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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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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민재 목사 |
참고 : | 20070701 은명교회 HTTP://WWW.SUMBIT.OR.KR/ |
땀 냄새 나는 하나님
오늘은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하면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지금 이곳은 수영장입니다. 한 사람이 수영을 합니다. 처음에는 물이 무서워 들어가지도 못하던 사람인데, 훈련을 받고, 어느 정도 물에 익숙해지자 수영을 즐길 줄 알게 되었습니다. 물에 자신을 내맡긴 채 천천히 나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빠르게 헤엄치기도 하고, 그러다가 깊이 잠수하여 물과 하나 됩니다. 그는 어머니의 태 속에 있는 것 같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 사람을 보던 어떤 사람이 부러워하며 말합니다. ‘아, 나도 저렇게 수영을 할 수 있었으면….’
두 번째 상상입니다. 이제 수영장의 물을 다 뺍니다. 한 사람이 물이 빠진 수영장에서 수영을 합니다. 발은 수영장 바닥을 딛었기 때문에 빠질 염려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집니다. 발을 딛고 걸으면서 온갖 폼을 잡고 수영하는 흉내를 냅니다. 자유형도 흉내내고, 수영장 바닥에 누워 배영 흉내도 내고…. 그야말로 온갖 폼은 다 잡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람이 배꼽을 잡으며 웃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내뱉습니다. “쌩쑈를 하고 있네!”
물이 빠진 수영장은 이미 수영장이 아니며, 물이 빠진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처럼 어리석고 웃기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유능한 수영선수라도 물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이와 같이 없으면 안 되는데 사람들이 평소에 까맣게 있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물이 그렇고, 또 공기가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공기를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적 있습니까?
저는 둘째 누이가 죽는 순간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죽기 얼마 전 한동안 혼수상태에 있었는데, 혼수상태에 있더라도 숨이 있으면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숨이 딱 끊어지는 순간 의사가 말하더라구요. 운명하셨다고. 그러니까 누이를 둘러싸고 있던 가족들이 울기 시작합니다. 엄마… 여보… 누나… 언니… 정자야….
실낱같은 숨이라도 붙어 있으면 산 사람이요, 실낱같은 숨이라고 없으면 죽은 사람입니다. 실낱같은 숨이 생과 사를 결정짓는다는 생생한 사실에 저는 전율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았습니다. ‘아, 호흡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구나!’ 이건 책을 통해 배운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삶 속에서 전율하면서 깨달은 진리입니다. 아, 숨, 그리고 호흡! 그리고 이것을 가능케 하는 공기! 얼마나 중요하고 고마운가.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란 어떻게 될 것인가. 그야 죽음이지요!
없으면 안 되는데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저는 요즘 사랑이 없다면 이 세상이 유지될 수가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가정이 유지되려면 사랑이 있어야 하고, 부부간이나 부모자식간이나 형제자매간에도 사랑이 없으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교회는 두말할 나위 없이 그런 곳입니다. 숯불처럼 사랑이 이글거려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기아, 질병, 가난, 전쟁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신의, 신뢰, 충성, 헌신 같은 말들은 사랑의 다른 이름들인데 이런 것이 결국은 이 세상을 지탱해나가는 힘인 것입니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이라는 프랑스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조수의 힘이나 바람의 힘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아냈지만, 사랑의 힘을 이용하는 법은 아직 터득하지 못했다.” 사랑의 힘, 사랑의 에너지를 이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현대문명의 모든 저주를 축복으로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 친척이 보낸 편지]
지난 주 주보에 <어느 편지>라는 제목의 표지글을 실었습니다. 수요숨빛예배를 통해 도운 적이 있는 허준수 할아버지께서 보낸 편지의 일부였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자신이 생활보호대상자이면서도 자신이 받는 모든 비용을 털어 가난한 집 아이들을 위해 <방과후학교>를 운영하고 계신 분인데, 교재 살 돈이 없어 어린이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얘길 듣고, 교재 사는 데 보태시라고 조금 도와드렸더니 너무 고맙다며 편지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 편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크리스마스로 들뜬 계졀.한 중년부인이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주차장으로 가다가 오들오들 떨고 있는 소년을 보고 얼른 차에 타게 한 후, 소년에게 "얘야, 너 나를 따라오련?"
소년이 그러겠다고 하자 부인은 목욕탕에 들여보낸 다음 때미는 분에게 부탁하여 목욕을 시켜주고, 그리고 백화점에서 속옷부터 겉옷, 외투, 신발, 모자까지 사준 다음 햄버거점에 들려 킹 사이즈로 주문시켜 주었더니, 정신없이 먹던 소년이 마주앉아 눈물을 닦아내는 중년부인을 보고,
"아줌마, 아줌마는 하나님 부인이야?"
"으응, 아, 아니야, 나는 그분의 쬐그만 딸 중의 하나야!"
입안에 가득했던 햄버거를 목 안으로 꿀꺽 넘긴 소년은 "어쩐지, 하나님 친척 같더라."
저도 하나님 친척이 되려고 퍽이나 노력해왔으나 이번에 '하나님의 조용한 성품을 닮으신 친척들'을 만나게 되어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기쁨의 찬송을 올렸습니다. 거듭 감사드리며,건강하시기를....
이 세상을 그래도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하나님 친척’들입니다. 하나님 친척이란 다름 아닌 사랑의 기적을 곳곳에서 일으키는 사람들이지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 치유하는 것, 새롭게 창조하는 것은 돈도 아니요, 권력도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이 함께 할 때 돈은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바탕에 깔려 있을 때 권력은 나에서 남으로 중심이동을 하게 됩니다. 이때 권력은 수없이 많은 가난한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체험]
서두가 좀 길었습니다. 왜 이런 서두를 꺼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 체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이 없으면 수영을 할 수 없는 것처럼, 공기가 없으면 숨을 쉬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이 세상이 유지ㆍ보존되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 없이는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은 꼭 뭐와 같은가 하면 물 없는 수영장에서 헤엄치는 흉내내는 것과 꼭 같습니다. 자신은 멋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은 천지간에 공기로 꽉 차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기가 없다 하면서 자기가 직접 만든 기계장치를 통해 만들어진 공기로만 숨쉬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처럼 어이없는 삶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은 사랑은 없어도 돈만 있으면, 공부만 잘하면, 얼굴만 예쁘면, 건강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가련하기 짝이 없는 삶입니다.
여러분의 하나님 체험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 체험이 있습니까? 잘 모르시겠어요?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고? 저는 하나님 체험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자기의 체험을 하나님 체험이라고 이름붙이지 못한다는 것뿐이지요.
저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것은 몇 번에 걸친 하나님 체험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여러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신비체험을 했다거나, 깊은 황홀경 속에서 남들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거나 한 것은 아니니까요. 만일 누가 저더러 “당신의 하나님 체험이 뭐요?” 하고 물으면 주저하지 않고 말합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근원적 느낌입니다.” 또는 “그것은 삶에 대한 직관적 느낌과 관계된 어떤 것입니다.”
‘삶에 대한 근원적ㆍ직관적 느낌!’ 매일 매순간 이런 느낌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때 문득 ‘삶이란 이래야 해!’ 내면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곳도 아닌 어떤 곳’(somewhere that is nowhere)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소리가 들리면서,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직관 상태에 사로잡히는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은 무엇을 하더라도 진실해야 해!’라든지, ‘모름지기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라든지, ‘내가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정직해야 해!’라든지, ‘때로는 고통과 핍박이 있더라도 정의의 편에 서야 해!’ ‘아아, 이건 아니야!’ 같은 어떤 근원적인 느낌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느낌은 학벌과 관계 없습니다. 오히려 학벌이 없는 사람이 더 근원적인 느낌을 갖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이런 ‘근원적인 느낌’은 흐트러졌던 삶의 방향감각을 회복하게 합니다. 어수선하고 무질서한 삶 속에 질서를 부여합니다. 분열된 삶을 통합합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흩어져 있는 구슬은 별 가치가 없지만, 그 구슬들을 하나로 꿸 때 아주 값진 보물이 되는 것입니다. 흩어져 있는 구슬들을 하나로 꿰는 줄, 그것이 삶에 대한 근원적인 느낌이요, 그것을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근원적인 느낌은 삶을 하나로 만들 뿐만 아니라, 때로는 깊은 회한의 정서에 사로잡히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이건 아니야.’ ‘어쩌다 이 지경이 됐지?’ ‘모든 걸 다시 시작하고 싶어!’ 이렇게 삶의 옷매무새를 다시 한 번 가다듬게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그런 체험이 있지만 그것을 하나님 체험이라고 이름붙이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에 대한 근원적 느낌을 하나님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 ‘명명하기’ ‘네이밍(naming)'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삶에 대한 근원적인 느낌은 있으면서도 그것을 하나님 체험이라고 명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체험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체험은 꼭 기도원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체험은 부흥회 같은 곳에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합니다. 무신론자도 합니다. 그들에게도 삶에 대한 근원적인 느낌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명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체험은 특별한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
모세가 꼭 그랬습니다. 하나님 체험을 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살펴본대로 모세는 나중에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을 갖도록 부추키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번에는 하나님의 이름도 모른다고, 즉 자신에게는 적절한 지식이 없다고 말하면서 발뺌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시면서 당신의 이름을 직접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한 번 더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더러 “하나님이 너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할 것이라고 하면서 발뺌합니다. 하나님 경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났으면서도,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서도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얘기하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지요. 하나님 체험을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 체험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우리와 똑같은 상황입니다.
정말로 모세에겐 하나님의 경험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당신의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사명을 주시지 않습니다.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3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는 사명은 바로 모세가 하나님을 체험한 직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러한 사명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자유’로 경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고 말씀하신 것을 조금 전에 제가 말한 식으로 얘기하자면, 그것이 모세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느낌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나는 양치기로 내 인생 끝내서는 안 되는데…’ ‘먹고 사는 문제에 급급하여 생존의 노예로 살아서는 안 되는데…’ ‘뭔가 다른 것이 있는데…’ ‘나만이 할 수 있고, 나만이 해야 하는 어떤 궁극적인 사명 같은 것이 있는데…’ ‘이건 아닌데, 정말 삶이 이렇게 끝나버리면 안 되는데…’ ‘이런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동포 이스라엘 백성도 바로의 학정에서 해방되어야 하는데…’ 그런 내면의 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소린지 확신이 서질 않는 것입니다.
이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두 가지 기적을 경험하게 하셨고, 한 가지 기적을 약속하셨습니다.
첫째, 지팡이를 던지게 했습니다. 그대로 했더니 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꼬리를 잡으라 하셔서 뱀꼬리를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둘째, 손을 가슴에 넣으라 하셔서 그렇게 했더니 손에 문둥병이 생겼습니다. 다시 품에 넣으라 하셔서 또 그렇게 했더니 손이 다시 깨끗해졌습니다. 본래의 살로 돌아왔습니다.
셋째, 그래도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나일 강물을 떠다가 땅에 부으라 하시면서, 그 물이 피로 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경험에 확신이 없는 모세에게 행하신 이적이요, 앞으로 행하실 이적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문자 그대로 이런 일을 경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일까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변화, 하나님 체험의 조건]
이 세 이적의 공통점은 ‘변화’입니다.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고, 뱀이 다시 지팡이로 변합니다. 깨끗한 손에 문둥병이 생기고, 문둥병 생긴 손이 다시 깨끗한 손으로 변합니다. 마지막으로 물이 피로 변합니다.
하나님 체험은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한 가지 생각에 고정되어 있는 사람, 자신의 경험에 갇혀 있는 사람, 자신의 성격에 갇혀 있는 사람, 폐쇄적인 사람, 집착하고 있는 사람, 현재의 작은 안일과 행복에 안주하고 있는 사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과감하게 자기갱신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체험과 그만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반대로 지금 상태에서 변화를 추구하고, 성장을 추구하고, 안주하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노력하는 사람은 하나님 체험에 가까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변화는 자신의 의지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변하고 싶지 않은데, 지금의 안정된 상태를 깨고 싶지 않은데 상황이 변화를 요구하는 때도 있습니다. 상황이 자꾸 나를 성가시게 하면서 자신이 쌓아온 성을 허물게 하는 때도 있습니다. 이때는 괴롭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자신에게 집착합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자신을 고집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 체험은 물 건너간 얘기입니다.
그러나 변화를 요구하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 체험은 점점 리얼해지기 시작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것은 무슨 뜻입니다. 이 세 성조야말로 변화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삶의 여정은 주거지와 믿음과 인격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야곱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여정에서, 이삭은 끊임없이 우물을 파는 과정에서, 야곱은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는 과정에서 계속 변화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맞닥뜨립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삶의 토대가 무너지는 근본적인 상황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더욱 생생하게 체험한 것입니다.
이 변화가 일어난 곳, 일어나고 있는 고, 앞으로 일어나야 하는 곳, 그리고 그 변화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생생하게 체험하게 하는 곳, 그곳은 어디입니까? 기도원, 교회, 부흥회? 아닙니다. 일상의 한 복판, 먼지 날리고 땀냄새 진동하는 삶의 한 가운데! 그곳이야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성소 중의 성소입니다. 그리고 이때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철학자나 신학자의 창백한 하나님이 아니라 땀냄새 나는 하나님 즉 삶의 체취가 배어 있는 인격적인 하나님인 것입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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