 가지고 부분을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부분을 해석할 때 다른 길로 가지를 않을 수가 있다.

 

2장을 해석하면서 그런 점들을 보겠다. 히브리 원문 성경에서는 2장의 분해가 제일 끝에 있는 23-25절 거기는 다른 문단으로 분해되어 있어도 1-22절까지는 그냥 한 문단으로 되어 있다. 그래도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혁 성경의 구분도 내용상 잘 구분된 것이니까 그 구분법을 따랐다.

 

여기 2장에 있는 이야기는 너무 잘 아니까 달리 읽는 시간을 가지지 않고 바로 해석을 하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남자아이를 다 죽이라고 그랬는데 그 때 모세가 낳다. 그래서 모세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2장에 있는데 여기 보니까 처음에 모세 구원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모세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고 모세의 어머니하고 모세의 누나 이야기만 쭉 나오고 모세 이야기는 별로 없다. 그러니까 모세에 대해서 강조 점을 두어서 해석을 할 필요는 없다. 그 다음 2장 11절부터는 모세가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다가 사람을 죽인 기사가 있고 그 다음에 그 일에 실패하고 미디안 가서 장가간 이야기가 있고 그리고 끝에 구원의 때가 가까웠다 그런 하나님의 기록이 있다.

 

어떤 의미로 구원의 때가 가까웠는가? 바로 왕은 죽었다. 여기서 죽었다는 기사가 어디서 나오냐면 4장에서 나온다. 모세를 파송할 때 너를 찾는 자들이 죽었느니라. 거기서 나온다. 여기서 이미 먼저 기록하고 있다. 그 왕은 죽었고 그리고 백성은 고난 중에 부르짖었고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나서 구원자 모세를 부르신 기사가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은 모세 개인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기가 쉬운데 출애굽기는 물론 모세가 중요한 인물이지만 출애굽기에서는 레위 지파가 중요한 지파다. 그래서 여기 보면 레위 족속이 레위 여자에게 장가갔는데 이러이러한 자를 낳았다. 레위 지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모세를 보냈을 때 레위 지파 족보를 말하고 있다. 6장에 보면 족보를 말하고 있는데 레위의 위치를 말하면서 르우벤 시므온 그 다음 레위 르우벤 시므온은 나이가 기록이 안되고 그냥 단순한 아들 낳는 이야기만 기록이 되어 있는데 르우벤에 가서는 누구는 누구를 낳고 몇 살 때 죽고 쭉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출애굽기에서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레위 지파 뿐이다.

 

그리고 십계명에 두 돌판이 깨뜨려지고 언약을 새롭게 했을 때 그 때 하나님께서 헌신한 지파가 레위 지파다. 하나님이 집을 짓고 레위 지파로 봉사하도록 했다.

구약의 교회는 레위 지파다. 하나님의 출애굽기에서 언약 체결은 어떻게 보면 레위 지파를 위한 언약 체결처럼 되어 있다. 나머지는 레위 지파에게 포함되어 있다. 레위 지파 나중에 장자를 대신해서 성별이 되니까 그래서 출애굽기는 주로 레위 지파가 중점적으로 강조가 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서 구원자 모세를 말했을 때도 레위 지파가 장가를 갔는데 거기서 아들을 낳았다. 레위 지파에 있는 구원자 또 레위 지파에 대언 자가 있다. 모세를 대신한 아론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레위 지파에는 항상 모세가 하나님의 구원의 중보자요. 레위 지파인 아론이 바로 모세의 말을 자기 백성에게 말하는 자요 이 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냈다. 그렇게 성경은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모세 개인에 대한 것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언약 체결이 중심인데 그것은 모세를 대언자로 세웠어도 결국 하나님의 성소를 봉사하는 지파는 레위 지파다. 그런데 구원도 레위 지파의 구원자요. 제사장도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요 전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전체적인 관점에서 부분을 볼 때만 어느 지엽으로 빠져들지 않는다 그 말이다.

읽으면서 해석하겠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과 구원과 언약 체결에서 중요한 인물은 모세와 아론이며 여호와께서 속한 자로 봉사한 지파는 레위 지파이며 족보와 나이가 기록된 지파도 레위 지파다. 레위 지파에 대한 언급은 중요한 전환점에서 나타나는데 여기 2장1절에 레위 지파의 부부의 활동이 나타나 있고 그리고 4장 14절의 레위 지파의 아론이 말 잘하는 줄 내가 알지 않냐? 그가 네 대언 자가 되리라. 거기서도 나타나 있고 6장에 레위 지파의 족보가 있는데 거기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 구원자는 모세와 아론이다. 그들이 모세는 나이가 80세고 아론은 83세였다고 나이까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32장 언약을 새롭게 체결할 때도 레위 지파고 38장에 성소에를 지을 때도 레위 지파가 쓸 물건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시내 산에 언약이 출애굽기에 목표인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백성으로 언약을 체결하는데 있어서 출애굽기는 처음부터 레위 지파에 초점을 둔다. 우리는 구원에 열렬한 장면에 매력을 두는데 그것은 실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새로운 단계로 진행시키는 일이다. 어떻게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으심으로 그것이 구원의 일이지 그냥 애굽에서 구원했다 거기다가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된다 그 말이다. 그런데 그 언약 체결에서 초점은 레위 지파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모세를 예비함에 있어서 레위 지파의 결혼을 먼저 언급하고 레위 지파의 여자들이 믿음으로 여호와를 봉사한 사실을 기록한다. 이스라엘의 구원자 모세를 기록한 사실은 레위 족속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석달을 숨겼더니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매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를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더라 그런 기록으로 되어 있다.

 

이 앞에는 산파들의 믿음의 봉사가 있었지요? 그 이전에 요셉도 죽고 그 시대 사람들이 다 죽었다. 요셉의 시대는 탁월하게 애굽에서 능력을 행했던 시대다. 그 시대 사람도 다 죽었다. 그리고 번성하고 번성했을 때 큰 핍박을 받았는데 산파들이 믿음으로 봉사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예비하는데 누가 봉사했느냐? 레위 지파가 봉사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주권 적으로 일을 하셔도 항상 사람과 관계 아래서 일하신다. 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떠나서 일하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여기서 보니까 레위 지파 여자들이 봉사하고 있다. 이에 대한 신약 성경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히11:23절에는 믿음으로 모세가 낳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을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했으며 그렇게 되어 있고 그 다음 행19장21절에 보면 바로가 어린아이들을 내어 버려 살지 못하게 할 때 그 때 모세가 낳았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달을 기르더니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의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그렇게 되어 있다.

 

신약 성경에 이 기록을 언급하고 있다 그 말이다. 그러면 믿음으로 봉사했는데 모세가 낳았을 때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석달을 숨겼다. 그렇게 히브리서는 되어 있고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석달을 숨겨서 길렀다. 그렇게 되어 있다.

 

모세를 숨긴 신앙의 동기는 모세의 아름다움을 보고인데 모세는 그 부친이 보기에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라고 기록한다. 그 부친이 보기에 아름답다는 말은 여기 출애굽기에 기록이 되어 있고 히브리서에 기록이 되어 있고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다 하는 말은 사도행전에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부모들이 그 아이를 살린 것은 그 준수함을 보고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준수함을 보았다 하는 말은 요새 우리 어머니들이 아이를 보는 것하고 다르다.

 

성경에 하나님의 택하심과 관련되어 아름다움이 묘사된 인물은 다윗이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데 삼하16장12절을 보면 그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다. 그를 묘사할 때 그렇게 묘사한다. 여기서 모세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며 이것을 그 부모들이 보았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이다.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예비하신 자를 위해서 그 부모들이 봉사했다 그런 말이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 보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렇게 되어 있고 이 본문은 그 부모들이 보기에 준수했다. 그렇게 되어 있고 히11장에는 그 부모들이 보기에 아름다운지라. 그리고 보기에 아름다워서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석달을 숨겨 길렀다. 우리 같으면 너무 너무 예쁘니까 이 자식은 내놓지 안해야 되겠다. 그렇게 해석을 하는데 실은 부모들은 그런 자식도 정이 있지만 아픈 자식에게 정이 더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그런 문제보다도 성경에서 아름답다 특별히 지목해서 묘사했을 때는 그냥 우리들이 생각하는 쌍카풀이 졌느니 그런 문제들이 아니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아이에게 주신 은혜가 있다. 그 은혜를 부모들이 파악했다 그 말이다. 그래서 임금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안했다. 모세를 더 이상 숨겨서 키울 수 없게 되었을 때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갈대 상자의 넣어 바로의 딸이 목욕하는 나일강에 두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멀리서 그 결과를 살폈다. 그리고 나서 바로의 딸이 그 아이를 발견하고 상자 뚜껑을 여니까 아이가 울었다. 그래서 불쌍히 여겼다. 그가 히브리인의 아이로다.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미리암이 나타나서 그러면 내가 히브리 여인 중에 유모를 구해다 드릴까요? 그렇게 해서 자기 어머니를 소개했는데 젖떼기까지 어머니가 길렀다. 바로의 딸이 하는 말이 나를 위해서 이 어린아이를 젖 먹여라 내가 삯을 주리라. 이렇게 해서 길렀다. 그리고 아이가 젖을 떼니까 바로의 딸에게 데려갔는데 그래서 바로의 딸의 아들의 되었는데 그가 이름을 붙이기를 그를 물에서 건져냈다 해고 모세라고 불렀다.

 

그렇게 해서 애굽의 왕자로 교육을 받았다. 이 출애굽기에서 그가 바로의 딸의 아들이 되었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10절에 그의 아들이 되니라. 물론 이런 것은 구약의 장면들을 보면 노아의 방주도 이 갈대 상자의 같은 단어로 되어 있고 그도 물로부터 나와서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고 하는 것과 물론 비교할 수가 있다. 또 이런 것을 갈대 상자를 역청으로 칠하고 나무진을 칠하고 했는데 노아의 방주도 역청으로 안팎으로 칠하고 했으니까 똑 같구나.

 

그러니까 유형론에 조심하라 그 말이다. 비슷한 장면이 있다고 막 연결하는 것을 조심하라 그 말이다. 그런데 방주가 교회다. 그냥 역청을 칠하지 안했으면 물이 들어와서 다 가라 앉았을 것인데 역청을 칠해서 가라앉지 안했다. 역청은 무엇이냐? 안팎으로 칠한 보혈이다. 그러니까 물들어 온 교회 물 안 들어온 교회 그래서 물 안 들어 온 교회가 무엇이냐? 역청으로 안팎을 칠하면 물이 안 들어 교회다.

 

그러면 영혼이 산다. 그래가지고 이것이 교회의 모형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데 이 문제보다는 나일강의 심판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만 전부 장자가 죽었는데 그런 의미로 이스라엘 백성의 죽음이다. 거기서 유일하게 살아난 사람이 모세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살아났는가? 자기 어머니와 누이의 수고를 통해서 처음에는 생명을 건짐을 받았는데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니까 나일강에 버렸다 그렇게 되어 있다. 사도행전의 해석은 그렇게 되어 있다. 부친의 집에서 석달을 길리우더니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에 가져다가 자기의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학술을 다 배워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그러니까 나일강에 버렸을 때는 더 이상 키울 수 없었기 때문에 버린 것이고 버렸는데도 자기 누나가 따라가서 대책을 세운 것을 보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실은 모세가 살았다. 그런데 그 때부터 모세는 젖뗀 후로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살았고 그리고 애굽의 모든 학술과 행사에 능했다. 애굽 사람으로 길림을 받은 것이다. 그런 의미로 모세가 살았는가? 죽었는가? 물에서는 건짐을 받았지만 히브리 정신은 완전히 죽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컸고 애굽의 모든 학문에 능통했으니까. 왜 제가 해석을 그렇게 하냐면 사도행전을 보니까 나이 사십이 되매 자기 백성을 돌아볼 마음이 생기더니 그렇게 기록하고 있고 처가살이 사십년 한 것도 사십 년이 차매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고 그 모세가 사십 년을 그 백성을 인도했는데 그들이 사십 년을 하나님을 배반하고 죽었다.

 

그것이 행7장에서 이스라엘의 배교 역사를 쭉 스데반이 처음부터 말했을 때 했던 말이다. 그러니까 거기서는 사십 살이 되매 사십 년이 차매 하고 사십에 대해서 강조 점을 두고 모세의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그런 스데반의 해석 가운데서 봤을 때 여기 모세가 물에서 건짐을 받아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그가 양육을 받았다 하는 것을 해석을 해야 하겠다 그 말이다.

 

더 읽고 해석을 하자. 그러나 모세는 장성하여 나이 사십이 도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은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한 것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의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죽였다. 지금 출애굽기와 함께 사도행전의 해석을 지금 읽고 있는 것이다.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다.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 화목 시켜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헤아려 하느냐? 그 동무를 헤하려는 사람이 그 동무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인 것같이 또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하니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였다. 그 이름의 뜻은 여기서 객이 되었다. 그 뜻이다. 모세의 이러한 행동을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도 더 큰 제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이는 것 같이 참았으며 말씀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이 시기를 나이 사십이 되매 하고 기술하고 출애굽기 2장을 두 번의 사십 년의 기간으로 나눈다. 물에서 건짐을 받은 모세는 애굽 궁전에서 사십 년 미디안에서 나그네로 사십년 그리고 이스라엘을 광야 사십 년 동안 인도하였다.

 

행730절 이하를 보면 사십 년이 차매 저희 말이 누가 너를 우리의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냐 하는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 떨기 나무 가운데서 보이사 천사의 손을 의탁 하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그렇게 기록한다. 왜 제가 이것을 이렇게 해석을 하냐면 이제까지 우리들이 이 부분을 해석할 때 아 모세가 처음에는 멋모르고 날뛰었다. 내가 내 힘으로 이 백성을 구원하리라. 하나님이 아직 부르지도 안했는데 그러다가 큰 실수를 했다. 아유 뜨거워하고 도망쳤지요? 그리소 사십 년이 되어 가지고는 하나님이 불러도 자꾸 못 가겠다고 사양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언제 자기 종을 부르느냐? 멋모르고 날뛸 때는 안 썼다가 나중에 자기가 다 꺾어지고 하나님의 능력만 일할 수 있나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 불러 쓰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자기를 관원으로 세우지도 안했는데도 자기가 재판장이나 되는 것처럼 살인을 했지않냐? 그런 살인자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겠느냐? 하고 도덕적으로 푼다거나 이렇게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서와 사도행전은 전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오히려 사십 년이 차매 자기 백성을 돌아볼 마음에 생겨서 억압받는 자기 백성을 구원했는데 그 다음날 이스라엘 백성이 누가 너를 우리의 관원으로 세웠기에 나를 죽이려고 그러느냐? 이 모세를 거절했다. 그가 미디안에서 사십 년 나그네 생활을 했는데 그를 거절했던 모세를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부르셔서 그를 이스라엘 백성의 속량하는 자와 관원으로 세우셨다. 이스라엘이 거절한 그를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세우셨다. 그가 사십 년을 너희들을 인도했는데 너희들이 그 때는 모세의 말을 들었더냐? 지금 그 말이다. 그것을 행7장에서 말하고 있다. 행7장은 성경을 도덕적인 교훈 모세의 인격이 살인을 했니 그런 말은 전혀 없고 모세를 불렀는데 사람이 너무 덜돼서 사람되게 하려고 사십 년 기다렸다 그런 말이 없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성경은 도덕적인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책이다. 더구나 구약에서는 윤리적인 성취를 풀어서는 안된다. 윤리적인 성취는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신약 교회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그것도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는 윤리적인 관계로 접근해서는 안되다. 모든 것은 창조와 새 창조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접근을 해야 되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도덕적인 법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격이 얼마나 되면 부르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 백성으로 부르셨을 때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고 자기 백성들의 믿음의 봉사를 통해서 일하셔도 그것을 도덕적인 방식으로 되었냐 아니냐로 해석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예로 구약의 사사들을 보면 나중에 도덕적으로 형편없다. 제일 삼손이 그렇다. 몇 번 여자 좋아하다가 눈 빠지고 죽었다. 그래도 하나님은 오히려 그가 죽었을 때 살아서 한일보다 더 큰일을 하게 하셨다. 도덕적인 문제들은 거론하지 않는다. 그런 성경이 비윤리적인 하나님이냐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은 드디어 신약 때 완전한 빛으로 드러난다.

 

어린아이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온전한들 어린아이의 도덕으로 모든 시대를 가르칠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누가 심부름 잘하고 말 잘 듣더라. 물론 그것도 다 컸을 때 어른의 도덕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 아이 때 도덕이지 그것을 모든 시대에 사람이 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줄긋기를 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성경은 도덕적인 방식으로 풀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모세가 사람이 되었냐 덜되었냐 이런 것은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어떻게 하나님이 예비하셨고 그 구원자의 어떤 특성이 있는가? 거기다가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모든 백성이 다 죽었을 때 하나님이 레위 지파 사람을 구원했다. 왜 레위 지파가 앞에 보면 장자로 삼았다. 그 장자를 구원함에서 그 전체를 구원할 약속을 진행시키고 있다. 그리고 장자 지파에 속한 자를 자기 얼굴 앞에 세움으로 전체를 자기 얼굴 앞에 세울 약속을 진행시키고 있다.

 

그러니까 그 완결된 빛가운데서 그 부분들을 보라 그 말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뒤에는 아직 안 나타났으니까 차례대로 읽을란다 해 가지고 느닷없는 신약 때 완결된 도덕으로 풀려고 그런다. 그것은 더 안 맞다 그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되겠는가? 조금 더 읽고 보겠다. 마지막 문단이다. 여러 해 후에 모세의 생명을 찾던 바로는 죽었다. 그것을 4:19절에서도 말씀한다. 너를 찾는 자들이 죽었으니 애굽으로 가라. 그런데 그 말이 있기 전에 여기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모세의 이야기를 하고 나서 바로 여러 해 후에 애굽왕 바로는 죽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극심한 고난 중에 부르짖었고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셨다. 어떻게 드디어 모세를 불렀다.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 여러 해 후에 모세의 생명을 찾던 바로는 죽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조상들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을 돌아보셨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예비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의 구원의 때를 여셨다. 그러니까 2장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예비한 기사다 그 말이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구원할 대표자를 부르는 기사가 3장부터 진행된다.

 

그러니까 이렇게 해석된 역사 기록이다. 무엇 때문에 이것을 기록하고 있는가? 하는 해석된 역사 기록이다. 이제 문제를 풀면서 설명을 하겠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아가 사살될 때 구원된 자는 모세인데 그는 레위 지파다. 나중에 보면 레위 지파가 장자 지파요 하나님의 성소를 봉사하는 지파다. 그러니까 온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어서 장차 하나님을 봉사할 레위 지파에 속한 자를 구원해서 그로 모든 백성의 구원자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대표 원리다.

모세는 누구의 활동으로 구원되었는가?

 

레위 지파의 여자들의 봉사를 통해서 구원된 것이다. 모세가 40년 동안 바로의 궁에서 양육 받은 의미는 그는 바로의 아들로 양육을 받은 것이고 애굽의 모든 학문과 행사에 능하더라. 그는 애굽 사람으로 양육을 받은 것이다. 나중에 이렇게 양육하려고 한 사람이 다니엘서에 보면 있었다. 귀족들을 뽑아다가 바벨론의 모든 학문으로 양육을 시키고 그 때 장학금을 받았지요? 바벨론의 궁전에서 거기서 먹으면서 나중에 특별 전형 시험을 보려고 양육을 받은 천재들이 몇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바벨론 궁전에 잡혀가서도 바벨론 궁전의 음식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았고 하나님의 그들에게 몇 배가 더 되는 지각을 주셔서 바벨론 궁전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하도록 하셨다.

 

모세는 실은 나일강에 던져졌을 때 죽은 것과 같다. 그는 버려진 것이다. 누가 데려갔다구요? 사도행전에서는 가져다가 그렇게 번역해 놨다.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길렀다. 그러니까 히브리인의 아들이 히브리인의 가정에서 히브리인의 교육을 못 받고 바로의 궁전으로 옮겨져서 그 아들로 양육을 받고 애굽의 모든 학문과 행동에 능하도록 양육을 받았을 때 그는 애굽의 왕자의 교육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모세에게 있는 히브리 정신은 죽어야 되겠지요?

 

사십 년은 이 때까지 다 죽음의 숫자였다. 노아 홍수 40년도 노아의 옛 세계가 죽음에 빠져 있는 그런 숫자요 물론 그런 의미로 노아에게는 믿음의 시련의 시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도 다 죽음의 의미들이고 특별히 다시 올라가서 40일을 굶었을 때 그 의미는 잘 드러난다. 그런데도 모세에게는 다른 시련의 시기다.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하시거든 요? 그런데 여기서도 사십 년을 바로의 궁전에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왕자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드디어 나이 사십이 되매 자기 백성을 돌아 볼 마음이 생겼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종살이했어도 거기 하나님께 소망을 둔 믿음의 산파와 믿음의 레위인이 있는 것처럼 레위인 중에 모세를 구원했는데 모세를 사십 년 동안 애굽의 궁전에서 바로의 왕자로 길렀는데도 그는 사십 년 동안에 그런 의미로 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백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다. 그냥 우연히 지나가다가 싸우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에서는 돌아 볼 마음이 생겼고 그 일을 위해서 그는 바로의 공부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애굽의 보화를 거절하고 고난받는 백성과 함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기뻐했다. 그리고 임금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멀리 탈출해서 멀리 떠났으면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 것처럼 하고 참고 기다렸다.

 

그렇게 되어 있다. 우리는 애굽 떠난 것을 출애굽에서만 보면 안된다. 우리는 40년 동안 모세가 완전히 애굽을 잊은 줄로 알고 있다. 나그넨 뒤로 그런데 이름을 붙였을 때 나는 이 땅에서 나그네 되었노라 게르솜이라 이름하였다. 그의 모든 소망은 애굽에 즉 하나님의 약속에 있었다. 그래서 이 출애굽기는 2장 끝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셨더라 하면서 모세를 부르고 있다. 모세는 그것이 이전에 자기가 왕자의 유혹을 받았고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서 구원 베푼 줄을 알도록 했는데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모세를 통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싸우셨다. 그런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40년을 늦추었어도 하나님은 모세를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모세를 세우셨다는 말을 처음부터 하신다.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를 세우 신줄 백성들이 안줄 알았는데 모르고 거절했다. 그 거절한 모세를 하나님은 다시 부르셨는데 그 때 모세는 하나님의 권능이 반드시 필요한 줄 안다. 그런 의미로 어떻게 봐서는 새로운 구원자를 예비하신 것과 같다. 그전에는 단순히 레위 지파의 구원자면 여기서는 친히 하나님이 구원자로 가신 것과 같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항상 출애굽기를 보면 언약 갱신 적인 의미가 나타난다. 두 돌 판도 첫째 돌 판은 깨뜨리고 다음 돌 판을 성소에 두고 메도록 되어 있다. 첫째 돌 판은 깨뜨려졌다. 중보자도 첫 모세 중보는 실패했었다.

 

그 다음 모세의 구원은 성공했다. 첫 번 구원자는 레위 지파의 구원자다. 그런데 두 번 째 모세를 보냈을 때는 그보다 더 확실한 언약을 한다. 나는 여호와라 내가 가서 건져내리라. 너는 나를 위해서 가라 그런 방식으로 구원자에 대한 약속이 더 진행되어 있다. 그런데도 그는 누구냐? 그들이 거절했던 모세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옛 언약 백성의 실패와 그리고 새로운 구원자에게 있는 완성들을 이런 문제를 같이 초점을 맞추어서 진행시키고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모세 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서 주지 못한 것을 새로운 모세 새로운 이삭을 보내셔서 하늘의 질서로 완성하셔서 영원한 구원을 주셨고 신약의 이스라엘은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실패로 끝난 이스라엘이 아니라 흠도 티도 없는 그런 완성된 교회를 세우셨다.

 

그렇게 항상 언약 체결에 있어서는 첫 언약과 함께 언약의 갱신 문제를 항상 담고 진행되고 있다. 나중에 보면 항상 이런 일들이 반복된다. 그런 일을 봐야 한다. 그래서 여기 모세가 40년 동안 바로의 궁전에서 양육을 받는 의미는 바로의 왕자로 양육을 받은 것이고 애굽의 모든 학문과 행사로 양육을 받은 것이고 그런 의미로 그는 애굽화 되도록 양육을 받은 것이다. 실은 그 시기에 모세는 죽어야 되는데 실은 죽지 않고 있다. 히브리 정신이 죽지 않고 있다. 그래서 40년이 차매 모세가 압제받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한 일의 성격은 구원자의 성격이다. 그래서 압제자로부터는 구원하고 형제끼리는 화목하고 하는 일을 그가 할려고 했다.

 

화목케 하려는 모세를 어떤 근거로 거절했는가? 누가 너를 우리 위에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세웠느냐? 너는 우리의 왕이 아니다고 했는데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 그렇게 성경은 해석한다. 모세의 미디안 40년의 의미는 나그넨 40년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 아들이 이름을 게르솜이라 붙였고 내가 이 땅에서 나그네 되었다 그렇게 하고 있다. 처가살이 40년이다. 그리고 3장 처음에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모세가 자기 장인의 양을 끌고 시내 산에 이르렀더니 그렇게 하고 있겠지요? 모세는 40년을 살았어도 그 땅에 정착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장가가서 아들을 두었어도 내가 이 땅에서 나그네 되었노라. 어디로부터 자기 친족으로부터 떠나 있다.

 

소망은 항상 자기 백성에게 있었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말이다. 그런데 40년이 찼을 때 그 40년 동안에서 모세 안에 있는 히브리 정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의  봉사하는 정신은 사라지지 안했다. 그래서 애굽의 40년 궁전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꺼진 법이 없고 그리고 자기 백성을 비림을 받고 이방 땅에서 40년 동안 나그네 생활을 했어도 모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꺼진 법이 없었다.

 

그를 하나님이 구원자로 세우셨다. 그렇게 해서 레위 지파에 있는 구원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가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의 집에 영접을 받은 이유는? 누가 너희들은 목자들의 손으로부터 구원해 주었느냐? 그렇게 해서 영접은 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가지 백성으로부터는 거절을 당했는데 이방 제사장의 집에서는 아주 큰 인물로 영접을 받았다. 자기 딸들만 일곱 있는데 목자들의 손으로부터 구원해 줬다. 그런 사람을 영접해야 되겠지요? 나중에 모세가 애굽에서 영접을 받았을 때도 구원자로 영접을 받았다. 그리고 그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주었다. 자기 백성으로부터는 거절을 받았는데 미디안 제사장의 집에서는 그 집안을 구원하는 사람으로 영접을 받고 있었는데도 내가 이 땅에서 나그네 되었노라. 자기 조상들에게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렇게 세웠다.

 

미디안에서 모세가 처음 낳은 아들의 이름은 게르솜이지요? 이스라엘의 출애굽기의 시기가 임하였음을 말하는 기록은 제일 끝에 있는 문단이다. 그 핍박하는 왕은 죽었고 그리고 이스라엘은 고난 중에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 언약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언약 성취를 위해서 돌아 보셨다. 원수가 죽었다는 것과 하나님이 그 언약을 기억 하사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는 의미 그런 의미들이 출애굽이 임하였다는 그런 의미들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기의 의미는 하나님의 약 속의 성취이다. 조상들에게 하신 약 속의 성취로 그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백성으로 성별을 시킨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는 모세의 이 식기를 나이 사십이 되매 자기 백성을 돌아볼 마음이 생기더니 나이 사십 년이 차매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부르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누가 너를 우리의 임금을 삼았냐? 거절당한 모세를 하나님이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속량자와 구원자로 세우셨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신학교에서 설교를 많이 한다. 당신이 구원받았으면 형제를 구원해라. 모세는 구원받았으니까 아 하나님이 왜 나를 구원했겠는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라고 그런 것이 아니냐 하고 사명감이 불탔다. 그래서 모세와 우리를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런 말이 아니고 레위 지파에 있는 구원자 레위 지파중에서 하나님이 구원자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구원자로 은혜를 입히고 아름답게 했을 때 그는 사십 년을 애굽 궁정에서 양육을 받고 그런 의미로 애굽화 되도록 버려졌는데도 그 안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열정 하나님에 약속에 대한 것은 꺼지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 백성은 그를 거절했는데 그는 나그네로 살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린 적이 없다. 하나님이 그를 다시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셨다. 그렇게 해서 처음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에 대한 문제를 레위 지파와 연결시키고 있고 처음 구원자의 실패와 그 다음 구원자의 성공을 말함으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갱신하는 문제들을 처음부터 깔고 진행하고 있다 그 말이다.

 

나중에 이 모세는 죽는다.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고 여호수아가 대신하고 있다. 첫돌 판도 깨뜨려지고 다음 돌 판을 받아서 그것을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첫 언약은 폐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런데 나중 이 모세를 보냈을 때는 그냥 하나님이 모세를 세웠다는 정도가 아니라 뒤에 보니까 내가 친히 가리라. 하나님의 약속이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전면에 나타나 있고 그리고 친히 보이신 이적으로 자기 백성들에서 자기가 함께 계심을 이적으로 나타내신다.

 

그렇게 해서 두 번 째 구원자를 보냈을 때는 하나님이 친히 함께 가신 방식으로 더 탁월하게 증거 되고 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출애굽기의 돌 판을 받았을 때도 처음에는 굶은 것만 나타나는데 나중에 계명을 받았을 때는 나는 여호와라 여호와로라. 거듭 자기 이름으로 모세에게 자기를 선포하고 그리고 영광을 보기를 원합니다 했을 때 손으로 모세를 덮으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지나가실 때 모세가 하나님의 등을 보았다. 첫 언약을 주셨을 때는 그런 영광을 보지를 못했다. 빽빽한 구름으로 있었고 안식일날 모세가 들어갔다. 빽빽한 구름이 전면에는 강조되어 있는데 그 다음 두 번째 언약을 받았을 때는 그런 구름은 강조되지 않고 언약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름으로 직접증거 되고 돌 판을 깨뜨려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언약궤 안에 보존되고 이스라엘 백성이 메고 함께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모세가 애굽에서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이 자기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자로 세우신 것을 깨달으리라.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를 거절했다. 그 다음에는 거절하지 못할 증거를 주셨다. 그런데 모세는 어떤 사람인가? 40년을 애굽 궁전에서도 40년의 미디안 생활에서도 그는 하나님에 대한 약속의 확실한 소망을 품고 있다. 그가 누군가? 레위 지파 중에서 택하신 구원자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처음부터 자기 백성과 함께 하는 구원 역사요 자기 백성 중에 믿음의 백성들을 분별해서 동행하는 역사지 느닷없이 누구를 건져내서 나와 같이 가자 이렇게 하신 적은 없다. 그 말이다

 

그리고 이 레위 지파가 법궤를 메고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지파로 구약이 진행이 된다. 이 레위 지파 없이 구약은 없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 해석되기 전에 바로 모세와 우리를 연결시키면 안된다 그 말이다. 모세 행동이 아무리 영웅스러워도 막 연결시키면 안된다. 그 다음 우리는 이보다 더 확실한 빛이 있다. 더 확실한 빛가운데서 부른다. 우리는 모세처럼 부르지 않는다.

 

우리의 모세는 새로운 모세다. 그분은 모세에게 내가 친히 함께 가리라 하신 그분이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바로의 권세에서 구원하신 정도가 아니라 어둠의 권세에서 영단번에 깨뜨리셨다. 그리고 우리를 그 군대로 부르지 우리를 모세처럼 구원자처럼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모세가 서 있는 삶이 우리의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승리의 군병으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니 우리는 모세보다 더 확실한 빛가운데서 믿음으로 봉사를 해줘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 시대적인 사명이 다르고 시대적인 위치가 다르다. 모세가 영웅스러우니까 막 우리에게 줄긋기를 해서 우리 종교적인 감정을 일으킨다고 해서 그것이 성령의 부르심은 아니다. 모세는 구원자에 대한 이야기지 우리보다 영웅을 닮아라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여기 보니까 이 영웅의 봉사는 믿음의 봉사인데 바로 믿음의 용장과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셨다. 그 믿음은 40년의 애굽 생활에서도 40년의 나그네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이 약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됐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조금만 세상에서 무슨 일을 당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세상 영광을 추구하고 그쪽 사람으로 동화된다. 특별히 처녀들이 멋있는 청년이 나타나면 그 집에 시집가서 전도하자. 더구나 아들까지 낳으면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셨구나. 그 아이 기르느라고 정신이 없다. 남편도 안보일 뿐만 아니라 정신이 없다. 그렇게 완전히 세속화되어 버린다.

 

그런데 하나님이 감사하게 우리를 굶게 하니까 죽자살자 기도해야 하거든.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모세는 그렇게 양육을 안 받았다. 핍박을 해서 죽인 정도면 그것은 핍박도 엉터리 핍박이고 모세를 건져다가 특별 양육을 시켜 버렸다. 여기서는 히브리 정신을 완전히 잊기 좋다.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를 죽이려고 한 것처럼 완전히 죽기 쉽다. 그래도 모세는 그 모든 것을 벼렷다. 그리고 고난받는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기뻐하고 그리고 애굽 궁전을 떠나는 것을 전혀 두려움이 없이 떠났다. 그리고 40년이 차매 하나님이 불렀을 때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다. 하나님이 그를 다시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참다운 구원자로 삼으셨다.

 

그랬는데 그 구원자를 너희들이 순종했던가? 아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이스라엘을 지으셨다. 그리고 성소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님이 집을 지었는데 그 집에 무슨 하나님의 집이었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완전히 창기의 소굴로 삼아 버렸다. 그런데 그들은 이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다 그렇게 하고 있다. 예수님이 새로운 성전 질서로 오셨다. 그것이 스데반이 하고 있는 것이다. 스데반에게서는 오히려 성전의 빛을 떠나는 것이 더 확실하다. 왜 본래 그들은 이방 땅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다. 바벨론 포로 때 성전은 불타 없어지고 그리고 돌아온 사람들이 성전을 지었지만 흩어진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히 성전은 의미가 더욱 멀어졌고 회당 제도다.

 

일년에 세 번씩은 올라와도 회당 제도다. 그래서 옛 제도의 끝남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제도가 완성된 것을 베드로가 증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 땅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의 대표로 스데반이 설명을 한다. 그래서 그들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고 성전은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스데반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같으면 이 정도 핍박했을 때는 조금 그랬다 가도 나중에 그냥 업고 가면 나를 이처럼 높여 주었는데 나쁠 것이 뭐여. 자기를 중심 해서 무엇이든 해석해 버리기 쉽다. 그런데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는 믿음으로 온전히 순종했다. 이 믿음의 용장과 함께 하셨다.

 

우리는 이 보다 더 큰 영광이 있다. 예수의 부활의 영광보다 더 큰 상급이 어디 있소? 이미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상급으로 주셨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야고보서에서 참다운 지혜를 얻어라 한 것처럼 조금만 좋은 것이 생기면 그것을 따라 자기를 해석하면 그것은 어둠이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 돈 많은 사람이 들어오면 대 환영하고 가난한 사람이 들어오면 멸시하고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옳은가? 야고보가 이야기하고 있다. 참다운 지혜를 구해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완전한 빛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님의 전쟁에 참여자로 불러내신 것이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도 조금만 영광스러우면 그렇게 하지를 않는다.

 

그전에 백화점에 황제였던 사람이 미국의 상무 장관할 때 주일은 시골 자기 교회 가서 주일학교 가르치기로 하고 그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여기서 보면 핍박이 두면에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게 해석하냐면 하나님이 모세를 쓰시려고 그래도 쓰시려면 일반 교육도 잘 받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무식해서는 안되니까 하나님이 애굽궁전으로 하나님이 섭리 중에 보내셨다. 가서 특별 교육을 잘 받고 나오니까 이런 지도자가 없잖아요? 이는 능히 애굽의 왕도 될 수 있는 지도자거든. 그렇게 양육을 잘 받았는데 드디어 하나님이 쓰려고 했는데 이 사람이 멋모르고 날뛰었다. 이쯤 되면 될 것이 아니냐 했는데 하나님이 실컷 고생해 보고 네가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아라. 하고는 40년을 들판에 돌려버렸더니 자기 나라말도 잊어버릴 만큼 말도 잘못하고 더듬더듬 한다.

 

요새 미국 교포들 오면 그런 사람 있지요? 하나님이 불러서 너 말해라 하니까 내가 어떻게 이런 말로 설교할 수 있겠냐고 그래서 완전히 k. o시켜 버렸다. 하나님 나는 못 갑니다 몇 번이나 모세가 사양한다. 그쯤 되어야 쓸만하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은 40년이 차매 자기 백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고 애굽의 보화를 그는 벼렷다. 그가 어떻게 양육 받았는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을 지도했을 때도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계명으로 양육했지 애굽에서 배운 지도력으로 한 것이 아니다. 모세가 그렇게 지도한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들은 교회도 조금 똑똑한 목사들이 생겨야 되겠다. 해 가지고 목사 부른데다가 적용을 시킨다. 목사는 대학교도 나와야 되겠고 그러나 배웠다고 교만하면 안되니까 겸손해야 되겠고 그리고 젊은 전도사가 좀 설치거든. 대학 나왔다고 목사는 지금 대학을 안 나온 목사인데 그러면 이 본문을 다 읽고 설교한다. 그런데다가 자기가 묘한 대학 나와서 사각모자 쓰고 사진 찍어서 벽에 걸어 놨거든. 목사 되고 나서 밤에 살살 다닌 대학 있다. 딱 붙여 놓고 양쪽을 공격하는 것이다. 교인들 무식하니까 배워야 한다 목사처럼 그것도 너무 껍죽껍죽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다.

 

먼저는 핍박했는데 레위 지파의 여자의 봉사로 살았고 그를 애굽에 궁전에 버렸는데 그는 그 모든 영화로 양육을 받고도 자기 백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하고 그가 쫓겨났을 때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하고 나그네 된 땅에서 참았다. 언제가 하나님의 약속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의 때가 되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불렀다. 그전처럼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을 위탁해서 보냈다. 내가 함께 가리라. 그렇게 해서 건져내셨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목사보다 더 큰 예수를 설교할 수 있는데 우리한테 적응성이 있어야 하겠다고 하고 예수님을 설교하면 적응성이 없어지고 목사나 반사를 말하면 적응성이 있는 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이 완성되게 때문에 드디어 우리를 부르심에 대한 확실한 적응성이 있는 것이다. 만일에 예수 안에서 역사가 완성되지 못하면 우리가 한 번 용장이 되어 보리라 해도 그 부름은 불안한 부름이고 진정한 부름도 안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구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진정한 부르심을 받을 수가 있고 우리는 애굽의 보화보다 더 큰 영광도 버리고 죽음을 이기고 걸어갈 수가 있다. 이런 용장들에 대해서 능히 세상이 저희를 감당하지 못했다. 히11장은 결론을 맺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만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믿고 세상을 봉사하는 것이다. 여기서 모세 인격을 설교할 필요가 없다.

 

질문에 대한 답.

어느 때는 르우엘 어느 때는 이드로 또 다른데 서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이제 그 이름들은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버지 이름하고 손자 이름하고 같거든. 우리는 그렇지 않아서 그냥 아는데 그렇게 이름이 같은 이름들이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장인인지 진짜 아버지인지 아니면 처남인지 잘 모른다. 나중에 보면 호밥으로 나온다. 그러니까 그렇게 잘 모른다. 그래도 우리가 그 계통을 잘 몰라도 불안하지 않다. 만일에 그런 이름이 해석되어 있어 가지고 이름을 다시 언급하면 왜 여기서는 이런 이름이고 저기서는 저런 이름인지 우리가 연구를 해봐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않고 단순히 이름이 여기 저기 불려졌을 때는 그냥 그런 이름으로 불린가 보다 하면 된다. 이제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장인이냐 처남이냐 하고 따지면 헛된 족보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고 딤전에서 말하고 있다.

 

족보를 풀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법을 풀면 그것은 안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더구나 야곱 같으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꿔졌다. 그러니까 이름들이 어떻게 쓰이는지 봐야 한다. 아브람도 이름을 바꿔 주셨다. 그런 이름의 변화는 중요하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이름을 불렀을 때도 여수룬 이렇게 부른다. 그런 이름들은 중요하다. 그 문맥을 보면 이름들이 해석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조항들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름이 있는가 보다 생각하면 된다.

 

주석들에서도 그 이름이 틀린 것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근거가 빈약한 가운데서 논리를 전개시키니까 받을 필요는 없다. 만일에 그 당시 배경을 알아서 이 의미를 해석해 내도 성경 해석에는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 그러니까 여기는 그런 이름으로 불린가 보다 하고 지나치면 된다.

 

이것을 가지고 모세가 이방 혼을 했느니 그런 것 따져서는 안된다. 더군다나 미디안 족속은 아브라함의 후처의 자녀들이다. 가나안 족속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방혼 했느니 해서도 안되고 오히려 자기 동족으로 버림을 받았는데 자기 동족 밖에서는 자기 딸들을 구원해 준 사건에서 영접을 받았다. 그래도 그는 이방 땅에서 나그네로 있고 항상 언약의 성취를 앙모하고 있다.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되었다. 모세를 죽이려고 한 사람도 죽었고 그리고 이스라엘이 핍박 중에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의 그들을 돌아보셨다. 모세를 통해서 그렇게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요셉도 제사장의 딸을 얻었다. 그 때 애굽은 전부 요셉에게 속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요셉을 팔았고 거절했다. 그런 면에 있어서 항상 구원자에 대한 약속과 연결은 된다. 그래서 모세가 그 아들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불렀다. 영접은 받았는데도 약속의 본 영역은 언약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40년이 차매 다시 불렀다. 아까 이름은 장인 이름을 이야기 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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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09 시편 곤고한 자를 건지시는 하나님 시107:10-14  김남준 목사  2012-12-14 2209
7808 시편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 시42:1-2  김남준 목사  2012-12-14 2954
7807 창세기 제단 쌓는 가정 창13:14-18  한태완 목사  2012-12-13 2436
7806 마태복음 맛을 잃은 소금 같은 우리 한국교회 마5:13-16  김동호 목사  2012-12-13 1843
7805 마태복음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 마16:13-20  김동호 목사  2012-12-13 2195
7804 시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23:1-6  김동호 목사  2012-12-13 2752
7803 히브리서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는 교회 히11:1-4  김동호 목사  2012-12-13 1968
7802 고린도전 사랑한다면 고전13:1-7  김동호 목사  2012-12-13 1707
7801 창세기 하나님과의 동행 창5:24  김동호 목사  2012-12-13 1878
7800 이사야 인카네이션 사11:6-9  김동호 목사  2012-12-13 2332
7799 누가복음 섬기는 교회 눅10:25-37  김동호 목사  2012-12-13 3076
7798 빌립보서 예수의 마음으로 빌2:1-11  김동호 목사  2012-12-13 2286
7797 마태복음 은사(恩事) 마25:14-30  황성현 목사  2012-12-13 2060
7796 창세기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2] 창12:1-3  김경형 목사  2012-12-13 3213
7795 창세기 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창12:1-3  김경형 목사  2012-12-13 2092
7794 마태복음 그물리라에 빛을 마5:14-16  김동호 목사  2012-12-12 1665
7793 창세기 땅을 정복하라 창1:26-28  김동호 목사  2012-12-12 2349
7792 베드로전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 벧전1:1-5  김동호 목사  2012-12-12 2192
7791 데살로전 칭찬과 격려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살전5:14-15  김동호 목사  2012-12-12 1746
7790 출애굽기 복된 만남을 위하여 출2:15-22  안효관 목사  2012-12-12 2247
7789 출애굽기 무언가를 준비하시는 하나님 출2:23-25  김종순 목사  2012-12-12 1950
» 출애굽기 구원자 모세를 예비하심 출2:1-25  김강호 목사  2012-12-12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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