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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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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임덕순 목사 |
참고 : | 2005-07-24 한가람교회 http://www.hankaram.or.kr/ |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
모세는 그동안 자기가 애굽에서 배운 지식과 무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 시켜 보려고 시도했다가 애굽 감독관만 죽이고 실패를 합니다. 살인자가되어 왕실의 지명수배를 받자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멀리 도망쳤습니다.
모세가 사력을 다해 도망쳐 간곳은 미디안 광야였습니다. 기진해 쓰러져 있다가 기운을 차려보니 우물가인데, 여자 목동들이 양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고 있었고, 그것을 남자 목동들이 방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일어나서 방해하는 남자 목동들을 몰아내고 여자들이 자기 양들에게 물을 먹이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 목동들이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 이드로에게 보고했고, 아버지 이드로는 모세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대접 하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양치기로 있다가 주인의 딸 십보라를 아내로 맞아 장가를 갔고 할 수 없이 장기체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습니다. “내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 는 뜻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피난살이를 하고 있지만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나는 가야할 곳이 있고,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거기서 목동으로 주저앉기에는 그동안 배운 지식이 너무 많았고, 버리기에는 그가 가진 꿈이 너무나 컸고, 그가 겪은 실패는 너무나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언젠가 다시 다가올지 모를 그날을 기다리면서 세월의 칼날을 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낸 날들이 하루 이틀 쌓이다 보니 40년이 지나갔습니다. 그 40년은 남이 보기에는 허무한 세월이요 낭비된 시간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도리어 모세를 모세 되게 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간 동안 모세를 당신의 프로그램에 맞추어 훈련시켰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지난 6월 12일 주일에 “훈련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40년이 지나가는 어느 날, 하나님은 연단 받은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날도 모세는 호렙산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고 있었는데, 모세가 양을 몰아 가다가 건너편 언덕을 보니 산의 가시나무에 불이 붙어서 활활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어떤 나무든지 불이 붙어서 타기 시작하면 몇 분 내에 다 타버리고 불이 다른 곳으로 옮겨 붙든지 꺼지는 것인데, 그 나무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불이 붙어 타고 있었는데도 나무가 사위지 않고 계속 활활 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모세는 그 이상한 광경을 자세히 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돌이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하고 모세는 가시나무가 불타는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모세가 불타는 가시나무에 가까이 갔을 때, 그 불속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 신을 벗으라!”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려고 호렙 산기슭으로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황량한 광야, 불타는 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모세는 지금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동반하고 모세를 만나러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태풍은 비를 동반하듯이,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는 당연히 기적이 동반됩니다. 화가가 자기가 그린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놀라운 기적이 아닙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세상 속으로, 당신이 지으신 인간을 만나기 위해서 들어오시는 것은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따라서 지금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는 이 사실은 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는 않았다는 사실보다 더 큰 기적이었습니다. 모세의 관심은 즉시 불붙는 기적의 나무에서 자기를 찾아오신 하나님께로 옮아갔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 하다가 불치병이 낫는 것이 큰 기적입니까? 죄인인 내가 창조주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음성을 듣고 그분이 준비하신 구원을 받는 것이 더 큰 기적입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당부를 내 귀로 듣는 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신비한 기적을 따라다니는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서 말씀을 받아들여 순종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왜 모세를 찾아오셨습니까? 기적을 보여주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잠시 모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하나님께로 다가오게 만들려는 과정에 불과했습니다. 기적은 본질이 아닙니다. 인간으로 하나님을 찾아오게 만드는 입문과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보았다면 그 다음에는 이적에서 관심을 떼고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 성숙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신 목적은 기적을 보여주어서 그에게 신비한 경험을 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를 불러서 내가 너와 함께 할 테니, 네가 할일을 해라. 하는 명령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애굽에서 고통받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한사람의 신비한 체험보다 애굽에서 고통받는 수백만명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 훨씬 더 큰일이었고, 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천하 만민을 구원하려는 일은 더 큰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일을 위해서 부름 받고 쓰임 받는 사람인 모세가 복 받을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부르시는데, 나를 사용하여 큰 일을 하려고 부르십니다. 기적을 보여주려고 교회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구원하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께 주목하지 않으니까, 잠깐씩 기적을 보여주시기도 하십니다. 병이 낫게도 하시고 방언과 예언도 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기적을 보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하나님의 일군이 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과 만민이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러 오셨을 때, 모세는 그 불타는 가시나무를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그때 모세는 어떤 자세로 나아갔는가, 오늘은 그 부문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어 보십시다. 그 장면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는 참된 자세는 무엇인가를 배워 보십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세는 무엇일까요?
1. 철저한 겸손과 참된 경건입니다.
모세는 처음에 호기심으로 불이 붙은 가시나무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내가 돌이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이것은 모세의 호기심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호기심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경외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호기심으로 다가오는 모세를 향하여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라. 너는 지금 하나님앞에 서 있어, 당장에 신을 벗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입니다. 그분 앞에 나아갈 때에는 정중하고 겸손하게, 죽은 것같이 엎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뵙는 바른 자세입니다.
권위주의 시절에, 대통령을 만날 때에는 여간 까다롭지 않은 절차가 있었고 대통령을 만나서 어떻게 행동할 것을 미리 연습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오늘도 한 나라의 대통령을 만날 때에는 어느 정도의 예절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옛날에는 임금이 지나갈 때에도 길에 섰던 사람들이 다 땅에 엎드려야 했습니다. 하물며 천지만물의 주인이시며 만왕의 왕이시고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러 가면서 함부로 나아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탐구의 대상으로 여기고 경외심이나 경건함 없이 호기심이나 갖고 나아간다면 대단히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자기를 철저히 감추십니다.
마11:25에 주님이 당신을 영접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 앞에서 말씀하시 기를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나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을 감추신다는 사실과, 진리가 사람의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역사와 자연법칙과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고, 그것을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지식이 아주 많은 사람이라 하여,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인 중에는 신령한 세계에 대하여 철저하게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 아주 많습니다.
욥37:24엔 “그는 마음에 지혜롭다 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느니라." 고전1:21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 하셨도다." 25절에선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인간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분별 하거나 구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독일의 어느 신학교에서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유명한 교수가 성경책 겉장을 모아들고는 "우리의 명석한 두뇌로 이 성경을 분석하고 하나님을 탐구해봅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은 두 장의 가죽 겉표지 밖에는 쓸모가 별로 없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학교에 입학했던 한 학생은 기겁을 하고 한국으로 들어와서 총신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며 교만한 탐구심을 가지고 접근 하는 자에게 자신을 보이지 아니하시지만, 마지막 심판 날에는 엄위하신 심판주로 그 앞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서낭당 신에게 정한수를 떠놓고 빌면서도 목욕재개를 했고, 무당을 불러 궂을 하면서도 어떤 경외심 같은 것을 가지고 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하여 공부를 한다면서 일말의 경외심이나 경건함도 신학을 연구한다 하니,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의 입은 진리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외에도 구원이 있다. 공산주의를 하는 것이 천국의 첫 단계이다. 성경은 해방신학을 말하고 있다.”는 등 사단의 주장이나 퍼뜨리는 데 이용되었을 뿐입니다.
이런 일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허물어보려는 사단의 하수인이 된 모습입니다. 이들이 아무리 히브리어 헬라어를 잘 알고, 공부한 세월이 쌓여서 박사학위 열개를 취득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하여는 한 줄도 알지 못하는 무식쟁이 일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그들에게는 자신을 철저히 숨기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계시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요청과 탐구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시고 알려주실 때에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는, 철저한 겸손과 경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는 경건한 마음, 진지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두려운 마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입니다.
요즘 우리 곁에는 하나님과 너무나 친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교회에도 하나님과 친구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올 때에도 이웃집 가는 마음으로 갑니다. 모자 눌러 쓰고, 슬리퍼 끌고 옵니다.
그래서 되겠습니까? 하나님앞에 올 때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와야 합니다. 경건과 옷이 무슨 상관이 있냐구요? 군사훈련을 시킬 때 사복 입혀서 훈련시키는 나라는 전 세계에 한 나라도 없습니다. 마음의 자세는 겉 옷차림으로 표시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경건한 마음은 경건한 자세에서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진지한 자세를 갖추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2. 자기 주권을 버리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노예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신발을 신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신발은 주권을 가진 주인만 신을 수 있었습니다. 신발은 자유를 의미했습니다. 신을 신으면 어디든지 자유롭게 다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들은 자기 마음대로 어디든지 갈수가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인이가라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거기 멈추라 하면 멈추는 사람이 종입니다. 종은 신발도 없고 자유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의 그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 발에 신을 벗으라.” 고 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였겠습니까? 너는 나의 종이다. 내 신을 신고 내가 어디든지 마음대로 오고 갈수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제부터는 네 주인 의식을 버리고 내 뜻을 따라 살아라. 하시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주인행세를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 근근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미미하고 미말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분이 가라 하셨기에 생명 갖고 이 땅에 왔고, 그분이 서라 하시면 어디에 정착하여 살다가, 그분이 오라 하시면 미련 없이 세상에서 갖고 있던 것들을 다 놓고 가야하는 존재입니다. 일 분 일초도 내 맘대로 더 버틸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근본을 잊어버리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주님, 나는 주인이 아니라 종입니다. 내발에 신을 신고 내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종입니다. 오늘도 내게 말씀해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그렇게 살겠습니다.” 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자세가 하나님 앞에 서는 기본자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하와 만물을 다스리게 하리라는 당신의 뜻을 행하게 하려고 사람을 지으셨고, 그들에게 생명과 양식과 환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어야 하고 명령에 순종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자세를 갖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신발은 온갖 더러운 것이 다 묻어있는 물건입니다. 여기 저기 다니면서 온갖 것을 다 밟는 것이 신발이기 때문입니다. 그 더러운 것이 내 발에 그대로 신겨져 있는 채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 갈 수는 없습니다. 온갖 것을 다 밟고 만진 부정한 몸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 내게 묻어있는 더러운 죄를 떨어버리는 회개를 하고서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구약시대에도 성전에 나아가려면 번제단에서 자기를 대신하여 짐승을 희생 제물로 드린 뒤에, 물두멍에서 손을 씻고 그리고야 성전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상대하지 아니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내어 놓고 회개하고 버려야지, 죄 없는 체하고 감추는 사람은 상대해 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상한심령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상한심령이란 죄를 감추어 놓고 태연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 숨은 지은 죄 때문에 가슴아파하는 마음입니다. 숨은 죄를 내어 놓고는 용서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여, 두렵고 괴로워하는 마음이 상한마음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죄 때문에 자존심이 무너지고, 체면이 무너지고, 신용이 깨어지고, 그래서 지금까지의 자기의 생활 기반에 대한 사형선고를 체험하는 절망적인 마음이 상한심령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나아가는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가장 깊숙이 나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죄에 대한 회개 없이는 하나님 앞에 한 발 자국도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십년을 걸려도 항상 그 자리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가까이 나아가셨습니까? 신앙생활 한 연조로 그 거리가 좁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죄를 솔직하게 고백했는가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상한심령으로 주님께 가까이 가시기 바랍니다.
신발은 오래 신으면 낡고 닳은 것입니다. 얼마를 신으면 바닥이 매끈매끈해 집니다. 우리의 마음도 옛 사상, 옛 경험 등으로 낡아져 있습니다. 닳고 닳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안 그런다고 결심하고도 사흘을 못 넘기고 또 그길로 갑니다. 삶의 자세가 매끈매끈합니다. 도무지 변화가 없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참된 회개는 어떤 사건을 고백하고 후회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옛 삶, 옛 습관을 아예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 똑같은 변화 없는 삶, 하나님은 이렇게 하라고 요구 하시지만, 그렇게 곧이곧대로 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적당하게 하면 되겠지 하는, 닳고 닳은 마음, 그런 마음으로는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습관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자기의 선입견과 편견들, 육신의 경험에 기초한 부정적인 생각, 낡고 때 묻은 생각들을 버리고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의 무한하신 계획과 능력을 이해하고 체험할 수가 있으며, 그분의 참되고 능력 있는 일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하던 생각을 가지고 파도치는 바다에서 수영하려고 들어갔다가는 큰 낭패를 당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대하면서도, 무능하고 속이기에 능한 인간들을 대하던 그 자세를 갖고 대한다면, 하나님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앞에 서고 하나님과 상대하여 사는 신자의 삶을 바로 살고자 한다면, 지금까지의 우리의 태도를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세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창 35:2에 보면, 야곱이『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야곱이라는 사람이 오랫동안 벗어버리지 못했던 형식적 신앙을 벗어던지고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장면인데, 거기서 그는 자기 가솔들에게 옷을 바꾸어 입자고 명합니다. 이제는 삶의 태도를 바꾸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을 그제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로 야곱은 완전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겸손하고 성결 합시다. 하나님만 주인이신 것을 인정하고 엎드립시다.
매끈매끈한 내 생활습관을 벗어버리고 새결심, 새 행동을 시작합시다. 그리하면 주님은 우리 앞에 나타나시고, 자세하게 우리를 인도 하시고, 우리를 놀랍고 위대한 일에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께 가장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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