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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역자

에배소서 김필곤 목사............... 조회 수 3479 추천 수 0 2012.12.30 09: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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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엡6:21-22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2012.12.2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동역자
엡6:21-22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상속받아 도시 근처에 2000평의 땅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작은 교회를 건축하고 15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하며 목회를 하였는데 30여명의 교인이 나왔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지역이 신도시가 되었고 큰 교회를 건축하여 3년 만에 2000여명의 교인이 모였답니다. 어쩌다 순식간에 교인이 많아져 유명인사가 되어 이곳저곳에서 간증을 하고 다니는데 몸이 이상하여 병원에 갔답니다. 그 동안 너무 고생하며 목회하다 신장이 상해 기능을 전혀 못하게 되어 신장이식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답니다. 목사님이 하루는 용기를 내서 “동역자”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답니다. “동역자와 동업자는 다릅니다. 동역자란 하나님의 사람들로 보다 높은 목적 달성을 위해 협동하여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같이 투자하고 같이 이익을 나누는 동업자가 아닙니다. 상대가 잘되면 시기하고 못되면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동업자가 아닙니다. 동업자는 어떻게 하든 희생을 덜 지고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지만 동역자는 어떻게 하든 희생을 많이 지고 조건 없이 헌신하는 자들입니다. 동역자는 고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고 동업자는 이익과 자기 영광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동역자는 고난을 나누려고 하지만 동업자는 이익을 나누려고 하는 것입니다. 동역자는 끝까지 책임을 가지고 고난의 길을 함께 가지만 동업자는 이익이 사라지면 가차 없이 떠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동역자입니까? 동업자입니까? 나와 함께 동역자로 이 교회를 섬깁시다.” 그러자 성도님들을 큰 소리로 “아멘”하였답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이어갔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바울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바울을 위하여 자신들의 목까지도 내놓을 정도였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그렇게 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라고 하자 성도들은 “아멘”이라고 큰 소리로 화답했답니다. 목사님은 용기를 얻어 "내가 여러분과 동역을 하다 신장이 못 쓰게 되었습니다. 신장 이식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워진다고 합니다. 날 여러분들이 동역자로 생각해 준다면 누가 내게 신장 하나 기증해 줄 분이 있습니까? 혹 내게 신장을 하나 기증해 주실 분이 계시면 손을 들어 보세요."라고 말했답니다. 순간 긴장, 침묵이 잠시 흐르고 여기저기서 한 사람, 두 사람 손을 들기 시작했답니다. 급기야 그 예배에 참여했던 2000명이 다 손을 들었답니다. 그야말로 감동의 물결이었답니다. 이 목사님이 너무 감격이 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답니다. "혹 이 중에 내가 어느 분 한 분을 택하면 나머지 분들이 상심할 수 있을 테니 한 주간 기도하고 한 분을 택하겠습니다." 드디어 한 주간이 흘러 주일이 되었답니다. 감사하게도 지난주에 나왔던 분들이 한 분도 빠지지 않고 다 나왔답니다. 목사님이 말했답니다. "여러분 내가 한 주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내가 직접 선택하는 것 보다는 제비뽑기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고는 오리털 하나를 꺼내 보이며 "내가 이제 이것을 불겠습니다. 이 오리털이 떨어지는 분의 신장을 이식받겠습니다." 하고는 오리털을 강대상에서 후하고 불었답니다. 이 오리털이 오리 오리하며 날아가서 앞자리에 앉았던 장로님 머리 위로 날아갔답니다. 오리털이 당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확인한 장로님은 아랫입술을 내밀고 윗입술은 최대한 당겨서 바람을 뿜으면서 "아부(푸)~지"라고 외쳤답니다. 그러자 내려앉으려던 오리털이 다시 날아 뒷줄에 앉은 권사님 위로 날아갔답니다. 그것을 확인한 권사님이 "오 주(추)여"하며 불었답니다. 다시 그 오리털은 날아올랐답니다. 지금도 그 교회에서는 “아푸지”와 “추여”가 계속되고 있다는 유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신앙 안에서 영적인 가족입니다. 그리고 이 험한 세상에서 그리스도가 메시아 다는 사실을 삶으로 증거하며 사는 신앙의 동역자들입니다. 우리는 동역자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사랑받는 형제로 서로 사랑하는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두기고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두기고를 에베소 교인에게 소개할 때 “사랑받은 형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은 형제이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형제입니다. 바울로부터 사랑받는 형제, 에베소 교인들로부터 사랑받는 형제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영적 형제가 된 것입니다. 사람은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관계가 달라집니다. 상대를 적으로 생각하면 무엇을 하든지 적대시하는 것입니다. 한 쪽에서만 보기 때문에 편협되게 보고, 타도의 대상으로 정해놓고 보기 때문에 좋게 보지 않습니다. 자기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무시해 버리는 확증편향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확증 편향의 종이 되면 자신의 관점과 상충하는 정보를 읽어도 자신이 옳다는 확신은 오히려 더 강화된다고 합니다. 결혼하여 부부가 될 때 사랑하는 관계로 변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면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모든 것이 싫어지고 미워지고 상대가 왜곡되게 보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인간이기 때문에 감정이 상할 수도 있고, 이해충돌이 생길 수도 있고, 가치관 충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도 끝까지 상대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형제로, 영원한 천국에 가서 함께 살 형제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이 없으면 아내도, 남편도, 자식도,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순식간에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동역자로 어떤 처지와 형편에 처하든지 사랑받은 자로 서로 사랑하면 동역을 하여야 합니다. 교회 생활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집요하게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 하는데 힘겨운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탁월한 인물이었지만 아내로 인해 힘겨운 생활을 했습니다. 여러 여성을 사랑했지만 결혼에 이르지 못했고, 47세에 바질 부인을 만났습니다. 어느 날 런던 다리를 건너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며 복사뼈를 삐게 되었습니다. 웨슬레의 친구들은 부상당한 웨슬리를 미망인인 메리 바질 부인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부인의 간호를 받도록 했는데 그 다음 주인 1751년 2월 18일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아내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질은 매사 원망이 심했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에게 온 편지를 다 뜯어보기까지 하면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남편을 괴롭혔습니다. 남편이 전도 여행을 떠난 동안에는 집에 있기를 싫어했으며 남편과 동행하면 불평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 여인의 분노는 가다가 폭행으로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가출해 버렸습니다. 싸우디는 그 여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그는 남편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만 섬기며 복종하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안될 때는 온갖 방법을 다 써서 그 남편을 번거롭게만 하였다. 그의 난폭한 투기심과 악독한 성품은 소크라테스의 아내나 욥의 아내와 비등하니 이 세 여인은 역사상 최고의 악처로 손꼽힐 것이다”라고까지 하였습니다. 남편이 하나님의 사랑받은 형제 동역자가 된 것이 아니라 원수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교인과의 관계도 그럴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사랑받은 형제라고 생각하다 이해 충동, 가치관 충돌, 감정 충돌이 생기면 타도의 대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악랄하게 변하여 서로 폭언하고, 저주하고 악담하다가 고소, 고발하고 원수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동역자를 늘 형제로 생각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골로새 교인들에게 두기고를 소개할 때 무엇이라고 소개합니까?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골4:7)” 두기고는 하나님의 사랑받은 형제이고, 바울의 사랑받은 형제이고, 교회의 사랑받은 형제입니다. 두기고는 아마 바울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를 하대하면 계급의식을 가지고 대하지 않고 바울은 그에 대하여 형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의 아들처럼 생각했던 디모데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고후 1:1)” 형제 디모데라고 말합니다. 디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고후 8:23)” 우리의 형제라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노예인 빌레몬에게도 형제라고 하였습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몬 1:16)”
바울은 그의 동역자에 대하여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신 형제 의식이 철저했습니다. 우리는 동역자로서 형제의식을 가지고 한 시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바로 사회에서 신분이 높든 신분이 낮든, 사회에서 돈이 많든 돈이 적든, 사회에서 직장이 좋든 나쁘든 교회 안에서는 한 형제입니다. 대통령이면 교회에 와서까지 대통령이 아니고, 부자면 교회에 와서까지 부자가 아니고, 가난하면 교회에 와서까지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모두가 한 형제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동역자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우리를 형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마 23:8)”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막 3:35)”
우리는 경쟁자가 아닙니다. 적도 아닙니다. 이해관계를 나누는 동업자도 아닙니다. 함께 연극을 보는 구경꾼도 아닙니다. 우리는 종교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모인 종교 소비자도 아닙니다. 남의 죄를 기소하기 위한 검사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형제입니다. 사랑받은 형제로써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롬 12:10)”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1-2)” 바울이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바울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을 정도로 동역자 바울을 사랑하였습니다(롬16:4)

2. 우리는 주안에서 진실한 일꾼으로 사역하는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동역자인 두기고를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두기고를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사정을 알고 무엇이든지 맡기면 믿을 만하게 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동역자로 무엇을 맡든지 믿을만하게 그 일을 해 낼만 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손님으로 교회에 나와 평생 손님으로 살다가 갑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운 구속받은 거룩한 공동체이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영적 가족 공동체입니다. 교인은 손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신 영적 가족입니다. 가족은 함께 고통과 슬픔, 기쁨을 나누며 한 가문을 세워 가는 사람들입니다. 양육하여 성인이 되면 분가시켜 자녀를 독립적 가정을 이루도록 내 보내는 곳입니다. 성경은 교인을 사랑을 입은 자녀(엡5:1), 사랑을 입은 형제(살전1:4), 하나님의 자녀(롬8:16), 빛의 자녀(엡5:8) 등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함께 일할 동역자라고 말씀합니다. 교인은 손님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집에서 주인처럼 살아야 할 거룩하게 부름 받은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우리를 진실한 청지기(눅12:42), 충성된 종(마25:23), 복음의 일꾼, 교회의 일꾼(골1:24-25)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역을 하려면 무엇보다 좋은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다윗이 다윗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요나단과 같은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민족 지도자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론과 같은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협력할 줄 아는 갈렙이라는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바울될 수 있었던 것은 바나바 같은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브리스길라, 유니아, 유오디아와 순두게, 뵈뵈와 같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드보라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락같은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게이츠 같은 최고 경영자 뒤에는 Steve Ballmer같은 지략이 뛰어난 동역자가 있습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택동 뒤에는 주은래 같은 충직한 막후 실력자인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두수선공이었던 무디가 놀라운 부흥 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토레이와 생키같은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토레이는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나 예일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에 가서 신학을 하고 교수가 되어 무디와 동역하였습니다. 무디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와 수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생키가 있었기 때문에 무디가 대중 전도를 통해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생키는 일생에 1,200여개의 곡을 작곡했으며 무디 목사의 진실한 동역자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찰스 피니에게는 동역자 파더 노아가 있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그에게는 동역자 R. C. 워레이가 있었습니다. 루터에게는 신실한 동역자 루터 부인이 있었습니다. 신부와 수녀들이 결혼하기 위해여 수도원을 떠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수녀가 그에게 상담을 요구해왔고 루터는 그녀가 다른 11명의 수녀를 데리고 도피할 수 잇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 후 루터는 그 수녀들에게 직업과 결혼을 알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42세에 그 수녀들 중 하나인 캐티 폰 보라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녀는 밭을 일구고 소를 파는 등 성실한 아내였습니다. 능률있는 주부였고 농토와 정원과 가축을 지혜롭게 다루는 관리자였습니다. 그녀는 집안일은 물론이거니와 가정의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하였습니다. 루터는 그런 일을 돌 볼 시간조차 없었으며 너무 자주 아팠기 때문에 그 뒷바라지가 더욱 힘들었다고 합니다. 캐티가 루터의 동역자가 그에게 용기를 준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하던 루터가 낙심하고 있을 때 캐티는 안방에 들어가 상복을 입고 나왔다고 합니다. 아내의 의외의 옷차림을 본 루터는 놀라는 표정으로 “이것이 웬이리요? 상복을 입다니 누가 세상을 떠났고”라고 물었더니 캐티는 심각한 표정으로 “예, 하나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답니다. 이 말을 들은 루터는 더욱 놀란 기색을 하며 “하나님이 세상을 떠나다니 그런 법이 어디 있소?”라고 반문 하였답니다. 그러자 캐티는 남편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떠나시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당신이 그렇게까지 낙심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고 합니다. 루터는 이 일을 통하여 큰 감화를 받고 용기를 얻어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고 합니다.
요즈음 “가나안 교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 '편력'이 심한 교인입니다. 크고 이름 있는 교회는 다 찾아다닙니다. "예배 분위기가 잘 맞지 않았고, 성도들 간 교제 방식도 내 스타일이 아닌 듯하다"고 조금 다니다가 다른 교회로 옮깁니다. 바쁜 일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회를 안 나가더라도 딱히 아쉬움을 못 느낍니다. 교회가 마음의 고향이라는 생각은 갖고 있지만 막상 가보면 고리타분하고, 소속감도 안 느껴지고, 제자훈련 등 여러 프로그램도 부담되고 해서 자체 방학을 하는 것입니다. 2004년 한국갤럽의 조사를 분석에 의하며 "개신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한 숫자가 198만 명, 개신교인에서 무종교인이 된 숫자가 56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기독교를 믿다가 교회를 떠난 인구가 무려 758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2005년 '한국 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한미준)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기독교인 중 11.6%가 스스로 신자라고 여기면서도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성도들의 교회 이전 경험률은 57.9%에 달한다고 합니다. 자신을 교회의 일꾼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꾼은 일꾼이되 진실한 일꾼이어야 합니다. 두기고는 주안에서 진실한 일꾼이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는데도 바울과 함께 고난을 같이 하는 진실한 일꾼이었습니다. 어렵다고,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고,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 것이라고 도망간 일꾼이 아닙니다. 로마에서 에베소까지 가는 길은 험하고 먼 길입니다. 부담스럽고, 힘겹다고 핑계 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바울의 편지를 맡을 만큼 진실한 일꾼이었습니다. 고난의 길이지만 고린도에서 예루살렘 길을 바울과 동행한 진실한 일꾼이었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골로새 교회에도 전한 진실한 일꾼이었습니다(골4:7-9) 바울이 디도에게로 보낼 만큼 진실한 일꾼이었습니다(딛3:12) 무엇을 맡겨도 주님 안에서 그 일을 믿고 맡길만한 진실한 일꾼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한 교회를 섬길 때 이런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일꾼에게는 진실이 필요합니다. 진실이라 참된 곧은, 성실, 거짓 없음, 참됨, 순수라는 뜻으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엡6:6)” 예배에 있어서 진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요4:23-24). 신자의 생활에(고후1:12),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시15:2, 엡4:25, 고후2:17) 진실해야 합니다. 오늘날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교회와 교인이 진실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 시사주간지 <시사IN>이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국민들이 가장 신뢰하는 종교는 천주교(61.8%)로, 불교(55.1%), 개신교(28.1%)로 나타났습니다. 최근 5년 간 각종 설문조사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가장 큰 원인은 지도자 문제입니다. 목회자의 재정비리, 성문제, 목회 세습 등으로 목회자가 교회의 건강성을 약화시켜 버렸습니다. 우리 모두 동역자로 진실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정치인도 진실성을 잃으면 매력을 잃게 됩니다. 요즈음 같은 선거철이면 자신이 대통령으로 적합자라고 쇼를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제례시장과는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이 제례시장에 가서 신문용 모델 사진을 찍고, 텔레비전용 동영상을 찍습니다.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기업도 진정성이 없으면 망합니다. 한때 포춘지가 선정한 미국 7대 기업으로 꼽히기도 했던 엔론은 진정성을 상실하여 파산하게 되었습니다. 36조원을 굴리며 세계 두 번째 갑부로 이름난 버핏이 후계자를 찾을 때 네 가지 조건을 밝혔습니다. 첫째 독립적인 사고방식을 갖추고, 둘째 위기를 인식하고 피하는 능력을 지녔으며, 셋째 감정적으로 안정되어있고, 넷째 인간과 기관의 행동에 대해 예민한 통찰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진실하지 못하다면 그의 후계자로는 부적합할 것입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 경영하는 회사는 멀리 가지 못합니다. 월드컴, 엔론, 타이코, 아서 앤더슨이 윤리적 문제로 위기를 당하였습니다. "위대한 기업의 조건"을 쓴 라인하르트 K. 슈프렝어는 "기업의 조직과 조직구성원에 있어 신뢰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 조건이며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요소이다. 따라서 21세기 기업의 생존과 번영은 신뢰에 달려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브랜드 상품을 좋아합니까? 그 상품의 품질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높은 '신뢰 지수'를 지닌 기업에 '자질이 뛰어난' 노동력이 모인다는 것입니다. 「좋은(Good)」 회사와 「뛰어난(Great)」 회사의 차이점 바로 신뢰라고 합니다. 신뢰가 현대 기업경영의 핵심이라고 합니다. 우리 열린 교회 식구들은 진실한 일꾼이 다 되어야 합니다. 저부터 진실한 목사가 되어야 하고,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이 진실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날로 비만해지는 대형 교회와 갈수록 빈곤해지는 빼빼한 개척 교회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몸 추스르기도 벅찬 비대한 교회도 아니고 그렇다고 힘없고 연약해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교회가 아니라 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진실한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암 조직처럼 스스로 수많은 혈관을 만들어 가며 주변 건강한 세포들의 양분을 착취해 자기 배만 불리는 교회가 아닙니다. 성도를 성숙하게 만들고,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고, 교회를 건강하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진실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진실한 일꾼을 활동하고 진실한 일꾼을 배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3. 우리는 서로 위로하는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의 동역자를 왜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내었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기 위하여(21)”입니다. 그 모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22절에 그것은 우리의 사정입니다. 둘째는 “에베소 교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22)”서였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들에게 근심걱정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두기고를 보냄으로 그들을 위로하기 원했습니다. 그의 어려움을 하소연 하고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그를 보낸 것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서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때 오히려 바울이 위로를 받아야만 할 사람입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지도자가 영광을 받지 못하고 인생말년에 감옥에서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을 것 제대로 입지 못하고 처자도 없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예수 믿더니 결국 저런 비참한 꼴이 되었구나 아마 실망할 것이고 자신도 실망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감옥에 있으면서 그들을 위로하기 원하는 바울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그는 성도들이 로마 황제에게 탄원하여 자신을 그 지긋지긋한 감옥에서 해방되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먹을 것 입을 것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어려움 가운데 성도들을 위로합니다. 죽음이 문턱에 다가온 사람이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기보다 더 육신적으로는 좋은 조건에서 사는 사람들을 그 처절한 환경가운데서도 위로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세상은 이 세상으로 끝나지 않고 지금의 고통은 잠깐이나 영원한 희락의 나라 천국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어려운 시대에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듯(사51:12,애3: 단10)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사 51:12)”
우리도 서로 위로하여야 합니다.(고후7:5-7)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고후 7:5)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고후 7:6)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후7:7)”
고난당한 자를 위로해야 합니다(사40:1,2; 고후7:5-7),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
근심하는 자를 위로해야 합니다(고후2: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고후 2:7)”
마음이 약한자를 위로해야 합니다(살전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살전 5:14)”
슬퍼하는 자를 위로해야 합니다(대상7:22)
“그의 아버지 에브라임이 여러 날 슬퍼하므로 그의 형제가 가서 위로하였더라 (대상 7:22)”
어려운 이 시대에 서로 위로하며 동역자의식으로 형제애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누군가 외로움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 어둠 속에서, 울고 있을 때 가슴의 문을 열고 보석처럼 전해줄 수 있는 위로의 말이 있어야 합니다.
호감 보답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면 자신도 상대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면 자신도 그에게 친절로 보답하고, 누가 자신을 기쁘게 해 주면 자신도 그에게 기쁨으로 보답하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언짢은 말이나 불쾌한 말을 하면 자신도 상대에게 똑같은 앙갚음을 하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위로받지 못할 사람도 없고 위로받지 않고 살만큼 강한 사람도 없습니다. 대단한 권력과 부를 가지고 산 다윗왕(시 69:20)도 솔로몬 왕(전 4:1)도 위로자가 없다고 한탄한 것을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지만 진정한 위로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동방의 부자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들 딸 다 죽고, 재산 다 잃어버리니까 아내까지도 욥을 버려 버립니다. 친구들이 고난당한 욥에게 왔지만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욥은 고백합니다. "이러한즉 너희의 위로가 헛되지 아니하냐 너희의 대답은 거짓뿐이니라 (욥 21:34)" 모두가 위로의 말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한 때 불륜과 이혼 소송으로 언론에 오르내리던 탤런트 옥소리씨의 15년 전과 나라를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많이 힘들고, 웃음을 잃고 죽음까지 생각하고 혼자 컴컴한 방에서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교회라도 좋으니 가서 마음껏 울고 싶었다고 합니다. 얼마 뒤 지인의 소개로 조용한 교회에 가서 할 줄도 모르는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울면서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기도했답니다. 사람들이 알아볼까봐 모자와 목도리로 얼굴을 가렸는데 연세가 꽤 드신 목사님이 자신을 알아보고 '소리씨, 여기 올 때 일부러 가리지 말고 편안하게 오세요. 여기서 그렇게 마음 졸이면 바깥세상에서 어떻게 견디려고 그러세요. 마음 강하게 먹고, 잘 헤쳐 나가야죠. 힘내세요. 아직 살날이 많은데'라고 말씀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의 말씀이 위로가 되고 참 많이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위로받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위로의 공동체가 되고 위로하는 동역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멀고 험한 이 세상길 소망 없는 나그네 길 방황하고 헤매이며 정처 없이 살아왔네 의지 할 곳 없는 이 몸 위로 받고 살고파서 세상 유혹 따라가다 모든 것을 다 잃었네
무거운 짐 등에 지고 쉴 곳 없어 애처로운 몸 쓰러지고 넘어져도 위로할 자 내겐 없네 세상에서 버림받고 귀한 세월 방황하다 아버지를 만났을 때 죄인임을 깨달았네
눈물로써 회개하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어 죄악으로 더럽힌 몸 십자가에 못 박았네 구원함을 얻은 기쁨 세상에서 제일이라 영광의 길 허락하신 내 주예수 찬양하네”
우리는 모두 위로하며 위로 받으며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슬픔은 위로에 의해 갚아지고 위로의 힘으로 고난의 강은 건너게 합니다. 늘 인간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은"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고 말씀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위로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신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고독한 사람, 죽어 가는 사람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는 지친 나그네에게 한 컵의 샘물과도 같습니다. 서로 위로하는 동역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아 사랑하는 동역자, 진실한 일꾼으로 사역을 같이하는 동역자, 서로 위로하는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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