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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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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익 목사 |
참고 : | 2005.5.29 |
믿음의 여성들
출 2:9-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 였더라.
오늘 우리사회는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 재인식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우리사회는 여성에 대해서 많은 눈을 뜨게 되었고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여성들이 많이 눌려 살았고 기회를 박탈당한 채 남존여비 사상에 깊숙이 물들어 살아왔습니다. 그 남존여비 사상을 오늘까지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사회는 그만큼 뒤쳐진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여성에 대해서 편견을 갖고 남자이기 때문에 우월감을 갖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만큼 뒤쳐진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를 구타하고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성에 대해서 남녀동등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사랑하고 복종하라고 했지만 남편에게는 복종이라는 남성 용어를, 아내에게는 사랑하라는 여성 용어를 쓴 것뿐 그 내용상 의미는 같은 뜻입니다.
그 사회가 건강하려면 여성이 살아야 하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성들이 정신이 건강하고 사리에 밝고 생활이 건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은 여성의 건강한 역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몇 명의 여성들이 나옵니다. 이 여성들을 역할별로 말씀을 드려보려고 합니다.
“아내로서의 여성상”
여성도 아내로서의 여성상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여성 가운데 구레네 시몬의 아내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을 보면 참 좋은 건전한 모습을 가진 아내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여인은 이름도 없습니다. 성경에 자세하게 나타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배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낸 여인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서 가다가 자꾸만 쓰러졌습니다. 그 때 로마군인들이 곁에서 구경하던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을 붙잡아 십자가를 지워 억지로 대신지고 가게 했습니다. 이 구레네 사람 시몬은 그 당시는 그것이 참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 사후 이 남자는 두고두고 그 때를 회상하면 참 감동적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려왔을 것입니다. 이 남자의 아내가 이름도 없는 그 여인입니다. 그의 아들은 루포와 알렉산더인데 이 두 아들이 모두 후에 유명한 전도자들이 되었고 그 남편 구레네 시몬도 후에 훌륭한 전도자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기 구레네 시몬이라는 말은 오늘의 리비아 땅 구레네에서 살던 시몬이라는 말입니다. 그날 두 아들과 아내 그리고 시몬이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그 멀리 리비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던 길이었는데 그때 마침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자꾸만 쓰러지니까 로마군인들이 지나가던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니까 그는 순순히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까지 갔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남자를 이렇게 만들기까지 아내들의 역할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이 시몬의 아내는 이름도 없습니다. 성경에 자세하게 나타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남편을 십자가를 지게 만들었고 두 아들을 사람들이 알아주는 전도자로 키워냈습니다. 저는 이것이 중심 있는 아내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로서의 여성은 살림만 하고 집안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온 가족의 할 일을 할 수 있도록 정신적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감동시키고 마음을 움직이도록 만드는 역할이 아내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로서의 여성상”
아내로서의 여성이 있는가 하면 또 좋은 어머니로서의 여성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마가의 어머니를 들 수 있습니다. 마가의 어머니는 오늘의 보통 어머니들 여인상을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두 아들이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마태복음 20장20절을 보면 한 여인이 예수께 찾아와 두 아들을 부탁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이 여인이 예수께 찾아와 “장차 예수께서 왕이 되시면 내 아들 둘을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하고 청탁을 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친자매간인 살로메라는 여인입니다. 장차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 분명한데 그렇게 되면 내 두 아들을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 말을 듣고 나머지 제자들이 분개했다고 했습니다. 이 경우는 지극히 오늘의 어머니상과 똑 같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의 앞날을 위해서 더 높은 사람에게 청탁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이런 일을 아버지는 체면상 말을 못하지만 어머니는 체면 따지지 않고 아들을 생각해서 찾아가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입니다. 아들딸이 잘 된다면 나의 수모나 수고나 체면이 구겨지는 것쯤은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나머지 제자들이 분개할지라도 예수님을 찾아가 두 아들을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여기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는 지극히 어머니로서의 여성상을 가진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잘못이라고 탓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소박한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자식이 잘 된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그것을 누가 탓할 수 있겠습니까. 군대 에 보내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내 아들이 군에 가서 고생한다고 생각하면 안보내고 싶은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매를 들고 때릴 때 쫓아가서 대신 매 맞으며 아들을 감싸 주는 마음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이 지극히 소박한 어머니다운 여성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여기 살로메라는 여인에게서 그런 모습을 봅니다.
“신앙인으로서의 여성상”
아내로서의 여성, 어머니로서의 여성의 모습도 있지만 신앙인으로서 강인하게 영향을 미치는 여성도 있습니다. 그 경우는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를 들 수 있습니다.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는 자상한 어머니상이나 조용한 아내상이라기 보다는 중심 있는 신앙인으로서의 여성상이 물씬 풍기는 그런 여인입니다.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입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 유니게는 아주 정숙하고 경건한 신앙을 가진 유대인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디모데를 놓고 아버지는 헬라남자가 되기를 요구했을 것이고 어머니는 장차 훌륭하고 경건한 신앙인이 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디모데는 갈등도 고민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민하고 갈등하는 디모데에게 그 마음에 아주 강렬하게 신앙적 뜻을 심어준 것이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디모데는 모든 갈등을 극복하고 어머니의 뜻을 따라 마침내 큰 전도자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디모데가 그 시대 마음을 잡고 경건한 신앙의 길을 선택하고 전도자가 되는데 가장 크게 역할한 사람은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유니게라는 여성은 아주 강렬하게 신앙을 전수시켜주는 신앙의 여성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여성상은 조용한 아내 상을 뛰어넘고 어머니상도 뛰어 넘는 그런 여성상입니다.
“사명자로서의 여성상”
아내나 어머니나 신앙적 차원을 넘는 사명자로서의 여성상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들 수 있습니다. 사명자를 둔 어머니나 여인은 평범하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세례요한의 어머니가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제사장인 남편과 노년의 인생을 살았는데 그때까지 아이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타나나서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이름까지 지어주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이 노부부는 장차 태어날 아이에 대해서 큰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동네 사람들도 모두 태어날 그 아들에게 대해서 큰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이 마침내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가 점점 자랍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부모에게 행복을 주고 평안을 주고 기쁨을 주는 그런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들이 청년기에 이르자 다른 청년들처럼 평범하게 살지 못하고 현실에 대해서 고민하고 갈등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방황 대더니 마침내 집을 나가 광야에서 거쳐하며 그 시대의 고민을 다 걸머진 사람처럼 고뇌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가끔씩 한마디씩 말을 내뱉는데 당시 집권세력을 향해서 독설을 퍼부어댔습니다. 그 말들은 듣기만 해도 민망하기 그지없고 저러다 제명대로 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입니다. 그러더니 마침내 집에 들어올 생각은 하지 않고 죽어 넘어진 약대의 가죽을 벗겨서 걸치고 다니며 광야에서 잠을 자고 야인으로 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어머니는 애간장이 탔을 것입니다. 노년에 얻은 자식이 저 모양으로 살고 있으니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다가 마침내 헤롯임금이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왕비로 삼고 살아가자 독설을 퍼 붓다가 마침내 미움을 받고 목이 잘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 아들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며 살아가던 그 여인은 어떤 마음,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복음서를 보면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한마디 말이 없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오랜만에 얻은 자식이 그 시대에 그런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 아들을 향해서 어머니로서 무슨 할 말이 있었겠습니까.
보통의 어머니들은 아들이 장차 성장해서 평범하게 평안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생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그렇게 살아가다가 목이 잘려 죽었으니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사명자의 어머니는 그 심장이 강심장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잔잔한 행복, 안일한 평안, 평안한 안주, 아기자기한 삶은 기대도 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사명자를 둔 어머니들은 한결같이 아예 숨을 죽이고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는 여인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려서 피땀을 흘리며 죽어갈 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어머니 마리아는 통곡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바라만 보아야 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어머니도 그런 심정으로 아들이 바른 말을 하고 독설을 퍼 붓다가 목이 잘려나가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보통의 어머니들은 정신을 잃고 까무러치겠지만 마리아, 엘리사벳은 땅을 치며 통곡하지도 못하고 조용히 바라만 보며 눈물짓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명자의 어머니는 강심장이어야 합니다. 사사로운 행복감, 평안, 즐거움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 여성상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사명자들이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감수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여인상“
나라를 사랑하는 여인상에는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합당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바로 그런 내용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요게벳이라는 여인은 애굽에 의해서 종살이 할 때 아들 모세를 낳았습니다. 300여 년간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중 아들을 낳으면 나일강에 갖다 버려야 하는 그런 시대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을 3개월 될 때까지 숨겨 길렀지만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자 아들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아들을 상자 속에 넣어 나일강에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바로의 공주에 의해서 건져지자 재빨리 좇아가 그의 유모를 자청해서 그 아이를 자기 자식처럼 양육합니다.
그 아이를 양육하는 동안 그의 어머니가 자라는 아들 모세에게 무슨 말을 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날마다 그 아들에게 “너는 히브리인이라는 점을 잊지 말라, 그리고 네 몸에는 히브리인의 피가 흐른다는 점을 기억하라, 너는 압박받고 핍박당하는 이 민족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사명을 고취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머리가 크고 성장했을 때 자기민족을 괴롭히는 애굽인을 쳐서 죽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의 마음과 정신 속에 내 몸에는 히브리인의 피가 흐른다는 정신이 뜨겁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몸에서 지금 흐르고 있는 피가 히브리인의 피라는 것을 자각하게 하고 깨닫게 해 준 사람이 그의 어머니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모세가 민족을 구원해내는 사명을 자각하게 되고 사명을 깨닫게 되고 실제로 민족의 지도자로 나서게 만들었습니다.
부모 중에서 누가 더 영향력이 있느냐 하고 묻는 질문은 우문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주는 영향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보면 큰 사명자들의 뒤에는 언제나 아버지 보다는 어머니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음을 이야기 하게 됩니다. 사명을 받은 여성은 몸으로 받는 수난도 있겠지만 아들을 숨겨줘야 하고 마음 졸여야 하고 눈물로 기도해야 하고 마침내는 아들이 고난 받을 때 그 모습을 바라보고 마음껏 울 수도 없는 속으로 눈물을 흘려야 하고 마음으로만 아파해야 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주기철목사의 역사를 보면 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을 당하는 남편을 면회 가는 사모는 그의 앞에서는 의연한 체 했다고 합니다. 눈물을 흘릴 수도 없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여도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면회 갔을 때 목사님이 마음이 상당히 약해져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 사모는 이러다 혹시 순교하는 것이 실패로 끝나지 않을까 염려되어 마음약해지는 남편에게 “당신은 여기서 살아나오면 안됩니다, 끝까지 인내하여 순교해야 합니다“하고 못을 박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밖에 나와서 홀로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인물들이나 성경속의 사명자의 어머니나 아내노릇 하려면 평안하고 행복한 그런 개인적인 삶의 내용은 초월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사명자의 아내요 어머니요 여성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여성들의 품안에서 위인이 만들어지고 애국자가 만들어지고 신앙인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건강하게 만드는데 여성들의 역할이 아주 크다고 봅니다. 여성이 살아야 가정이 살고 나라가 살고 이 세상이 믿습니다. 여성이 정신이 살아있으면 그 품에서 애국자도 나오고 신앙의 위인도 나오고 사명자도 나올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점을 더 깊이 인식하고 생각하고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2005. 5. 29. 여성주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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