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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2: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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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아브라함 |
1절-20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영원 전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저희를 당신의 자녀로 택하여 주시고,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 있기 때문에 당신의 택한 백성이요 자녀인 주님을 믿는 성도들의 어깨에는 하나님의 큰 축복과 함께 다른 사람에게 그 영향이 미쳐질 수 있는 존재로 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큰 책임감과 함께 하나님 앞에 큰 행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저희들을 향해서 ‘너희들은 복의 기관이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재앙을 내리겠다’고 하니 세상이 재앙을 받고 복을 받는 일에 있어서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생각을 해 볼 때에 우리 자신들이 자기를 아무렇게나 여길 수 없고, 아무렇게나 살 수 없으니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바로 알아서 그대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것을 말씀으로 통해서 우리가 알 수가 있겠나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저희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나 창조의 목적에 입각해서, 또는 자기가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큰 책임과 사명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깊게 느끼며 살아오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이 저희들 모두 하나하나가 하나님 앞에 창조된 존재의 가치성을 더욱 깨닫고 갈 수 있는 복된 자리가 될 수 있도록 축복을 해 주시옵소서.
행여나 저희들이 깨닫지 못해서, 저희들이 미련함으로 타인에게 앙화가 미쳐진다면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저희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이 시간에 역사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오늘날 한국교회가 일을 많이 하고서도 실패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도와줬다는 거지요. 특히 큰 교회에 가면 찬양대도 많이 있고, 주일학교 교사 반사들이 많이 있지요? 특히 찬양대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돕는다, 교회를 돕는다’ 이런 인식들로 가득 차 있어요.
그렇게 되니 하나님은 무능자가 되고, 자기는 유능자가 되니 못난 하나님을 내가 가서 도와줘야지요. 그렇게 돼 버렸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 나의 도움을 받아야 만이 교회가 잘 된다는 거지요. 그런 교역자들도 많이 만날 수가 있어요. 이것은 교만쟁이지요. 하나님 앞에 잘나면 그 사람은 망합니다. 그런 교만쟁이가 되면 망하게 돼 있어요.
하나님 앞에 교만쟁이로서 부지런을 떨고 다녀도 망하는 거지만, 반면에 ‘나는 아무 것도 못한다’고 하면서 안 하고 있는 것도 받을 축복도 못 받지요. 안타까운 일이지요? 어떻게 보면 어리석지. 교만쟁이는 교만해서 망하지만 자기가 받을 것도 많은데 아무 것도 안 해서 그걸 못 받고 멍청하게 있다는 이것도 참 어리석어.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부서에서 어떤 직임을 맡고 수종을 들더라도 참 서툴러. 우리 모두가 그렇지요? 서투나마 우리가 하나님의 방편적인 일은 할 수 있지만 목적적인 일을 직접적으로는 할 수가 없어요. 안 되지요. 그건 하나님 당신이 하시는 건데, 하나님 당신이 하시는 일에 내가 수종을 드는 거지요.
‘이거 와서 해라, 도와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약하고 무능해서가 아니고 그 사람에게 축복을 주기 위해서, 구원이라고 하는 축복을 주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당신 혼자서 일을 하시면 더 잘 하실 텐데 나 같은 이런 죄인에게 일을 맡기십니까’ 해야지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한 사람에게 맡기는 게 당신에게 손해가 덜 나겠습니까, 많은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힘이 덜 들겠습니까? 많은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보다 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하나님 당신이 힘이 덜 들지.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안 그렇지요. 많은 사람에게 많이 맡겨야 힘이 덜 드는 것으로 생각을 하거든요.
사역을 두고 말할 때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우리에게 맡기는 것은 단순히 일, 사역이 목적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것입니다.
교만쟁이는 망하는데 오늘날 교회적으로 보면 말세가 될수록 더 그런 건데 교역자가 다른 사람을 망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을 자기가 안 받으면 자기 스스로 망하게 되는 건데 보면 교역자가 사람을 더 망하게 만들어 버리는 걸 우리가 볼 수가 있거든요. 많이 볼 수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일을 왜 만드셨느냐? 나의 실력을 키워주고, 나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입혀주기 위해서 일을 만들어 놓은 거지요. 그러기 위해서 물질계를, 세상을 만들었다 그 말이요. 창세기로 올라가서 인간을 만들 때에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라’ 하는 그 말씀 속에는 우리를 하나님 당신의 성품을 입혀주기 위해서 그 명령을 하신 것이 분명하다 그 말이지요.
예배당 건물이 하나님께 필요합니까? 교회에서 예배당 건물을 짓는 것이 하나님에게 필요해서 짓는 겁니까, 인간 자기에게 필요해서 짓는 겁니까? 인간에게 필요해서 짓는 거지요. 그러니까 ‘너를 위해 지어라’ 그 말이요. 즉 구원을 위해서! 일이 중요해서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는 게 아니라 일 속에 들어있는 구원이 중요하다. 이렇게 봐 나가니 성경 66권 전부는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곧 인간 우리, 날 위해 주었다.
그러면 십일조를 바치라는 것은 하나님이 돈이 궁해서? 솔로몬이 양을 1천 마리를 드렸는데 1천 마리를 잡으려면 하루 온 종일도 모라랄 것 같은데, 그러니 양 1천 마리를 잡아 번제를 드렸다고 하는 것은 그 의미가 크고 깊지요. 많이 드렸다고 하는 것을 숫자적인 개념으로 생각해서 ‘와, 많다’ 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그 많은 것을 드림에 있어서 그 마음에 강조가 들어가는 거지요.
보면 전부 다 우리를 위해서! 그렇다면 독생자를 준 것 역시도 우리를 위해서 준 거란 말이요. 모든 게 그렇단 말이요. 그러니까 성경의 모든 명령은 우리들의 실력배양이요, 이 물질계는 실력배양의 재료다, 교재다 이렇게 봐 집니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출발하라’ 하는 것이 인간 편에서 보면 그대로 순종을 하면 알거지가 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말씀을 하신 의도성에는 그보다 더 크고 훌륭한 것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임이 틀림이 없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을 입히는데 있어서 육신의 부모가 신경을 더 많이 씁니까, 하나님 당신이 신경을 더 많이 씁니까?
그런데 믿는 부모라도 그 면에 대해서 생각을 깊이 하는 부모가 별로 없지요. ‘육신의 내 자식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더 많이 진하게 입게 해 줄까’ 하는 면에 대해 걱정을 하는 부모가 별로 없을 것 같아. ‘명절에 내려왔다가 가거라’ 하는 어떤 인정 그런 걸 많이 생각하지요?
주님께서 밤잠도 주무시지 않는다는 건 뭐요?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애쓰시고 염려하고 계신다고 하는 것. 그 면을 우리가 발견을 해야 되겠지요. 하나님 당신은 우리의 성화구원을 위해서 분초찰나도 쉬는 게 없다 그 말이요. 밤과 낮으로 연속적으로 계속입니다.
여러분들, 낮에만 숨을 쉬는 게 아니고 밤에 잠 잘 때도 숨을 쉬지요? 그런 것처럼 하나님 당신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밤낮으로 쉬는 게 없다고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많은 계명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것.
나그네 생활은 왜 하게 하느냐? 성경에도 있지요? 피 뿌림을 받게 하려고! 그러니까 순종의 횟수, 순종의 양, 순종의 수고대로 신의 성품이 입혀지는 겁니다.
우리가 그냥 인생살이를 걸어가면 이게 실력이 있는지 기술이 있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어떤 사건 환경에 부딪히면 ‘내 실력이 얼마나 있구나’ 하는 그것을 자기가 스스로 판단하게 돼요. 그걸 자기가 느낄 줄 알아야 됩니다.
일반사람들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성화구원의 욕심을 내고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특히 어떤 사건 환경에서 자기가 넘어졌을 때에 ‘아, 외부적 환경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 하는 그런 말이 나오면 안 되지요. 남이 볼 때는 그렇게 보여질 수도 있고, 그런 해석을 붙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넘어진 자기가 자기에게 그런 해석을 붙이면 안 되지요.
그런 일이 있을 때 ‘내가 어떤 면에서 아직도 약하구나, 어떤 어떤 면이 나에게 약하니 그 면에 대해서 나에게 능력을 주십시오, 믿음을 주십시오’ 그런 기도 좀 해 봤습니까?
자기가 생각을 할 때 ‘아, 저기는 내가 가면 안 되지’ 하고 강하게 의식을 하면서도 넘어질 때는 자기 믿음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지만, 그러나 반대적으로 내 마음이 늘 가고, 좋아하는 그것에 빠져서 자기의 신앙이 넘어져도 자신이 넘어졌는지, 안 넘어졌는지 그 사실조차도 모른 채 지나가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자기란 말이요. 얼마나 둔감하고 어리석은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그런 일들을 종종 겪으면서 뒤를 쳐다보면 그런 사실을 알게 되고 양심에 가책을 받고 하는데 만일 그런 사실이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른 채 그렇게 살다가 천국에 들어갔다고 했을 때는 그런 면이 더 진하게 느껴질 것 같아요. 그렇지 않겠어요?
이 세상에서는 천국을 볼 때도 희미하게 보이지만 성화구원 면에서도 희미하게 보여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면 성화구원의 결과성이 뚜렷하게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날에 가서는 확실하게 드러날 거란 말이요. 그러면 그 때는 어떻게 할 거냐 그 말이요.
감옥은 고통을 주는 곳인데 일반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면 다 고통을 느끼지요. 그러나 바울은 감옥 속에 들어갔는데도 고통이 없어. 내발적 기쁨이 외부의 고통을 삼켜 버렸다.
불은 외래적이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그들의 내발적 기쁨이 외래적인 그 불을 삼켜버리니 더욱 기쁘다 그 말이지요. 삼켜버리면 더욱 기뻐. 다른 사람들은 불에 타서 죽었지만 세 친구는 불에 타지를 않았어요.
그러니까 내발적 기쁨은 다른 사람의 순종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다. 영적으로 나오는 내발적 기쁨이 다른 사람의 충동에 의해서 좌우되지를 않는다 그 말이지요. 기독자는 내발적인 이 기쁨으로 살아야 한다 그 말이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참 신비롭게 지었는데 죄에게 감염이 될수록 고통이 되게 지었습니다. 인간 자기는 그렇다는 것. 죄에게 감염이 될수록 인간 자기에게는 고통이 온다.
그리고 고통이 왔다는 사실을 자기가 느낄 수 있지요? 자기가 고통을 느꼈을 때는 ‘아, 벌써 나에게 무엇이 감염이 됐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지요? 느낄 수 있어요.
아담과 하와는 그 좋은 에덴동산 안에서도 고통이 됐지요. 우리 성도는 진리와 영감의 결합적 활동으로 내발적 기쁨으로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점점 남방으로 갈 때는 돈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으나 구원 면에서는 점점 중단이 오고 있었지요. 애굽에서 먹을 것, 입을 것이 풍부했지만 아브라함의 그 속에는 내발적인 고통이다.
육의 고통은 심적인 심고보다도 그 강도가 약합니다. 심고가 강해지면 육의 고통은 잊어버리게 돼요. 심고가 강해지면 육고는 잊어버려집니다. 심적인 어떤 고통 때문에 밤새도록 잠을 못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눈이 삐끔해 가지고 밥을 먹으려면 모래알을 씹는 것 같지요. 마음의 고통 이거는 사람을 마르게 해요.
그러면 영의 고통은 뭘까? 육고가 있고, 심고가 있고, 영고가 있는데 영의 고통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고통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표현이 그렇습니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그런 면으로 자기에게 고통이 되도록 심각한 생각들을 해 보았습니까? 영적인 것을 생각을 하면 할수록 생명적인 건데 이걸 영고라고 붙이기는 그렇네요.
어쨌든 하나님의 뜻을 놓고 영적인 면에 있어서 밤새도록 잠을 못 자는 그런 게 있느냐 그 말이지요.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일까, 저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일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한 고민이랄까?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가서 영의 고통도 당하고, 마음의 고통도 당하고 고음국을 먹은 셈이지요. 그런 후에 아브라함은 회개를 하고 처음에 장막을 쳤던 벧엘로 올라오게 됩니다.
벧엘로 올라간다고 하는 것은 뭘 가르치느냐 하면 회개를 가르치는 겁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건 타락이고, 벧엘로 올라오는 건 회개이고.
사람이 남방으로 갈 때는 벼랑 끝에서 떨어지듯이 금방 푹 떨어지는 게 아니고 ‘점점’ 이란 말이요. 점차적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점차적’ 이걸 자기가 별로 잘 못 느끼지요? 그렇지 않아요? 안 그래요? 별로 못 느껴요. 의식을 못해요. ‘아, 지금 내가 남방으로 가고 있구나’ 하는 이걸 꼭 한 방 얻어맞거나 어떤 사건이 부딪혀서야 ‘아차’ 하고 알지요.
이렇게 나마 돌아오는 것도 성화구원의 이치와 도리를 알아야 만이 정확한 길을 찾아 빨리 찾아 올라올 수가 있다 그 말이요. 본질을 찾는 면에 빠르다 그 말이요.
그런데 가만 보면 남방으로 가서 고음국을 먹고 나서 회개를 한다는 것이 고작 하나의 종별적 회개에 불과한 교인들을 많이 보거든요. 그러니 이거 참 얼마나 안타까우냐?
남방으로 가지 말라는 것은 남쪽으로 가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물질로, 세상으로 기울어지지 말라 그 말이지요.
우리가 회개를 보면 기본회개가 있고, 중복회개가 있지요? 에베소 1장 7절에 있나?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이건 기본회개지요.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여기에 기본구원을 받고서도 죄 사함을 받을 게 또 있습니까? 기본구원에서, 기본회개에서 죄 사함을 덜 받고 천국에 가는 건 아니지요. 오늘 지은 죄와 미래에 지을 죄 모두가 기본회개에서 다 사함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공로로 나의 지었던 죄, 앞으로 지을 죄 모두 다 탕감이다.
모세의 율법은 우리의 죄값을 매겨서 지불하려고 주었다 그렇게 보면 될 거요. 율법이나 계명을 준 것은 다 그 면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율법이나 계명이 오기 전에도 죄는 있는 것이고, 이로 인해 죽음이 오는 거니까 그 죄값을 매겨주려고 준 겁니다. 그러한 면에 있어서 기본구원에서 다 사함이 된 겁니다.
그것은 어디에서 되는가 하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심이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100% 다 지켰다 그렇게 쉽게 생각하면 되겠어요. 다른 각도로 말씀을 드리면 내가 성경의 말씀대로 100%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못 산단 말이요. 죄에 걸려 넘어졌었고, 영이 죽었었고. 그런데 주님께서 내 대신 직접 100% 말씀대로 사셔서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드렸다 이렇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내 대신 대형이고, 내 대신 대행이다. 대행이라는 면에서 ‘칭의라, 의롭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집회 때에 지은 죄를 사람 앞에 회개를 하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천주교에서 말하는 고해성사와 비슷한 것입니다. 다르게 좀 심한 말씀을 드리면 공갈협박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알아두실 것은 우리가 그런 걸 흔히 볼 수가 있는데 교회 교인이 다른 교회 목사님에게 가서 상담하는 거 있지요? 그런 게 있을 수 있는데 어느 교회 교인이면 그 교회 목사님에게 가서 상담을 하는 게 성경적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하는지 모르겠는데 기독교계 방송의 프로그램에서 신앙상담 하는 거 보면 상담해 주는 게 그 성도에게 하나도 덕이 되지 못하는 대답을 해 주는 걸 많이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공개된 방송이다 보니 ‘이렇다 저렇다’ 하고 딱딱 끊는 게 없이 빙 둘러서 부드럽게 답을 해준단 말이요.
신앙상담이면 상대가 행하던 안 행하던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딱 이렇게 말이 돼야 할 거란 말이요 ‘이건 영이고, 이건 육이다’ 하고 정답을 가르쳐줘야 할 텐데 그런 걸 별로 못 봐요.
이걸 다른 면으로 보면 그게 음행입니다. 세상은 몸으로 음행을 하는 이것만 알고 있지만 그건 마음으로의 음행이 되는 거지요.
나도 그런 경험을 당하지요. 저기 수원교회의 집사님이 그 교회 일을 나에게 얘기하고 그런단 말이요. 교인들끼리 싸우고 한 걸 나에게 얘기를 하거나, ‘우리 가정이 이렇게 돌아가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내가 말대답 해 주기도 싫고 그래요. 교역자로서 말하기가 그래요.
그러면 내 말은 ‘집사님, 아예 그런 교회에서 옮기십시오’ 하는데 이 말을 그 분이 어떻게 들을 런지 모르지만 참 딱해. 그 교회를 옮기면 그런 문제가 해결이 될 것 같고, 사실 옮기라고 그런 일이 생긴 거라고 보여지는데 그럴 마음은 없거든. 그런 교회에 다녀봐야 자기의 성화구원이 안 된단 말이요. 그러니 그 상태에 있는 분께 백 날 말대답을 해 줘 봐야 맨 날 그 타령이야. 소용이 없다. 차라리 모른 채 그렇게 믿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실컷 얻어맞고 기어 나오는 게 낫지.
이런 사람은 회개를 한다고 해도 하나의 종교적 고해성사적일 테니 무슨 회개가 되겠어요? 처음사랑도 붙잡지 못하는 것이고. 그래서 보면 이 세상에는 참 사랑보다도 거짓사랑이 많고, 또 사람을 살리는 사랑보다도 죽이는 사랑이 참 많다.
고해성사는 회개가 아니고 일종의 자복입니다. 이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죄의 그물에 자기가 걸리기 쉬워요. 고해성사를 받는 사람에게 내가 내 죄를 말한들 고해성사를 받는 그 자가 나의 죄책임을 질 수 있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으냐? 참 어리석다.
우리는 먼저 방향회개, 방향전환을 할 것! 전환하는 그게 회개란 말이요. 자기가 입으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 무슨 죄를 지었다’ 그게 아니고 옳은 신앙의 노선으로 들어선 이것이 방향전환이 된 거란 말이요. 이건 회개가 된 거란 말이요.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종별회개가 있는데 진리노선으로 가면서 이 종별회개가 돼 나오는 거지요. 이 종별회개는 옳은 신앙의 본질적 노선으로 나가지를 못하면서 회개하는 것과는 다르지요. 본질적 노선도 모른 채 종별적 회개를 하는 것과는 그 차원이 달라요. 바른 종별회개는 늘 하나님의 단일성을 생각하면서 내가 그 단일성에 맞추려고 하는 이게 옳은 거지요.
만일 아브라함이 애굽에 그대로 붙어 있으면서 아내 팔아먹고, 진리 다 팔아먹고 대성통곡을 했다면 그건 회개입니까, 회개가 아닙니까? 그건 하나의 자복에 불과하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바른 회개는 애굽에서 벧엘로 올라가는 거지요. 다시 말씀을 드리면 내가 과거에 지은 잘잘한 죄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현재적으로 진리를 잡고 사는 것이 바로 되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거예요.
아브라함의 경우에 있어서의 종별회개는 ‘내가 무엇 때문에 애굽으로 갔나? 여자 때문에 애굽으로 갔느냐, 물질 때문에 애굽으로 갔느냐, 권세 때문에 갔느냐? 무엇에 끌려갔느냐, 무엇 때문에 내가 그리로 내려갔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고 물질 때문에 내려간 것이라면 ‘이제는 물질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하는 게 종별회개란 말이요. ‘진리를 버리고, 벧엘을 버리고 물질을 잡으려고 애굽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하는 이것이 종별회개가 되는 거지요.
여러분들도 가치 평가적으로 생각해 봐요. 작은 물질이 부른다고 할 때 진리를 두고 오라면 갈 수 있습니까? 못 가지요. 스스로 평가가 나잖아요. 그러면 많은 물질이 ‘진리 두고 오너라’ 하고 부를 때는? 안 가요?
얘기는 조금 다릅니다만 마음은 가만있지 않고 움직인다고 하는 면에서 볼 때 여러분들, 밤에 꿈꾸지요? 그거 무슨 작용인 것 같아요? 어디서 나오는 작용인지 과학적으로 규명이 안 될 거예요. 그렇지만 꿈속에서도 생시처럼 마음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지요? 그걸 보면 밤에도 마음이 쉬지를 않는다고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어요.
마음의 상태는 그런데, 지금 말하고자 하는 벧엘신앙이라고 하는 건 항상 진리를 잡고 있는 상태라는 것. 이런 상태라면 남방으로 내려가지를 않겠지요. 이런 상태라면 헤브론으로 올라가는 신앙이 되겠지요. 이런 상태가 아니라면 별 수 없이 남방으로 돌아가는 신앙이다.
주일날 저 멀리 대전에서 누가 일을 준다고 하면 그 일 하러 갈 거란 말이요. 안 가지는 않을 거란 말이요. ‘거기도 교회가 있으니까 거기서 예배드리면 되지’ 하면서! 그게 점점이야.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진리를 버리고는 절대로 안 간다’ 하고 단정을 짓는 거거든. 이게 종별적 회개거든.
아내를 팔아먹는다는 건 신앙정조를 팔아먹는 걸 말하거든요. 그 일 후에 아브라함은 또 벧엘로 올라가. 그런데 올라가서는 벧엘생활을 잘 하는가 싶더니 또 내려가. 늘 이러고 있어. 그런 아브라함을 보면 나하고 똑같아요. 훤하게 보여요. 이게 전부 다 내가 나를 하나님과 저울질하는 겁니다.
우리는 누가 주일날 물질을 크게 많이 준다고 해도 신앙은 팔아먹지를 말아야지요. 설령 나에게 있는 물질이 달아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잡으러 가지를 않아야 되겠고, 또 진리도 버리지 않아야 되겠다.
그런데 보통 보면 물질로 인해 넘어지게 되는데 이 물질선을 초월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물질을 또 맡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질 면에 철저히 회개를 하고 나오니까 물질을 맡기는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이 회개를 하면서 물질을 달라고 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회개를 하고서 물질을 많이 가지게 됐을 때 아브라함의 신앙은 ‘나에게 왜 이렇게 물질을 맡기십니까? 이 물질을 어떻게 쓰길 원하십니까’ 하게 된 거지요. 그래서 보면 물질초월을 하는 사람에게는 물질을 잘 관리를 하니까 물질을 맡기는 그런 게 있어요.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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