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교회 분쟁 속에 세상 모습이 있고 교회 성장의 허상이 보인다
순전한신앙이야기 황부일목사............... 조회 수 2064 추천 수 0 2012.12.14 22:41:36출처 : | 순전한 신앙 이야기<http://cafe.naver.com/ghkdqndlf> |
---|
교회 분쟁 속에 세상 모습이 있고 교회 성장의 허상이 보인다
교회 분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어 우리가 잘 알다시피 초대 예루살렘 교회부터 고린도교회로 시작하여 교회 역사 속에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 분쟁은 끊임없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교회 분쟁들을 보면 예전에 있었던 교회 분쟁과 양상이 전혀 다른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초대교회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분쟁은 주로 신앙과 신학의 차이로 인한 논쟁이었고 진리냐 비 진리냐의 싸움으로의 분리였습니다. 물론 중세이후 오늘날도 신앙과 신학 때문에 갈등 짓고 분쟁하는 경우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오늘날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의 대부분의 분쟁은 한마디로 교권이나 영역이나 자리를 확립하거나 그것을 지키기 위한 인간적인 쟁투인 것입니다.
실재로 교계 언론이나 세상 언론을 통해 보여 지는 근간에 교회들의 분쟁을 보면 무섭고 살벌할 지경입니다. 그동안 분명 한 교회였는데 어떻게 나뉘어서 갈등 짓고 싸우며 심지어 서로 원수같이 대하고 더 나가서는 세상 사람들처럼 서로 욕하고 폭력상태까지 이르고 경찰에 검찰에 서로 고발하고 고소까지 일삼게 되는 것인지 도저히 납득이 안갑니다.
대체적으로 요즘에 종종 생겨지는 교회 분쟁들을 보면 잘 알려진 교회나 잘 알려지지 않은 교회나 나뉘어서 싸우는 상태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생겨지는 분규나 자리다툼이나 영역 차지를 위한 싸움이나 이권 등으로 인해 서로 밀리지 않으려고 끝까지 싸우는 모습과 같은 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근간에 보면 큰 교회이기 때문에 세간에까지 알려지도록 분쟁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교계 신문들은 연일 그 내용을 보도 합니다. 시비 문제, 사건의 흐름, 사건의 실재 등 중점 보도 내용들은 그런 것입니다. 때론 요인 문제 등을 간략히 다루기도 하지만 정작 오늘날 이 땅의 교회들이 한번 진지하고 심각하게 문제를 제시하며 돌아보며 다루어야 할 것에 대해서는 언급해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기독 언론들은 그동안 그런 교회들을 광고하고 알려 주는 데만 주력해 왔기 때문에 보는 시점이 일반화되어 버렸다고나 할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가 분쟁이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그렇게 머리 터지게 싸우지는 않았지만 분명 고린도 교회는 네 파로 나뉘어 서로 시기하며 분쟁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은 서신을 보내어 그들을 지적하며 권면합니다.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파요 나는 아볼로파요 나는 게바파요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데 한 분되신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형제들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지적하며 권면합니다(고전 1:10-13). 이것은 바울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 모습을 이루어가라는 성령의 지적이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당시 분쟁이 있을 당시 고린도 교회는 성장한 교회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자로라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지적 했습니다(고전 3:1-3).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는 교회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직 어린 아이 같은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모습에 아직 육신에 속한 옛 사람의 모습들이 나타나 서로 시기하며 나뉘어 분쟁을 했던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이런 교회를 성장한 교회로 여기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성숙하지 못하고 초신 적인 상태에 있을 때는 부족하여 이런 육신에 속한 모습과 아직 세상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내용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로 된 교회 모습으로 온전케 자라감이 교회 성장임을 분명 증거 해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요즘 세간에까지 널리 알려져 손가락질 받으며 무섭게 분쟁하고 있는 교회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 이 교회는 자타가 인정하는 크게 성장한 교회입니다. 그 교단에서 손꼽는 큰 교회입니다. 온 교계에 부흥하고 성장한 교회로 알려져 있으며 목회자는 성공한 목회자로 인정해온 교회입니다.
그러나 근간에는 교회 분쟁으로 더 유명해졌지만 매우 어렵고 심각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언론을 통해 그 상태를 볼 것 같으면 담임 목사 지지자와 반대자로 나뉘어 무섭게 대립하고 있으며 서로 예배 본당을 먼저 차지하려고 폭력이 난무하고 용역회사 인부들이 동원되고 사설 경호원들이나 심지어 폭력배까지 동원되어 반대쪽 교인들을 몰아내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이미 반대편이 차지하고 있는 곳을 다시 접수(?)하기 위해 폭행과 완력이 난무하는 지경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다치고 서로 비방과 고소 고발이 많아지고 그야말로 이것은 교회 모습이라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어떻게 보면 본당과 강대상을 먼저 차지하려고 싸우는 것이 의사당 의장석을 차지하거나 지키기 위해 밀고 밀리며 고함치며 본색을 보이며 싸우는 국회 정치인들 같은 느낌도 들고 좀더 심한 상태로 볼 것 같으면 세상 좋지 않은 사람들의 영역 접수를 위해 머리 터지는 살벌한 싸움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사이비 집단들이 주권다툼을 위해 무섭게 싸우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면에서 보면 생존경쟁을 놓고 서로 양보 없이 조금도 밀리거나 손해보지 않으려고 살벌하게 대처하고 있는 상황 같기도 합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교회 분쟁은 그리고도 시간되면 나뉜 상태에서 저들끼리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쟁을 위해 기도회도 하고 철야기도회 금식기도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너무 모르는 처사요 신앙이 잘못됐거나 어린 아이 같이 초 신자적인 모습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거룩한 대회로 성회로 모이면서도 내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패역 하는데 그것을 하나님은 견디지 못한다고 했으며 때문에 그들의 성회는 그저 내 마당만 밟고 가는 것에 불과하며 그들의 예물도 헛것이 되고 또한 그런 그들이 하나님께 손을 펼 때에 눈을 가리 우고 많이 기도할찌라도 듣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 1:11-15 참조).
또 이사야 58장 4-5절에 보면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 될 날이라 하겠느냐”고 말씀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호 6:6).
대다수의 남아 있는 교인들은 서로 교회를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서로 갈리고 원수처럼 싸우면서 교회 모습은 이미 상실되었는데 어떻게 교회를 지킨다는 것입니까? 그들이 서로 지키고 끝까지 사수해야 한다는 것을 보면 교회가 아니라 예배당 건물인 것입니다. 지도자 위치에 있는 자나 대다수의 교인들은 바로 이 건물을 지키는 것에 생사를 걸 정도로 매달려 있습니다. 어떤 교인들은 여기서 뼈를 묻을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합니다. 성도가 정말 생명을 다해 인내하며 지켜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지키는 것이요(계 14:12) 교회를 지킨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 된 믿음의 거룩 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떤 핍박과 세상의 방해와 유혹과 악한 무리와 거짓된 자들의 미혹이나 잘못된 신앙의 물결 속에서도 진리를 파수하며 복음의 합당한 신앙의 모습과 삶으로 천국 된 교회 모습을 이루며 언제든지 그리스도 앞에 설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신부된 정결함을 굳게 지켜감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 된 모습으로 자라가는 성장에로 인도받는 것보다 큰 예배당을 세우고 그 안에서 종교적인 욕구나 자기 기대에 대한 충족을 채우는 데로 조련되어 온 것입니다. 때문에 그렇게 헌금하며 정성들인 예배당을 신전처럼 지키려 하는데 서로 주력하며 무섭게 싸우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이 매우 주요한 요새나 되는 것처럼 그래서 그것을 서로 점령하고 사수하는 군인들의 전투처럼 때로는 치열하기도 한 것입니다.
어떻게 한 교회 교인들이었고 한 제직회 제직들이었고 한 당회 당 회원들이었으면서 또한 형제, 자매하며 한 부서에서 함께 어울리던 자들이 한 순간 갈라져서 원수처럼 되고 서로 미워하며 비방하며 세상 사람들처럼 욕하고 폭행까지 고소까지 막가는 것인지 도대체 납득이 안 되겠지만 교회된 기준으로 조명해 볼 때는 분명한 구분이 나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회된 모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의 분쟁 속에는 세상의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 된 자라면 여러 지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한 몸 됨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몸 가운데는 분쟁이 없고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라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한다고 말씀했습니다(고전 12:25-27). 그리고 교회된 자라면 형제들 간의 생겨진 문제를 가지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 나가 송사(소송, 고발, 고소)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요 완연한 허물이라 했습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임을 당하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고전 6:5-7).
이런 상태를 조명해 볼 때 분명히 이렇게 분쟁하는 교회는 거룩한 교회 된 모습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성장한 교회라고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 허상이었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수십 년 세월 속에 교회 구원을 이루어 가는 길로 자라가지 못하고 세상의 단체나 기업처럼 외적으로 팽창 확장만 되어 온 셈입니다. 문제는 분쟁하는 교회가 이런 시점에서 자신들을 돌아보지 못한다는 것과 교계에 그 숱한 인물 된 지도자중 누구하나 이런 허상을 위한 싸움을 지적해 주지 못한다는 것과 수많은 교계 언론들도 드러난 교회성장의 허상과 허구를 예리하게 찔러 보여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기사 교계 언론들은 그런 교회의 규모 적 확장만 교회 성장으로 지금껏 널리 알려주는 역할만 주로 해왔으니 보는 시점도 없을 뿐 아니라 더 이상 할 말도 없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오늘날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그런 교회의 분쟁을 보면서도 그리고 관심 있게 서로 얘기 하면서도 그것이 허상적 교회 성장이었음을 발견 못하고 계속 그런 교회처럼 성장하려는 목표는 변함없다는 것입니다. 꿩 잡는 것이 매라는 식으로 수백 명에서 수천 명으로, 수천 명에서 수만 명, 수십만 명으로 끝없이 교인들 수만 많이 모으는데 역점을 두고 그래서 어마어마한 예배당 짓고 그 교인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온갖 시설과 시스템을 갖추는 데에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그런 목회에 줄 곳 여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수십 년간 그렇게 모두가 인정 하고 알아주는 쪽으로 커 온 교회들이 성장의 모본이 되어 작은 교회들의 부러움을 사고 그 교회 목회자는 성공한자로 신학생들과 많은 목회자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고 어떤 비젼을 가져야 할지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크게 성장했다고 쳐다 보며 인정하는 교회들이 결국 교회 주인 되신 주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모습으로 볼 때는 분명 교회 된 모습으로 성장한 것이 아님이 드러나진 것입니다. 실로 마음이 아픈 것은 분쟁하는 교회의 실재보다 분쟁하는 교회 속에 세상이 보이고 교회 성장의 허상이 보이는데도 대부분의 신앙의 지도자들이 그 점을 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허상으로 그리며 쌓는 교회 성장의 계획에 착오를 느낄 수 없고 더나가 개혁 수정됨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 성장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그 모습으로 자라감에 있고 세상과 달리 하나님 나라로 새롭게 영원히 구별된 모습과 삶으로 돌아가는데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 규모가 크든 작든 상관없이 구원에 이르는 모습과 삶이 있느냐 없느냐에 교회 성장의 실재 여부가 판가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된 모습은 우리가 가늠하는 그런 세상 적 규모와는 차원이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한에서 참 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니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증거 한 것입니다(엡 4:13-16). 이 말씀이 밝히 증거 하는 것을 보면 교회성장은 그리스도께 까지 자라감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 그의 생명으로 한 몸 됨을 지키며 더욱 한 몸 됨으로 연합되어 하나님 나라 된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교회 성장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에 영적으로 실현된 하나님 나라 인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져 하나님 나라 된 성도가 되었고 이제는 하나님 나라 된 모습과 삶이 점점 이루어져 그 나라를 세우며 누리며 드러내는 은혜로 부름 받은 자들이 곧 교회된 자들인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된 모습은 거룩한 하나님 나라 된 모습과 삶에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의 통치를 따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모습으로 돌아가고 점점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서가는 교회가 참으로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분쟁은 망하는 길로 가는 세상 나라의 모습이지 하나님 나라로 구별된 교회의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때문에 진정한 지도자요 성도라면 분쟁을 피해야 합니다. 오른 뺨을 치면 왼뺨을 내 놓고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어 줄지언정 악을 악으로 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악을 선으로 이기고 그런 원수를 사랑하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같이 해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답다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마 5:39-45). 이것이 성숙한 교회 된 자의 모습입니다.
모쪼록 그리스도의 교회 된 성도라면 부흥하고 성장했다는 요즘 교회들의 분쟁 속에서 세상을 보고 교회 성장의 허상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혹 글을 퍼오실 때는 경로 (url)까지 함께 퍼와서 올려 주세요 |
자료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 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