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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3: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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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아브라함 |
13장 1절-18절.
1절-18절: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 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성경은 우리에게 천국 가고, 지옥 가고 하는 그 이치만을 가르쳐 주지를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도리를 가르치는 게 있고, 또 심판성에 있어서 공심판과 사심판을 가르치는 게 있습니다. 요5:24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심판을 면한다’ 하는 이건 공심판을 말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구원섭리적으로 볼 때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가 있으니 공심판을 받을 자가 있고, 사심판을 받을 자가 있는데, 물론 하나님의 지공법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공심판의 면제자는 천국에 가게 되고, 이 공심판 면제자는 누구든지 사심판이 붙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심판은 성화구원, 성장, 이력 등에 따라 차등성적으로 영광성이 나오게 되지요.
왜 공심판이 면제가 되느냐 할 것 같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나를 위해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이루었기 때문에 나는 공심판에 면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공심판이 면제된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형을 입고, 또 대행을 입어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됐으니 이는 신인양성 일인으로 된 예수 그리스도의 대형과 대행으로 하나님과 단절이 된 인간을 하나님과 연결시킨 중보의 사역으로 된 것입니다. 주님의 신성은 하나님과 연결이 되고, 인성은 인간과 연결이 되고, 주님에게는 그 두 양성이 있습니다.
이 중보사역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새생명으로 중생이 됐습니다. 다시 태어났다 그 말이요. 이래서 완전히 공심판이 면제가 된 겁니다.
이제 중생이 된 자에게는 사심판이 있는데 이 사심판은 애정적이고 자체적이고 영원적인 심판이 되는 겁니다. 성화구원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노아홍수의 심판을 보면 공심판과 사심판을 보여주고, 소돔성의 심판은 사심판을 보여주면서 역시 공심판을 또 보여줍니다. 항상 그게 같이 있어요. 불신자도 망하고, 택한 자도 망하고 하는 거기에 공심판과 사심판이 들어 있지요.
우리 믿는 사람은 공심판은 면제가 되었지만 사심판에 있어서 주님의 살으심의 정신과 사상대로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전부는 심판이 되는 겁니다.
공심판은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의해 되지만, 사심판은 근원에 의해 됩니다. 이것은 택자의 경우에 있어서의 얘기예요.
성경에 보면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했는데 둘이 똑같은 일을 했지만 한 사람은 심판을 받고, 또 한 사람은 심판을 안 받는다는 겁니다.
또 마7:21 이하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 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한 자’란 한 인간의 전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한 인간의 어떤 사건이나 이력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부분적이지요. 성도에게 있어서 사건과 이력을 두고 하는 말이 되겠습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일을 한다고 해도 100% 주님께서 받으시는 게 아닙니다. 100%라는 게 있을 수 없다 그 말이요.
그리고 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고 나오고, 또 그 뒤를 보면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고 나오지요?
예수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능력을 행하고 다 했는데 왜 불법이라고 하느냐? 인간 자기의 이름으로 한 것도 아니고 예수의 이름으로 했는데도 왜 모른다고 하고, 왜 불법이라고 하느냐? 성경대로 했는데도 왜 그러냐 그 말이요.
‘모른다’ 하는 이 말은 책임적으로 모른다고 하는 말인지, 지식적으로 모른다고 하는 말인지? 어느 말일까요? ‘난 너희를 모른다,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고 했는데 책임적으로 모른다 그 말입니까, 그들이 뭘 행했는지를 지식적으로 몰라서 모른다는 그 말입니까? 책임적으로 활동적으로 모른다 그 말이지요. 주님이 지식적으로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
내가 오늘날을 살면서 나의 미래에 대해 무시를 하면 무시한 그대로 미래에 내가 무시를 당하게 됩니다. 내가 무시했던 그 미래에 대해서 내가 무시를 당한다 그 말이요. 언젠가 미래가 현재가 되고, 현재가 과거가 될 날이 반드시 오는 겁니다.
하나님을 무시를 하면 현재에서도 자기가 무시를 당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어요. 그리고 내가 현재에 진리를 무시하면 미래가 현실이 되는 그 날에는 내가 반드시 진리에게 무시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지혜롭게 살아야 하는 겁니다.
성경 외에 이방종교의 법전이나, 불교로 말할 것 같으면 팔만대장경 같은 그런 것에는 절대로 이런 말이 없습니다. 성경을 무시한 자는 장차 반드시 진리에게 무시를 당하고 보복을 받게 될 날이 오게 된다.
창12:-22:까지 보면 아브라함과 롯의 두 인물이 나타나는데 이 두 인물을 계시적으로 병행시켜서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도 공심판도 볼 수가 있고, 사심판도 볼 수가 있습니다.
셈 자손으로부터 아브라함도 나왔고 롯도 나왔어요. 아브라함과 롯은 삼촌과 조카 사이지요. 이 삼촌과 조카는 족속이 동일하고 혈육이 동일합니다. 그리고 갈대아 우르를 출발하는 그 시간이 같고, 또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들어가는 그 코스가 둘 다 같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12:4에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이렇게 돼 있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피동되어, 또 동화되어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롯은 누굴 좇아갔느냐? 아브라함을 좇아갔지요. 아브라함은 말씀에 피동 동화되어 좇아갔고, 롯은 아브라함을 좇아갔고. 그러니까 롯은 인간을 좇아갔고.
그런데 13: 이후에서 아브라함과 롯의 길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갈라지는 이것을 계시적으로 보면 신앙노선이 완전히 갈라지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또 교회 대 교회가 갈라지는 것으로도 볼 수가 있고, 또 교인 한 사람과 한 사람이 갈라지는 것으로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 같이 예수를 믿는 자라도 아브라함의 길을 걷는 자가 있고, 롯의 길을 걷는 자가 있다 그 말이지요.
그리고 또 성경에서는 선택한 노선에 따른 아브라함의 최종적인 결과와, 롯의 최종적인 결과를 보여주고 있으니 지금의 믿는 우리가 아브라함과 롯의 노선과, 그에 따른 최종적인 결과를 분명히 보고도 신앙노선의 변경을 못하게 되면 롯의 길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롯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 그 말이요.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올라오지요? 벧엘로 올라오는 건 회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다시는 물질로 인해 죄를 범치 않겠다, 진리를 버리고 물질을 잡으러 가지 않겠다, 내 수권법위 내의 물질이 다 날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만은 놓지를 않겠다’ 하고 물질축복을 받고 나서 깨닫고서 천국저축 소유주의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저축된 것만 나의 소유다, 세상사람들은 세상물질을 가지고 부자라고 해도 나는 그것을 내 것이라고 하지를 않고, 부자라고 하지를 않겠다’ 그 말이지요. 그러나 롯은 지상저축 소유주의입니다.
여기서 롯은 불신자의 모형이 아닙니다. 이 롯을 신자로 보면서 그 속에 들어있는 불신성을 봐야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분명히 같은 코스를 걸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가만 보면 물론 결과적으로 롯이 자기 신앙대로 비신앙적으로 걸어가서 그런 결과를 당했지만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을 롯도 들었다고 하는 말이 없지요?
그 말을 듣고 떠났다는 말이 왜 없을까? 그거 궁금하지 않아요? 아브라함에게는 ‘떠나라’ 하는 그 말을 했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붙잡고 갔는데 롯에게는 그게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만 그 말을 하면 롯은 자동적으로 아브라함을 따라 떠날 것이니 굳이 롯에게는 그 말을 할 필요가 없어서 안 한 건지? 궁금하지 않아요?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사람과, 롯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창조의 목적은 대등합니다. 그렇지요? 둘 다 궁극적 천국이 있고, 이룰구원이 있습니다.
동등하게 주어졌다는 이 면을 우리가 현실에서 볼 때 교회에서 다 같은 신자로서 말씀을 좇아가는 성도와, 말씀을 좇지 않고 그저 예수 믿고 교회만 나가는 신자를 볼 수 있거든요.
하나님의 확실한 어떤 신앙심에서 나가는 그런 신자가 있는가 하면, 그저 버릇처럼 하나의 습관처럼 교회에 다니는 그런 신자도 있는 걸 볼 때에 그 두 사람이 그런 신앙으로 계속 나간다고 할 것 같으면 그냥 교회만 다니는 신자는 결국 롯과 같은 인생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느껴집니다. 말씀을 좇아가는 신앙과, 인간을 좇아가는 신앙!
우리가 천국에 저축할 수 있는 게 많이 있지요? 경제도 있고, 시간도 있고, 정력도 있고, 목숨 등등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자라는 소리를 죽음 이편에서만이 아니라 죽음 저편에서까지도 듣자고 하는 그 원리, 그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에 첫째는 내재적 영감이 있습니다. 이거는 중생된 영과 함께 성도 속에 영원히 계십니다. 나에게서 사역적 성령의 활동이 안 나와서 그렇지, 내가 진리충만이 되지를 않고 안 나와서 그렇지 성령님은 내재해 계시는 겁니다.
두 번째는 수락적 영감이 있는데 이 감화를 받으면 말씀이 나에게 전부 다 아멘으로 받아지고, 인격적으로 받아지는 겁니다.
세 번째는 조명적 영감이 있지요? 받은 말씀이 자꾸 깨달음이 옵니다. 이렇게 돼 나오니 이제 활동적 영감이 나오게 된다. 활동이 나온단 말이지요.
또 하나는 회고적 영감이 있는데 이거는 과거적인 죄에 대해서 회개를 하는 것. 그런데 과거적 죄를 잡고 우는 이거는 별로 수입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적 죄를 잘 알아지는 겁니다.
두 번째는 현재적 영감이 있지요. ‘내가 이 옳은 말씀을 붙잡고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하는 이런 결심.
세 번째는 미래적 영감이 있지요. ‘오늘 이 사건이 오니 앞으로 분명히 무엇이 오겠다’ 하는 거. 그러니까 미래를 미리 끌어다 놓고 미리 준비를 하는 신앙이 되겠습니다. 지혜로운 신앙이지요?
미래적 영감, 회고적 영감, 현재적 영감이 있는데 우리 신앙의 성도 속에서 성령님이 그렇게 역사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무시하고 사는 자는 물질이치가 어둡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살면 도덕이치가 나오게 되고, 도덕이치에서 ‘물질을 어떻게 써야 되겠다’ 하는 물질이치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무시하면 도덕이치도 어둡고, 물질이치도 어둡고 그래요.
그리고 천국저축 소유주의로 깨달으면 이제 바른 가치관이 나오게 됩니다. 세상사람들은 가치평가를 어떻게 하느냐? 사람을 버리고 물질을 갖지요. 이것이 세상방식입니다. 사람을 버리고 물질을 갖는 거 참 똑똑하지요? 세상사람들은 인간과 원수가 되더라도 물질을 갖습니다.
우리 기독자들은 물질보다 사건을 선택을 해야 되겠지요? 사건에 물질을 쓸 것이다 그 말입니다. 사건은 또 사람보다 아래이고, 또 물질보다 사람을 선택을 해야 되겠지요? 사람을 놓치지 말 것입니다. 물질보다 사람을 잡아라 그 말이요.
안 믿는 사람들은 사람을 버리고 물질을 잡는다고 그랬지요? 물질보다 사람을 잡으면 롯과 같은 그런 결과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사람보다 진리를 붙잡을 것! 사람을 붙잡기 위해서 진리를 양보하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물질과 사건, 사건과 사람, 사람과 진리’ 이렇게 병행해서 나올 때가 있어요. 물질, 사건, 사람, 진리가 같이 나온단 말이요. 이럴 때에 자기가 판단과 가치 평가력을 바로 가져야 하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붙잡을까’ 하는 것! 그러니까 진리는 하나님과 연결이 돼 있으니까 온 세상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진리를 놓치지 말라 그 말이지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깨달은 이치를 써먹기만 하면 되는데 써먹으려고 하다 보니 알기는 아는데 힘이 없어서 못 써먹고, 또 몰라서 못 써먹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요?
아브라함과 롯은 요단평지에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성령의 발동이 걸려서 성령에 충동이 돼서 일어났고, 롯은 악령에 충동이 돼서 악령의 발동이 걸려나온 걸 볼 수가 있어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천국저축 소유주의로 나가는 이것이 투자인데, 투자란 사업적 용어로서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이익을 본다는 뜻인데 어떻습니까? 투자보다 저축이 낫습니까, 저축보다 투자가 낫습니까? 어느 쪽이 나아요?
장사를 하려면 저축을 해야 됩니까, 투자를 해야 됩니까? 투자를 해야 이윤이 많이 나오지요. 투자를 해야 성공이 되지 거두어 들이기만 하면 성공이 안 돼요. 투자를 해야 경험도 많아지고, 실력도 커지지요.
롯은 ‘요단평야를 달라!’ 그렇지요? 아마 요단평야와 소돔 고모라성이 연결이 되어 있는 모양이요. 어쨌든 그것이 롯의 소원입니다. 이래서 롯은 거부가 됐지요. 아브라함의 투자성과, 롯의 투자성에 있어서 각자의 감화성이 다릅니다.
아까 본문에 보니까 종들이 서로 자기 주인의 것이라고 하며 싸웠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롯을 불러서 ‘너나 나나 싸울 게 뭐가 있느냐’ 하면서 롯에게 선택권을 주고 있지요? 아브라함이 그렇게 말을 하면 롯의 입장에서는 ‘아이, 그럴 수 있습니까, 삼촌부터 가지십시오, 삼촌이 가지신 후에 제가 갖겠습니다’ 하는 게 옳잖아요?
물론 아브라함도 인간이지요. 그래서 아브라함 속에도 옛사람도 들어있고, 새사람도 들어 있으니 옛사람의 소리대로 하면 ‘롯에게 주지 말고 롯을 좇아버려라’ 그렇게 나올 것이고, 새사람의 소리를 들으면 ‘뭐 그럴 거 있느냐, 유업을 좀 주자’ 이렇게 나올 것이란 말이요.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세 가지를 잘 알고 있어야 되겠어요. ‘선악’ 이라고 할 때 소선보다도 대선을 찾고, 또 선이 아니면 악이 되는 것이니 모두 다 악이라면 무선으로 나가야지요. 그리고 악도 무악이 있고, 소악이 있고, 대악이 있는데 우리 기독자들은 무선에서 소선, 소선에서 대선으로 올라가야지요. 평가적으로 올라가면서 살아야 되고, 대선이 없으면 소선이라도 해야지. 그렇지 않아요?
소선과 대선이 있을 때는 소선을 버리고 대선을 찾아 나가야지요. 악도 마찬가지. 대악, 소악, 무악이 있는데 제일 큰 악에서 작은 악으로, 또 작은 악으로 이렇게 평가를 해야지요. 그러니까 소선으로 살지 말고 대선으로 살자! 그리고 대악보다 소악, 소악보다 무악으로 살자 그 말이지요.
성령의 감화에 의함이라면 무선에서 소선, 소선에서 대선으로 가치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대악에서 소악, 소악에서 무악으로 살아야 합니다. 악령의 감화에 의함은 이와 반대가 되겠습니다. 우리가 그 면에 대해서 항상 판단을 잘 내려야 되겠어요.
예를 든다면 예배시간에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는데 늦게 와서 맨 뒤에 앉아 찬송을 부른다면 찬송 자체는 나쁜지 않으나 대선에서는 소선은 항상 죄가 되는 겁니다.
또 설교를 하고 있는데 늦게 와서는 뒤에 앉아 기도를 크게 하면 그거 안 되지요. 설교도 기도도 다 선이지만 우리가 잘 선별해서 해야 되겠지요? 그런 게 있다 그 말이요. 우리 생활 속에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보다 이거, 이것보다 이거’ 영적인 면을 좇아서 그렇게 하면 그 신앙생활은 틀림이 없을 겁니다.
아브라함은 최고의 양심에서 대선을 하고, 롯에게 선택권을 줬습니다. 이 때 롯도 신자이기 때문에 아마 ‘여호와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줬구나, 그러면 그렇지’ 했을 거란 말이요. 그렇지 않겠어요?
지금 아브라함에게나 롯에게나 물질과 사람이 병행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때 물질을 우선적으로 욕심내서 취하게 되면 사람과 끊어지지요.
항상 옛사람은 내 육을 위하는 면으로 돼 있고, 새사람은 나의 영을 위하는 쪽으로 돼 있지요. 그러니까 육 이거는 참 자기가 아니라는 것! 결국은 자기의 원수가 됩니다. 자기 원수는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자기 속에 들어 있다 그 말이요.
롯에게 많은 물질을 줄 때 아브라함도 사람인지라 ‘다 주면 내가 어떻게 살까’ 그런 마음이 나올 수 있지요? 그런 마음이 나올 것 같으면 아브라함 속에서는 새사람과 옛사람의 싸움이 나오게 되는 거지요. 또 롯도 양심이 있지요? 롯 속에서도 옛사람과 새사람의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롯을 볼 때 새사람이 참 자기인데 그렇게 나가지를 않고 옛사람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 말이요.
자기 속에서 싸움이 일어났을 때에 대내전에서 승리를 하면 모두 다 이깁니다. 외부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빼앗겼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이면적으로 보면 이긴 거지요. 롯은 외부적으로 보면 빼앗은 거고, 이겼습니다. 그러나 이면적으로 보면 패배가 된 거지요.
그래서 이제 11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했습니다. 요단 온 들을 택하고 하루아침에 부자가 됐다 그 말이요. 소원성취가 됐다 그 말이요.
롯은 부자가 됐고, 아브라함은 ‘진리 진리’ 하다가 요단들을 롯에게 빼앗긴 채 천막 하나 가지고 헤브론으로 올라갑니다. 양떼들이 거기 있으니까! 그리고 롯은 점점 소돔으로 들어가서 부자가 되고 성주가 됐는데 롯의 대문이 얼마나 튼튼한지 깡패들이 와서 부수려고 해도 못 부쉈지요?
그런데 보통 보면 롯을 따라가면 편안해 보이니까 롯을 따라가는 자가 많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을 따라가는 자는 가시밭길인 산으로 올라가니까 힘이 들겠지요. 그 때 종들도 틀림없이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14, 15절을 보면 동서남북으로 보이는 것을 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준다고 했으니 이걸 제하고 나면 남는 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지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다 준다는 말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보고 내 편이 돼 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았지요.
가만히 보면 아브라함은 사람을 택하기 위해 물질을 빼앗긴 것 같으나 사람도 물론 안 빼앗겼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을 잡고 물질은 버렸습니다. 그러나 롯은 물질을 잡고 사람은 버린 셈이지요?
롯은 물질을 차지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차지하고! 누가 더 가치 있는 것을 차지했지요? 아브라함이지요. 이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왔지요. 찾아와서 하는 말이 15절에 뭐라고 그러지요?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사람을 사람같이 여기면 사람을 준단 말이요.
동서남북을 떼버리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요? 그러니 롯의 것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는 대로 다 준다고 했으니 롯의 것이 있어요? 있을 수가 없지요.
우리가 또 한 편 롯을 볼 때에 롯도 신자니까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 놓고 자기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우리가 룻기서를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 놓으니까 하나님이 복수를 하지요? 복수라는 말이 상당히 강하게 들립니다만 어쨌든 하나님을 떠나서 모압으로 내려간 그들의 가정이 과부가 셋이 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뭘 달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감동이 되도록 살아보자 그 말이요.
종과 횡으로 행하라: 종은 진리요, 대신관계요, 즉 진리를 붙잡고 대신관계요, 횡은 대인관계요 대사관계요 대물관계입니다.
‘죽이는 사랑을 하지 말고 살리는 사랑으로 종횡으로 해 봐라, 그러면 밟는 대로 다 준다’ 밟는 대로 다 준다고 했으니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어떻게 밟아요? 천천히 밟아? 부지런히 밟아야지!
밟는다는 게 뭐냐? 밟는 것은 행하는 거지요. 행하는 것은 찾는 것, 또 가지는 것, 또 주는 것.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정복성이 돼 나옵니다. 알겠어요? 밟는 것은 행하는 것인데 찾는 것, 가지는 것, 주는 것. 종과 횡으로! 이거는 정복성이 나온다.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브라함과 같고, 롯과 같은 저희들이 아니옵니까? 아브라함도 롯도 인간이요, 이들이 세상에서 생활할 때에 여러 가지 사건 환경을 당할 그 때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어떻게 행해야 되겠다’ 하는 이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그 명령, 그 말씀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믿는 자로서 영적인 면에 대한 이해타산과 가치평가를 바로 내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당신의 착한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종과 횡으로 행하라, 밟는대로 다 주겠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게 되었던 아브라함의 그 가치평가력, 그 신앙심, 그 지혜를 저희들에게도 주셔서 일상생활에서 진리를 붙잡고 종과 횡으로 부지런히 밟아가는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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