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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땅의 나그네

출애굽기 최형묵 목사............... 조회 수 1697 추천 수 0 2012.12.30 23:4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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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2:15-25 
설교자 : 최형묵 목사 
참고 : 2001년 1월 21 천안살림교회 http://www.salrim.net/ 

출2:15-25

낯선 땅의 나그네

 
지난 주에 이어 오늘도 계속 출애굽기 본문을 함께 보았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을 전하고 있는 것이 출애굽기의 내용입니다.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정해진 예배당 없이 임시 처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우리 형편이 또 다시 이 출애굽기의 본문에 주목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모세의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성서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모세일 것입니다. 역사나 성서의 분량으로 보면 모세가 더 우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약의 빛에서 성서를 조명하다 보니까 모세의 비중이 약화되었을 뿐이지 실제 역사적으로나 양적인 측면에서는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여간 모세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되짚어 보아야 그 참 모습을 알 수 있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도 모세의 생애의 한 단면 / 한 국면을 전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다 아는 대로, 히브리인의 아들로 태어나 이집트 왕궁에서 자란 모세는, 한편으로는 '이집트의 왕자'로 성장하였으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명한 어머니와 누이 덕분에 친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면서 더불어 '히브리인으로서 의식'을 갖고 성장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히브리인이 매를 맞는 것을 보고 의분해서 이집트인 감독을 쳐죽이고 그 일 때문에 피신을 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아마도 이 사건은 모세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한 첫 번째 사건일 것입니다. 모세는 이집트인이면서 동시에 히브리인으로서 이중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아니 정반대로 진짜 이집트인도 아니면서 히브리인도 아닌, 자기 정체성을 갖지 못한 모호한 주변인, 경계인으로서 살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히브리인의 편에 서는 선택을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비로소 자각한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아무런 문제의식을 지니지 않고 살아갈 때에는 잘 모르지만, '내가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함께 그 정체성을 자각하게 될 경우 대개 기쁨에 앞서 진통과 고통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경우는 이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당장 그는 이집트인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대목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모세는 미디안으로 피신하였고, 그 곳의 한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곳을 피신처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온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이집트 왕 파 라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을 택하여 달려 온 곳이 바로 그 미디안 광야였을 뿐입니다. 이 곳에 이르러 그는 아마도 초조하고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우물가에 잠시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물가에서 그가 이곳에 정착하여 안주하게 되는 계기가 발생합니다. 낯선 나그네가 한 지역의 주민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 곳으로서 우물가의 이야기는 성서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물가에는 늘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는 그 지역 생활의 특징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물가에 사람들이 모일 때에는 단순히 만남이 있고 좋은 일만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이 우물가에 서로 다른 집단의 사람들이 마주치거나, 혹은 한편은 힘이 세고 한편은 약한 사람이 만나게 되면 충돌 또한 자주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물이 흔치 않았을 그곳에서 서로가 자기들이 더 많은 물을 확보하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가 그런 경우입니다. 미디안의 사제(르우엘 / 혹은 이드로)의 딸들이 양에게 물을 먹이고 있는데, 목자들이 와서 내쫓으려 했습니다. 바로 이 때 우물가에 앉아 있던, (정의의 사도) 모세가 나타나 미디안 사제의 딸들을 도와 양들에게 물을 먹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또 다시 자기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지 매우 일관된 행동양식을 취합니다. 강한 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약한 여자들을 도운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안 사제가 너무나도 고마워 모세를 대접하고 같이 살도록 했으며 급기야는 딸 십보라와 결혼까지 시켜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모세는 미디안에 머물게 되었고, 아들까지 낳게 되었는데, 그 아들의 이름을 낯선 땅에서 객이 되었음을 뜻하는 '게르솜'(게르=나그네)이라고 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도행전 7장 23절이하에 따르면,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이른 때가 나이 40이었다고 하며 그곳에서 아들을 두 명 낳았으며 타지 않는 가시나무덤불을 목격함으로써 소명체험을 하기까지 40년을 거기서 그렇게 살았다고 전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 이야기는 모세의 그 엄청난 업적에 관한 이야기에 비추어 보면 쉽게 지나버릴 수도 있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했고, 또 이후에 출애굽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은 곳이 바로 이 미디안에 있는 호렙산=시내산이라 전해지고 있어서, 이 미디안이라는 곳이 모세의 생애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곳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만, 훗날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이곳에서 벌어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모세의 미디안에서의 40년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대목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 이야기도 그 내용으로 볼 때 무게 있게 다뤄지고 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훗날 모세가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일들을 바로 이 미디안에서 경험하게 되었다는 점 때문에, 모세가 어떻게 해서 처음에 이 미디안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해명해 주는 이야기 정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를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로 볼 수 없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훗날 바로 그 미디안에서 모세가 경험하게 될 생의 중대한 사건, 모세 개인의 체험이라고만 할 수 없는 중요한 계기를 경험하고, 나아가 진정한 민족의 지도자요 신앙의 지도자로서 모세가 있게 만든, 그 삶의 전(前)과정을 전하는 대목입니다. 훗날의 민족의 지도자로서 모세의 삶이 있게 한 그 계기가 바로 미디안에서의 삶과 의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간단한 에피소드처럼 전해지고 있는 미디안에서의 모세의 삶의 단면을 가볍게 지나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특별히 저는 모세가 그곳에서 낳은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뭐라고 붙였는지 전하고 있는 오늘 본문 뒷부분 구절에 주목합니다. 십보라가 아들을 낳자 모세는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하면서 그 아들의 이름을 그와 같은 뜻을 지닌 '게르솜'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단순한 푸념이요 신세 한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회적인 순간적인 푸념이나 신세 한탄일 수 없는 까닭은, 바로 그런 처지를 자식의 이름으로 남겨 두고두고 기억해 두려고 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나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 뿐만 아니라 어느 민족의 경우든 이름을 짓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특별히 중요성을 지니는 그와 같은 이름짓는 일을 통해 현재 자신의 처지를 각인시켜 두는 행위는 예사로운 행위가 아니라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닌 행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목적의식일까요?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자기가 있는 자리가 어떠한 곳인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행위입니다. 모세는 끊임없이 이러한 자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자기 자신이 처해 있는 자리,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두 가지 의미로 한정해서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간단히 말해 지금 자기가 처한 자리를 돌아보는 것은, 바로 지금 그 자리 / 이 자리가 '내 자리인가, 아닌가' 이 둘 가운데 하나의 답변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자리가 내 자리라면 지금 그 자리에서 그 자리에 걸맞는 일을 더욱 충실히 해야 할 것이요, 그 자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자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낯선 땅의 나그네로 전락해가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느끼고 / 자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후자의 경우, 곧 이 자리가 나의 자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경우에 해당할 것입니다. 모세의 미디안 40년 생활은 단순한 안주나 정착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서도 모세는 이집트 왕궁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변인으로서 경계인으로서 자기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자기가 택한 히브리 백성과 더불어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몸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낯선 땅에 나그네'로서 머물러 있는 자기 자신을 확인한 것입니다.

 

많은 양떼를 거느리고, 처와 그리고 이제 자식까지 거느리게 된 순간, 모세에게 '낯선 땅의 나그네'로서의 의식이 없었다면 그는 아마도 영영 그 지역에서 성실하고 이름난 목자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 신앙의 지도자로의 몫은 모세의 몫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지금 주어진 일상에 매몰되어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이 그의 생활을 지배하였고, 그랬기에 어느 날, 정말 그가 가서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일깨워 주는 사건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통해 그가 깨우친 그의 자리는 지금 고통받고 있는 히브리 백성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깨우침으로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는 자의 자리에 나섰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집단적인 차원(민족적, 교회적)에서든 끊임없이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때로, 아니 대부분의 경우 진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오늘은 마침 교단에서 제정한 민속주일입니다. 설 명절과 가장 가까운 주일을 민속주일로 지킴으로써 우리의 전통의 의미를 신앙 안에서 되새겨 보자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이제껏 한국 교회가 지켜 왔던 신앙의 정체성을 재검토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그리고 지금도 대다수의 한국 교회는 민족의 전통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겨 왔고 또 여기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전해 준 서구, 특히 미국적 신앙의 표준에 따라 우리 것은 비신앙적인 것이요 걸림돌이 되는 것으로 인식해 왔습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서구적인 가치, 미국적인 가치를 선망해 왔으며, 우리 것은 촌스러운 것으로 세련되지 못한 것으로 치부해 왔습니다.

 

선교 초기에 많은 한국인들은 선교사들을 '양대인'(洋大人)으로 여기며 그들에 의존하였습니다. 그 양대인을 섬기는 의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의식은 그들에게 의존하는 것 뿐 아니라 우리도 그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포함합니다. 한 마디로 정체성의 분열입니다. 다르다는 사실, 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허위의식을 깰 때 우리는 우리로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구 기독교 문명의 주변부에 있다는 현실, 경계에 있다는 현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세가 가졌던 '낯선 땅의 나그네'로서의 삶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자각이 우리는 우리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첫 걸음이 됩니다. 모세가 '낯선 땅의 나그네'로서의 삶을 자각한 것이, 히브리인의 해방을 위한 지도자로 나서게 하고 이로써 분열된 정체성을 극복한 이치와 같습니다.

 

민족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적 차원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바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은 개인적인 삶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기 전, 동양철학을 하는 한 친구의 글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깨우쳤습니다. 공자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요. "열 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志于學), 서른에 일어섰고(立), 마흔에는 의심할 일이 없어졌고(不惑), 쉰에는 하늘의 명령을 알았고(知天命), 예순에는 귀에 거슬리는 일이 없어졌고(耳順), 일흔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좇더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從心所欲不踰矩)"(『論語』「爲政」 2:4). 지금 이 자리에는 20대에서 50대까지 여러 세대가 있기 때문에 각기 받아들이는 초점도 다르겠습니다만, 그 친구의 입장에서나 제가 눈여겨보는 대목은 '불혹(不惑)'입니다.

 

흔히 통설로 '유혹을 받지 않게 되었다' 정도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 본 뜻은 '의혹을 갖지 않게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의혹을 갖지 않게 되었다', '질문하고 따지지 않게 되었다' 하는 뜻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왜 이럴까?, 정치가들은 왜 모두 저 모양일까?, 왜 사람들의 마음이 그리도 완악할까?, 무엇 때문일까?, 왜 그럴까?, 하는 것을 더 이상 묻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뜻은 물음을 던지지 않은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 까닭을 다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 사물의 이치를 다 알아 이제 어떤 판단을 해도 흔들림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치를 아는 사람의 할 일은 무엇이냐?, 그것은, 누구의 잘못을 타자에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 책임있게 답변해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불혹의 의미입니다. 공자 나이 40에 그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삶에 대한 분명한 자각입니다. 공자가 말한 것이 절대적인 표준이 될 수 없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공자의 말씀은, 삶의 마디마디마다 자신의 몫, 자신의 자리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나이에 걸맞는 자신의 위치와 몫, 어떤 관계에서의 마땅한 자신의 위치와 몫, 곧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웁니다.         


모세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정말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고자 했을 때, 민족의 지도자요 신앙의 지도자로 몫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 자기의 자리에서 자신의 몫을 깨달음으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자기의 몫을 온전히 감당하는 축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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