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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라 대답해야 합니까

출애굽기 최형묵 목사............... 조회 수 2073 추천 수 0 2012.12.31 00: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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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3:13-15 
설교자 : 최형묵 목사 
참고 : 2001년 3월 18 천안살림교회 http://www.salrim.net/ 

무엇이라 대답해야 합니까

 

금년 들어 출애굽기 본문을 벌써 네 번째 보는 것 같습니다. Exodus, '탈출기'라는 성격 자체가 극적(dramatic)인 긴장감을 담고 있고, 그 극적인 긴장감이 늘 뭔가 탈출구를 찾고 싶은 우리의 역사적 삶과 일상적 삶에서의 긴장감과 대비되는 까닭에 유독 눈길을 주게 되는 책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 내용상 유일하게 등장하는 본문입니다. 다른 어디에도 이와 같은 장면이 반복되지 않는, 본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낯선 땅의 나그네'로서 삶을 살았던 모세는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습니다. 불꽃에 휩싸여 있으나 타지 않는 나무 떨기를 목격한 데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습니다.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내 백성'을 구하라는 사명을 일깨워주는 사건입니다.

 

그 나무 떨기 가운데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모세는 묻습니다. '나를 일러 백성을 구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을 그 백성들 앞에서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하는 물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으로 너희를 해방시키기 위해 왔다'고 말하면 백성들이 '도대체 어떤 신이 너를 보냈느냐?'고 물을 터인데, 거기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하겠느냐는 물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답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 '스스로 계신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은 너희의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덧붙여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본문 말씀은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본문입니다. 언어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수없이 많은 논란이 이 본문을 둘러싸고 제기되어 왔고, 지금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라고 새번역 성서에 번역되어 있는 14절 말씀은, 개역 성경에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로 되어 있고, 공동번역 성서에는 "나는 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 자체로는 도무지 그 뜻을 쉽사리 알아먹기 힘든 이 표현은, 언어학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고유한 자신의 이름을 비로소 밝히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나는 나다.'라는 이 말은 히브리어로는 '아흐예 아쉘 이흐예'로 읽힙니다. 그래서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야훼'라는 발음과 '아흐예' '이흐예'의 발음상의 유사성에 착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이 이 본문의 뜻을 충분히 해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이름 정도 밝혔다는 것이 그다지 중요한 사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이 각별한 사건으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 이름에 담긴 뜻 때문입니다.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여기에는 중요한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무엇이든 외부적인 어떤 것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게다가 이 표현은 단순히 현재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정확히 말해 '나는 그렇게 되고자 할 나다.'라고 미래형으로 혹은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한 표현입니다. 말하자면 없는 것은 아니되, 지금 당장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뭐가 그렇게 아리송하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바로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에 관한 가장 중요한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 하는 첫 번째 계명도 사실은 이와 같은 하나님 이해에서 비롯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역사에서 바로 이 하나님 이해가 얼마나 순수하게 지켜져 왔는지는 사실 상당히 의심스럽습니다. 형상을 만드는 것과 그것에 대한 숭배의 금지를 수없이 되풀이해 왔고, 그것을 의례를 통해서도 상징적으로 구현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예컨대, 성전 안에 신의 형상을 두지 않고 '말씀'을 두었던 것도 그러한 신앙, 그러한 정신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그 정신을 사실상 망각해 온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였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의 형상, 신의 형상을 붙잡고 싶어했고, 결국은 보이는 것, 손에 쥘 수 있는 것에 집착해 온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였습니다. 오늘의 많은 기독교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나다', 그 말씀은 그 어떤 것이든 외부적인 것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성격을 말한다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될 나이다', 하는 것은 현재 확정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요, 미래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했습니다.노자의 도덕경 첫 머리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도를 도라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우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바로 그 말과 상통하는 뜻을 지닌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뭐라고 규정하거나 어떻게 떠받들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욕망을 뒤집어 씌어 놓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인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라, 그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존재가 곧 하나님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은 유혹 가운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통한 유혹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아라. 성경에 천사들이 떠받쳐 다치지 않게 해 주 실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그것을 증명해 보이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겠다' 하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이 유혹에 대해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답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능력을 네 멋대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무슨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이 유혹의 이야기에 담긴 뜻은, '스스로 있는 하나님'을 외적으로 규정하지 말라는 오늘의 본문 말씀과 그 맥이 닿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이야기임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그 사실을 깨닫는 모세의 이야기요, 히브리인들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얼마 전(지난 1월), 오늘 본문의 바로 앞 2장의 말씀을 통해 '낯선 땅의 나그네'로서 모세가 자신의 정체성을 새삼 깨닫는 과정을 더불어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야훼 하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오늘 본문 이야기가, 모세가 히브리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가는 과정의 정점에 있다는 사실을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아니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가는'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은, 곧 '나를 나 되게 하지 못하는 힘'을 떨치고 '스스로 서는 삶',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에 대한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백성에게 '스스로 있는 하나님'께서 보냈다고 말하라는 것은, 이제 너희들도 '이집트인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자유민 히브리인'으로 서라는 요구입니다.

 

하나님은 미래의 가능성이며 개방성입니다. 하나님은 새롭게 이루어질 희망입니다(희망이 있는 곳에 종교가 있다. 그러나 종교가 있는 곳에 꼭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에른스트 블로흐). 지금 이집트의 거대한 권력과 막강한 재력으로 형상화한 신은 가짜다, 그것은 하나님/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힘을 떨쳐버려라, 하는 것이, 자신의 정체를 밝힌 야훼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모세의 깨달음입니다.


하나님을 임의로 판단하고, 그래서 그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으로 옭아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삶 또한 그 어떤 것에 매여 삽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욕망과 그 욕망을 충족시켜 줄 힘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세상의 유력한 사람들이 큰 교회에만 나가는지 아십니까? 아니, 달리 말해 우리 나라 전체 인구 가운데 기독교인 비율과 국회의원 가운데 기독교인 비율이 어떻게 대비되는지 아십니까? "25%:50%"! '기독교인들이 똑똑하고 또 복을 받아서'라고만 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만일 '국회의원이라도 하려면 교회에 나가야 되고 그것도 큰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 무시 못할 한 요인이라면 그 현상을 보고 순진하게 기뻐해야 할 일만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수많은 유력한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기독교의 영향력', '힘'인 것입니다. 그 외적인 '힘'에 매여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자유를 누리고 평안함을 누리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독교인은 결국 힘(권력/물력)의 노예일 뿐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현재의 어떤 형상이나 어떤 외적인 힘에 의해 속박당하지 않고 미래로 개방하는 것과 같이, 스스로를 미래의 희망에 내맡기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광야의 길처럼 때로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뒤를 쫓아 붙잡으려는 이집트의 군대를 물리친 것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힘에의 유혹을 뿌리친 참 자유의 길입니다. 때로 목마름과 허기짐에 지칠 때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힘들여 일해 놓고 그 결과를 빼앗기는 종의 신세, 혹은 따뜻한 밥 한 그릇, 고기 한 덩어리 때문에 자기의 온 몸을 다 바치는 굴욕적인 종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스스로 그러지(自然)' '못하게' 하는 힘, 우리는 늘 그 힘에 둘러싸여 삽니다.

러시아와 정상회담에서 탄도요격미사일(ABM) 제한조약에 동의했으면 당당하게 그 입장을 밝히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NMD)에 반하는 입장은 아니라는 비굴한 유감 표명을 해야 합니까? 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힘으로 밀어붙이면 된다는 발상도 돼먹지 않은 발상이지만,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치욕입니다. 모처럼 회복한 민족 자존과 평화의 길에 찬물을 끼얹는 미국의 '힘의 우위 전략'에 왜 또 다시 이 민족이 놀아나야 한단 말입니까? 미국이 '신'이 아니라는 사실, '세계의 경찰'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 아니 '형님'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이사야서 31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유다 왕국 말기에 앗시리아의 위협에 이집트에 의존하려 했던 유다를 두고 한 말입니다. "도움을 청하러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그들은 군마를 의지하고, 많은 병거를 믿고 기마병의 막강한 힘을 믿으면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바라보지도 않고, 주께 구하지도 않는다(1절)... 이집트 사람은 사람일 뿐이요, 하나님이 아니며, 그들의 군마 또한 고기덩이일 뿐이요 영이 아니다.(3절)" 어쩌면 그렇게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까? 이 사실을 예나 지금이나 인정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모양입니다.     

 

도대체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까?' 하는 물음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 ABM조약 정신에 동의한 듯 비췬 것은 '유감'이라는 우리 '정상'의 해명 태도에 심한 굴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 외국 기자의 말대로, 한국의 '만델라'를 만나러 왔는데 만나고 보니 한국의 '대처'였더라 한 것처럼, 자본과 군사력이라는 힘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정권 담당자의 실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는 또 일상에서 어떤 힘의 우상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이집트의 '고기가마'가 그리워 자신의 몸을 팔아 목숨을 연명하는 노예의 신세로 전락할 수는 없습니다. 마치 이집트의 신들처럼 위용 있는 형상을 갖춘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머리를 조아릴 일도 아닙니다. 우리 안에 꿈틀거리는 '고기가마'에의 유혹, '금송아지'에의 유혹을 우리는 떨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철학자(에리히 프롬)는 말했습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람들은 한편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듯 하지만, 한편으로 그 불안함 때문에 다시 자유로부터 도피하고픈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스스로 책임지는 삶은 사실 불안합니다. 누가 길을 제시해 주면 그 길을 따르는 것이 차라리 속 편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분명히 말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도대체 무엇이라 말해야 합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바꿔 말합니다. "도대체 어찌 해야 합니까?" "너의 길을 네가 알아서 찾아가라! 너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기지 말라!" 이것이 오늘 말씀의 뜻입니다. 남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살아가던 히브리 노예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자유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그 희망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를, 이 시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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