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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1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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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피영민 목사 |
참고 : |
하나님의 타이밍을 따르라
“Timing is everything” 인생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타이밍을 잘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성장 했지만, 40세 이후의 모세는 때를 잘못 맞춰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더 큰 훈련의 기회로 미디안 광야를 예비하셨던 것이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그른 자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 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출애굽기 2장 11~15절
영어에 “Timing is everything”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타이밍을 잘 맞추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시간을 조절하고 때를 조절하여 타이밍을 맞춘다는 것은 때를 아는 것입니다. 가야할 때 가고 멈추어야 할 때를 알아 멈추는 것이며, 웃을 때 웃고 울 때는 울고, 밥 먹을 때 밥 먹고, 잘 때 자는 것입니다.
요리에도 중요한 것은 타이밍입니다. 라면도 물이 팔팔 끓을 때 면을 넣어야 되고, 조금 지나면 스프를 넣어야 되고 계란도 먹기 직전에 넣어야 맛있게 됩니다. 고기를 구워도 적당한 때 구워야지 너무 빨리 꺼내도 안 되고 너무 두어도 타서 못 먹게 됩니다. 사람이 병들어 약을 먹을 때도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약 먹을 시간에 맞추어 먹어야 병이 속히 낫는 것입니다. 말을 할 때에도 때를 잘 맞추어서 말을 해야 합니다. 장례식에 가서 “참 행복하시겠습니다.” “기쁘시겠습니다.” 말한다면 민망스럽지 않겠습니까?
잠언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 25:11)는 말씀이 있습니다. 은쟁반을 수로 잘 아로새기고 금사과를 띄우게 되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경우에 합당한 말이 그렇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돈 버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이 투자를 할 때인가? 투자한 것을 거두어야 할 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한 박자 먼저 가거나 한 박자 늦으면 남들 다 벌 때에 자기는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스펄전 목사님은 설교 본문도 때와 정황에 맞게 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평생을 부요하고 믿음으로 살던 장로님의 장례식장에 가서 성경본문을 “그 거지가 죽어 장사되매”(눅 16:22) 이런 본문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잘못 정하면 말하기도 어색하고 듣기도 딱하고 그런 상황이 된다고 했습니다.
때가 정확한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의 생애는 온통 정확한 타이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도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니라 때가 차서 오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 4:4).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셔도 아무 때나 행하신 것이 아니라 때가 되었을 때 행하셨습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가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나이다.” 라고 했을 때만 해도 예수님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라고 하면서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던 것을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위대한 기적을 행하셨을 때에도 때가 되자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무슨 슈퍼스타나 ‘욘사마’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보고 “그렇게 능력이 많으시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인기를 끌어 보시오!” 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도 예수님을 안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형제들에게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요 7:6).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했지만 잡지 못한 이유도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요 7:30).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때가 그른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2장은 타이밍이 잘 맞은 경우와 가장 안 맞은 경우가 절묘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1절부터 10절까지는 얼마나 타이밍이 잘 맞았습니까? 요게벳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낳고 보니까 인물이 얼마나 준수하고 아름다운지 유대인은 아들을 낳거든 하수에 던져 버리라는 바로왕의 명령을 알면서도 그 아들을 붙들고 품에 안고 3개월 동안 젖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얼마나 건강한지 3개월이 되니까 울음소리도 우렁차고 도저히 숨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갈대상자를 만들어서 역청을 칠하고 물이 새지 않도록 한 후 “하나님이시여 이 아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죽지 않고 살아나게 하여 주소서” 기도를 하면서 나일강으로 떠내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에 누가 나왔습니까? 그 때에 바로의 공주가 대낮에 목욕을 하러 나일강에 나왔습니다.
바로 그 때에 갈대상자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더니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하고서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그 갈대 상자를 잡고 거기에 있는 아기를 건져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라는 이름의 의미는 ‘물에서 건져 내었다’는 뜻입니다. 마침 그 때에 모세의 누이가 그것을 보고 있다가 쫒아갑니다. “공주님, 공주님 이 아이가 먹고 살려면 젖을 먹여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히브리 여인 중에 젖먹일 수 있는 유모를 소개해 드릴까요?” 그러자 바로의 공주가 허락해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자기 아들을 자기 아들이라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자기의 젖으로 모세를 키우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타이밍이 딱딱 잘 맞습니까? 만약에 요게벳이 2개월 만에 모세를 떠내려 보냈으면 모세는 죽었을 것입니다. 아마 4개월 있다가 떠내려 보냈으면 모세는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딱 3개월 째 떠내려 보냈고, 마침 그 때에 공주가 목욕을 했고, 마침 그 때에 누이가 그것을 보게 되고, 마침 그 때에 공주가 허락을 해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고 궁중에서 잘 살면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11절부터 15절은 참 모세가 타이밍을 잘 못 맞춘 내용입니다.
때를 못 맞춘 모세
10절로부터 11절 사이에 4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고 최고의 교육을 받으면서 나이 40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참 모세를 바라보고 존경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히브리 사람이라고 하는 민족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너는 애굽 사람이 아니고 히브리인이라고 계속 교육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어쨌든 모세는 애굽 사람이 아니고 히브리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나이 40쯤 되니까 동족의 고통 받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내 동족을 이 애굽의 압정에서 건져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그것을 보고 있다가 히브리 사람이 없어졌을 때에 좌우를 살피고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모래를 파묻어서 그의 시체를 묻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게 처리했습니다. 이런 범죄를 가리켜서 형법용어로 ‘완전범죄’라고 합니다. 모세가 지금 완전범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또 나가서 보니까 이번에는 히브리 사람 둘이 싸우고 있습니다. 동족끼리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른 사람을 향해서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면서 잘못된 쪽을 향해서 야단을 칩니다. 그러자 잘못한 사람이 말합니다.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출 2:14) 말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일이 탄로되었도다” 하며 두려워합니다.
모세는 좋은 동기와 의협심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돕고자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인데 자기 동족들이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고 언제 법관을 삼았느냐고 도리어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게다가 바로왕이 그 소식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결국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모세는 얼마나 의협심이 강합니까? 자기 동족을 친다고 쳐 죽이고 파묻었습니다. 그러고 나가서 또 동족들끼리 싸워도 좋은 편을 들고 나쁜 편을 꾸짖는 의협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민족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협심도 좋고 인품도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타이밍이 아주 형편없었습니다. 모세는 아직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타이밍을 맞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의협심은 훌륭합니다. 모세를 보면서 ‘나도 이런 의협심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의협심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모세는 본받을 만한 의협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민족을 사랑하는 의협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렇게 훌륭한 의협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타이밍을 잘 못 맞춰서 나쁜 결과를 얻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도 타이밍을 못 맞춘 예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이 자식을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과 사라가 오늘인가, 내일인가, 기다려도 자녀가 생기지 않으니까, 즉 하나님의 때를 못 맞추고 자식 하나를 낳아버렸습니다. 그것이 이스마엘입니다. 이 이스마엘이 나중에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희롱하고 대대로 원수가 되어서 지금까지도 싸우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때를 잘 못 맞춰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께 번제를 드린 일이 어찌 나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왕은 때를 못 맞췄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올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번제를 드리다가 폐위된 것입니다. 베드로도 때를 못 맞추었습니다. 의협심이 필요할 때는 오히려 도망가더니, 용기를 부리지 말아야 할 시점에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자르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그 귀를 다시 붙여 주시고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열두 영이나 되는 천사를 오게 하실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직 이렇게 할 때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이사야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갈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0)의 독수리 날개침 같은 새 힘을 얻고 살려면 여호와를 앙망해야 되는데, 앙망한다는 것은 곧 기다리는 것(wait upon)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독수리 날개침 같은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때를 못 맞춘 모세의 징표
모세는 그 애굽인을 쳐 죽이면서 좌우를 살폈습니다.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12절). 사람이 옳은 일을 하면 왜 좌우를 살핍니까? 옳은 사람은 좌우 살필 것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좌우를 살핍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의 방법을 동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기 위해 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로 파묻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것을 알면서 좌우로 살피며 이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살인하지 말라”하는 하나님의 법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기도보다는 충동심을 따랐던 것입니다. 모세가 이 순간에 “아버지여 내가 저 애굽인을 쳐 죽일까요?” 일분일초라도 기도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단지 의협심으로 쳐 죽이고 파묻었을 뿐입니다. 사람은 충동적이면 모든 일을 그르칩니다. 결혼의 경우도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에 빠져 오늘 결혼했다면 틀림없이 후회할 것입니다. 충동구매를 하게 되면 틀림없이 후회하게 됩니다.
또한 모세는 자기의 일을 부끄러워해 죽인 사람을 모래로 파묻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자신이 행한 결과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히브리 동족들에게도 인정받지도 못하고, 바로왕은 모세를 죽이려 합니다. 도망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계 3:7). 예수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습니다. 다윗의 열쇠는 열고 닫는 열쇠입니다. 예수님이 한번 닫으면 열자가 없고 열면 닫을 자가 없습니다. 기도할 때에 예수님이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모든 축복의 문을 열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원의 문이 열렸을 때에는 들어가야 합니다. 축복의 문이 열렸을 때에는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이 닫혔을 때는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때가 아니오니 열 때를 다시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다리고 앙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나쁜 문은 모두 닫히고 좋은 문은 모두 열려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원의 문도 열어 주시고, 축복의 문도 열어 주시고, 건강의 문도 열어 주시고, 부요의 문도 열어주시고,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모든 문을 다 열리게 하여 주시길 축원합니다.
기독교는 때의 종교입니다. 타이밍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때가 오면 과감하게 들어가는 도전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가만히 앉아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때가 오고 기회가 오면 그것을 잡을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고, 그 지혜를 가지고 잡아서 모든 면에서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모세는 때를 잘못 맞춰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습니다. 동족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바로왕은 죽이려 하고, 히브리인이지만 히브리인에게 갈 수도 없고, 애굽으로 갈 수도 없는 모세는 미디안 광야고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모세의 인생은 끝난 것입니까? 모세는 망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손 씻으셨습니까?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이로써 모세의 생애가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더 큰 훈련의 기회를 허락하시고 미디안 광야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에게 최고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애굽의 왕자가 아닌 다 깨어지고 부서진, 그러나 하나님께 훈련받을 준비가 된 모세가 되었습니다. 아주 절망하고 위축될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모세는 의협심을 버리지 않습니다.
모세가 광야를 건너 우물가에 도착했을 때 마침 미디안의 제사장의 일곱 딸들이 아버지의 양을 끌고 왔습니다. 우물에서 물을 떠서 구유에 담아 양에게 먹이려고 하나 남자 목자들이 나중에 와서는 여자들은 우리가 양을 먹인 다음에 먹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이런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사람입니까? 이런 공정치 못한 일은 두고 보지 못하는 모세입니다. 모세가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을 도와서 양무리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이 소식을 미디안 제사장인 르우엘이 듣고 모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함께 살게 됩니다. 르우엘이 모세와 함께 살면서 가만히 보니까 모세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교육을 받았으니 얼마나 인품과 실력이 좋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딸 십보라를 주었고 모세는 십보라에게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의 아들은 ‘잠시 거하는 객’ 즉 나그네라는 의미의 게르솜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때를 주어서 모세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모세는 망한 줄 알았는데 망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비로소 시작인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40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인생의 출발이지 완성은 아니었습니다.
저도 91년도에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12년 동안 교수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느끼는 것은 박사학위는 목회의 출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미국에서 5년동안 담임목회를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목회하면서 때로는 어렵기도 하고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즐겁기도 하고, 산전수전 겪으면서 훈련되어지면서 영적인 지도자가 되어가는 것이지, 어느 날 하루아침에 갑자가 슈퍼스타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모세가 이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죽을 고생을 다하고 여러 가지 훈련을 받고 나이 80이 되니까 그제야 하나님은 “모세야 이제는 네가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만하니라”하고 출애굽을 맡기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놓쳐서 지금 여러 가지로 고통하고 계십니까? 가정이 어렵고 경제가 어렵고, 영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하고, 마음으로 절망된 분이 계십니까? 성도들은 아무리 때를 놓쳐서 정말 어려운 상황이 되고, 모세처럼 정말 맨몸으로 미디안 광야로 쫓겨 가는 상황이 되더라도 ‘나는 망했구나. 나는 끝났구나’ 생각하지 마십시오. 미디안 광야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입니다. 거기에 십보라도 예비해 주시고 장인도 주시고 게르솜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를 통해 또 다른 축복의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서 의인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아무리 어려워도 의인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실제적으로는 육신이 약해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지라도 법적으로는 의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보시고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다시 일으켜 세워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망해도 의를 지키고 흥해도 의를 지키고, 잘될 때도 의협심을 가지고 살며, 쫓겨 가도 의협심을 가진 의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론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이 대박을 꿈꾸며 강원랜드로 갔다가 전 재산을 다 날리자 장기를 팔아서 돈을 마련한 후 수술한 곳이 아직 덜 아물어서 고름이 나는 몸을 가지고 또 그곳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삶이 어려우면 도피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다고 해서 도피하듯이 죄와 악을 향해서 가다 재앙을 만나면 할 수 있는 일은 그 재앙에 걸려 엎어지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의 길을 따라가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의의 길을 가게 되면 일곱 번 넘어져도 주께서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어려움이 올 때 주께서 다시 미디안 광야를 예비하시고 더 큰 기회를 주시고 더 큰 축복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에서 끝났으면 모세의 이름을 우리가 알게 뭡니까? 그런데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훈련받고 하나님의 큰 종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종의 이름이 된 것이 아닙니까?
어려우십니까? 그래도 ‘의’를 따라 사십시오. 믿음으로 사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길 바랍니다. 다윗의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여! 다윗의 열쇠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 인생에 축복의 문이 열린 한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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