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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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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2012.12.9 http://charmsarang.onmam.com/ |
온유한 자
마5:1-12
팔복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야 할 천국백성의 특성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들과는 정반대되는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요,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 때부터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가 되며, 세상 사람들에게 수수께끼와 같은 신비로운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맛보지 못했던 진정한 평안과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뭔가 잘못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팔복을 상고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주시는 참되고 완전한 행복을 소유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세상 사람들은 폭력이나 무력 등에 의하여 땅이 정복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절) 이스라엘 왕이 된 후 주변 모든 나라를 평정했던 다윗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37:11)
당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 군사적인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로마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다윗 시대와 같은 번영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시대의 형편과도 완전히 반대되는 교훈입니다. 오늘도 세상 사람들은 온유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리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은 개성이 약하고 자기주장이 없는 소극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온유는 하나님 나라의 특성입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당연히 이 세상의 기준과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심령의 가난 - 애통 - 온유
온유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온유함은 가난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자기의 행위와 의는 걸레조각과 같고, 자신의 마음은 죄로 심히 부패해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애통해 합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불의와 불법, 죄와 허물을 솔직히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되면 더 이상 교만하거나 다른 사람을 공격할 수 없게 됩니다. 진실로 마음이 겸허해지고 낮아져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나에게는 소망이 없음을 절감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온유함이란?
그러므로 온유란 단순히 부드러움, 연약함, 친절함이 아닙니다. 온유는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영광에 참여하는 내적인 능력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의 죄와 무능과 소망 없음을 절감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유명한 강해 설교가인 데니스 레인은 “온유란 거인의 손 안에 있는 갓난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온유한 자야말로 진정으로 강한 자임을 의미합니다. 온유한 사람이 어떻게 강한 사람일 수 있을까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절실히 깨달은 사람은 이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이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깨어져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온유한 자야말로 가장 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스데반은 유력한 유대인들과 논쟁했는데, 구약에 정통해 있던 유대인들은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구약의 역사를 관통하며 전하는 설교에 압도당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스데반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렇게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용서해주시라고 기도하면서 눈을 감았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이렇게 강합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거인의 손 안에 있는 갓난아이’라는 말은 온유를 잘 표현한 말입니다.
온유는 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에 참여하여 그 분의 능력을 힘입은 자가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자기의 목적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 삶의 지배권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이와 같이 자기주장, 자기이익, 자기 합리화, 자기연민, 자존심 등을 끝장 내버린 사람입니다. 존 번연은 “이미 넘어져 있는 사람은 넘어질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주장, 자기이익, 자기 합리화, 자기연민과 자존심을 끝장낸 사람이 어떻게 상처를 받거나 자존심이 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은 더 이상 넘어지거나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므로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과 타인이 자기에게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놀라워합니다.
온유할 수 없는 사람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람들은 온유할 수 없습니다. 열등의식이나 우월감에 빠져 있는 사람, 항상 긴장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항상 남을 이겨야 하는 사람, 언제나 비교하면서 사는 사람, 늘 타인의 시선을 끌고 싶어 하는 사람 …
이런 사람들은 늘 남이 나에게 뭐라고 하는가에 신경이 곤두서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에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면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지고는 못사는 사람들입니다. 나보다 잘 났거나 나은 사람을 보면 시기하며 질투합니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실망하고 속이 상합니다. 그래서 늘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자기 스스로도 늘 피곤하며 우울합니다. 이런 사람은 온유할 수 없습니다.
내가 온유한가 온유하지 않은가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대하는 것에 대하여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칭찬 받을 때 거기에 빠지지 않고, 조롱을 당하거나 무시를 당할 때 화내지 않으며, 오직 모든 일을 하나님의 손에 의탁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감사하며 평안합니다.
온유한 사람들
성경에서 온유한 사람들을 생각해봅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순종하여 떠났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순종이 바로 온유입니다. 아브라함은 또 조카 롯에게 양보했는데, 이 역시 온유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으나 그는 즉시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순종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의 온유함을 잘 보여줍니다.
요셉은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으나,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팔았던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8상). 이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이렇게 된 것은 다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은혜이다.”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 백성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세가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 광야에서의 모세를 생각해보십시오. 광야는 고난과 시험의 장소였습니다. 광야생활은 그야말로 거칠고 메마르고 고단한 생활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은 수시로 모세를 원망했고, 심지어는 돌로 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모세는 오직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모세는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택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을 끝까지 대적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긴 다윗은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온유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이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1-24)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예수님은 온유 자체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제외하고 이 모든 사람들은 본래 온유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온유하게 되었을까요? 이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온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온유하게 될 수 있습니다. 속세를 떠나 세상을 등진다고 해서 결코 온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순종할 때 우리는 온유한 자가 됩니다.
복이 있나니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땅’은 우리가 누릴 모든 축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땅을 얻는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이 말씀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온유한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온유한 자는 하늘의 복과 함께 땅의 복을 받게 될 것이며,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항상 만족을 얻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8상-10) 온유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이렇게 진정한 만족을 누립니다.
동시에 온유한 사람들에게는 미래의 축복과 영광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고전6:2-3)
사도 바울은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 또 우리가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딤후2:11-12상)
온유하려면
우리가 온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먼저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떠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인과 세리와 창기와 어린아이들, 심지어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자들에게까지 온유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는 온유를 배울 수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온유한 자가 되려면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주님께 배우고 주님을 닮아갈 때 우리는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가 되려면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해질 때 자아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자아가 죽은 사람은 열등의식과 우월감, 그리고 마음의 상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됩니다. 이렇게 자아가 죽어야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자아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의지합니다. 이렇게 자아가 이미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이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졌다고 속이 상하거나 마음에 상처 받을 일도 없게 됩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로만 만족합니다.
온유한 자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화를 내는 순간 우리의 자아가 고개를 쳐들게 되며, 우리의 마음은 다시 강퍅해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그러나 이 모든 일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내 마음에 오셔서 나를 온전히 다스리셔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주장하시면 우리는 온유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며, 자신의 죄와 부정함과 무능을 철저히 깨닫고 인정하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와 영적인 무능함 때문에 애통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이제 나 자신으로서는 아무 소망도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의지하는 온유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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