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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창세기 궁극이............... 조회 수 2092 추천 수 0 2012.12.13 10: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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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2:1-3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아브라함 

창 12장 1절-3절.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들을 이 시공세상에 우리 멋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여러 가지 교훈과 간섭과 인도로 저희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에 주님을 만나봄에 있어서 어깨를 펴고 기쁜 얼굴로 들어갈 수 있도록 오늘날까지 훈련과 연단을 시키고 사랑해 주심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에도 저희들을 불러 이 자리에 인도해 주셨으니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한 이치라도 신앙에 도움이 되는 이치를 깨닫고 갈 수 있는 복된 자리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1절-3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 세상에는 수많은 인간이 살고 있습니다. 수 억억 인간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이상자나 정신이 부족한 사람은 잘 모르니까, 생각할 수가 없으니까 제외를 하고, 정상적인 사람치고 다 잘 살기를 바라고 원하고, 이를 위해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잘 사는 방법도 한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길이 있다고 제각기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말들이 모두들 힘 안 들이고, 노력도 하지 않고 잘 사는 비결이 무엇일까를 생각들을 하고 있지요?

 

그렇게 살면 잘 살 수 있는지 잘 모르겠으나 그렇게 해서 성공을 해서 사는 사람들을 예로 들어가면서 곧잘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런 말을 세상에서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시골의 문명의 혜택을 별로 받지 못한 사람들은, 미신이 많은 그런 사람들은 ‘큰 고목나무 밑에 가서 한 달에 한 번씩 고사를 지내면 잘 산다더라, 가까운 강이나 가까운 바다에 가서 물신에게 빌면, 제사를 잘 해 주면 잘 산다더라, 산중 법당에 올라가서 100일간 정성을 드리면 피눈물 안 나고 잘 산다더라’ 라는 말을 합니다.

 

비단 근대뿐만 아니고 수 천 년 간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몰록이나 아세라나 그모스나 바알신 등의 여러 신당을 만들어 놓고 ‘그것들을 잘 섬기면 민족이 잘 되고, 국가가 잘 되고, 개인이 잘 산다’ 라고 한다면 그 말이 과연 맞느냐? 이방인들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잘 사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성경대로 볼진대 그 말들은 하나도 맞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것은 잘 사는 방법이 아닌데도 그 운동, 혹은 그 짓을 하고 나가면서 자기네들 스스로 똑똑한 사람이라고 자찬을 할는지 모르지만 과학적 이치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것이 어리석은 사람인지, 똑똑한 사람인지가 판단이 쉽게 납니다.

우리 인간들이 보면 잘 사는 이유도 많지만 못 사는 이유도 많아요. 그런데 보통 보면 어떤 그 면에 무식해서, 알지를 못해서 고생을 하는 면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바로 안다고 하는 이 지식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지!

 

우리가 잘 사는 방편, 잘 사는 길, 잘 사는 이치를 안다면야 그 얼마나 좋겠느냐?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방인들이 일생 동안을 그 운동, 그 일을 해 나왔음에도 그들 나름대로 잘 사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들이 진짜로 맞는다면 왜 이때까지 잘 살지를 못하는가?

 

지식이 잘못되면 일생 동안 수고만 하고, 당대뿐만이 아니라 잘못된 그 지식을 그 후손이 받고, 또 그 후손이 받고 해서 계속 내려갑니다. 그렇게 내려가도 그들은 그 지식이 얼마나 비뚤어졌는지를 잘 모른다 그 말이지요. 이걸 아는 사람들이 볼 때 그 사람들이 얼마나 미련하게 보이겠느냐 그 말이지요.

 

모든 이치는 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아주 산골에서는 샘을 파서 먹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웬만한 도시는 상수도로 식수를 합니다.

 

수길(水道)을 아는 사람은 머리를 써서 땅을 파면 물이 나옵니다. 그런데 무식한 사람은 그 면을 잘 모른 채 ‘무조건 땅만 파면 물이 나온다, 땅속에 물이 있다’ 이렇게만 알고 아무데나 땅을 파니 거기에서 물이 나느냐 그 말이요. 말하자면 그게 똑똑한 지식이냐 그 말이지요.

 

지식이 비뚤어지면 남보다도 수고를 배나 더 들이고도 그 효력을 볼 수가 없고, 시간낭비요 정력만 소비하게 되고, 남은 것은 노쇠뿐이고 죽음밖에 없는 것을 우리는 헤아려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고로 우리가 하나의 예를 든 것이지만 우물을 판다고 할 때 지식이 앞서야 되고, 농사를 지어도 지식이 앞서야 됩니다. 바로 알고 수고를 해야지 무엇이든지 무턱대고 아무렇게나 하면, 이치가 없이 하면 절대로 잘 될 수가 없지요.

 

그런가 하면 아는 사람이 볼 때는 저 사람이 어리석게 보이는데도 그 사람이 수고나 노력도 하지 않고도 잘 사는 경우도 있긴 하지요.

 

우리는 예수를 믿는 이치도 바로 알아야 되겠는데 자기가 하는 것이 똑똑한 것 같으나 틀린 게 상당히 많이 있는 겁니다. 내가 소원하고 있는 것이라든지, 정직성이라든지, 진실성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나는 옳다고 알고 있고, 성의껏 믿고 있으니 신앙의 효력성이 있으리라 생각을 하고 힘을 다하고 노력을 다하면서 나가지만 이치가 어그러졌다면, 틀렸다면 땅은 팠으나 수길을 모른 채 땅을 파면 물은 없듯이 신앙의 효력성을 보지 못할 것이 아니겠느냐?

 

우리가 신앙생활을 성의껏 정성껏 하기만 하면 효력성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을 섬기고, 계명을 지키고, 십일조를 내고, 감사헌금을 드리고 하는 것들을 정성껏만 하면 효력이 있느냐? 지식이 비뚤어져 놓으면 신앙에 효력이 없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한국교회가 부흥회에서 설교하는 것을 보면 ‘열심히 해라, 정성껏 해라, 성의껏 해라, 기도 많이 해라’ 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이치도 없이 그렇게만 하면 옳은 것이냐? 수길도 모른 채 정성들여 땅을 파기만 하면 물이 나온다는 것과 같은 말인데 그게 맞는 말이냐 그 말이요. 땅을 파기 전에 지식이 먼저! 말하자면 땅을 파기 전에 먼저 물이 잘 날 곳을 찾아야 된다.

 

이것도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대로 되는 하나의 자연원리요, 자연이치지요. 이 이치에 비뚤어지면 안 된단 말이요. 우리가 생각할 때에 둘 중에 어느 것이 먼저겠느냔 말이요. 이치는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이 이치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로 믿는다는 것과 같은 말일 수 있습니다.

 

생쥐를 잡아다 놓고 이 생쥐가 황소가 된다고 믿으면 황소가 되느냐? 쥐가 소가 되느냐? 황소를 갖고 싶으면 쥐를 잡아다 기르지 말고 송아지를 기르면 될 것 아니냐 그 말이지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는 이치요, 이치는 믿음하고 연관이 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진리지식을 떠나서는 신앙이 없다 그렇게 봐 집니다. 또한 부분적으로 다 통하는 말인데 진리지식이 없으면 성화구원을 이루기가 상당히 힘이 듭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것의 강조점이 이치도 없이 믿음만을 말하는 걸 우리가 많이 봅니다.

 

어제 저녁인가, 아침인가? 테레비 뉴스에 나왔지? ‘평화통일 어쩌고’ 하는 그 종교인 말이요. 그게 하나의 연설이 아니고 그 사람의 정신이 그렇고, 그들의 종교성이 그래요.(주-그들은 기독교 사회주의 주장을 함)

 

그러면 그들만 그러냐? 신교에서도 그와 같은 정신 사상, 그와 같은 목적성을 가지고 신앙을 하고 있는 자들이 상당히 많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놓고 볼 때 꼭 쥐를 잡아다 놓고 믿으면 황소가 된다고 하는 것처럼 이치가 되지도 않는 어거지적인 말들을 한다. 그들의 말은 부드럽고 듣기 좋은 말 같으나 성경으로 볼 때에 그건 신앙의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이 땅에 숨겨 놓은 이치가 매우 많이 있습니다. 자연이치, 도덕이치, 생명이치, 신앙이치, 영적 이치 등 많단 말이요.

 

물이 날 수 있는 곳을 안다면야 조금만 파면 물이 날 텐데 지식이 없으면 수고만 하게 되듯이 하나의 쉬운 예를 든다면 옛날에 한국의 조상들이 한양에 한 번 가려면 왜 여러 날이 걸렸지요? 몰라서, 모르니까 고생을 했고, 모르니까 병이 들고, 모르니까 죽고 그랬지요. 모르니 개발을 못해서 그렇게 고생만 하고, 애만 쓰다 죽었지 알았다면 왜 그렇게 살았겠느냔 말이지요.

 

하기야 그 때는 짚신을 신고 걷든가 소달구지를 타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면 간단하겠지만 그러나 지금 나를 그곳에 갖다 놓고 생각해 볼 때 ‘그 때 사람들이 왜 자동차나 비행기 같은 걸 연구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모르면 그렇게 고생을 한다.

 

제가 언젠가도 말씀드렸지요. 일본에는 해방 전에도 전철이 다녔고, 기차가 다녔고, 버스가 다녔고, 바다에 나가면 산더미 같이 큰 상선이 서 있고 했어요. 그런데 해방 후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나오니 충무 앞바다에 돗단배가 한가롭게 떠다니고, 거리에 차는 한 대도 없고 소 구루마가 길을 가면서 소가 뒤로 배설물을 내놓고 했어요.

 

조그마한 돗단배가 한가롭게 바람을 따라 가는 게 보기에는 상당히 한가롭고 평화롭긴 하지만 머리를 쓰는 면에서는 일본에 한참 뒤떨어진 거지요. 어쨌든 모르면 고생을 한다. 그러니까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귀하냐 그 말이요.

 

오늘날 우리 기독자들이 세상이 어떤 곳이라고 하는 걸 세밀하게 깨닫는다면, 인생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세밀하게 깨닫는다면 사람이 참으로 총명해질 것 같아요. 그걸 모르니 엄벙덤벙 살고 있지 않느냐?

 

옛말에도 있는데 용장보다도 지장이 더 무섭고, 지장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학장이다. 즉 배우는 장군이다. 나이 칠십이라도 배워야 하는 거지요.

 

오늘날 과학이 이만큼 발달이 됐지만 이게 완전히 다 발달이 된 것이냐, 아니면 아직 발달될 것이 더 많이 있느냐? 우리에게 어떤 계시적인 면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이 지상에는 아직도 무진장하게 개발될 것이 많이 있다. 참 신비로운 것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이 돼요.

 

이제 우리가 교회로 눈길을 돌리면서 예배당 안에는 젊었던 늙었던, 잘났던 못났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교회라고 하는 이 교회는 무슨 법학이나 철학을 배우는 곳이 아니지요. 말하자면 믿는 이치만 잘 배우면 된다. 다른 것으로는 절대로 안 된다. 누구의 간증얘기나, 부자 되는 얘기 같은 것으로는 안 된다.

 

우리는 죽음의 선에 도달할 때까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갈 우리들입니다. 따라서 먼저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성을 바로 알아야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면에 인격적으로 결합이 척척 되어 들어가지 아무리 아버지라고 불러도 인격적인 면에 결합이 안 되는 상태라면 어떻게 통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요. ‘내가 세상에 와서 어떻게 살다가 가야 되겠느냐’ 하는 이걸 우리가 마음속 깊이 느껴야 되겠지요.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성인가? 왜 나를 지었느냐? 당신이 영광을 받아먹으려고?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인간으로 통해 당신이 영광을 받으려고 인간을 지은 것이라면 이걸 이치적으로 따져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계신 분인데 우리를 짓기 전에는 누구에게 영광을 받았느냐? 하나님 외에 자존자가 또 있었느냐?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기 영원 전서부터 계셨는데 도대체 그 영원 전서부터가 얼마나 긴 시간이냐? 그 긴 시간 동안에 당신에게 영광을 돌릴 자가 없었을 텐데 그 기간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고 싶어서 어떻게 살았겠느냐?

 

하나님은 완전자요, 영광이 충만자이니 이 세상의 그 어떤 도덕가나 철학가가 그 하나님께 영광을 보태준다고 해도 그거는 질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성과는 다른 거고, 될 수도 없는 거고, 하나님은 그런 영광을 받지도 않는 거지요. 하나님은 영광성이 충만하신 분이므로 당신이 그런 영광을 못 받아서 좋지 않을 것은 아무 것도 없지요.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깊이 알고 가야 되지 않겠느냐? ‘기도 많이 해라, 전도 많이 해라’ 해서 교인 숫자가 많아지면 헌금을 계산하는 시간이 더 많아질 테지. 그러나 문제는 나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이 어떤 것일까?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가지고 사는 것이 믿음이다. 바르게 사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은 다음에 천국을 지었습니까, 천국을 지은 다음에 인간을 지었습니까? 인간 다음에 천국? 인간을 구원하려다보니 천국을 지은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천국이라면 하나님이 영원하니 그 천국도 영원하고, 하나님이 기쁘고 쾌락하니 역시 천국도 그런 곳입니다. 하나님 당신 자체가 완전하시니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누림성도 완전히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는 물론 우리가 가보면 알 수 있지만 우리가 천국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을 하려고 하면 오히려 그 천국이 축소가 되고 마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서울의 명동거리만큼 좋다’고 말을 하면 천국이 확장이 돼요, 축소가 돼요? 축소! ‘천국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지 아하수에로 왕의 잔치만큼 기쁘다’고 말을 한다면 이건 축소요, 확장이요?

 

가령 천국이 그 정도의 곳이라면 우리가 뭐 하러 천국에 가겠어요? 갈 필요가 없지요. 신앙의 선배들이 있는 그 곳,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는 그 곳, 화려하고 찬란한 그 세계가 얼마나 좋은지 이름을 지어 표현할 수도 없고, 참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요.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하나님을 인간의 표현방법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은 상당히 인심이 좋은 분이시지요. 그렇게 즐거운 곳에 혼자 살고 계시지만 당신의 마음속에 ‘나 혼자 살아야겠다’ 고 하는 마음이 있겠어요? ‘다른 사람하고 같이 살아봤으면!’ 마음이 나쁜 사람은 ‘나 혼자’ 하는 게 있는 거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의 발작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 혼자’ 하는 그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천국을 보여주고 싶었으면 사도요한을 밧모섬에 불러다 놓고 천국의 TV를 다 보여줬겠느냐?

 

‘천국의 그 나라를 나 혼자 누릴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형상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 같이 누리자’고 한 것이 최고의 인격성입니다. 창세기에 있지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짓자!’

 

왜 다른 피조물은 아니고 인간만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었을까? 형상이란 인격성이요 속성이지요. 왜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우리 인간을 지었을까? 그 이유야 목석을 천국에 갖다 놓으면 무슨 느낌성이 있어서 그 기쁨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돼지를 훈련시켜서 낙원에 갖다 놓은들 그 돼지의 말이 ‘아, 이곳이 천국 같다’ 라는 하겠어요? 인격성이 없기 때문에 못 느낀다 그 말이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못 느낀다 그 말이요. 천국의 즐거움을 당신처럼 맛보게 하려니까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목적만 알아도 감사가 절로 나올 겁니다. 감사는 그 분의 혜택을 알았을 때 나오지요. 그런데 우리 미련한 인간이 감사는커녕 어떤 때는 원망 불평이 나올 때도 있지요. ‘왜 나를 만들어서 세상에서 이렇게 고생을 시키나!’ 모르니까 원망이 될 수밖에 없다. ‘죽음과 질병과 눈물과 고통이 없는 곳, 기쁨의 그곳에서 나와 같이 누리게 하려고 너를 지었다’ 그렇게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지은 목적을 성경의 여기저기에 많이 얘기해 놨어요.

 

인간은 인격성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율성과 주권과 심판성이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인격의 세계에는 차등성이 있다. 그리고 그 차등성을 알 수 있게도 지었다.

 

비인격의 세계에서는 동등입니다. 그러나 인격의 세계에서는 차등이 있어야 그 가치가 드러난다. 만일 벽돌을 찍듯이 인간을 똑같이 만들어 놨다면 인격성 면에서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의 영은 중생으로써 동등입니다. 여기서부터 인격성장에 경주입니다.

 

인간창조의 궁극적 목적은 ‘나를 당신처럼’ 하는 것이고, 동기는 그 나라가 너무 좋아서, 원인은 당신의 사랑의 선의 발작으로.

 

‘그곳에서 영원히 살게 해 주기 위해서 나를 지었다’고 하는 이것을 내가 그 나라에 들어가서 깨닫는다면 그 때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찬송이 나오지 않겠느냐 그 말이요.

 

내가 갈 그 나라, 기쁨의 그 곳에 언젠가 나는 갑니다. 이런 나를 이 시공세상에 보낸 것은 영적 실력배양을 위해서 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신앙의 조상, 믿음이 조상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을 성경에 기록한 것은 히브리인의 조상과 근원을 밝히려고 말함보다도, 또는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려는 것보다도 더 큰 것은 예수 믿는 이치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기록해 놨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슨 능력이나 성령의 무슨 은사나 그런 걸 욕심내어 받으려고 하는 자들이 많지요? 그것을 받아서 그걸 써먹고 가려는 사람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실력을 위한 영원한 이치를 잡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기독자가 이 세상에서 하고 갈 일이 뭐냐? 나의 재세기간 동안의 목적이 뭐냐? 우리가 이걸 버리면 절대로 안 됩니다. 내가 이 시공세상에 사는 목적이 뭐냐? 이걸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시간세상은 시간이 흐르는 것이고, 공간세상은 내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시공세상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는 곳에 내가 있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하고 갈 것이냐? 이 세상에 나에게 부여된 시간이 얼마나 남았겠느냐? 모든 인간이 다 똑같이 한결같지 않습니다. 그 시간은 다 다릅니다. 그 시간만 되면 나는 그 자리, 거기에서 그 나라로 갈 겁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천국은 내 힘으로 가는 것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천국을 자기 힘으로 간다고 하는 자들은 몰라서 그러는 것인데 안타깝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누가 뭐래도, 누가 공갈 협박을 해도 나는 천국 간다. 이제는 지옥에 가는 쪽으로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지옥은 못 갑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패역을 부리게 되면 손해는 자기에게만 오는 거지요.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으니 지옥을 가고 싶어도 못 갈 존재인데 이왕에 천국에 갈 것이라면 그 때에 아버지를 볼 면목이 있게 천국에 들어가야 되지 않겠느냐?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믿기 전에 저희들은 무지몽매하고 무식하고 악한 저희들이었습니다. 세상을 따랐고, 세상의 모든 풍습을 좇은 정말 마귀적이고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영원 전서부터 우리의 구원을 예정한 그대로 우리를 어느 날 어느 시에 주님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의 품 안으로 불러서 아버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살게 해 주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본구원에서 집을 짓듯이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이뤄갈 수 있는 모든 재료를 저희들에게 주셨으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믿기 전에는 세상을 목적을 하고 계산하고 계획을 하고 살았지만 그대로의 결과가 잡혀지지 않았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이루어지지 않는 그 결과를 보고, 소망하고 갔던 저희들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주님 안에서 그 모든 세상은 다 없어지고 오직 주님뿐인 줄 압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기본적으로 저희들을 구원해주신 은혜도 무한히 크고 감사한데 무한히 더 성장하라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날마다 더 큰 은혜를 부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저희들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이 큰 은혜들을 저버리고 모른 채, 무시해 버리고 세상 것을 향하여 가지 아니하도록 저희들을 꼭 붙잡아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너무나도 믿음이 연약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담대한 믿음 주옵시고, 깨닫는 마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생활의 모든 발걸음이 아버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기쁘게 해 드리는 신앙의 발걸음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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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01 창세기 하나님과의 동행 창5:24  김동호 목사  2012-12-13 1878
7800 이사야 인카네이션 사11:6-9  김동호 목사  2012-12-13 2332
7799 누가복음 섬기는 교회 눅10:25-37  김동호 목사  2012-12-13 3076
7798 빌립보서 예수의 마음으로 빌2:1-11  김동호 목사  2012-12-13 2286
7797 마태복음 은사(恩事) 마25:14-30  황성현 목사  2012-12-13 2060
7796 창세기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2] 창12:1-3  김경형 목사  2012-12-13 3213
» 창세기 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창12:1-3  김경형 목사  2012-12-13 2092
7794 마태복음 그물리라에 빛을 마5:14-16  김동호 목사  2012-12-12 1665
7793 창세기 땅을 정복하라 창1:26-28  김동호 목사  2012-12-12 2349
7792 베드로전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 벧전1:1-5  김동호 목사  2012-12-12 2192
7791 데살로전 칭찬과 격려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살전5:14-15  김동호 목사  2012-12-12 1746
7790 출애굽기 복된 만남을 위하여 출2:15-22  안효관 목사  2012-12-12 2247
7789 출애굽기 무언가를 준비하시는 하나님 출2:23-25  김종순 목사  2012-12-12 1950
7788 출애굽기 구원자 모세를 예비하심 출2:1-25  김강호 목사  2012-12-12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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