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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4:1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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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임덕순 목사 |
참고 : | 2005-09-18 한가람교회 http://www.hankaram.or.kr/ |
애굽으로 가는 모세
지난 시간에는 애굽으로 가서 내 백성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여러가지 핑계를 앞세워 거절하며 사양하다가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까지 하는 모세를 보았고 거기서 우리의 모습도 발견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드디어 모세가 하나님께 설득당하여 애굽으로 출발합니다. 그런데 18절에 보면, 모세가 장인에게 작별인사를 하는데, “내 형제들이 살아있나 보려 합니다.” 라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애굽으로 갑니다.”라고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장인이 딸을 걱정하여 보내지 않을까 염려해서라기보다는, 아직도 두려움과 염려가 남아서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는 아직도 자기의 사명과 장래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절에 보면, 그가 출발하기 전 미디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서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이가 죽었느니라." 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이 소식이 모세에게는 상당한 위로가 되었을 듯합니다. 모세의 생명을 찾던 왕은 죽고 말게 되어있는 인생에 불과하고, 그의 생명을 지키는 분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도대체 무엇을 왜 무서워한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모세는 자기를 지키는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을 믿지 못하고, 죽고 말 인생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에게만 국한된 일입니까? 지금 우리도 그렇습니다. 지금 나를 괴롭히고 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죽고 망하는 인생에 불과하지만, 우리를 지키는 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자라. 여호와께서 너의 우편의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못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분의 말씀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고, 그 무엇에게 둘러싸인다 할지라도 두려워 할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생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고 계시고, 나는 그의 백성으로 그분의 명령을 따라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믿으십니까?
20절을 보면,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의 등이 보입니다. 그가 가서 일 해야 할 곳은 애굽입니다. 자신도 아마 그것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가 첫 아들을 낳았을 때, 내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는 뜻으로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는 나그네 의식이 가득했었고, 지금 애굽에 가면서도 "돌아간다." 고 표현 하는 것을 보면, 그는 지금 가는 길이 자기가 마땅히 가야할 길을 이제야 가게 되었다고 생각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야할 길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길을 이제야 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망설임이 있었고 수많은 핑계를 자기 앞에 일부러 갖다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러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내가 마땅히 가야만 하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저 일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행을 못하고 두려워하며 망설이기만 합니다. 그것이 내 길이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왠지 두려움이 있습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실천, 전도생활, 이웃에게 먼저 찾아가서 섬기는 일, 이 일들이 다 우리가 해야만 할 일이며, 복된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결단을 못하고 망설이고 핑계만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습니까? 오늘은 내가 이제 말씀대로 하겠노라고 결단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은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가 구원해야 할 사람들 곁으로 가도록 보내십니다. 인도자는 인도를 기다리는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하고, 일군은 일거리 곁에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오늘까지 어디에 있었습니까? 교회 제단 밑에 있어야 할 사람, 말씀아래 있어야 할 사람이 술자리에 있고, 복음전할 사명을 가진 사람이 돈 버는 재미, 세상의 거짓만족에 취해서 세상을 따라가고, 사랑을 주어야 할 사람이 남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탓하면서 지내지 않았습니까? 사람은 각자 자기의 자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거기가 여러분의 자리입니까?
하나님은 자기 분수를 모르고 주인인 사라에게 덤비고 이삭을 조롱하다가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돌아가서 네 여주인의 수하에 복종하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있어야할 자리에 있고,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 아름답고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별하는 지혜와 결단이 사람마다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받다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았다면,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기도하다가 자기가 가야할 자리와 해야 할 일을 찾았다면, 망설이지 말고 즉시 그리로 가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으로 난 보람이요, 그것이 인간으로서 성공을 거두는 법입니다.
모세가 애굽으로 가는데 그동안 양을 칠때 사용하던 지팡이 하나를 들고 출발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오랫동안 지니고 있었던 그 지팡이가 맞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지팡이가 용도가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양을 칠 때에는 목동의 지팡이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같은 지팡이지만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를 제압하기 위해서 능력을 나타낼 지팡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도할 지휘봉인 지팡이입니다. 지팡이를 든 사람이 목동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바뀌자, 지팡이도 용도가 바뀌고 이름도 바뀌었습니다.
지팡이도 그러하고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 누구라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일을 붙잡는 순간, 그의 지위가 달라지고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달리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의 종입니까? 여러분의 손은 사랑의 손, 위로의 손, 능력의 손입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그의 손도 변합니다.
그 지팡이를 잡고 출발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그가 애굽에 가서 해야 할 일과, 모세가 일을 할 때 애굽 왕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미리 알려주셨습니다.(21-23) “네가 애굽에 가거든, 내가 네게 준 이적을 바로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그가 너희를 쉽게 놓지 아니하리라. 그래도 물러서지 말아라. 사실은 내가 일부러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라고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놓지 아니하거든 너는 바로에 게 “이백성은 내 장자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만일 거절하면 네 장자를 죽이리라.” 고 경고하도록 알려 주셨습니다.
모세는, 나 혼자 애굽에 가서 무슨 재주로 애굽 왕을 굴복시킨단 말인가 하고 땅 꺼지게 걱정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너무나도 자세하게 준비하셨고, 그가 해야 할 행동 하나하나를 알려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가서 할 일과, 바로의 반응과, 그때의 대처방안을 모두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도와주시는데, 누가 하나님의 일을 못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내가 순종하는 길을 도와주신다는 것을 알고 믿기만 하면 누구나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전도도 그렇고, 능력을 행하는 것도 그렇고, 크게 하는 교회봉사도 그렇고,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어떤 성도는 자기 몸을 순교의 제물로 바쳤고, 어떤 성도는 수만명을 전도해 구원했으며, 어떤 이는 수백억 재산을 복음을 위해 바쳤습니다. 그렇게 큰일을 한 사람들은 한결 같이 자신이 잘나서 한 것이 아니라 다만 말씀에 순종했을 뿐이라고 간증합니다. 믿어지지 않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순종했을 뿐이고, 모든 일은 시종일관 하나님이 행하신 결과일 뿐입니다. 이렇게 도우시는 데에야 누가 하나님의 일을 못하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번 살아보기를 무엇 때문에 망설이고 무엇이 겁나서 주저 하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과 도우심을 믿고 목숨을 걸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도우시는데, 하나님께서 명하여 시킨 일을 하려고 결심하는 모든 사람들을 철저하게 책임지고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할수록 담대해지고, 기쁨이 생기고, 보람이 생기고,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자라기를 원한다면 손 걷어 부치고 봉사해보시기 바랍니다. 손해 보면 보지 뭐, 따돌림 받으면 받지 뭐, 망하면 망하지 뭐, 하는 그런 자세로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 보려고만 한다면 더 이상 어려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모세도 미리 알고 간 것이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는 과정에서 경험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가 계속 망설이고 애굽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도무지 알 수 없고 경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순종하다가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무턱대고 보내셨다가, 어느 날 내가 하도 궁지에 몰리니까 그때 즉흥적으로 나를 도우신 것이 아니다. 내가 부름을 받기 전에, 내가 이 일을 알기도 전에, 처음부터 하나님이 치밀하게 준비하시고 나를 보내셨다.” 이런 사실을 애굽으로 가서 순종하여 일 하다가 경험하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능력과 치밀하신 그분의 계획과 섭리를 맛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기만 하고 듣기만 하여서는, 평생토록 “그거 참 좋은 말씀인데 정말 그럴까? 아냐, 세상에 그럴 리가 없어,” 하면서 망설이기만 할 뿐, 결코 조금도 체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사람만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보고 체험하고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며, 더 큰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자로 큰일을 해야 할 모세에게 광야서편에서 40년의 훈련을 시켰으며, 그 다음으로 길의 숙소 사건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이 두 과정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훈련입니다.
3장에서는 모세가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시절을 보았습니다. 그는 애굽의 문무를 모두 배운 인재입니다. 대 학자이며, 무술의 고수이고, 왕실에서 자란 정치가이며, 큰 웅지를 가진 40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웅지를 펴기도 전에 실패하게 하셨고, 미디안 광야의 서편에서 세월을 보내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인재를 왜 미디안으로 보내서 거기서 세월을 허송하게, 젊음을 썩히게 만드셨을까요?
모세는 애굽의 모든 지식을 배웠고 인간의 지혜에 통달했으며, 왕궁에서 존귀한 특전들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이제는 뭐든지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법 합니다.
또한, 그의 마음속에는 ‘나는 히브리 사람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다, 나는 이제 하나님을 위해서 큰일을 한번 해야겠다.’ 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어떤 일이라도 잘 해낼 수 있다고 자신했을 법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만만한 모세를 단번에 넘어지게 하셨고, 가장 삭막한 광야로 보내어 양치기가 되게 하셨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짐승 치는 일을 가증하게 생각했습니다.(창46:34) 애굽 왕실에서 자라고 학문과 무예와 사상을 다 배운 모세에게, 산골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 된다는 것은 정말 수치스런 일이었습니다. 그가 양치기가 되었다는 것은 죽지 못해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가치관이고 사상이고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치워버렸다는 의미가 그가 양치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왜 그런 가혹한 시련의 기간을 주셨을까요? 큰일을 해야 할 모세에게 미디안 광야는 매우 유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거기는 사람도 없고, 사건도 없고, 지식도 없으며, 겉치레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애굽에 가득하던 야단법석 하는 소리도 없는 곳이고, 돈 때문에 떠드는 장사군의 소리도 없고, 정치인들의 야망이나 탄식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입니다. 거기서는 시들어버릴 세상의 명예도 쾌락의 향락도 유혹하지 않았으며, 거기는 황금의 갈망도 느껴지지 않았고, 교만으로 마음이 부풀어 오를 일도 없었습니다.
거기는 모든 것의 본질이 사실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인간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가가 여지없이 드러났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광채가 그대로 빛나는 곳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사실 그대로 보였습니다. 높은 산은 높은 산으로 보이고, 깊은 골짜기는 깊게 파여져 있고, 거친 돌멩이는 그대로 굴러다니며,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꾸민 것이 하나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사실이 사실대로 보이고, 그 사실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음성만 들리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거기로 보내어 40년을 지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를 위한 훈련기간 이었습니다. 모든 거짓된 위장물들이 제거되고 세상의 본질이 드러나는 곳에서, 모세는 사물의 본질을 보는 훈련을 받았고, 만사와 역사를 움직이는 이가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 훈련을 거치지 않고서는 누구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교육을 많이 받아야만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다면, 애굽 궁중에서 훈련받고 나온 모세는 가장 유리한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 학문과 무예에서 월등한 인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실패하게 하시고, 광야의 서편으로 보내어 40년을 새로 훈련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 서편에서 배운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모든 자만과 영광을 진토에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부여한 가치,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들인 세상 지식이나 경험이나 물질이나 처세술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세상 지식과 재능과 재물과 여건은, 하나님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볼 때에는, 그야말로 배설물과 찌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빌 3:7-9에서 바울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라고 선언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면 세상의 모든 것은 가치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사람만 참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요3:6에서 요한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 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미디안의 훈련을 받으셨습니까? 육의 가치관을 버리고 영에 속하는 훈련을 받으셨습니까? 여러분이 그동안 그렇게 애쓰고 수고 한 것이 모두 허물어지고 헛수고가 되어버렸습니까? 자신을 의지하는 육신적 사고를 버리게 하는 하나님의 훈련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세우실 때는 가장 먼저 육을 버리게 하십니다. 육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나의 지식이나 노력이나 인맥이나 자본은 하나님이 보실 때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쓰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이고, 십보라는 미디안 사람입니다. 십보라는 이스라엘 사람 남자라면 누구나 행하여야 하는 할례를 자기 아들에게 행하기를 반대한 것 같습니다. 어린 아들에 대한 육신적 사랑 때문에 아이의 몸에 칼을 대는 할례를 반대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아들로 태어난 게르솜은 유대인이면서도 아직 할례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가 애굽을 향해 가는 길가의 숙소에 나타나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이 대목은 이해가 잘 안 가는 내용입니다. 모세를 애굽에 가라 하신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는 가기 싫다고 하는데 억지로 몰아 보내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막상 간다고 떠나니까, 가는 길에 그를 기습하여 죽이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태도가 이해되십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조금 전에, 모세에게 애굽에 가서 바로에게 이렇게 말해라, 그렇게 말하면 바로는 이렇게 반응할 것이고, 그러면 너는 이렇게 행동을 해라. 결국은 그들이 금은보화를 싸 주면서 가라고 할 것이라는 내용까지 이미 다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모세가 애굽에 가기도 전에 길에서 죽이시면, 그 모든 하나님의 계획은 허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혹시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놀래주려고 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려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십보라는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자기가 반대해서 시행하지 못한 아들의 할례 때문일 것이라고 눈치를 채고, 얼른 차돌을 가지고 아들의 몸에 할례를 행하여 게르솜의 생식기 피부를 모세에게 던지며,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라.” 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놓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건을 통하여 모세와 그 가정에 남아있는 육신적인 생각을 아주 확실하게 죽이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육신의 힘이나 육신적인 생각으로는 감당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할례를 받는 것은 육신을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식기 표피를 베는 것은 자식을 내 육신의 힘으로 낳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서 낳은 것이다. 세상만사가 내 육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장하신다 는 것을 고백하는 의미로, 육신을 죽이는 예식이 할례입니다.
그 할례는 신약에 와서 세례로 바뀌었고, 그것은 육신을 죽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예식이 되었습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2:10-12의 말씀입니다.
육체로 상징된 인간의 본성과, 육신적 생각에 사망선고가 내려진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고 하신바 있는데,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듯이 너희도 자신의 육신적 생각을 죽이고 나를 따르는 새 삶을 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육신은 죽었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 사람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육신의 자아가 살아있어서 그것의 욕심대로 살아가십니까?
모세는 그날 아내 십보라를 친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로 나왔을 때에야 아내와 아들을 불렀습니다. 출 18: 2절에 보면, 모세가 광야에 있을 때 장인 이드로가 아내를 데리고 왔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의 마음으로 큰일을 해야 하는 모세에게, 육신적인 시각과 생각으로 살아가고 말하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은 큰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평범한 가장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켜야 하는 특수 임무를 띤 하나님의 사자였습니다. 그에게는 아내나 가정보다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더욱 중요했기 때문에 모세는 아내를 돌려보냈을 것이고, 그날 이후, 모세는 다시 육신의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시각과 하나님의 생각으로 일하여 이스라엘의 해방이라는 큰일을 해냅니다.
육을 죽이고 육과 결별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출발하는 순간이 길의 숙소에서의 할례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떠나야 할 것을 떠나고 죽여야 할 것을 죽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능력 있게 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의 본질을 바로 보고, 육신을 죽이고 주님을 따르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셔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큰일을 이루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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