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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순전한 신앙 이야기<http://cafe.naver.com/ghkdqndl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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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맞추어 주는 것이 문제다
세상에는 눈높이 교육이 있습니다. 연령별, 수준별, 분야별, 적성별 지역이나 문화 차이별 등으로 나누어 거기에 맞게 가르치고 양성하는 것입니다. 합당한 것이라 봅니다. 또한 영리목적의 모든 업체들도 보면 사람들의 기호나 기분이나 관심 등에 맞추어 생산하며 광고하며 사업함을 볼 수 있습니다. 서비스업의 경우는 고객이 왕이라 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맞추어 주는데 전문입니다. 그래야 장사가 되겠지요. 따지고 보면 세상 모든 분야가 다 사람들에게 맞추어 주는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정치도 그렇고 방송 언론도 그렇고 예술도 그렇습니다. 물론 세상은 모두가 다 자기 유익과 어떤 목적을 두고 그렇게 사람들에게 맞추어 주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교회들이 이렇게 세상 모든 분야들처럼 사람들에게 맞추어 주는데 전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 안에는 이벤트식 행사가 교인들에게 친근하게 되어 버렸고 교회 모든 계획이나 프로그램이나 시스템도 교인들 관심과 기대에 초점을 두고 도입되고 개발되고 짜여져 가고 있음은 물론 효과적인 호응도에 따라 서로 답습하고 공유하는데 열심들입니다. 교회내 전반적인 요소들이 대부분 다 교인들의 기준이나 요구나 형편이나 그들의 기대나 공감적인 관심사에 중심을 두고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배당 내외 시설도 시스템도 모두 다수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선이나 귀나 기분적인 감정이나 몸의 편안한 상태에 따라 만들어 지고 꾸며집니다. 얼마 안가서 금새 뜨악해지고 식상해지는 사람들의 심리는 또 바꿈과 변화를 요구하고 교회는 지금까지 사람들의 요구나 기대에 맞추어 왔기 때문에 또 바꾸고 다르게 꾸미어 새롭게 변화를 가져 보려고 많은 재정을 들이며 애들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의 예배당은 지나가는 사람이나 동네 사람들도 와서 어울릴 수 있는 문화 공간이나 카페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무엇보다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께 경건히 드려져야 할 예배와 찬양은 심각합니다. 대부분의 예배는 사람들의 사정과 형편과 느낌의 감정에 맞추어 주느라고 시간도 편한 대로 변경 되었고 예배도 적어지고 짧아졌고 더 심한 것은 예배를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고 흥미로운 느낌에 몰입시키는데 역점을 두어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악기나 조명 영상등 많은 시스템을 도입하고 그야말로 세상 축제처럼 공연이나 특별한 행사처럼 합니다. 그럴수록 또 뭔가 다른 것을 끝없이 찾고 요구하는 사람들의 기대에 이제는 예배라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열린 예배, 영화 예배, 뮤지컬이나 드라마예배까지 생겼고 사람들 감성에 맞추어 뜨겁게 가던 찬양은 몇 가지 가사만 빼고는 세상의 대중음악으로 콘서트를 여는것 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예배와 찬양이 인간을 위한 축제로 전락된 것입니다. 그래도이런 것을 예배와 찬양의 갱신이니 새로운 변화라고 대부분 말할 정도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성취 그대로를 순전한 복음으로 선포하고 가르쳐야 할 설교가 사람들의 현실의 관심과 기대와 문제, 또 사회적 시대적 흐름이나 이슈 등을 잘 파악하여 공감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준비하고 설교하라는 설교론이 생기더니 이제는 15분을 안 넘기는 것이 명설교가 되어 버렸고 재미있고 웃기는 개그가 들어가야 은혜가 되고 잘하는 설교가 되었고 대부분의 교인들이 인간적으로 기대하는 꿈이나 비젼이나 위로나 성공이나 웰빙이나 글로벌이나 축복 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로 강조되고 소개되는 것이 요즘 주 설교내용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통해서 그 말씀을 빌어서 세상을 더 품고 바라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사람들에게 맞추어 주기 위해 조금씩 시작한 것들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도록 거기에 매어졌고 교회는 끌려가기에 바쁘고 목회는 더욱 고객처럼 된 교인들 관리와 인기를 위해 새로운 시스템이나 특별한 프로그램을 도입하기 위해 정보망을 펴며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교회들의 모습에는 교회 이름만 있고 경배라는 형식적 의식과 하나님의 이름만 불러질뿐 진정한 하나님 중심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거룩한 교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인간중심에서 점점 대중화로 세속화로 열려지고 개방되고 세상도 교회도 아닌 것으로 어우러져 가는 것입니다. 교회 구원을 이루는 신앙의 진실과는 애초부터 방향이 틀렸고 점점 멀게 될 뿐입니다. 사람들 위주로 갔던 유럽이나 서양교회들의 몰락 과정을 밟아 가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교회들이 사람들에게 좋게 맞추어 주는데 역점을 두게 되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해 그들을 남보다 더 효과적으로 모으고 그들을 붙잡아 두고 잘 조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일시적으로 사람을 모을 수도 있고 보기에 많고 큰 부흥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교회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로 서가는 거룩한 교회된 모습들이 없고 하나님 나라된 모습과 삶으로의 실현이 없는 많은 교회들의 문제요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도 많은 교회들이 오늘날 나타나는 제반 문제를 사회와 교인들의 기대와 시대의 흐름에 변화를 주지 않고 잘 맞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교회의 진정한 새로움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말년에 이스라엘에 대해 예고하시기를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신31:16)고 말씀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늘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백성이 되고 신정국가인 하나님 나라로 된 것이지 실제 그들의 본성은 하나님과 안맞는 육체로 된 옛사람의 죄의 근성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요구와 기대는 광야에서도 늘 나타났지만 하나님의 언약된 구원의 실현은 원치도 기대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실제 기대는 광야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고 그것이 안되면 애굽으로 돌아가 옛 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그래서 욕망을 따르고 세상 풍속을 좇던 육체의 소욕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통해 기대와 욕망을 성취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 된다고 한 것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을 이용하여 각양 탐심을 이룬다고 했습니다.(롬7:8,11) 하나님과 신앙을 자기 욕망에 적용 이용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본성을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서 스스로는 선할 수 없고 그냥두면 세상으로 가 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이들 중심으로 교회가 맞추어 주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성전이 왜 강도의 굴혈이라고 책망 받았겠습니까? 외식적인 유대교권 주의자들과 욕심으로 몰려든 유대 사람들 중심으로 조성된 타락한 유대종교 무리들이 모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무리들은 넓게는 좋은세상(지상천국)을 바랐고 좁게는 자기 형편의 반전과 기대의 실현과 육신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메시야를 기대했고 예수를 찾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기대에 맞추어 주지 않으셨고 오히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하시면서“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6:26-27)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과 안맞는 무리들은 다 떠나갔고 당시 제자들만 남았는데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하시자 베드로가 대표로 대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6:66-68)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도 보면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적 욕망의 기대와 영광을 가졌고 서로 크고 높은 자리를 따지며 다투었고 자기 생각을 앞세워 책망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든 자들이나 은혜로 교회 안에 들어온 자들이나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육신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자들의 기대나 원함에 맞추어 주면 이들이 언제 교회로 구별되고 또한 구별된 교회 모습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 중심에 맞추어 서가려는 교회는 반드시 한계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수시로 변하면서 끝없이 요구하는 이런저런 인간적 기대를 그 무엇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더 말할 것도 없이 혼합주의적 이고 구원을 이루는 순전한 신앙은 될 수 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막고 하나님을 통해 자기유익 중심에 머무르게 하는 크게 잘못된 이교도적인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증거 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그들에게 맞추어 주지 않고 오직 복음만 그대로 증거 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게 여겨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들에게 맞추어 주지 않아도 그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복음이 능력으로 깨달음으로 역사한다고 했습니다.(고전1:22-24)
이렇게 해서 구별된 자들이 교회인 것입니다. 또한 이런 교회가 계속적으로 진리에 서서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맞추어 갈 때 그리스도의 교회로 바르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사람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며 변질되지 않는 그 분의 말씀 중심으로 모든 것을 기준하고 맞추어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외면하고 안 오거나 왔다가 가버린다 할지라도 그래서 성공적 부흥이 안 된다 할지라도 계속적으로 하나님 중심의 푯대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진정한 성도가 생기는 것이며 교회 구원이 이루어지는 교회로 서 갈 때가 오는 것이며 하나님 통치의 영역이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로 이루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가 교회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만 빌린 인본주의나 사이비 단체가 아니라면 이제라도 교회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 제일 중심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중심으로 개혁해야 합니다.
목회는 자기중심으로 나와서 자기 유익을 구하는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내걸고 진리를 파수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의 요구에 굴복시키는 힘든 싸움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고 하나님의 통치가 살아계신 그 분의 교회로 서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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