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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4:1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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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형묵 목사 |
참고 : | 2008년 5월 18 천안살림교회 http://www.salrim.net/ |
진실의 힘
기세등등하게 등장한 정권이라 해도 국민들의 반발에 부딪히면 난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민들의 저항 앞에 궤도 수정을 하지 않는 한 그 정권은 내내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미국과 쇠고기 협상을 하고 난 다음 국민적 저항에 대통령도 적이 놀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때문인지 지난 15일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대통령은 자기반성조의 발언을 했습니다. “국민과 역사 앞에 교만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면서 더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고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대통령인 저 자신이 모든 것을 먼저 바꿔나가겠다. 남에게 바꾸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이 먼저 바꾸도록 하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최근의 민심을 의식한 자기반성적 고백일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것이 빈말이이라는 것은 같은 자리에서 말한 다른 이야기에서 금방 드러나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나라를 이룩하는 과정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지난 10년 (정권)의 그늘이 크고 그 뿌리도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현재 난국의 원인이 지난 정권의 탓이라고 돌리는 태도로 자신의 속내를 감추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그의 반성은 전혀 진실과는 상관없는 빈말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낸 셈입니다. 너무 쉽게 반성하고 너무 쉽게 그것을 뒤집어엎는 정치지도자의 말을 누가 신뢰할 수 있을까요?
그 점에서 오늘의 정치적 난국이 ‘신뢰의 위기’라는 진단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정권이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정치가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은 것은 아니고, 적어도 대통령과 정부가 정책상의 일관성을 당당하고 선명하게 보여 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정책이겠지만, 이 정권은 꼼수를 두기보다는 선명하게 자신의 정책을 밀고 나가면서 자신들의 지지계층을 모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사례들을 통해서도 드러났지만, 이번 쇠고기 협상과 관련해서도 매우 빈번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국민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전혀 진실성을 기대할 수 없는 정권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 장면의 한 대목을 함께 읽었습니다. 지난 수요일 성서연구 시간에 함께 나눈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저는 이 말씀에서 진실의 힘을 발견합니다. 모세가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그의 진실함을 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포함하여,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은 인간적 측면에서 매우 섬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한 대목 한 대목을 음미할 것 같으면 인간 모세가 놓인 정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초점이지만, 성서의 위대한 인물들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결코 특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처한 처지가 어떤 것인지 볼까요?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통받는 자기 백성이 있는 이집트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습니다. 불꽃이 일지만 타지 않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모세는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백성을 구해야 할 사명을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여전히 주저합니다. 누구에게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고 해서 곧바로 결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단을 하는 데에는 늘 두려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백성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명을 수행해야 하는 모세에게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파 라오 앞에 서서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나가겠다고 하는 것이었고(3:11), 하나는 자신의 백성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었습니다(4:1).
파 라오 앞에 서야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그 답의 실마리들이 주어졌습니다. 우선은 모세의 목숨을 노리던 파 라오가 죽었습니다. 히브리 사람을 괴롭히는 이집트 감독관을 쳐 죽인 사건 때문에 모세는 파 라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자로서 은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목숨을 노리던 그 파 라오가 죽었습니다. 물론 그 다음 파 라오도 모세와 그 백성에 결코 호의적일 수 없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끝내 그 앞에서 백성을 이끌어 낼 터이이니 걱정 말라고 하십니다.
이제 모세에게 걱정되는 일은 백성들을 이끌어내는 일입니다.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저의 말을 듣지 않고 ‘주께서 너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 하면 어찌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증거를 보여 줄 터이니 역시 걱정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 앞에서 기적을 보임으로써 당신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미리 보여 주십니다. 미심쩍어 하고 주저하는 모세를 북돋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걱정하는 문제를 하나님께서 도와 다 해결해 주겠다고 하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자신이 걱정하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시겠다고 하는데도, 모세는 여전히 불안했고 여전히 주저했습니다. 더 이상 핑계거리를 찾기 어려웠던 모세는 마침내 결정적인 자신의 결함을 실토함으로써 도망갈 핑계거리를 찾아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입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본래 말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전에도 그랬고, 주께서 이 종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이 둔하고 혀가 둔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벙어리를 만들고 귀머거리를 만들며, 누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거나 앞 못 보는 사람이 되게 하겠느냐? 바로 나 주가 아니더냐? 그러니 가거라. 네가 말하는 것을 내가 돕겠다. 네가 할 말을 할 수 있게, 내가 너에게 가르쳐 주겠다.”
모세는 이 말씀 앞에서도 머뭇거립니다. 그리고 다시 말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대책이 안 서는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대목에서 화를 벌컥 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레위 사람인 너의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나는, 그가 말을 잘 하는 줄 안다. ...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을 할 것이다. ...”
결국 그렇게 한 끝에 모세는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이집트에서 억압받는 백성들의 지도자로 나서 그들을 해방의 대장정에 오릅니다. 물론 처음부터 자신이 걱정했던 문제들을 다 극복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신뢰를 받았고, 파 라오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핑계를 다 대서 자기가 감당해야 할 몫을 피하고자 하는 모세에게서, 우리는 모든 인간이 지닌 공통적인 모습을 발견합니다. 동시에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놀랍게도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감당하는 성서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그런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마저도 자신이 받아야 할 잔을 피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몫을 다 하는 성서의 이와 같은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그 스스로의 능력 탓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그 몫을 감당하는 사람이 아무런 준비 없이 그저 단순한 도구로만 사용된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피하고 싶은 핑계거리를 찾아내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찌 보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인간의 진실됨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진실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사람을 선택합니다. 자신의 약점을 다 드러내놓고 고백하는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고 내건 핑계거리를 보면 흥미롭습니다. 파 라오 앞에 어찌 서야 하느냐 하는 것은 자신이 맞서야 할 적대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백성들이 나를 믿겠느냐 하는 것은 자신이 이끌어야 할 사람들로부터의 신뢰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 두려움은 소위 객관적 조건에 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간단한 해결방식을 선택하십니다. 기적을 통해 해결합니다. 글쎄요? 인간의 편에서 보면 기적은 어찌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일 수 있습니다. 그 만큼 객관적으로 어려운 문제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하십니다. 그 사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어렵다고 느끼는 일이 오히려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소위 그 객관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전망이 주어졌을 때, 정작 문제가 된 것은 자신이었습니다. 큰일을 감당하기에 부족한 자신의 결정적 결함을 고백하는 모세의 모습은, 끝까지 도망갈 궁리를 하는 궁색한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달리 보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놓는 진실한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 방식은 이전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식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기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십니다. 이 대목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있는 그대로 부리시고자 하십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벙어리를 만들고 귀머거리를 만들며, 누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거나 앞 못 보는 사람이 되게 하겠느냐? 바로 나 주가 아니더냐? 그러니 가거라. 네가 말하는 것을 내가 돕겠다. 네가 할 말을 할 수 있게, 내가 너에게 가르쳐 주겠다.”
이 말씀은 인간들이 각기 지니고 있는 어떤 결함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결함을 지니고 있을지언정, 그 결함을 지니고 있는 조건 그대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몫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어눌한 말주변을 달변으로 바꿔주지 않습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그 어떤 기적도 약속하시지 않습니다. 입이 둔한 것을 핑계대고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아주 인간적인 해결방식을 제시하십니다. “말 잘하는 네 형이 있지 않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해결방식입니다. 이것은 기적을 통한 해결방식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결함을 다른 사람의 장점으로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연대와 협력을 통한 해결방식입니다.
이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시사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진실의 힘이 드러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자신의 진실을 드러낸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모세 그 스스로도 찾을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을 제안하십니다. 이미 주어져 있는 조건 그 자체 안에 해답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대화할 때 많은 경우, 드러난 언어 그 자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드러난 그 언어의 뒤집어진 의미가 정말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경우가 흔합니다. ‘제가 이런 결함을 지니고 있기에 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모세의 고백은 그런 것입니다. 그 고백의 진실은 ‘제가 이런 결함을 지니고 있는데도 저를 쓰시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발뺌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결함을 감추지 않는 모세의 진실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주저한 것은 정말로 도망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놓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과정입니다.
그 진실을 인정받았을 때 모세에게 다른 두려움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신뢰를 받았고 파 라오 앞에서 당당하였습니다. 마침내 백성을 가나안 복지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지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진실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결함을 온전히 드러내놓고, ‘하나님 어찌해야 할까요?’ 묻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진실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앞길을 열어 주신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일러 주십니다.
물론 세상은 진실을 감추기를 즐깁니다. 진실을 감추는 사람이 더 행세합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그와 다릅니다. 그 세상과 역행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를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고, 그 어떤 장애도 극복하고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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