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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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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종화 목사 |
참고 : | 2009년 02월 15일 경동교회 http://www.kdchurch.or.kr/ |
출3장 1-6, 벧후1장 16-19, 마17장 1-8
거룩한 변모
박종화 목사
출애굽기 3:1-6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인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가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갔을 때에, 거기에서 주님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에 불이 붙는데도,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모세는, 이 놀라운 광경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어째서 그 떨기가 불에 타지 않는지를 알아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모세가 그것을 보려고 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모세가 대답하였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하나님이 또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뵙기가 두려워서, 얼굴을 가렸다. 아멘.
베드로후서 1:16-19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드린 것은, 교묘하게 꾸민 신화를 따라서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위엄을 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더없이 영광스러운 분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좋아하는 아들이다” 하실 때에,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을 때에 우리는 이 말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욱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17:1-8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이 눈을 들어서 보니, 예수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멘.
아름다운 찬양감사드립니다.
오늘 산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건데 오늘 내가 찬양을 들으면서 하늘에서 오는 음성이 뭘까 봤더니 아까 아멘 찬송하셨는데 오늘 성경말씀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세 마디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인 요한을 데리고 갈릴리 언덕의 산으로 지금 올라갑니다. 성경말씀대로 하면 올라가서 산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광채로 빛나고 입은 옷도 하얀 옷으로 빛나면서 그 옆에 모세가 와 있고 엘리야가 와 있어서 세 사람이 오순도순 얘기를 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심리적 착시 현상이 아니고 사람들이 보기에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께서 안으로부터 광채를 내시고 하얀 옷으로 빛내시고 말씀을 나누십니다. 말씀을 하시는데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봤더니 모세와 엘리야가 하는 말, “예수님, 당신이 곧 수난을 받고 죽으셔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요?” 라고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는 없는데 누가복음에 보면 이 구절이 나옵니다. 세 사람의 대화 내용은 곧 있을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셋이서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을 겁니다. 그래서 너무 감격스러워서 평소에 듣던 이스라엘 전체 역사, 유대교 전체 역사의 상징적 주인이신 모세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스라엘 모든 예언자 가운데서 최고의 예언자로 존경받는 엘리야, 살아서 승천했던 엘리야가 나타났다며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베드로가 스승으로 섬기면서 존경하는 예수님 앞에서 삼자 대화를 이루는데 테마는 우리 사랑하는 예수님이 죽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베드로는 그 장면을 보고 즉석 제안을 합니다. “예수 선생님, 제가 오늘 집 세 채를 짓겠습니다.” 장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는 선생님을 위한 집이고, 또 하나는 모세를 위한 집이고, 또 하나는 엘리야를 위한 집이고, 세 집 짓고 오순도순 사시지요. 우리도 시종들면서 살겠습니다.” 베드로는 보통 인간의 상식을 가진 제안을 합니다. 이미 오래 전에 죽었을 모세가 부활을 해서 나타난 겁니다. 아직은 다시 오지 않고 다시 온다고 약속했던 엘리야가 나타난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사고방식이 있었습니다. “살아서 승천한 사람은 엘리야 뿐 그 분이 다시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을 알려주실 것이다. 엘리야가 오실 때 이 땅이 종말이 된다,” 이렇게 믿었습니다. 엘리야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에게 보인 것은 환상일까요, 현실일까요? 그런데 갑자기 산중에 하늘이 막히고 구름이 끼면서 구름 속으로 주시는 하늘의 음성입니다. “예수라는 이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모세야, 엘리야야, 베드로야, 세상 모든 사람아, 예수의 말을 들어라.” 이 사건이 오늘 변화산 상의 핵심입니다. 베드로가 집을 지을 수가 없었죠.
그런데 마침 이 사건이 보도된 시간, 그 시간이 언제냐 하면, 유대교 명절 중에 중요한 축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초막절, 또는 장막절로 불리는 구절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도움을 받아서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기 전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살 때 집이 없어서 나뭇잎사귀를 가지고 벌판에서 살았던 40년입니다. 벌판에서 살던 40년, 이때를 기념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도 가나안 땅에 있는 나뭇잎사귀 가지고 지붕을 만들고 또는 볏잎으로 지붕을 만들어서 초막을 지어서 일주일 동안을 살았습니다. 일부러 살고, 일종의 텐트고 캠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주신 것을 실제 몸으로 체험하면서 삽시다. 그 절기를 초막절, 장막절이라 이름합니다.
오늘 산에서 예수와 모세와 엘리야가 한참 이야기하고 있는 이 시점은 유대교 장막절의 절정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이 광경을 보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장막절에 세 분이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또 하나의 장막을, 아름다운 장막을 산에 세 채를 지으면 모세, 엘리야, 예수가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하나가 되는 순간입니다. 디자인 치고는 아름답죠? 엄청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우리한테 주는 메시지가 단순명료합니다. 이 변화산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일주일 후면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십자가를 지고 마지막 죽기까지 고난당해야 할 수난을 예고하는 바로 그 시점에 이 사건이 생겼습니다. 예수님 마음은 이럴 것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고, 모든 인간에게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 왔다고 했고, 축복의 길을 준다고 했고, 많은 사람에게 구원과 축복을 줘야 할텐데, 그렇게 설교했고 선포했는데 이젠 내가 죽어야 한다.’ 죽음을 미리 예측하는 사람, 죽음의 운명을 아는 사람이 제자들 모아놓고 후손들 모아놓고 뭐라고 예언하면 좋습니까? 내가 곧 죽는다, 그러면 너희들은 남아서 유지를 받들기를, 이렇게 하라고 유언 남길 수 있습니다.
예수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죽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상상을 안 합니다. ‘엘리야도 살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와 가지고 왜 죽는다고 해야 합니까? 죽음 없이 구원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믿던 기적의 하나님,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는 나는 죽는다고 선포해야 하고요, 실제로 죽어야 합니다. 실제 죽음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이고 죽어야 산다고 하는 부활의 경험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은 괜찮은데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이야기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께서 오늘 산에 올라가서 이런 장면을 연출하십니다.
산에 자주 다니십니까? 저는 산에 자주 못 가는데 산이 너무 좋습니다. 우선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죠?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대자연의 신선한 공기도 호흡할 수 있죠? 그것뿐만 아니라 세상에선 모르다가 산에 올라가보면 어찌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품이 아름다운지요? 그곳에 가면 하나님이 조금 가까이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오순도순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영적 대화가 가능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중요한 이야기하실 때 산에 가셨습니다. 산에 가셔서 유혹도 당했습니다. 산에 가셔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산에 가셔서 죽기 전에 피눈물나게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 오늘처럼 하얀 얼굴로 변모하는 장소도 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산에서 죽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부활했습니다. 산은 자연의 한 현상이고 상징이지만 하나님과 조금 가까운 곳,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 죽음도 있고 부활도 있는 곳, 조금은 세상보다 위에 있는 곳, 그 곳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디자인 하나를 만드셨습니다. 그랜드 디자인입니다. 하나님이 옛날 모세와 엘리야와 지금의 예수가 어떻게 구원을 이루시는지 세상 사람들 좀 보십시오. 그림 같은 한 폭의 장면이 지금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왜 와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예수도 속한 이스라엘 전체 유대백성 전체 대표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입니다. 율법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최고의 조상의 말씀이고 모세가 한 일은 출애굽뿐 아니라 호렙산에 올라가서 율법을 받아 온 사람, 떨리는 가슴으로 받은 사람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율법을 받는 모세야, 이곳은 거룩한 곳이다. 신을 벗어라.” 거룩한 하나님 앞에 떨리는 마음으로 불타는 떨기 속에서 모세는 율법을 받았습니다. 율법이란 그냥 법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가는 모든 행위, 신앙, 정치, 사회, 가정, 모든 것을 총괄하는 율법전서가 모세가 받은 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입니다.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가 오늘 예수와 함께 했습니다.
그러면 율법만 가지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하나님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 망가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 거역될 때, 반드시 등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언자들입니다. 왜 율법을 안 지키느냐고, 왜 하나님을 멀리하느냐고, 심판도 예언하시고, 위로의 복음도 예언하시고, 하나님의 축제 때마다 말씀하시고, 예언과 율법이 동시에 두 기둥이 되어서 이 둘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있습니다. 그 예언의 대표자가 엘리야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조금 더 읽어보면 “예수님, 세상 사람들 말이 엘리야가 빨리 오셔서 무언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구세주가 오신다는데, 메시야가 오신다는데, 엘리야가 온다고 말씀하시는데 언제 오십니까? 이 엘리야가 언제 오십니까? 이 엘리야가 맞습니까?”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 엘리야는 구약시대 엘리야고, 지금 내 앞에 온 엘리야가 있다. 엘리야가 누구냐?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 예언잔데 그 엘리야가 세례요한이다. 이미 왔지 않느냐? 지금 세례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온 그 사람이 새로운 엘리야다. 그러면 나는 누구냐? 옛날에는 율법을 받은 모세가 있었지만 오늘은 율법 그 자체인 나 예수가 있지 않느냐? 모세는 율법을 받았고 나는 바로 그 율법이니라. 그것도 새로운 율법이니라.” 그래서 성경말씀 전체를 보면 율법 자체인 예수는 율법이라 하지 않고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입니다. 율법은 모세가 받은 법전이지만 예수는 인간과 삶과 말과 행실 모든 것이 율법 그 자체요, 새로운 율법이요, 복음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 사실이 우리한테 주는 중요한 시사점이 있습니다. 예수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했습니다. 아니 모세와 엘리야의 하는 말이 “예수님의 수난절에, 죽음에 어떻게 우리가 동참할까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총괄한 율법은 당신의 십자가 사건에 어떻게 용해될 수 있습니까? 모든 예언은 오늘 십자가에서 달릴 주님의 수난에 어떻게 동참하면 됩니까?” 구약이 오늘 예수한테 뭉치는 순간입니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가 모든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예수십자가에 다 함몰되는 순간입니다.
이 사실을 보면서 우리가 꼭 깨달아야 할 게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시작된 구약에 쓰여 있는 모든 역사, 지나간 역사, 그 자체로 우리한테 의미 있지 않습니다. 구약의 모든 역사를 창세기부터 보지 마시고 예수의 눈으로 구약을 보세요. 예수가 역사해석의 핵심입니다. 예수의 눈으로 구약을 보세요. 예수의 눈으로 예언을 보세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과거에 이루었던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판단하시면 보람 있는 거 추리세요.
우리가 지나간 역사를 판단할 때, 역사가가 과거 지나온 역사를 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내 삶에 중요하고 구원이 되는 것을 골라서 편집을 합니다. 역사가와 지난 세기의 대화, 만남,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요? 구약에 있는 모든 역사, 예수 이전의 모든 역사는 오늘 예수의 안경을 끼고 보십시오. 그리고 엘리야의 예언도 그렇게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예수와 모세가, 예수와 엘리야가 하나가 됩니다. 신약과 구약이 왜 하나가 됩니까? 왜 우리가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역사를 우리의 경전으로 받아들입니까? 예수의 눈으로 본 예수 이전의 하나님의 통치 역사입니다. 이렇게 구약을 보십시오. 예수가 안경입니다. 역사관의 이야기고, 신앙관의 이야기고, 신앙고백의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집트에서 탈출시켰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예수의 눈으로 본 역사는 이렇게 출애굽기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 자체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과 같습니다.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냥 건넌 게 아니라 홍해를 건넜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 하나님의 백성은 물이 갈라져서 살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려고 했던 이집트의 군사들은 홍해에 수장되었습니다. 홍해가 뭡니까? 예수의 십자가와 같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건 뭡니까? 그것은 예수님 십자가 다음에 온 작은 그러나 실제화 된 역사적 부활의 세계입니다. 예수의 눈으로 봤더니 출애굽 사건 자체가 십자가 사건과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있었습니다. 홍해는 자연적 사건이고, 상징적 사건입니다. 홍해가 십자가라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예수의 수난과 고난이라고 이름하는, 죽음이라 이름하는, 십자가를 건너온 우리는 부활이란 이름하는 새로운 가나안 땅, 새로운 예루살렘을 축복으로 본다는 것이 오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엘리야는 누굽니까? 엘리야는 모든 예언을 대표했습니다. 엘리야는 살아서 승천했다고 그랬습니다. 살아서 승천한 사람은 다시 와야 합니다. 다시 온 사람이 오늘 세례요한으로 와서 엘리야가 하는 말, 새로운 세례요한이 하는 말, “메시야가 오신다.” 그 메시야가 오늘 왔습니다. 예수의 눈으로 엘리야를 비롯해서 모든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예언의 말씀을 예수의 십자가 부활의 힘으로 다시 해석합시다. 구약 성경 전체를, 인류의 모든 역사를, 창조역사를 십자가 부활의 힘으로 다시 해석해 봅시다. 해석해 보면, 구약의 모든 역사가 우리한테 생명의 역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눈으로. 오늘 이 사실을 변화산 상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역사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가 죽습니다. 죽으면 죽음 다음에 올 부활의 역사가 우리한테 주어질 미래의 역사입니다. 내일 우리는 부활을 위해서 십자가로 갑니다. “나는 죽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만백성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 수난의 시절을 내가 맞아야 한다. 그러나 수난의 터널을 지나면, 수난의 홍해를 지나면 반드시 약속된 땅이 있다. 그 땅을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여라. 그 땅을 하나님 나라라고 하여라.” 그 이야기를 하시기 위해서 오늘 변화산상에서 몸이 변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다시 한 번 수난을, 구원의 길로 생각하십시오. 이 사건이 모세와 엘리야를 끌어안은 예수의 대화, 예수의 한 모임, 이 사실을 우리는 늘 경험해야 합니다. 지나간 역사는 예수한테 세례를 받습니다. 지나간 우리의 모든 조상들의 역사도 예수한테 세례를 받으면 다시 구원의 역사로 들어갑니다. 이 사실 하나를 분명히 인지하고 확인하십시다. 그러면 그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와 함께 내려가자. 두려워마라. 일어나라. 나와 함께 이 길을 가자.” 새로운 가나안 땅이 여러분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또 하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실 때,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의 말을 들어라, 하실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말씀하셨지만 듣는 사람들은 직접 하나님 말씀 듣지 못하고 구름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기억하시죠? 비둘기 같이 성령이 임해서 하는 말,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똑같은 말씀이 베드로후서에 베드로가 기록했습니다. 세례 받을 때 보지 못했지만 오늘 변화산 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을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베드로후서의 기록이에요. “그 분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이 말씀은 세례받을 때 주어졌는데 오늘 변화산 상의 말씀은 이제는 하고 싶은 이야기, 그 분의 말을 들읍시다. 그분의 행실을 따릅시다. 그런데 그 말씀이 구름 속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옛날에 기록된 모든 예수의 말씀을 자연의 현상, 사례현상, 기후 현상을 합해서 분위기를 연출한 장면이 나오는데 구름 낀 역사는 독특한 역사입니다. 맑은 하늘에 대낮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항상 천둥을 동반한 속에서 구름 낀 속에서 암흑 속에서 하나님의 실낱같지만 관통하는 말씀을 해 주신 것이 구약 성서 전체의 기록입니다. 오늘 변화산 상에서 구름 속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내가 사랑하는 아들의 말이다. 그의 말을 들어라.” 구름을 뚫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 무엇을 상징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기도에 응답하실 때, 언제 하시느냐 하면, 잠잘 때도 응답하시고 일할 때도 응답하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구름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아주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건강하게 사시다가 병 들릴 때가 있지요? 사업이 잘나가다가 한 때 좌절될 때가 있지요?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데 구름 낀 날씨처럼 괴로울 때가 있죠? 나라가 잘 나가는 것 같은데 지금처럼 위기에 닥칠 때가 있지요? 구름은 하늘과 땅을 만나게 하는 중간지대이지만 구름은 햇빛도 아니고 암흑 천지도 아니고 중간쯤 생긴 불안, 질병, 좌절, 아픔, 또는 위기, 그 위기를 뚫고 아픔을 뚫고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의 말을 들어라.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가 좋아하는 아들, 그의 말을 들으면 산다.” 그의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 내부로부터 나오는 얼굴이 너무 광채가 커서 부활을 담은 얼굴이 너무나 커서, 십자가의 구름을 뚫고 하시는 그분의 말씀이 너무나 커서 흰 옷입은 사람처럼 하얀 것으로 광채가 뒤덮였습니다.
우리한테 희망을 주시는 광채를 주시는 거룩함을 주시는 그 분이 구름을 뚫고 말씀하십니다. 역경을 뚫고 말씀하십니다. 위기를 뚫고 기회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이 얻은 통로를 뚫고 여러분에게 진실된 삶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 좋아한다. 제발 그의 말을 들어라. 이 위기를 살자.” 사는 방법은 꿰뚫고 사는 겁니다. 하늘에서 하늘의 음성이 꿰뚫고 내려오셨듯이 오늘도 내려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아, 일어나라. 두려워말라. 이 길을 가자.” 수난절을 맞이합니다. 수난을 뚫고 가십시다. 그리고 위기를 맞으면 위기를 뚫고 가십시다. 예수와 함께 갑시다. 그러나 위기 때 수난 때 구름이 끼면 무릎을 꿇고 하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진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이 임해서 이 어려운 터널을 뚫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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