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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패를 잡는 설레임

고린도전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704 추천 수 0 2012.12.16 23:5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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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전15:31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1.11.30 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2012, 새로운 패를 잡는 설레임
고전15:31

얼마 전에 어떤 자리에서 노름판의 묘미에 대해서 장로님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한 번 빠지면 인생이 끝난다’는 것이고, ‘노름에는 이성과 지성이 별로 유효하게 방어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노름으로 잘사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노름을 해서 패가망신을 자처하느냐 하는 문제로 넘어가면 그 해석은 훨씬 다양해집니다.

그런데 제가 가장 좋아하고 이해되는 해석은 이것입니다. ‘매번 판이 시작될 때마다 새로운 패를 받는 기대감’ 때문이라는 거 말입니다. 지난 판에는 몽땅 잃어버렸어도 이번  판에 기대를 거는 것은, 패가 새것이기 때문에 뭔가 지난 판에서와는 다른 결과를 얻을 지도 모른다는 심리가 작동한다는 것이죠. 그게 물론 어떤 경우에는 원하지 않는 패일수도 있지만 ‘새 패’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노름은 판이 빨리 빨리 바뀌어야 재미가 있지 한 판을 하루나 이틀에 걸쳐 친다면 그만큼 노름에 미치는 사람의 수도 감소하게 될지 모릅니다.

오늘 설교의 내용은 그것입니다. 우리가 2012년을 마치 노름판에서 새로운 패를 받듯이 그런 마음으로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설교로 하기엔 좀 뭣하지만 말입니다.  

여하튼, 그 새로운 패에 대한 이야기를 수준 있게 말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 대한 것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대개 분량이 방대합니다. 언제 그것을 다 읽을까 싶습니다. 그런데도 일단 시작하면 어떤 재미에 빠져서 그 많은 분량을 금세 독파하게 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추리소설 기법을 도입하였을 뿐 아니라 심리 묘사에 탁월하죠. 그래서 추리 소설을 읽는 것처럼 손에 땀을 쥐며 읽게 되고 또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를 할 때는 마치 내가 그 사람이 된 듯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도스토엡스키의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생각은 그가 마치 소설에 나오는 여러 등장인물에 대해서 수많은 파일들을 갖고 있다가 쑥쑥 꺼내고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파일을 열어서 재미난 얘기를 하다가 좀 지루할 즈음엔 어느 새 다른 파일을 열어서 딴 이야기를 이끌고 갑니다. 이런 생각은 일반적인 소설에서도 가끔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이야기가 지루할 즈음엔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죠. 그래서 서너 사람의 이야기로 흘러가다 보면 이제 처음에 하던 이야기를 잊어버릴 때쯤에 “아 참 아까 그 처음 주인공 어떻게 되었더라.” 하는 생각이 불현 듯 들고, 그러면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는 겁니다. 처음에는 작가가 머리가 참 좋구나 생각하다가 소설이 점점 길어지면서 마침내 생각하는 것은 ‘아, 이야기의 파일이 있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여러 개의 파일을 펼쳐 보이는 소설의 방식이 무슨 방식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여하간, 그런 방식이 인생의 방식과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인생은 따분하다 하면서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는 재미있다고 하죠.

요즘 여러분이 재미있어 하는 드라마는 ‘천일의 약속’인 줄 압니다. 왜 재미  있는 것입니까? 김수현씨의 작품이기때문인가요? 수애가 등장인물이라서 그런가요? 물론 그런 것들이 이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의 재미는 뭐니 뭐니 해도 장면이 계속 바뀐다는데 있을 것입니다. 같은 줄거리를 가지고 가면서도 장면은 항상 바뀝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도 영화나 드라마와 같습니다. 지루하게 끌지 않습니다. 지루하면 그 작품은 끝난 것입니다. 조금 이야기 하다가 장면이 바뀝니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다시 처음 장면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오지 않으면 미완성 작품 같고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갖게 되죠. 특히 미스터리 수사극 같은 것은 전체의 99 프로 이상을 계속해서 단서만 찾고 수 십 개의 파일들을 펼치고 또 펼치면서 독자 또는 시청자가 종잡을 수 없게 합니다. 그런데도 흥미진진하죠. 그러다 맨 끝에서 전체의 1 프로가 될까 말까 하는 짧은 시간 동안에 그 많은 파일들이 종합이 되면서 어떤 결론에 이릅니다. 대개는 엄청난 반전이 따르죠. 우리가 범인이라고 예측했던 사람은 범인이 아니고 전혀 상상도 못한 인물이 사실은 범인이란 걸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더 재미를 느끼게 됩니다. 그런 뜻에서 드라마 ‘천일의 약속’은 어떻게 될 거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도 ‘천일의 약속’같다면 어떨까요? 그렇게 살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비록 어린 나이에 치매에 걸렸다고 해도 말입니다.

과거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이나 삶은 오직 하나의 진실한 이야기 또는 하나의 스토리를 가지는 게 기본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송죽 같은 굳은 절개로 한 사람만 섬기는 어떤 이야기들만을 칭송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여자에게는 정절로 백성과 신하에게는 충성으로 강요되어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하였지요.

그것은 옛날이야기만은 아니어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에게 오직 어떤 한 가지 성실한 길 또는 모범적인 길을 제시함으로써 삶은 지극히 단순화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오직’ ‘절대로’ 이런 말들을 좋아합니다. 그런 삶은 오직 한 개의 파일뿐이기 때문에 ‘그거 아니면 절대로 안 된다’는 식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교회 앞에 큰 돌에다가 새겨놓은 교회도 있습니다. 그래서 타 종교에 대해서 적대적이고 어느 정도는 신경증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스스로의 ‘신앙 태도’역시 지나치게 자신의 교리에 집착하고 어떤 가르침에 몰두하고 자기가 지닌 하나의 파일만 절대 유일하며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어떤 타협의 여지도 없습니다.

프로이트를 비롯해서 정신분석학자들은 이런 태도에서 신경증이 유래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지난주에 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고등학생의 친모 살인 사건을 보더라도, 그 어머니는 아들에 대해서 오직 하나의 파일만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직 하나의 파일만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하나의 파일에 온 힘이 쏟아지기 때문에 거기에 엄청난 에너지가 실리고 혹 그것이 거절되기라도 하면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서 비정상적인 충성심과 에너지를 쏟게 되고 그것은 금제가 되고 터부가 되어서 병적인 신경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온 같은 심리학자는 그렇게 하나의 파일로만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대신 꺼짐과 켜짐을 동시에 즐기는 삶을 살라고 권합니다. ‘꺼짐과 켜짐’ 그것은 마치 노름판에서 돌려지는 패와 같지 않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나고 다시 죽었다가 살아나는 순환과 반복의 사이클 또는 리듬을 즐기라는 것이 비온이라는 심리학자의 말입니다. 아이건 같은 심리학자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믿으라고 강요하기보다는 그것을 조금씩 맛보는 식으로 우리 삶에서 죽음과 삶을 경험하면서 결국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더 좋다는 이해를 지니라고 가르칩니다. 융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는 선과 악의 양단간에 선의 편에 서라고 결단을 요구하는 어떤 식의 삶이 사람에게 콤플렉스를 만들고 무의식을 억압해서 병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 보다는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균형 잡힌 의식을 통해서 그리고 반대의 일치 또는 역설을 통해서 전인성을 획득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지금가지 나눈 이야기들을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본다면, 우리는 하나의 파일만을 갖고 사는 단조로운 존재들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한 길만 파는 그런 사람이 칭찬받던 시대는 더 이상 아닙니다. 이것저것 해보면서 삶의 경험을 많이 쌓고 내게 가장 행복한 길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한 개의 파일에 집착하기 보다는 여러 개의 파일을 펼쳐 놓고 이것이 지루하다 싶으면 잠시 덮어놓고 또 다른 파일을 열고 또 그것이 지루하면 또 다른 파일을 열어서 새로운 삶들을 향유하고 즐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치, T.V의 채널처럼 이 채널을 보다가 심심하면 저리로 돌리고, 저걸 보다가 또 이걸 보고 그러면 시간이 빨리 가고 지루하지 않잖아요? 삶도 그렇게 살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까 보다 놔둔 파일로 돌아왔을 때 좀 전의 지루함은 사라지고 훨씬 더 성숙한 내가 새롭게 또 새로운 재미를 느끼면서 이전 파일을 대하고 있는 걸 보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이것이 소설로는 도스토옙스키고, 영화나 드라마일 것입니다. 또한 컴퓨터로 나타난 것이 이른바 윈도우라는 거겠죠. 여러 개의 파일을 펼치는 것처럼, 오늘날 사람들은 여러 개의 윈도우를 열어놓고 글에서 작업하다가 페이스북으로 또 그러다가 바이블웍스로 또 그러다가 트위터로 또 그러다가 다음으로 네이버로 구글로 유투브로... 수십 개의 창을 열고 닫으면서 하루를 행복하게 보내는 것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하면 너무 정신이 없었습니다, 집중이 안 된다 하면서 부정적으로 보았지만, 이젠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신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더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전에는 오직 한 길만 파다가 그게 안 되면 거기서 포기하거나 자살해버리는 것이 크나큰 부작용이었습니다. 이젠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 아닙니다. 거기서 안 되면 돌아가고 다른 길을 찾고... 조금씩 맛보면서... 때로 죽음을 경험하지만 그래도 다시 거듭 살아나면서 새로운 파일을 펼치는 기쁨을 맛봅니다.
인생을 오직 한 파일만을 위해서 수십 년 수 천 수 만 날을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인생에는 하나의 목표란 있을 필요도 없고 있다 해도 그것은 수시로 변경되고 움직입니다. 인생은 짧지 않습니다. 일 년만 해도 열두 개의 파일이 있고 열 두 개 파일 안에는 또 서른 개의 작은 파일들이 있습니다. 그 하나하나의 파일들이 저마다 흥미진진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런 것들입니다. 매일 그런 파일을 하나씩 펼쳐 보는 재미로 사는 삶은 시간을 깨어 있게 하고 황홀하게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처럼 15일짜리 유럽 여행을 갔다고 해봅시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경험이고 신나고 즐거울 게 아닙니까? 그런데 매일 매일 다른 곳을 다녀야 신날 겁니다. 만약 15일 동안 한 곳에만 가만히 있다면 어떻겠어요? 신나긴요, 지루하고 짜증스러울 겁니다. 거기가 유럽이 아니라 천국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오늘은 런던 내일은 레이크디스트 모레는 에딘버러... 그 다음은 파리 루브르 오르세, 칸느, 고호가 그림 그리던 아를 지방... 그 다음은 베네치아, 피렌체... 이렇게 매일매일 새로운 도시에 가야 여행이 신나는 겁니다. 그렇게 살면  어느 하루인들 오o 설레지 않고 흥미진진하지 않겠어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날은 그 여행만큼 가치가 없는 날들일까요? 유럽으로 여행을 간 것 보다 덜 소중한 시간들일까요? 아니죠. 오늘 우리의 하루하루도 여행이죠. 그러니 유럽으로 15일을 여행 떠난 날들과 똑같은 나의 날들입니다. 내가 그렇게 살기만 하면 오늘 하루의 삶도 유럽 여행 못지않은 설레는 날이고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날들이 되는 겁니다.  

너무 큰 단위로 파일을 접었다 펴지 말아야 합니다. 꼭 맨 마지막에 한번 죽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매일 작은 파일들을 펼치고 지루하면 다른 파일을 펼치며 삽시다. 늘 정리하면서 결론짓고 나가려고 하지 말고 파일들을 좀 늘어놓고 살자는 겁니다. 결론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파일을 펼치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파일을 접을 때마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합니다.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도 우리는 잠깐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을 매일 경험하면서 매일 또한 살아남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창을 열고 숲을 보면서 싱그러운 바람을 들이쉬면서 전혀 새로운 존재로 살아보는 겁니다. 생일날 단 한번 태어나서 미래에 단 한번 죽는, 패 하나로 일생을 사는 것 같은 그런 지루한 삶은 허상입니다. 가짜 삶이라는 말입니다.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고전15:31). 바울은 예수를 만나고 난 이후에 여러 개의 패를 번갈아 씀으로 무엇이 ‘날마다 새로운’것인지 깨달았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예수께서 내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 것도 예수는 한번 죽고 부활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을 반복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을 믿는다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 바울과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직 예수’를 외치면서 외길을 가라고 하시겠습니까?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 수많은 자신만의 파일들을 펼치면서 순간을 행복하게 살고 예수께서 매순간 우리 속에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자유입니까!

2012년에는 이렇게들 살게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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