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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계신 분이 보내셨다

출애굽기 최형묵 목사............... 조회 수 1702 추천 수 0 2012.12.31 00: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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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3:13~15 
설교자 : 최형묵 목사 
참고 : 2007년 8월 12 천안살림교회 http://www.salrim.net/ 

출3:13~15

스스로 계신 분이 보내셨다

 
지난 주일은 교회 수련회로 디아코니아자매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원래는 강화 석모도에서 수련회를 할 예정이었습니다. 석모도 답사를 다녀오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배를 타고 건너는 동안 몰려드는 갈매기떼가 장관을 이루는 장면이었습니다. 흔히 도시의 공원에서 비둘기떼를 마주치는 것과 같은 장면이었습니다. 바다의 갈매기를 그렇게 가까이 마주하는 것은 다른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수련회를 갈 때 우리 아이들에게 새우깡 봉지라도 들려 던지면서 가면 참 재미있는 체험이 되겠다싶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석모도 관광안내를 보니까 바로 그렇게 안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폭우로 수련회 장소를 급히 바꾸는 바람에 그 흥미로운 체험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간 신문의 한 여성칼럼난을 보다 아차 싶어졌습니다. 소설가 김연씨가 “우리 모녀, 잘 살 수 있다고요”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갈매기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한겨레신문> 2007.8.7.). 영국의 남서부 해안지역 세인트라 이브스라는 곳은 우리나라로 치면 해남 땅끝마을 정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아마 그곳도 갈매기떼가 장관을 이루는 모양입니다. 아침에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는데 길가에 세워진 알림 문구가 눈에 들어왔답니다. “갈매기에게 제발 먹이를 주지 마세요. 지가 알아서 살게 좀 내버려두자구요.” 갈매기도 제가 알아서 잘 산다는데, 모녀가 어찌 그 여행길을 감당하지 못하겠느냐는 결의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까닥했으면 우리가 우리의 재미 때문에 갈매기가 스스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할 뻔 했구나 싶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런 식의 잘못을 또 얼마나 범하면서 살아갈까 잠시 생각이 스쳤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 것은 어디에서도 반복되지 않습니다. 이 본문이 유일합니다.미디안 광야 낯선 땅의 나그네로서 삶을 살았던 모세는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습니다. 불꽃에 휩싸여 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목격하면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습니다.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내 백성’을 구하라는 소명이었습니다. 

 

그 떨기나무 가운데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모세는 묻습니다. ‘나를 일러 백성을 구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을 그 백성들 앞에서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명으로 너희를 해방시키기 위해 왔다’고 말하면 백성들이 ‘도대체 어떤 신이 너를 보냈느냐?’고 물을 터인데, 거기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하겠느냐는 물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답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 ‘스스로 계신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은 너희의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덧붙여 말합니다. 

 

이 본문 말씀은 수없이 논란이 되어 왔습니다. 언어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수없이 많은 논란이 이 본문을 둘러싸고 제기되어 왔고, 지금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라고 새번역 성서에 번역되어 있는 14절 말씀은, 개역 성경에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로 되어 있고, 공동번역 성서에는 “나는 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언어학적으로 하나님께서 고유한 자신의 이름을 비로소 밝히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나는 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아흐예 아쉘 이흐예’로 읽힙니다.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야훼’라는 발음과 ‘아흐예’ ‘이흐예’의 발음상의 유사성에 착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이 이 말씀의 뜻을 충분히 해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이름을 밝혔다는 것만으로는 중요한 사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밝힌 것이 각별한 사건으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 이름이 지니는 뜻 때문입니다.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여기에는 중요한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무엇이든 외부적인 어떤 것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합니다. 게다가 이 표현은 단순히 현재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정확히 말해 ‘나는 그렇게 되고자 할 나다.’라고 미래형으로 혹은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한 표현입니다. 말하자면 없는 것은 아니되, 지금 당장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말씀에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에 관한 가장 중요한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 하는 계명도 사실은 이와 같은 하나님 이해와 관련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바로 이 하나님 이해가 얼마나 순수하게 지켜져 왔는지는 사실 상당히 의심스럽지만, 형상을 만드는 것과 그것에 대한 숭배의 금지를 수없이 되풀이해 왔고, 그것을 의례를 통해서도 상징적으로 구현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예컨대, 성전 안에 신의 형상을 두지 않고 ‘말씀’을 두었던 것도 그러한 신앙, 그러한 정신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그 정신을 사실상 망각해 온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였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의 형상, 신의 형상을 붙잡고 싶어 했고, 결국은 보이는 것, 손에 쥘 수 있는 것에 집착해 온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였습니다. 오늘의 많은 기독교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나다’, 그 말씀은 그 어떤 것이든 외부적인 것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성격을 말합니다. ‘나는 그렇게 될 나이다’, 이것은 현재 확정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요, 미래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노자의 도덕경 첫 머리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도를 도라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우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바로 그 말과 상통하는 뜻을 지닌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뭐라고 규정하거나 어떻게 떠받들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욕망을 뒤집어 씌어 놓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인 것처럼 착각하고, 그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존재가 곧 하나님이라고 믿는 착각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겪은 세 가지 유혹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아라. 성경에 천사들이 떠받쳐 다치지 않게 해 주 실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그것을 증명해 보이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겠다’ 하는 유혹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유혹에 대해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답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능력을 네 멋대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무슨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이 유혹 이야기에 담긴 뜻은, ‘스스로 있는 하나님’을 외적으로 규정하지 말라는 오늘의 본문 말씀과 그 맥이 닿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이야기임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그 사실을 깨닫는 모세의 정체성, 나아가서는 히브리인들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가는’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은, 곧 ‘나를 나 되게 하지 못하는 힘’을 떨치고 ‘스스로 서는 삶’,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에 대한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백성에게 ‘스스로 있는 하나님’께서 보냈다고 말하라는 것은, 이제 너희들도 ‘이집트인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자유민 히브리인’으로 서라는 요구입니다.

 

하나님은 미래의 가능성이며 개방성입니다. 하나님은 새롭게 이루어질 희망입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망이 있는 곳에 종교가 있다. 그러나 종교가 있는 곳에 꼭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참 의미심장합니다. 종교의 기원과 그 역사, 그리고 오늘의 종교적 현실을 동시에 돌아보게 해줍니다. 희망으로서의 종교와 희망을 억압하는 종교를 동시에 돌아보게 해 줍니다. 모세에게 계시된 하나님 이름은 모세와 그 백성이 처한 삶의 현실과 동시에 종교적 현실을 돌아보게 해 줍니다. 거대한 권력으로 형상화한 이집트의 신은 진정한 신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우며 그 어떤 것으로도 형상화되지 않는 야훼야말로 진정한 신이라는 것을 일깨웁니다. 이 계시는, 나를 나 되게 하는 것을 가로막고 진정한 희망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나를 나 되게 하는 길로 당당히 나설 것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에 과연 어떤 역할을 합니까?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당당한 삶으로 인도해줍니까? 아니면 그 어떤 강박상태에 매이게 만듭니까? 만일 나의 삶을 향유하지 못한 채 그 어떤 것에 매여 끊임없이 허덕인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자신을 현재의 조건에 묶어 두는 모든 것들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스스로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그 기쁨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림과 동시에, 그러나 분단으로 적대화된 체제의 사슬을 넘어 평화를 이루기를 기원하는 평화통일주일입니다. 우리가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기뻐하고 분단의 극복을 염원하는 것은, 제국의 지배가 우리에게 고통을 강요했고 분단의 체제가 우리의 삶을 왜곡시키고 일상적으로 증오를 부추겨 왔기 때문입니다. 원치 않게 강요된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당연히 기쁜 일이며, 당연히 갈망하는 바입니다. 마침 남북 정상회담이 곧 열립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 정상회담이 남북 양편 모든 사람들의 삶을 왜곡시킨 적대적인 분단체제에 균열을 내고, 남북 양편의 평범한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만남이 그 기대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서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옭아매는 수많은 사슬들로 뒤엉켜 있는지 모릅니다. 그 모든 사슬을 한 순간에 다 떨쳐버리고 싶은 소망이 강렬하지만, 그것이 녹록치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사슬을 벗어버리기보다는 대개는 적응하는 길을 택합니다. 신앙은 그 사슬들을 벗어버리기를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그 사슬들이 한꺼번에 벗겨지기보다는 아주 더디게 하나 둘 겨우 겨우 벗겨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은 거기에서 묘미를 발견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신앙의 결과요 희망의 소산입니다. 비록 더딘 성취이지만 그것은 희망을 포기할 때는 전혀 맛볼 수 없는 데 반해 근본적인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때 맛볼 수 있는 묘미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당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매이지 않는 삶에 대한 희망입니다. 그 희망 가운데 발견하는 삶의 기쁨을 소중히 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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