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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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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아브라함 |
창 12장 1절-9절.
1절-9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참조: 히11:8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으로 창조를 했는지 그 면을 알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인간이 인격적으로 지음 받은 목적과,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목적, 이 세상에 살게 하는 목적 이 모두가 한 목적입니다. 단일목적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영광을 받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기독자들은 하나님 당신이 영광을 받고 싶어서라고 하지요? 소요리 문답 1조 1항에 그렇게 돼 있어요? 그 말 자체는 맞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해석이 문제가 되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성을 입어나갈 때, 즉 인격의 온전성, 성품의 온전성을 입어나갈 때 하나님께서 그걸 기뻐하시며 ‘너는 내 영광이다’ 그렇게 되는 것인데 자칫 잘못하면 어떤 큰 사역을 분량적으로 많이 함으로써, 사역을 크게 많이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해석을 잘 갖다 붙인단 말이요. 그렇게 되면 문제가 크게 달라지지요.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당신이 영광을 받고 싶어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 인간을 지은 것이 아니고 당신의 그 충만한 영광, 발생적인 그 영광을 우리 인간에게 한없이 입혀주기 위하심이다. 그렇게 해 주시려고 우리를 지었고, 또 당신이 누리고 행복하고 기쁘고 영광이 충만한 그곳을 우리에게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처럼 누리고 느끼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당신의 모양처럼 형상처럼 지었습니다.
그리고 천국은 차등이 있는 곳인데 이 차등성은 하나님의 공평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차등적으로 공평적으로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물질계인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물질계인 이 세공세상에다 우리를 보냈습니다.
무엇 때문에 물질계를 창조했다고요? 그냥 ‘하나님의 성품을 입히시기 위해서’ 라는 그 말도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생각을 해 보면 이 물질계를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이 물질계에 살게 하신 이유는, 물질계를 통과케 한 이유는 우리 인간에게 손해나 원망이 없이 하나님의 공평적으로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물질계를 창조했다. 이 공평에는 차등성이 있다는 것.
이곳을 통과하기 전에는 차등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육신으로 태어날 때에 신체적으로는 그 신체의 장단에, 평수에, 체중에 차이는 있지만 인간성이나 인격성 면에는 차등이 없었습니다. 또한 신학적인 면으로 볼 때에 모든 인간은 원죄가 동일하고, 지능 면에서나 기능면에서도 모두가 영(0)점입니다.
이렇게 동등하게 출생을 했지만 진리와 영감으로 자라나는 면이 다릅니다. 배우며 가르치고 자라고 하는 그 면이 각자 성장이 됩니다.
악이라고 하는 이거는 안 가르쳐줬는데도 자랍니까? 항상 원죄의 바탕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둑질하라’ 그런 거 하나도 안 가르쳤는데도 자라면서 사람 속에서 그런 게 나온단 말이요. 기능 지능 면, 도덕적인 면이 모두 성장하게 됩니다.
영의 성장은 언제부터 되는 겁니까? 중생서부터 시작입니다. 중생 여기서부터 시작인데 아무리 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중생을 못했다고 하면 그것은 영점 그대로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종교인이라, 기독교인이라 그러면 보통은 영의 중생을 전제를 하고 들어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 교훈이 ‘이제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니 너는 이제 이렇게 이렇게 자라라’ 그러는 거거든요.
그런데 교회에 나온 사람을 보고 ‘너는 중생을 해야 된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돼야 한다, 지옥에서 빨리 천당으로 올라가야 된다’ 그렇게 말을 하면 그건 어떻게 된 거지요?
여러분들, 신비주의 적으로 나가는 그런 데서 보면 ‘성령을 받아야 구원을 얻은 것이다, 예언 방언을 해야 성령을 받은 증거고 구원을 얻은 증거다’ 하며 그런 사람이라야 신학교에 들어가라고 하는 거 봤지요? 그런 걸 하지 못하면 아무리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도 중생을 못했다는 지식을 갖고 있는 거지요. 그러니 사람이 뭐가 되느냐 그 말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음의 선에 도달하기까지 사건적으로나 존재적으로 충돌이 되고 대립이 되고 마찰이 되는 물질세계에서만이 지혜지식적으로 싸워서 영적인 면의 성장성이 격차성으로 자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보면 성도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자기 하나 바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끝내는 자기 하나 바로 만들어 가는 것! 살아생전에 존재나 사건이나 물질이나 다 연관적으로 서로 돕고 도와주고 사는 것인데 그렇게 살다가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 하나 만들어지는 것으로 돼 있다 그 말이지요.
인간의 일생은 이 세상에서의 작은 삶 속에서 늘 싸우는 인생인데 이런 구원도리를 깨닫지 못하면 이 싸움에서 일생동안을 지고 가게 되는 겁니다. 싸움에 진다 그 말이요. 죄의 종으로 살면서도 종인 줄 모르고, 싸워서 진 종이면서도 졌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된다 그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미련한지!
사람과도 싸워야 돼요, 사람이면 다 좋은 거요? 그런데 보통 보면 싸울 줄 모르지요. 그래서는 안 된다. ‘진리사랑이냐, 아니냐?’ 우리 기독자들은 전부 다 싸워야 하는 겁니다. 내적인 면에 싸우는 자가 산 자요. 그러나 비기독자들은 세상에 얽매이고 동화되고 피동되고, 그렇게 살려고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좋다고 그러지요. 비기독자만 그러나? 타락된 기독자들도 그렇더라!
이번에 추석 때 얼마나 싸웠어? 많이 싸웠어? 안 싸웠나? 정복하려고 싸우다가 ko 당했다면 하나님 앞에 ‘죄송합니다’ 이렇게 나올 수 있지. 그런데 뻔히 알면서도 ko를 당했다면 그건 뭐가 좀... 우리 기독자는 싸워야 된다. 심각합니다.
내 영의 중생은 나의 노력으로 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노력입니까, 인간과 하나님의 합동사역입니까? 하나님의 노력이지요. 하나님의 단독사역! 합동사역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교파에서는 합동사역을 말할 겁니다.
죽은 자는 말도 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중생이 되는 데는 인간의 영은 죽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이렇게 해야 내가 중생이 됩니다, 저렇게 해야 내가 중생이 됩니다’ 하고 말 한 마디도 보탤 수 없고, 할 수도 없어요. 중생까지가 하나님의 단독적 사역입니다.
중생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간의 영에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을 입혀서 죽은 영을 살리는 겁니다.
그러면 중생 즉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알까요, 모를까요? 하나님을 바로 모릅니다. 중생, 이건 내적인 것입니다. 내적인 사역으로 된 겁니다. 따라서 내 영이 언제 살았는지 그 시일을 자기가 모릅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저기 전라도 여수에 있을 때 한 번 가서 보니까 그 교회가 장로교회였는데 그 교회에서 분리가 돼 가지고 권신찬파로 갔는데 분리되기 전에 그 교회에서 종을 치는 충성스러운 분의 아들이 부산의 권신찬파에서 배움을 받아가지고 결국 많은 교인들을 권신찬파로 가게 했어요.
그래서 왜 그렇게 됐나 보니까 내가 그 교회에 다닐 때 물론 목사님은 몰라서 그런 건데 중생의 교리에 대한 면을 가르치지를 않았어요. 그런데 권신찬파 사람들은 중생에 대한 교리를 가르치려고 상당히 애를 많이 썼어요. 그들이 요3:을 가지고 가르쳤는데 이제 보면 그게 기본구원에 관한 교리야. 물론 우리가 볼 때는 잘못된 것이 많지요.
그 교회에서 그런 가르침을 받지 못하다가 권신찬파 사람들로부터 중생에 대해 들으니 뭔가 모르게 확신이 서는 것 같지. 그 동안은 백 날 교회에 다녀도 언제 구원을 받았는지 그 날짜를 몰랐는데 권신찬파 사람들 말을 들으니 그들은 날짜까지 알거든. 그러니까 새롭지요.
권신찬파 그들이 설교를 하는 걸 보니까 젊은 청년들인데 각자 성경을 깨닫고 은혜 받는 사람들이 설교를 하더라고. 그러니까 무슨 특별한 절차가 없어요. 신학교 다니다가도 신학교 그만 두고 그리로 가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들이 예배를 마치고 설교를 한 자가 말하기를 ‘구원 얻은 사람들 모여서 의논을 합시다’ 그러더라고. 그게 무슨 말인가 했더니 구원 얻은 날짜를 알고, 그런 체험이 있는 사람들만 모이라고 하는 말이야.
우리는 중생과 변화는 분리시킬 줄 알아야 된다. 예를 들어서 아이를 갓 나으면 그 아이가 나는 길로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인 줄 모르잖아요. 나중에라도 안 가르쳐주면 몰라요. 어쨌든 당장 태어난 즉시로는 자기 아버지를 모른다. 그러면 모른다고 해서 그 아이가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냐? 그건 아니지요. 또 아이를 나아도 당장 호적에 올리지는 않지요. 그렇지만 그 아이는 생득적으로 그 아버지의 자식인 것만은 분명하단 말이요.
이와 같이 영이 중생이 됐어도 그 즉시로는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아버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천국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자식인 것만은 틀림이 없어.
그런데 교회에 갓 들어와 가지고 집회 때 ‘무슨 죄 지었다, 무슨 죄 지었다’ 하면서 뒤집어지는 것이 있잖아요. 술 담배를 끊기고 하고. 이거는 보이는 거지요. 그런데 중생은 보이는 거요, 안 보이는 거요? 안 보이는 사역이다. 눈물 뿌리고, 뒤집어지고 하는 것은 일종의 변화라 그 말이요.
그러면 변화가 됐기 때문에 중생이 된 것이냐, 중생한 사람은 변화가 올 수도 있느냐? 전자요, 후자요? 변화가 됐기 때문에 중생이냐? 그건 아니지요. 중생한 사람은 변화가 올 수도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변화를 중생으로 알게 되면 여러분들이 예수 믿으면서 때때로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일생동안 몇 번이나 중생이 되는 것이냐?
불신자들도 비인간적인 행동을 하다가 어떤 계기로 신비적인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생활이 변화되었다고 해도 그건 중생은 아닙니다.
신체나, 일반 인격이나, 일반 지식보다 영적인 인격이 많이 자라게 되면 그 사람은 참 훌륭한 사람입니다. 어린아이를 매일매일 볼 때는 자라지 않는 것 같으나 한 5, 6년이 지나면 굉장히 자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라도 성경을 항상 자기 옆에 두고 읽는 아이라면 이거는 뭔가 다른 아이입니다. 뭔가 달라요. 모세가 그렇게 자라났습니다. 뭔가 다르다.
그러니까 영이 중생한 사람은 그걸 늘 기준하면서 그 면으로 늘 생각을 하고, 생활면에서도 모든 것이 항상 우선적으로 먼저 들어가는 이것이 항상 있어야 된다.
아브라함을 보고 ‘본토를 떠나라’ 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라는 말입니까? 여러분들, 세상을 떠나라는 그 말을 한 번 봅시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늘로 솟았습니까? 백 날 가봐야 세상이지요. 가나안으로 들어가도 세상이지요. 그러나 그 역사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의도성을 생각을 할 때는, 계시적인 면으로 볼 때는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곳을 떠난 것은 분명해.
우리가 ‘세상을 떠나라’ 하는 이 말을 잘못 알아들으면 초절주의, 염세주의가 되기 쉬운데 사실 그것도 보면 세상이야. 잘못 착각을 하고 깨닫고 있는 거지요.
본토를 떠나면 돈을 벌어야 됩니까? 학교에 가야 됩니까? 장사를 해야 됩니까? 그 참 말이 우습지요. 세상적인 추구성이나 지향성이나 세상적인 소원성을 버리라는 말이지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은 ‘버리라’ 그 말이지요. 세상적인 소원성을 버리라는 거지.
우리가 사는 여기는 갈대아 우르가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지금 현재 우리 기독자가 무엇을 추구하고 지향을 하느냐? 기존적인 것을 지향하고 추구하느냐, 세상적인 것을 지향하고 추구하느냐, 천국의 것을 지향하고 추구하느냐?
내가 예수 믿기 전에는 세상부자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예수 믿고 보니 이제는 재벌이 되던, 가난이 되던 소원 목적적으로 그게 문제가 아니고 구원을 잘 이루고자 하는 그게 갈대아 우르를 떠난 자지요. 갈대아 우르를 떠난 자는 부요관이나 출세관이나 영광관이 예수 믿기 전과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본토를 떠나라고 하는 말은 세상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고 기존적인 욕망을 버리라는 그 말이지요.
아무리 예수 믿어도, 또 예수를 전해도 수락적 영감이나 조명적 영감의 감화가 아니면 이걸 깨닫기가 참 힘들어져요. 깨닫는 것은 성령의 영감으로 깨달아지는 것인데 아브라함을 보고 ‘떠나라’ 했을 때 이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는데 이 말이 무슨 뜻이냐? 말씀으로 ‘떠나라’ 해 놓고 어디로 가라고 그러지요? 가나안으로 가라고 그랬으니까 아브라함이 갈 바는 가나안이란 말이요.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고 그랬거든요.
우리는 갈 바를 정해놓고 떠나면 안 되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 ‘세상에 출세할 목적으로 공부를 했는데 예수를 믿으면 그 면이 더 잘 되겠다. 세상공부를 하면서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도와줘서 출세가 더 빠르고 일이 잘 되겠다’ 하고 나가게 되면 이건 정해놓고 떠나는 것이다.
공부를 하기는 하는데 예수 믿기 전에는 출세할 목적으로 공부를 했고, 예수를 믿으면서 갈 바를 정해놓고 떠나는 것은 예수를 믿으니까 자기가 정한 목표가 더 잘 이루어지겠다고 하는 것이고, 갈 바를 정해놓지 않고 떠나는 것은 예수를 더 잘 믿기 위해 공부를 하고, 전도를 하고, 성경을 읽기 위해서 국어공부를 하는 것 등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공부를 못하면 전도가 될까요, 안 될까요? 또 자기가 게을러서 못 살면 전도가 안 되겠지. 예수를 믿어 부지런하게 되니 부자가 됐다고 하면 전도가 되긴 되겠지. 이럴 경우 돈 보고 전도가 되는 것일까, 사람을 보고 전도가 되는 것일까?
내가 게을렀었는데 예수 믿고 부지런해졌고, 그래서 부자가 됐다고 할 때 그걸 안 믿는 사람이 봤어. 그럴 때 뭘 보고 전도가 되겠느냐? 옆에서 본 사람도 눈이 있잖아. ‘저 사람 예수 믿더니 부지런해졌다’ 그렇게 보기 마련이라 그 말이요. 진리를 위해서 거지가 되면 그건 전도가 돼요. 그런데 자기가 게을러서 거지가 된 것은 전도가 안 되지요.
우리가 과거에는 소원 목적성이 모두 세상 것이었으나 예수를 믿고 보니 이제는 진리 때문에 그거와 상관이 없이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이것은 본토를 떠나는 겁니다. 앉으면 늘 남 말만 하고, 남 흉만 보고 돌아갔는데 예수 믿은 후에는 성경을 보는 취미라든지, 전도하는 취미라든지 이런 걸로 변한다. 우리가 그런 사람 간혹 볼 수가 있어요. 그거 좋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니 내가 가는 길이 환난이던 부요던 가난이던 역경이던 감옥이던 평안이던 순교던 무엇이 와도 상관이 없다’ 하고 가는 것이다. ‘내가 예수를 믿고 가면 실패는 없어지고 성공 평안이 올 것이다’ 라고 믿고 가는 이것은 정해놓고 가는 것이다.
보통 보면 정해놓고 가는 게 많아요, 알지 못하고 가는 게 많아요? ‘예수 믿으면 뭣도 잘 되고, 뭣도 잘 되고’ 하는 거는 정해놓고 가는 것이다. 예수 잘 믿고, 신앙생활 잘 하면 전부 다 성공이냐 그 말이요.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잘 될 것으로 믿고 가는 것은 갈 바를 정해놓고 가는 것이고,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그거와 상관이 없이 진리대로만 산다’ 하는 것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생각은 하나님을 잘 믿고 가면 가난은 멀리 가고 부요만 오는 것으로 착각을 하지요. 이런 사람들은 말씀대로 살았지만 가난해지면 암만해도 예수 안 믿기 쉽지 뭐.
사도바울은 성경대로 살았는데 쇠고랑을 찼어, 그러나 사도바울에게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렇지요? 가난이 와가지고 진리와 생명 길을 가지 말라고 막지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순종해 가는 사람에게는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런 것이 와서 막아도, 가난이 와서 막아도 소용이 없고, 부요가 와가지고 그렇게 가는 자기를 보고 ‘아이고, 너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 이렇게 슬쩍 위로가 오더라도 그것도 상관이 없어요.
시사토론에서 ‘인격교육 어쩌고’ 하는데 그 원인을 몰라서 몸살들을 하고 있더라고요. 사회적으로 바로 잡아 나가기는 해야겠는데, 이걸 누군가가 해야 되겠는데 사실 자기도 못한다는 말이지. 하고 싶은데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나온다 그 말이요.
그런데 믿는 사람이 거기에 전화를 하긴 합디다만 어느 분이 전화를 하던데 그 분의 교회 목사님이 그걸 못 가르쳐준 것 같아. 근본적으로 바꿔놔야 하는 건데. 핵심적으로 자꾸 들어가려는 소원성은 가졌는데 그게 안 돼. 불가능이야. 불신세상은 불가능이에요. 몰라서도 못하고.
그래서 보면 늘 앉으면 그것 잡고 고통이야. 인간이 학교에서, 가정에서 이걸 가르쳐야 된다고 하는데 몸살을 앓고 있어요. 늘 붙들고 회의하는 그게 몸살이야. 그런데 안 나와. 할 수가 없어요.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개적으로 거기 앉아있는 사람까지도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는, 즉 수학이라면 정확한 공식과 같은 말을 해 줘야 하겠는데, 그래서 이 진리로 말을 하면 그들은 ‘그거는 하나의 종교고’ 그렇게 말할 거란 말이요.
제가 왜 이 말을 하는가 하니 우리가 좁게 보면 좁고, 넓게 보면 넓은 건데 ‘그건 하나의 종교다’ 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 개념이고, 전도서에 있듯이 이게 인간의 본분이란 말이요. 종교 이전에 인간의 본분이에요. 인간의 본분을 놓고 그 차원에서 말을 하는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을 하라’는 게 있거든요. 그런 차원에 놓고 말을 하는 거란 말이요.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앉은 기독자들까지도 세상적인 개념으로 돌아간다는 거지요.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얻어맞고 두들겨 맞고 발발 기어 나와서 예수 믿고 ‘주여, 주여’ 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러나 세상은 악한 세상이고, 누가 불택자인지를 모르니까 우리가 이 진리교육을 주격으로 가르친다고 해도 안 믿을 자는 역시 안 믿을 거라!
어쨌든 불가능하겠지만, 그리고 사회정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이 진리사상으로 인간을 근본적으로 확 바꿔져야 한다. 그런데 거기 나오는 교수들도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은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 모양이란 말이요.
이걸 사회개혁에 붙이면 사회적 운동이 되는 것인데 우리의 적용성은 사회적 운동이 아니고, 불신사회가 평화롭게 잘 살게 하자는 게 아니고 사람의 속을 개혁시키는 면으로 사람을 바꾸자는 그 말이지. 그렇게 해서 그것이 영향력을 미쳐서 다른 것이 개혁이 되던 안 되던 그건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고.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사회적인 면에 목적을 두고 부르짖기가 쉬워요. 지금 기장 쪽이 그렇단 말이요.
그렇지만 우리가 믿는 각자가 이 진리사상으로 힘 있게 버티고 있다면 그만큼의 소금역할이 불택자, 혹은 불신자의 세상에 미쳐지기 마련이거든.
그렇게 돼서 그들이 비록 불신자지만 진리의 영향력을 입으면서 자기 양심에 악을 깨닫고 도덕적으로 바로 살면 천만다행인데 그것이 시기질투로 화해서 핍박자 입장에서 진리를 가진 자를 해한다면 이럴 때는 진리를 가진 기독자가 순교가 되겠지요.
그런데 기독자가 그런 단계도 아니면서 자기가 몰라 가지고 일반차원에서 헤매면서 세상타락을 보고 마음 아파하고, 그런 세상을 바로 잡겠다고 나서는 건 좀... 세상이 바로 서지 못한 그게 안타깝단 말이요. 그래서 믿는 사람이 사회봉사로 세상에 어떤 감화를 주어서 그걸 바로 잡아보겠다고 하니 그게 돼 지느냐 그 말이요. 참 안타까워요.
어쨌든 적극적으로 사람을 바꾸어나가는 그 운동이 우리에게 사명적으로 부여돼 있다고 저는 느껴져요. 그렇게 하다가 얻어맞거나, 감옥에 가거나 그런다면 모르겠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빌빌거리다가 죽는다면 원통해서 쓰겠느냐?
아브라함은 부요자가 됐지만 ‘이까짓 부요는 나와 상관이 없다’ 했고, 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갈대아 우르를 막 떠날 때도 그거 가난 아니요? 아주 가난이지요. 거지 중에 그런 상거지가 없는 거지. 하지만 그것도 상관이 없다고 하며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브라함은 가난이던 부요던 그거와는 상관이 없이 신앙의 달리는 속도는 같다 그 말이요.
역사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신앙의 기반을 잘 닦고 살았습니다. 참 그 신앙이 멋있는 거요. 남이 볼 때는 부자로, 물질로 집안을 닦는 것같이 보여지지만 그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가면 갈대아 우르보다도 더 잘 살게 되리라’ 하는 것은 갈 바를 알고 가는 것이다. ‘내 재산이 다 달아나도 나는 이 길이 좋으니 간다, 나의 기본재산 이것보다도 찾아오신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는 더 좋다’ 가치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찾아오신 그걸 기본재산에 대겠느냐? 값어치를 따질 수 있습니까? 그렇게 가치 평가 판단을 내리고 살면 재림 때에는 반드시 거기에 대한 상당한 것이 주어진다. 다른 말로 하면 보복이 온다 그렇게 봐도 될 거요.
우리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공중 혼인잔치라든지 그게 다 일종의 보복성이 들어 있는 거요. 보복이란 표현이 좀 뭐하지만 ‘믿는 내가 어느 것을 더 값어치 있게 여기고 살았느냐’ 하는 심판이란 말이요. ‘죽음도 심판을 한다’고 하는 이것도 ‘내가 현세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보복성도 되는 거라 그 말이요.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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