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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의 위임식(2)

출애굽기 김강호 목사............... 조회 수 2101 추천 수 0 2012.12.18 23: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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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29:25-37 
설교자 : 김강호 목사 
참고 : 은혜와평강교회 http://www.gap.or.kr 

제사장의 위임식(2)

 

19-25 위임식의 수양

위임식의 수양을 드리는데서 제사장의 위임의 특성이 잘 나타난다. 위임식의 수양의 피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오른 귓부리와 오른손의 엄지와 오른발의 엄지에 바르고, 그 피를 단 주위에 뿌리고, 단 위의 피와 관유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려서 거룩하게 한다.

 

오른 쪽은 대표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위임식의 제물의 피를 오른 쪽 손과 발의 엄지에 바르고 오른 쪽 귀에 바른 것은 온 몸에 바른 것과 같다. 또한 제단에 뿌린 피와 관유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리는 것은 온 몸과 옷을 피와 관유로 거룩하게 한 것이다. 위임식 수양의 피는 아론과 그 아들들과 단에 바라지고 뿌려져서 서로를 한 피로 연합시켰다. 마치 시내 산에서 언약을 체결할 때에 제물의 피의 반은 백성에게 뿌려지고 나머지는 단에 뿌려진 것과 같다.

 

위임식 수양의 모든 기름과 우편 뒷다리와,  무교병 하나와 기름 바른 과자 하나와 전병 하나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손에 들려 여호와께 요제를 드린다. 요제물에 번제물을 더하여 여호와께 불살라 화제로 드린다. 이것은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화제이다.

 

이전의 제사는 모세가 주관자요 아론과 그 아들들은 제물에 안수함으로 제사에 참여하였다. 이제 위임식 수양의 제사에서는 모세가 준비하고 주관하지만 아론과 그 아들들이 위임식 수양의 모든 기름과 우편 뒷다리와 함께 기름 섞은 무교병을 여호와께 요제로 드렸다. 이 요제는 다른 번제물을 더하여 모세가 단에서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로 여호와께 화제로 드렸다. 아론과 그 아들들의 요제는 번제와 함께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었다. 드리는 방식과 제물을 먹는 것을 보면 위임식의 제사는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이다. 화목제는 함께 먹는 친교가 제사의 중심이다.

 

26-28 모세와 아론과 그 아들들의 분깃

 

모세가 위임식 수양의 가슴을 취하여 여호와께 요제로 드리고 그것은 모세의 분깃이 되었다. 아론과 그 아들의 위임식 제사에서 언약 체결의 중보자인 모세가 이후 아론과 그 아들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장인 것처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제사장이다. 위임식의 요제 곧 가슴과 넓적다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돌릴 영원한 분깃이요 거제물로서 거룩하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여호와께 드리는 거제물이다. 이러한 분깃을 취하는 자는 가장 귀하고 힘있는 부분을 여호와로부터 받은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대리자로서 백성에게서 또한 백성의 대표로서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29-30 아론의 뒤를 잇는 아들들의 위임

 

아론의 거룩한 옷은 아론 후에는 그 아들들에게 돌려서 그들이 그것을 입고 기름 부음을 받아 제사장으로 위임을 받게 한다. 아론을 이어 제사장이 되는 아들은  성소에서 섬길 때 칠일 동안 그 옷을 입는다.이것은 아론 계통의 제사장 직분이 영원하며 온전한 것을 말한다. 민수기 20:23에서 아론이 호르산에 올라가 죽을 때에 아론을 이을 엘르아살도 함께 올라갔고 아론의 옷을 입고 내려왔다. 백성의 눈에 아론의 죽음은 가려졌고 영광스럽게 되었다.

 

31-34 아론과 그 아들들이 위임식의 제물을 먹음

 

위임식의 수양은 회막문에서 아론과 그 아들들이 위임식 광주리의 무교병과 함께 먹는다. 속죄물 곧 그들을 위임하며 거룩하게 하는데 쓰인 것을 그들이 먹되 타인은 먹지 못한다. 그것은 아침까지 남았으면 불살라야 한다. 이는 그것이 위임식의 식사로서 거룩하기 때문이다. 가슴과 뒷다리를 분깃으로 취하는 문맥에서는 위임식 수양을 화목제라 칭하였고, 거룩한 곳에서 먹는 문맥에서는 그것을 속죄물이라 칭하였다. 제물에서 분깃을 취하고 거룩한 곳에서 먹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거룩한 친교와 생명을 의미한다.

 

35-37 칠일 동안 위임식을 행하여 단을 거룩하게 함

 

위임식은 칠일 동안 행한다. 매일 수송아지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고, 또 단을 속죄하여 정결케 하고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한다. 칠일 동안 단을 속죄하여 거룩하게 한다. 그리하면 지극히 거룩한 단이 되어 단에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칠일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완성 곧 안식을 의미한다. 칠일 동안의 속죄로 단이 지극히 거룩하게 되어 거기에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이 모든 일을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생명의 교제로 온전케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체결자이시요 대제사장이 시요 영원히 거룩하게 하신 제물이시다.

 

출29장은 제사장의 위임식인데 출애굽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중심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 중에 거하시는가? 하는 언약 적인 관계를 말하려는데 모든 특징이 있다. 그러니까 똑 같은 제사 법이 있고 똑 같은 성소 제도가 있어도 레위기와 출애굽기의 강조 점이 다르다 그 말이다. 출애굽기는 어떻게 그들 중에 거하셔서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봉사를 받으시는가? 하는 언약의 나라 설정 문제고 레위기는 어떻게 거기서 생명의 교제를 나누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가? 하는 것이 레위기의 강조 점이다. 그러니까 비슷해도 차이가 나는 것은 그런 것이다.

 

29장의 위임식에서는 제물을 가져오고 그리고 제사장을 물로 씻고 옷을 입히고 관유로 부어서 거룩하게 해라. 이처럼 예물과 제사장 의복을 입혀서 거룩하게 하는 일과 그리고 10절 이하에서는 구체적으로 그 예물로 무엇을 하는가 하는 문제였는데 첫 째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한 속죄제를 지내고 그리고 두 번째는 아론과 그 아들들이 번제를 지내고 그것이 지난 시간에 배웠던 것이다. 오늘 19절 이하를 배우면 이 앞에 것의 의미도 더 잘 드러날 것이다. 먼저 주보를 읽으면서 설명을 하겠다.

 

19-25 위임식의 수양

 

위임식의 수양을 드리는데서 제사장의 위임의 특성이 잘 나타난다. 위임식의 수양의 피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오른 귓부리와 오른손의 엄지와 오른발의 엄지에 바르고, 그 피를 단 주위에 뿌리고, 단 위의 피와 관유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려서 거룩하게 한다. 그것이 위임식 제사 드리는 한 순서다.

 

오른 쪽은 대표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위임식의 제물의 피를 오른 쪽 손과 발의 엄지에 바르고 오른 쪽 귀에 바른 것은 온 몸에 바른 것과 같다. 또한 제단에 뿌린 피와 관유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리는 것은 온 몸과 옷을 피와 관유로 거룩하게 한 것이다. 위임식 수양의 피는 아론과 그 아들들과 단에 발라지고 뿌려져서 서로를 한 피로 연합시켰다. 마치 시내 산에서 언약을 체결할 때에 제물의 피의 반은 백성에게 뿌려지고 나머지는 단에 뿌려진 것과 같다.

 

그러니까 여기 보면 위임식 제사는 어떻게 지내는가? 첫째 그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오른 쪽 귀 또 오른 쪽 엄지손가락 오른 쪽 엄지발가락에 바른다. 그리고 그 피를 단에 뿌리고 단에 뿌린 피와 관유를 아론의 옷에 뿌리면 거룩하게 된 것이다 그 말이다. 이처럼 피를 바른다 그 말은 피와 연합시킨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어디에 피가 나아가면 그것은 거룩한 생명이 나아가는 것이어서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그것이 유월절 제사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 있다. 피를 바른 집은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의 거처가 되어서 그 피가 그들의 생명이고 그 피가 그들의 양식이어서 유월절 양고기를 먹을 수가 있었다. 거기는 심판의 천사가 심판하지 아니했다.

 

그런 관계가 여러 모양으로 확대되어서 반복되는 것이 이 모세 제도의 제사 법이다. 그래서 피를 신체의 대표적인 곳에 바른 것은 전체에 바른것과 같고 몸 전체를 피로 거룩하게 한 것이다 그 말이다. 성경에 보면 오른 뺨을 치면 외빰도 돌려대고 하는 것은 마태복음 이야기고 이 쪽 뺨을 치면 저 쪽 뺨도 돌려대도 하는것는 누가복음 이야기다. 그러니까 오른 뺨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특징적인 언어다. 왜 오른 쪽은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이 쪽 뺨을 치면 저 쪽 뺨도 대라 그 말이지 오른 쪽 왼 쪽 그런말은 안한다. 또 오른 눈이 범죄하면 네 오른 눈을 빼고 그리고 천당가는 것이 좋다. 그러면 왼 쪽 눈은 범죄를 안하고 왼 쪽 눈을 빼면 상관이 없냐? 오른 쪽 것이 대표 기관이기 때문에 그렇다. 마태복음의 특징이 그렇다. 그런데 요새는 역사 실증주의적 해석법 해가지고 그 당시 오른 뺨을 친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한참 문학작품을 연구를 해 보는 것이다. 아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오른 뺨을 친 것이 가장 수치스럽게 뺨을 치는 것이다.

 

살짝 때려도 기분이 몹시 나쁘다. 이것을 예수님이 하고 있는 말이구나 이렇게 도입하지 말라 그 말이다. 구약 언어 개념을 가지고 해석을 해야 되지 그 시대의 오른 뺨을 치는 것이 무엇인가? 해 봤자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옛 언약의 완성이지 그 시대의 어떤 사상을 고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오른 뺨 하는 것은 구약에 보니까 전부 오른 쪽은 대표 기관을 가르친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은 오른 쪽은 양이고 왼 쪽은 염소다. 전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언어 개념이다. 그래서 오른 귀 오른 손 엄지손가락 오른 쪽 엄지발가락에 바른 것은 온 몸을 피로 바르는것과 같다. 제단 뿔에 바른 것은 그 뿔이 제단을 대표하는 권세다. 온 제단에 바르는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위임식 이 양의 피가 제단과 아론의 몸과 옷에 전체에 뿌려진다. 그러니까 이 위임식 제사 안에서 제단과 아론이 전체로 한 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위임식 제사에서 이 제사장 제도를 위임하는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다 그 말이다.

 

위임식 수양의 모든 기름과 우편 뒷다리와,  무교병 하나와 기름 바른 과자 하나와 전병 하나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손에 들려 여호와께 요제를 드린다. 요제는 흔들어 드리는 제사인데 가슴을 그렇게 흔들어 드린다. 그런데 요제와 거지는 거의 같이 언급되니까 구별이 안될 때도 있다. 요제물에 번제물을 더하여 여호와께 불살라 화제로 드린다. 이것은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화제이다. 이것이 그 다음에부터는 먹는 것이다. 앞에 것은 단에 피를 어떻게 드릴것인가? 단과 아론의지체에 발라라 하는 것은 첫 단계로 그 다음에는 먹는것인데 하나님의 몫이 있어야 겠지요? 그래서 모든 기름 그리고 광주리에 있는 기름섞은 과자 그 하나씩 그렇게 해가지고 우편 뒷 다리 그것을 하나님 앞에 흔들어서 요제물로 드리고 또 이 제물은 불살라 드린다. 그런데 요제는 번제와 함께 드리라고 되어 있고 레위기를 보면 항상 번제 기름위에다가 화목제물을 태우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든 향기로운 제물로 드린다 하는 것은 번제적인 성격이고 또 전체로 태워 드린다 하는 것도 번제적인 성격인데 다 태워 드리면 임자가 먹을 것이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께는 기름과 우편 뒷다리를 그리고 기름과자를 드리는 것이다.

 

이전의 제사는 모세가 주관자요 아론과 그 아들들은 제물에 안수함으로 제사에 참여하였다. 이제 위임식 수양의 제사에서는 모세가 준비하고 주관하지만 아론과 그 아들들이 위임식 수양의 모든 기름과 우편 뒷다리와 함께 기름 섞은 무교병을 여호와께 요제로 드렸다. 레위기를 보면 다른 제사는 임자는 안수하고 죽이기만 하고 각을 떠서 씻고 피를 뿌린 것은 전부 제사장의 일이다. 그런데 화목제물도 레위기에서는 임자가 하나님 앞에 와서 흔들지 않고 제사장이 흔든다. 그런데 백성의 대표자로 제사장을 위임시키는 제사에서는 아론과 그 아들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고 그것을 주관하는 사람은 모세다. 그러니까 모세가 예물도 주고 보니까 모세가 이 모든 제사들을 집행하고 아론과 그 아들들은 안수하는 것 뿐인데 여기 위임식 제사에서는 아론과 그 아들들이 요제물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와서 흔들어 드려야된다. 그러면 다음에 보면 백성들은 화목제물을 드릴 때 흔들지 못하고 제사장이 흔드는데 여기 보니까 아론은 와서 흔든다.

 

그러니까 아론은 일반 백성들과 다른 위치에 있고 또 모세가 아무리 중보자여도 아론이 백성보다는 올라서 있다. 그래도 어떻든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에 직접 참여하는 의미로는 위임식 제사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이제 아론과 그 아들들이 위임식 수양의 모든 기름과 우편 뒷다리와 기름 섞은 과자를 가져와서 여호와께 드린다. 

 

이 요제는 다른 번제물을 더하여 모세가 단에서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로 여호와께 화제로 드렸다. 아론과 그 아들들의 요제는 번제와 함께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었다. 드리는 방식과 제물을 먹는 것을 보면 위임식의 제사는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이다. 화목제는 함께 먹는 친교가 제사의 중심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제단에는 양쪽피가 연결되어 버렸다. 그전에는 피를 가져다가 제단 뿔에만 바르면 되는데 여기 보니까 제단 뿔에만 바른 것이 아니라 아론의 몸에도 발라 버린다. 제단에 뿌린 것만 아니라 아론의 몸에도 뿌린다. 이렇게 해서 완전히 피로 연결을 시키고 먹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기름과 뒷다리고 그리고 이 제사를 지낼 때 기름과 뒷다리는 누가 가지고 오냐면 아론과 그 아들들이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흔들어 드린다.

 

그러니까 이것은 레위기의 감사제로 드리는 화목 제물을 드리는 방식이다. 이렇게 드리고 나면 하나님의 몫은 기름과 우편 뒷다리였다. 그러면 여기서 보면 모세의 몫도 있고 아론의 몫도 있다.

 

26-28 모세와 아론과 그 아들들의 분깃

 

모세가 위임식 수양의 가슴을 취하여 여호와께 요제로 드리고 그것은 모세의 분깃이 되었다. 아론과 그 아들의 위임식 제사에서 누가 제사장 역할을 하냐 언약 체결의 중보자인 모세가 제사장 역할을 하고 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이 일반 백성처럼 안수하고 그 정도밖에 아니었다. 그런데 위임식 제사에서는 아론과 그 아들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장인 것처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제사장이다. 무슨 말이냐면 지금 아론과 그 아들들은 백성처럼 되어 있고 모세가 제사장처럼 되어 있다. 그러면 이 관계는 어떤 관계냐? 나중에는 어떻게 되는가? 제사장으로 위임된 아론과 그 아들들이 백성에 대해서 모세와 같은 직분을 하고 또 백성들은 아론과 같은 위치에 있다. 그러니까 이 언약 체결은 아론이 대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체결하는 중보자가 따로 있다. 모세다. 모세 아론 백성 이런 단계다.

 

새 언약의 체결에는 모세는 없다. 물론 아론도 없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과 언약 체결을 하시는데 거기 있으면 자기 백성을 대표하는 열두 제자가 있지 토대로서 열둘이 있지 그 중에 장자가 따로 있고 그런 것은 없다. 그것이 신약에서 언약 체결의 특징이다. 제가 지금 그 말을 하고자 한 것인데 여러분이 제가 한 의미로 쭉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그런데 이제까지 제사에서 여러분이 보면 모세의 몫이라는 것이 없다. 모세가 아무리 제사를 집행해도 모세의 몫은 없는 것인데 여기는 모세의 몫이 있다. 하나님 앞에 요제로 드리면 하나님이 그것을 잡수시니까 하나님의 몫이 있고 그것을 중계하는 모세의 몫도 있고 그러면 이 위임식은 한 번 행하는 것이고 다음에는 모세가 행하지 않는다. 그러면 다음에 위임식은 누가 하느냐? 그런 위임식은 없고 이제 아론 그 후에는 아론의 아들이 여기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랬을 때 그 다음 모세의 몫은 누가 먹을 까요? 없다. 나중에는 가슴과 등 뒷다리는 누가 먹냐면 제사장 가문이 백성을 대표해서 먹는다.

 

그러니까 아론이 드리는 이 예물은 말하자면 온 백성을 대표해서 드리는 예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 위임식 제사에서만 보니까 피도 양쪽에 발라진 것이 아니라 제물도 보니까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의 몫도 있고 제사장 몫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아직도 먹지 못할 것이 있다. 타인은 먹지 못하고 제사장만 먹는다. 그것이 구약에서 가지고 있는 간격들이다. 지금은 언약 백성이 누구나 먹을 수 있다. 아이들은 저리 가라 했다가 우리들은 바꿨다. 누구나 먹을 수 있다. 그런데 구약 때는 보니까 아론과 그 가문만 먹을 수 있고 타인은 먹지 못할지니라 이렇게 되어 있다. 이것이 위임식 제사의 특징이다.

 

위임식 제사를 보니까 한 피로 연합이 되어 있고 한 상에서 먹는다. 그것이 위임식 제사다. 그것도 가슴과 든 뒷다리는 소가 오른 다리를 드냐 왼 다리는 드냐 하는 그런 축산법으로 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들어서 드리는 제사라 그 말이다. 이것은 항상 오른 다리다. 오른 쪽이 항상 대표 기관이기 때문에 오른 다리를 항상 하나님 앞에 들어서 드리고 가슴은 흔들어서 드린다. 흔들어서 드리면 요제 들어서 드리면 거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온 땅에 계신 하나님 또 높이 계신 하나님 이런 식으로 흔들어 드리고 또 들어서 드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든 다리다.

 

그런데 나도 어려서 소를 먹여 봐서 소다리 사이로 고삐가 들어가면 발들어 하거든. 그래서 이것이 오른 다리를 든댜냐 왼 다리를 든댜냐 그러면 오른 다리를 들기가 쉽다. 왜냐하면 소 고삐는 오른 쪽에 달렸거든. 그래야 탁탁 때리기 좋으니까 고삐를 뺄려면 오른 다리를 들겠는데 그러니까 자기 경험으로 읽어 들어가면 안된다 그 말이다. 이것은 제사 법에서 든 다리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오른 다리 다른 데서는 든 다리 했을 때 든다 그 말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들어서 드리는 제사 예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는 것이 병이라고 소좀 뜯겨 봐서 든 다리가 오른 다리 하는 것이다. 얼마큼 무식한가 모르겠다. 하여튼 예수 처음 믿고 개 고기 안 먹었다. 목매어 죽인 것은 먹지 말지니라. 아 이것은 개구나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닭을 잡을 때로 목을 비틀어 죽이지 않고 칼로 잘라 죽였다.

 

그전에 기도원에 가면 선배들이 염소를 낸다. 염소 입에다 소금을 넣어서 죽이면 냄새가 안 난다면서요. 그런데 항상 칼로 찔러 잡는다. 피 다 뺀 것이 중요한 관심사다. 왜냐하면 피를 먹지 말라고 했으니까 피를 먹으면 큰일이다. 그러니까 신약 성경을 배워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행15장에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을 멀리 할지니라. 그러니까 아하 이것은 신약 성경에 있으니까 구약하고는 다르구나. 해 가지고 도축 법이 된 것이다. 그런데 사슴피는 좋다고 둘러 마시네. 그러니까 성경을 모르면 그렇게 어리석게 되어 버린다. 하여튼 대학교 나온 사람이 물건보고 절하면 종교적인 영역이 얼마나 어둠의 권세가 큰지를 알아야 한다. 제일 어두운 것이 기독교 영역이다. 여기는 진짜 마귀가 어둡게 하는 곳이다. 불량품이 제일 많은데 가 기독교다. 개혁 교회다. 천주교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종교적으로 잘못되면 그렇게 어두운 것이다. 그것은 대학을 천개 나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예수 믿고는 개고기는 안 먹었다. 그런데 그것도 눈치 봐서 먹어야 한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먹는 사람인지 안 먹는 사람인지 보고 먹어야지 먹지 못한 사람 앞에서 먹으면 야 저 목사 개목사구나 하고 그 다음부터 나를 먹기를 탐하는 자로 알고 내 말을 안들을 것이 아닙니까? 어려운 조항이다.

 

그러니까 위임식 제사에서는 피도 양쪽에 발라졌고 또 꼼꼼히 발라졌다. 대표 기관에 전부 발라 버렸다. 또 양쪽에만 바른 정도가 아니다. 뿌리면 뿌린 피와 관유를 또 아론의 몸에 뿌려 버린다. 그러니까 양쪽에 거듭 발라 버린 식이 되어서 피로도 연합되어 있고 그 먹는 방식도 연합되어 있는데 모세가 지금까지 먹는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여기서는 모세의 몫도 있고 아론의 몫도 있다. 나중에 위임식 할 때는 모세의 몫은 없고 그것은 항상 제사장의 몫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제사장이 먹는 흔든 가슴과 오른 쪽 다리는 이스라엘 백성 대대로 그것은 아론 가문에 주어야 할 몫이다. 그가 제사장 직분을 맡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제사장에게 제일 소중한 것을 주신다. 하나님이 제일 기름진 것을 잡수신다. 그리고 제사장에게는 제일로 맛있는 갈비에다가 오른 쪽 다리를 준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여기 위임식에서는 아론 가문만 먹는다.

 

다른 화목제물은 임자도 먹는다. 화목 제물 드릴 때 가슴과 뒷다리는 제사장이 먹고 나머지는 임자가 먹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임자가 아론과 그 아들들이다. 자기 가문만 먹고 나머지 사람들은 못 먹는다. 그것이 구약 위임식의 한계점이다.

 

예수님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로 하늘로 올라갔을 때 그는 언약 체결 자가 되어서 내가 새 언약을 체결하노라. 이것이 새 언약의 피니라. 또 너희를 위해서 찢긴 새 양식이니라. 하면서 열두 제자에게 다 주었다. 그 열둘에는 가짜도 들어가 있다. 열둘에 관심이 있지 유다가 가까냐 진짜냐는 상관이 없는 문제다. 열둘에 관계된 문제다. 그래서 다 먹었다. 그것이 신 구약의 차이점들이다.

 

위임식의 요제 곧 가슴과 넓적다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돌릴 영원한 분깃이요 거제물로서 거룩하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여호와께 드리는 거제물이다. 이러한 분깃을 취하는 자는 가장 귀하고 힘있는 부분을 여호와로부터 받은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대리자로서 백성에게서 또한 백성의 대표로서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여러분이 문장 형식을 잘 보라 그 말이다. 이 본문은 분명히 모세가 예비하고 하나님이 주신다고 되어 있는데 그 뒤에 바로 이어서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줄 것이니라. 이렇게 맞추고 있다. 그 앞에는 분명히 하나님이 이렇게 이렇게 모세한테 말씀하신다. 이렇게 예물을 예비해서 이렇게 이렇게 주어라고 하셨다. 그 다음에 바로 이어서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줄 것이니라 그렇게 해 놨다. 왜 아론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매로 있다. 그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백성을 대할 뿐만 아니라 그리고 백성의 대표자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특별히 이 제사장이 레8장에서 취임했을 때는 그가 손을 들어 축복하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불이 나타났다. 제사장의 축복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왜 그가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제사장 하면 우리 죄 때문에 발발 떨고 나아가는 것만 생각하고 있는데 구약의 제사장도 그렇게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는 분명히 백성의 대표인데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백성에게 복주는 축복의 사자다. 그 제사장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나신다. 그것이 레위기9장에 하고 있는 바고 또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은 성질 내고 있고 제사장은 성질 내고 있는 하나님을 어떻게 달래고 나가는가? 여기다 강조를 두고 있는데 여기 위임식에서 보니까 한 피로 연합되어 있다. 제단과 아론의 몸은 차이가 없고 제단의 영광과 아론의 영광은 차이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상에서 하나님이 가장 소중한 부분을 자기 종에게 주었고 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대표자에게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의 가문에 주어야 한다. 그것이 여기 위임식에서 나타나고 있는 내용들이다.


29-30 아론의 뒤를 잇는 아들들의 위임

 

아론의 거룩한 옷은 아론 후에는 그 아들들에게 돌려서 그들이 그것을 입고 기름 부음을 받아 제사장으로 위임을 받게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입고 기름 부음을 받아 제사장으로 위임을 받게 하는데 아론을 이어 제사장이 되는 아들은  성소에서 섬길 때 칠일 동안 그 옷을 입는다. 그러니까 위임식은 칠일 동안 한다 그 말이다. 이것은 아론 계통의 제사장 직분이 영원하며 온전한 것을 말한다. 민수기 20:23에서 아론이 호르산에 올라가 죽을 때에 아론을 이을 엘르아살도 함께 올라갔고 아론의 옷을 입고 내려왔다. 백성의 눈에 아론의 죽음은 가려졌고 영광스럽게 되었다.

 

구약에서 높은 산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다. 그런데 아론은 높은 산에 올라가서 죽었고 그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 가리워져 있다. 모세도 산에 올라가서 죽었는데 우리는 시체를 모르는데 유다서를 보니까 모세의 시체에 대해서 사탄과 다투고 있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만일에 모세가 죽었다고 시체가 공개되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구약 식으로 하면 의미가 별로 없다. 그런데 그는 가나안 땅을 보았는데도 그 시체는 백성의 눈에 가리워졌으면 그는 죽기는 죽었지만 유비적으로는 그는 영광스럽게 된 자다. 아론도 높은 산에 올라가서 죽었는데 백성은 죽은 것을 못 봤다. 그 아들이 그 옷을 입고 내려왔다. 마치 모세를 대신해서 여호수아가 그렇게 한 것처럼 아들이 그렇게 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아론의 직분은 영원하고 영광스럽다 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그 아버지가 죽으면 그 아들이 대대로 입는다. 그것을 히브리서에서 설명을 해주고 있다. 구약에는 많은 제사장이 필요했는데 죄 때문에 계속해서 죽어야 하니까 많은 제사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분은 죽음이 없다. 한 분밖에 없고 다른 분이 없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또 다윗 가문도 아버지의 왕위를 아들이 잇는다. 다윗의 보좌는 영원하다 하는 것을 상속 제도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론이 죽으면 그 아들이 옷을 입고 위임식을 행하는데 위임식을 행할 때 그는 성소에서 섬기는 위임식이다. 칠일 동안 행하는 것이다.

 

31-34 아론과 그 아들들이 위임식의 제물을 먹음

 

이 앞에서는 제물을 먹는 다는 이야기보다는 어떤 것이 자기 분깃인가 하는 이야기였다. 그 다음에는 먹으라는 이야기다. 위임식의 수양은 회막문에서 아론과 그 아들들이 위임식 광주리의 무교병과 함께 먹는다. 속죄물 곧 그들을 위임하며 거룩하게 하는데 쓰인 것을 그들이 먹되 타인은 먹지 못한다. 그것은 아침까지 남았으면 불살라야 한다. 이는 그것이 위임식의 식사로서 거룩하기 때문이다. 가슴과 뒷다리를 분깃으로 취하는 문맥에서는 위임식 수양을 화목제라 칭하였다.

 

거기 28절을 쭉 보면 화목제 희생 중에서 화목제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물론 레위기를 보면 화목제인 줄 그냥 알 것이다. 화목제로 언급하고 있다.  거룩한 곳에서 먹는 문맥에서는 그것을 속죄물이라 칭하였다. 여기 33절에 보면 속죄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앞과 뒤를 보면 위임이라는 말이 반복되어 있다. 곧 그들을 위임하며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데 쓰는 것은 그렇게 되어 있다. 속죄물 해도 소위 속죄제 그것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위임할 때 쓰는 모든 것이 속죄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죽음이 있으면 항상 속죄적인 의미로 말한다. 그러니까 속죄 제물은 속죄만 있고 화목제는 화목만 있고 그런 것이 아니다. 구약의 제물은 반드시 죽음이 있다. 가장 비참한 죽음은 영문밖에 불사르는 죽음이다.

 

그리고 속죄 제물도 임자가 먹으면 화목 제물 적인 성격이다. 물론 임자가 못먹고 그것을 담당한 제사장이 먹는다. 어떻든 먹는다 그 말은 생명을 교제하기 때문에 화목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제사는 어떤 의미만 있고 그렇게 해석하면 안된다. 마치 휘장이 여러 가지 직물로 다양하게 짜여진것처럼 제사법도 각 제사마다 강조점은 있어도 이 속죄제는 속죄만 있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여기 보니까 위임식을 31-34절 문맥에서는 속죄물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 앞에 문맥에서 가슴과 뒷 다리를 가져라 했을 때는 화목제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교리적으로 읽어 들어가지 말고 본문을 자세히 읽으라 그 말이다. 그 본문에서 문맥에서 의미들의 뉘앙스가 달라져 있으니까 잘 읽으라 그 말이다.

 

제물에서 분깃을 취하고 거룩한 곳에서 먹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거룩한 친교와 생명을 의미한다. 가장 소중한 것을 주고 또 하나님이 거룩한 곳에서 먹어라. 하는 것은 거룩한 친교를 말한다. 그 밖에서 먹으면 부정한 자다. 제사장이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곳은 성소 안으로 제한되어 있다. 그것이 제사장이 누리는 거룩한 영역이다. 그 밖에는 먹으면 그는 제사장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일반 백성으로서는 먹을 수 있어도 하나님 앞에 제사장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성소 뜰까지다. 그것을 넘어서면 아니다. 그것이 구약 때 누리는 거룩한 교제의 한계성이다.

 


지금도 우리들이 교회에서만 성찬식을 행한다. 그러면 집에서 먹으면 의미가 없냐? 집에서는 교회론 적으로 성찬식을 집행 안한다 뿐이지 여러분이 먹을 때는 성찬식을 먹는 방식으로 먹어야 그것이 거룩한 교제다. 만일에 그렇게 안 먹으면 부정한 자로 먹는 것이다. 가령 지금도 여러분이 지금도 피와 기름을 안 먹으면 구약 백성으로는 먹어도 신약 백성으로는 안 먹는다 그 말이다. 그러면 여러분이 구약 백성으로는 거룩해도 신약 백성으로는 거룩하지 않다 그 말이다. 즉 신약 백성에 속하지 않는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도 기름과 피를 구약 때문에 안 먹으면 제대로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여러분이 구약 백성은 되어도 신약에 예수 믿는 백성은 아니다. 성소 밖에서 사망 가운데 갇혀서 어둠 가운데서 먹는 사람은 되어도 예수의 영광의 빛 가운데서 부활 자의 상에서 먹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먹는 의미다. 그러니까 여기 보니까 거룩한 곳에서만 먹어라. 그러면 이 거룩한 친교는 아직 일반 백성에게는 확대된 것이 아니다.

 

그 뜰까지만 생명의 교제가 있고 그 뜰을 벗어나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날에만 먹으라고 되어 있다. 왜 그것은 그날 위임식으로 거룩하지 다른 일상 양식으로 거룩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다음날 아침에 해가 뜨면 불살라 버려야 한다. 새로운 날의 양식은 아니다. 그러니까 위임식의 양은 하루 양식이고 뜰에 제한 된 양식이다. 그것이 먹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생명이 많이 제한되어 있다.

 

요새 아이들이 좀 크면 현관에 가서 아버지 큰 구두 신고 다닌다. 아이들이 좀 컸다 하면 어쩌냐면 나도 어른 되었다고 담배부터 핀다. 어렸을 때 그것을 먹지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아직 먹으면 건강에 치명상이 있으니까 먹지 못하게 했다. 이제 다 컸다는 표시가 술 담배를 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 먹으면 버린 자식이고 커서 먹으면 어른 됐고 요새 식으로 커서 술 담배 못 먹으면 어야 자네 아인가? 여러분이 예수 믿은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그 말이 이해가 잘 안가지요? 우리는 안 먹는 것이 너무도 정상적이니까 그런데 안 믿는 세계에 가면 어야 자네 여자여 술 담배도 못하게 아 요세는 여자들도 먹으니까 안되는구나. 말하자면 좀 덜돼 먹었다 그 말이다. 그런 식이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구체적인 실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먹을 때는 뜰에서만 먹고 하루만 먹어야 된다. 새로운 날의 양식은 되지 못했다. 그런데 서원 예물이나 자원해서 드린 예물은 이틀까지 먹는다. 제 삼일 째는 불살라 버려야 한다. 안식일 만나도 이틀을 먹는다. 다음 날에 되면 썩어 버린다. 이틀까지 먹는 것이 안식일의 만나다. 그러니까 서원과 자원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특별한 생명으로 교제하신다는 의미가 확대되어 나타나 있고 함께 먹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모든 제사의 목표점이다.

 

이 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교회론 적으로는 여기서만 행하지만 여러분이 믿으면 여러분의 가정에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분 자기 백성을 위해서 몸과 피를 주신 분이 바로 이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그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생명으로 복 주셨다 하는 믿음안에서 먹을 때만 여러분은 거룩한 자로 먹는것이고 그냥 여름에 더우니까 속옷 차림으로 라면만 얼른 마셔버리고 어야 자네 혼자 밥먹소 나 갈깨 그렇게 칼로리로만 취한 사람은 이방인으로 먹고 마시는 자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렇게 먹어야 한다. 여러분의 먹고 마시는 모든 삶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교제를 의식하고 누려야 된다. 그래서 소위 성찬과 애찬을 연결시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여기서 밥 먹으면 뭐 얼마나 좋겠어요? 딱딱한 밥에다가 그리고 또 여자 분들 중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하면 밥을 잘 못잡순 분들도 있다. 자기 집에 아이들 없는 사람은 더 그런다. 우리 아이들은 얌전하니까 별로 태가 안 나지만 그래도 아이 없는 사람은 그것이 느껴진다. 그러면 그것이 별맛 있겠어요?

 

그러면 왜 교회에서 애찬을 먹느냐 하면 밥 먹고 정들자 그 말도 아니다. 세상 이야기도 아니다. 성찬과 애찬이 연결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냥 우리가 성찬식을 행하면서 그 때 같이 공동 식사를 하는 것이다. 식사 기도를 이것을 주님께서 주셨다는 의미로 성찬 기도로 한 것이 제일 좋다. 그런 의미로 우리가 함께 먹자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런 일에 더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여튼 주일날은 믿는 식구끼리 먹자고요. 왜 예수님 재림하시면 믿는 식구끼리만 먹을 것이다. 그래서 주일날은 안 믿는 식구는 혼자 잡수게 하자 그 말이다. 왜 새로운 가족 공동체가 모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도 회개하고 믿고 같이 먹자 그 말이다.

 

35-37 칠일 동안 위임식을 행하여 단을 거룩하게 함

 

위임식은 칠일 동안 행한다. 매일 수송아지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고, 또 단을 속죄하여 정결케 하고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한다. 칠일 동안 단을 속죄하여 거룩하게 한다. 그리하면 지극히 거룩한 단이 되어 단에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칠일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완성 곧 안식을 의미한다. 칠일 동안의 속죄로 단이 지극히 거룩하게 되어 거기에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앞에는 제사장을 정결케 하는데 강조 점이 두어져 있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단을 거룩하게 하는데 강조를 두고 있다. 이 앞에 보면 분명히 단과 제사장이 연결되어 있는데 그래도 강조는 보니까 제사장의 옷에다 뿌리고 거기다가 강조가 되어 있는데 뒤에 보니까 똑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단에 대해서 강조가 주어져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임하시는 단과 거기 나가는 제사장을 같이 거룩하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단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칠일 동안 한다. 그러면 지극히 거룩한 단이 되어서 무엇이든지 거기 접촉하면 그 거룩이 다른 것을 거룩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니까 완전한 거룩을 주겠다 그 말이다. 그래서 칠일 동안 하고 제사장도 칠일 동안 뜰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니까 제사장 위임식은 제사장과 단을 동시에 칠일 동안 거룩하게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지극히 거룩한 것이 되어서 제사장이 정결 예식을 행하면 정결하게 된다. 구약의 제사장이 무엇을 만지면 부정을 탄다는 말이 없다. 다른 사람은 부정탄다 그런 말을 해도 단지 이런 말은 있다. 그에게 기름 부음이 있어서 거룩하니 자기 아버지가 죽을 지라도 나가지를 말아라. 그렇게 하고 있다. 부정탄다는 말은 직접으로는 안한다. 단지 지극히 거룩한 기름 부음이 있으니 나가지를 말아라. 아직도 구약의 제사장은 죽음을 정결케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모든 부정을 정결케 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어도 죽음을 정결케 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모든 부정한 자는 제사장에게 나와서 예식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단에 나오면 거룩하게 된다. 그것이 구약에서 칠일 동안 거룩하게 하면 지극히 거룩하다. 칠일은 하나님의 거룩을 반복해서 완성시킨 것이다. 왜 이것은 거룩을 칠일 동안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창조 칠일이 창조의 완성이고 안식인 것처럼 거룩을 일곱 번 반복하는 것이어서 그것이 거룩의 완성이다. 이것이 완성됐기 때문에 거기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임하신 자리다. 29장 끝에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이 모든 일을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생명의 교제로 온전케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체결자이시요 대제사장이 시요 영원히 거룩하게 하신 제물이시다. 한꺼번에 전체를 묶었다. 물론 문단마다 기독론적인 해석을 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런데 제일 뒤에서 한꺼번에 묶어서 했다. 여기서는 모세가 따로 필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모세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 신약에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이니까 아론이 따로 필요 없다. 신약에는 예수님이니까 제물이 따로 필요 없다. 그렇게 되어 있다.

 

예수님 안에서 열린 것은 땅에 제단을 거룩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제단을 거룩하게 했다. 그 제단을 하나님이 친히 임하신 곳이기 때문에 거기는 생명이요 죽음은 없다. 그러니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완전히 정결케 되고 완전한 생명의 교제를 누리지 칠일 동안 어떻고 그런 문제들이 아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정결케 된 대제사장이요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는 완전히 정결하게 된다. 예수 안에서 죽음도 거룩하게 되었다. 죽음의 권세가 예수와 함께 하는 거룩한 교제를 끊지를 못한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우리는 가슴과 뒷 다리만 먹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피와 살을 받았끼 때문에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얻은 것이다. 그가 우리의 대표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그가 얻으신 모든 것을 우리의 대표로 축복해서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받았따. 그것이 신약 교회가 누리는 거룩한 교제다.

 

이것은 하루만 먹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하늘에 양식이다. 그것이 교회가 누리는 복이다. 이 영원한 대제사장을 주셨다는 것이 신약의 복음 선포다. 구약에 교제를 알겠지요? 이것은 여러분을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하는지 절대로 설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영원한 대제사장을 주셨고 바로 이 영원한 대제사장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곧 여러분의 생명이기 때문에 거기는 어둠이 전혀 없고 완전한 정결이다. 완전한 피와 생명을 받았다. 오른 쪽 든 다리 뜰에서만 먹어라 한 정도가 아니라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기 때문에 떡과 포도주를 살과 피라고 이야기를 한다.

 

구약처럼 성소에서 먹는 제물만 아니라 가나안 땅의 젖과 꿀이 흐름은 그들이 너무 너무 포도주를 많이 마시니까 눈이 빨갛 것이고 우유를 많이 마시니까 이가 하얄 것이고 구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 복을 주신 의미다. 떡과 포도주로 특별히 요한 복음은 보리떡이다. 보리떡을 먹어 놓고 내가 생명의 양식이니라 그렇게 말씀하신다. 좋은 밀가루 떡이나 주었으면 모르겠는데 보리 떡 줘 놓고 내가 생명의 양식이니라 그러신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삶을 주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삶으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세움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거룩하게 하셨다. 그가 우리의 속죄 제물이셔서 그의 죽으심 안에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새롭고 산 구원의 길이 열렸고 그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린 헌신의 길 때문에 우리가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영원한 봉사의 길이 열린 것이다. 모든 제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으로 성취된 것이다. 바로 이 교제 관계가 여러분을 거룩하게 한다. 바로 이 교제가 여러분을 거룩하도록 결심 시킨다. 그러니까 항상 여러분이 주님을 믿으시고 의지하기를 바란다. 그것만 여러분으 유일한 거룩이다.

 

이렇게 나누어서 설명을 해도 제일 좋은 방식은 본문을 그대로 순서대로 여러 번 읽는 것이다. 그러면 본문이 그렇게 아름답게 묘사를 해 놓고 있다. 단지 저는 알기 쉽게 짚고 있는 것뿐이지 여러분이 이렇게 읽고 또 본문을 읽으면 왜 이것은 앞에 두고 뒤에 두었는고 똑 같은 말을 좀 바꿔 놓았는고 보면 단과 거기 봉사한 제사장을 함께 거룩하게 한 의미들을 잘 알게 될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그 단에서 제사장이 봉사하는 것과 향단에서 제사장이 봉사한 봉사에 대해서 말하면 이 언약 관계는 일단 끝나고 그 다음 30:11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 새로운 단락이 또 시작되는 것이다. 여전히 제사장의 물두멍과 기름 부음이 있어도 여기서는 또 다른 이야기다.

 

우리가 성경을 들을 때는 이렇게 만족하고 성경을 다 안다고 생각을 한다. 예수님을 완전하게 알고 사랑한다고 느끼는데 우리 신자들이 요새 여자들 비슷하다. 둘이 만나서 사랑한다고 그러고 음악회가 가고 그러면 이 남자가 진짜구나 그러고 어디 출장 가서 일주일 동안 전화 안하면 변했다냐 그러고 그렇게 느끼면 안된다. 여러분에게 구체적으로 말씀이 임하고 일이 형통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느끼고 여러분을 혼자 두신 것처럼 두시면 하나님이 변한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이 변한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진짜다냐 가짜 다냐 하고는 이웃 사람을 기웃거린다. 왜 나만 이렇고 하면서 그러면 안된다 그 말이다.

 

이분은 영원히 살아 계시고 변치 않으시고 아론은 주지 못하는 것을 주시는 권세 자다.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몸에 죽음을 당하신 대제사장이시다. 그런 대제사장은 구약에 없다. 이처럼 우리가 영원한 대제사장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 그분을 믿으세요. 그러면 여러분이 많은 고난을 당할지 모르지만 세상이 위로 못하는 빼앗지 못하는 평안을 여러분이 누릴 것이다. 외부 사람이 오면 가난하고 고생한 사람인데 그 자신이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있으면 그것은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사람한테는 세상이 감당을 못한다.

 

세상에서 이런 저런 일이 되고 안되고는 눈한나 꿈적 할 일이 아니다. 괜히 옆에서 보기에 불안하게 보인 것이지 눈 하나 꿈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 그렇게 살면 된다. 천당 가는 것은 확실히 믿는데 땅에서 조그만 일만 생겨 버리면 정신이 혼미하고 큰일 나 버린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내가 여기 있지 않냐? 방금 보리떡으로 오천명을 먹이신 분이 여기 있는데 풍랑에 빠져 죽겠다고 달달 떨고 있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가짜라 그 말이 아니다. 그분이 여기 계시는데 적용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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