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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이 오리라!

예레미야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918 추천 수 0 2013.01.04 21:5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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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렘33:14-18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2.12.2일설교 http://dabia.net/xe/627135 

jys.jpg 정용섭 목사

 

그 날이 오리라!

렘 33:14-18, 대림절 제1주, 2012년 12월2일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1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1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스라엘 집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18 내 앞에서 번제를 드리며 소제를 사르며 다른 제사를 항상 드릴 레위 사람 제사장들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레미야서의 역사적 배경은 유다의 멸망입니다. 당시 근동의 신흥 제국이었던 바벨론은 유다와 다투다가 기원전 588년부터는 아예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유다는 이집트에 구조를 요청하면서 1년 동안 버텼지만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기원전 587년 7월에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의 총공격을 받아 함락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고대의 전쟁은 완전히 ‘제로섬’ 게임입니다. 전쟁에서 지면 모든 걸 잃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 궁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사용되던 귀한 집기들은 다 약탈당했습니다. 그리고 귀족과 지식인들은 대부분 포로로 잡혀갔고, 유다 지역은 바벨론의 식민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완전히 망한 겁니다.

 

예레미야는 그 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수십 년 전부터 선지자 역할을 하면서 조국 유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을 두고 다른 선지자들과 다투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생활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하나냐 같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치시고 유다를 다시 일으키신다고 주장했습니다. 역사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흘렀습니다. 암흑과 같은 바벨론 포로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절망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깊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이 왜 이방민족에게 패배를 당하고 수모를 당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암담한 미래를 내다보면서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날”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기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해야했을까요. 그 내용이 오늘 설교 본문인 렘 33:14-18절에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여기서 ‘그 날’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14절은 “...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고 했으며, 15절은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라고 했고, 16절은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렘 23:5,6절과 상응합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렘 23:5,6절의 문장은 시 형식이고, 렘 33:14-16절은 산문 형식이라고 합니다. 문장 형태만 다르지 내용은 똑같습니다. 렘 23:5,6에도 ‘그 날’이 강조됩니다. 5절은 “... 보라. 때가 이르리리...”라고 했으며, 6절은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라고 했습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본문 14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의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이게 예레미야를 비롯해서 유대 선지자들의 고유한 영적 시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단순히 행복과 불행이라는 현상으로만 봅니다. 자신이 볼 때 좋은 일이 많으면 행복하다고 말하고, 거꾸로 나쁜 일이 많으면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좋은 일을 이루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결국 한평생 롤러코스트를 타듯이 일희일비합니다. 지금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밑바닥에 떨어진 자신들의 운명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는가 하는 점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국 유다가 망하는 운명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바벨론 포로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말씀의 성취라는 차원에서 삶을 이해하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은 지금 그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겁니다. 모든 삶이 무너졌는데, 간절한 기도가 수포로 돌아갔는데, 그게 무슨 말씀의 성취냐고 말입니다. 당연합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입니다. 그런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이게 민중들과 선지자와의 영적 시각의 차이입니다. 민중들은 현실만 보았지만 선지자는 현실 너머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민중들은 자기가 계획한 인생설계도로만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았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성립됩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의 성취입니다. 어려운 일도 마찬가지임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모든 걸 팔자소관으로 돌리는 숙명주의가 옳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최선으로 악한 운명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에서 벗어난 게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은 없습니다. 지금은 악이 승리하는 것 같아도 궁극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당장은 실패인 것처럼 보여도 부활의 승리를 거둔 것처럼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어떻게 민중들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차원에서 세상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그 말씀이 성취될 그 날이 온다고 외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점쟁이가 아닙니다. 기도하다가 갑작스럽게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그 날’을 역사에서 배웠습니다. 선지자의 전통에서 배운 것입니다. 그는 평소에 하나님의 ‘그 날’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살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여러분이 죽을 그 날이 속히 옵니다.’라는 사실을 평소에 느끼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잘 생각하지 않던 준엄한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매 순간을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그 날’로 받아들일 수 있으신가요?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신가요? 아니면 ‘그 날’이 여러분의 삶에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인가요? 그렇다면 기독교인으로서는 불행한 겁니다. 성경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니까요.

 

정의와 공의

예레미야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성취하실 것에 대해서 이제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그것은 정의와 공의입니다. 1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렘 33:15) 정의와 공의는 16절이 가리키는 유대의 구원입니다.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이어지는 17절과 18절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다윗 왕조가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이며, 성전의 제사 행위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날’에 이루실 일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유다의 구원을 정의와 공의의 실현이라고 보았습니다. 거꾸로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면 유다가 구원을 받는다고 본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조국인 유다가 불의한 세력에 의해서 억압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불의한 세력은 바벨론입니다. 당시의 바벨론과 유다는 비교의 대상이 못됩니다. 바벨론은 근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제국이었고, 유다는 여러 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생존의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지금으로 비교하자면 바벨론은 미국이고, 유다는 이라크나 북한입니다.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국력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유다는 바벨론이 주도하고 있는 고대근동의 억압적인 상황을 헤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상황을 불의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어야만 유다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벨론의 입장에서는 반대로 생각할 겁니다. 유다는 국제 경쟁에서 패배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과연 누가 옳을까요? 지금의 이 세상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예레미야의 주장은 옳은가요, 아니면 패배한 자의 넋두리인가요?

 

오늘도 비슷한 일들이 반복됩니다. 국제 질서는 그만 두고 국내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대형마트 규제 문제로 시비가 그치지 않습니다. 대형마트로 인해서 동네의 작은 가게들이 피해를 본다는 겁니다. 대형마트가 들어서는 것에 제한을 두기도 하고, 공휴일에 영업을 하지 못하게도 했습니다. 이것을 대형마트 쪽에서는 불공정하다고 여길 겁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영업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느냐고 불평합니다. 무엇이 정의이며 공의입니까? 교회 사정도 비슷합니다. 대형교회로 인해서 작은 교회들의 형편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종교적 메리트를 제공하는 대형교회는 점점 더 커지고, 작은 교회는 무기력감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무엇이 정의이고 공의입니까? 저는 경제학자도 아니고 사회학자도 아니기에 이런 문제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전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이라는 제국이 주도하는 이 세상을 불의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세상의 질서는 악입니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절대적인 힘으로 지배하고 있는 그런 질서는 정의롭지 못합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냉소적 발언이 진리로 받아들여집니다. 바벨론의 힘 앞에서 유다는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게 당시의 국제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거기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를 실행한 바로 ‘그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 날이 오면 유다는 구원을 받을 것이며, 예루살렘은 안전하게 될 것이라고 외칩니다.

 

여러분은 예레미야의 이런 예언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정의와 공의에 대한 그의 예언은 ‘공자 왈’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노이며, 절규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은 분노와 절규가 있는지, 아시지요?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을 위한 투쟁이 수년간 이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고압 송전철탑에 올라가서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힘이 없는 이들의 마지막 분노이자 절규는 아닐까요?

 

다윗의 후손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회 정의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편한 생각이 들기도 할 겁니다. 이 세상이 다 그런 건데 어떻게 하라는 거냐, 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모두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 운동권이 되든지, 최소한 시민운동가가 되라는 말이냐, 하고 말입니다. 그런 기회나 능력이 있는 분들은 그렇게 하면 좋습니다. 직접 그런 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문제가 중요하다는 생각과 함께 기회가 닿는 대로 그런 분과 그런 일을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분노와 절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신앙적인 태도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의와 공의가 성취될 날이 온다는 예레미야의 이 예언은 유다 역사에서 실현되었을까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구원과 예루살렘의 안전한 삶은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고 팔레스타인에 유다를 재건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유다는 다른 제국에 의해서 계속해서 식민통치를 받았습니다. 나라는 없어졌습니다. 자기나라 말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실현되었습니다. 바벨론을 무너뜨리는 방식이 아니라 훨씬 근본적인, 아니 궁극적인 방식으로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사실을 자신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예언했습니다. 본문 15절에 따르면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이는 다윗에게서 온 ‘공의로운 가지’입니다. 다윗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레미야가 말하는 그 다윗의 후손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막연했던 ‘그 날’에 일어난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참된 정의와 공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참된 부활 생명 사건입니다. 그것이 아직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그 약속을 우리는 희망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종말론적 대림 공동체입니다. 바벨론과 같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런 세상의 감언이설에 부화뇌동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정의와 공의를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궁극적인 정의와 공의의 세계라 할 수 있는 부활 생명으로부터 빛을 받아서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부활의 주님이 다시 오십시다. 희망하십시오. 궁극적인 정의와 평화의 순간이 오고 있습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심정으로 대망하십시오. ‘그 날’은 옵니다.(*녹음 파일은 서울샘터교회 예배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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