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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67-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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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2012.12.3일 http://www.john316.or.kr |
약점 때문에 생기는 장점
(눅 1:67-80)
지난 화요일에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할 집에 유리창 깨진 것, 미닫이문이 잘 안 열리는 것, 방충망이 곳곳에 파손된 것, 싱크대가 낡은 것 등 여러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목회자로서 불평하는 말을 하면 덕이 안 되니까 계약할 때 그냥 조용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을 보고 온 부동산 중개사가 총대를 메고 곤란한 말을 다 대신 해주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앞서서 깔아주는 것 같아서 중개사가 정말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그때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싱크대 문제였습니다. 중개사가 “싱크대가 너무 낡았으니 새로 해 달라!”고 하자 집주인이 4년밖에 안 된 것을 갈면 국가적으로도 낭비라고 거부했습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저도 집주인에게 딱 한 마디만 했습니다. “내가 입주자라면 그 싱크대를 그냥 쓸까 하는 마음으로 판단해주십시오.” 그러자 집주인도 조용히 있었습니다.
살면서 자신을 잘 다듬으려면 이런 성찰의 질문이 필요합니다. “내가 사장이라면 나 같은 사람을 쓸까? 내가 상대 거래처라면 나 같은 사람과 거래하고 싶을까?” 더 나아가 인물이 되려면 더 속 깊은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내가 사장이라면 나 같은 사람을 핵심적 위치인 재정 등기이사나 비서실장으로 쓸까?” 그런 질문에 “쓸 것이다.”란 확신이 들도록 자신을 다듬으면 조만간 자신을 이끌어줄 좋은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결국 중개사가 자신이 싱크대 값의 절반 정도를 부담하겠다고 해서 새 싱크대를 설치해주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중개사는 교회 권사였습니다. 그때 목회자를 위해 총대를 메주고 복비도 거의 안 받고 싱크대 비용까지 대준 그분을 보며 길을 예비해주는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어디서든지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라도 길이 잘 닦인 나라는 대개 잘삽니다. ‘성을 세우는 것’보다 ‘길을 잘 닦는 것’을 중시하면 마음도 커지지만 ‘길을 잘 닦는 것’보다 ‘성을 세우는 것’을 중시하면 마음도 작아집니다. 결국 “길 닦는데 주력할 것이냐? 성 쌓는데 주력할 것이냐?”의 선택에 따라 각 개인과 공동체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성을 세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길을 잘 닦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마 11:11)’라고 했습니까? 세례 요한은 구약의 기라성 같은 선지자에 비하면 오히려 행적이 초라합니다. 그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기적도 일으키지 않았고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다니엘처럼 예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지칭되는 이유는 그가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직접 예비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처음 예수님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또한 예수님의 위대성을 이렇게 나타냈습니다.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해야 하리라(요 3:30).” 그처럼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기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호칭된 것입니다. 총대를 메고 왕의 길을 예비하는 삶은 무엇보다 복된 삶입니다. 교회도 누군가 총대를 멘 사람이 있어야 리더십도 세워지고 부흥의 은혜도 입습니다.
< 사가랴의 찬양 내용 >
본문은 세례 요한이 탄생하자 그의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본문입니다(67절). 찬양 내용이 무엇입니까?
1. 돌보심과 구원하심
본문 68절 말씀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이 구절에서 ‘속량’이란 말은 “대가를 치르고 구원한다.”는 말로서 예수님의 보혈의 대가로 죄에서 구원받은 것을 뜻합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보시고 예수님의 피로 구원하실 것을 찬양함으로 자신의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계속해서 본문 69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뿔은 힘과 능력과 권세의 상징으로 ‘구원의 뿔’은 구원의 능력을 지닌 메시야를 뜻하고 ‘다윗의 집’은 다윗 가문을 뜻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의 압제와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가 다윗 가문에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대로 다윗 가문에서 메시야를 일으키셨다고 찬양합니다.
2. 예언대로 이뤄주심
본문 70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수많은 메시아 예언의 주인공이란 뜻입니다. 그 예언대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그 구원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과 맹세의 성취라고 노래합니다(71-73절). 인간은 수시로 하나님을 배반하며 실망시킵니다. 그때마다 그 백성을 외면하고 싶지만 언약을 기억하고 결국 구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온라인 새벽기도 이메일 사역을 하다 보면 가끔 이런 일이 생깁니다. 받는 사람이 스팸메일로 차단하거나 수신거부를 누르면 그 다음부터는 저희 시스템도 그를 수신거부자로 처리합니다. 그런데 간혹 수신거부자 중에 본인이나 지인이 다시 신청하거나 추천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수신거부자’란 붉은 글씨가 뜨면서 새로 가입도 안 되고 리스트에도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처럼 한번 거부하면 완전히 버림받는 시스템이 가끔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거부했는데 그 다음에 하나님의 생명책에 바로 빨간색 글자로 ‘이미 수신거부 했음’이란 싸인이 뜨면서 영원히 그 영혼이 천국에서 거부된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수시로 수신거부를 해도 새로운 기회를 주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긍휼의 하나님입니다.
3. 두려움이 없게 하심
본문 74-75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구원은 천국을 가는 축복만 의미하지 않고 평생 하나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사는 축복도 포함됩니다.
두려움은 상대는 크게 보이게 만들고 자신은 작게 보이게 만듭니다. 그처럼 심리적인 문제가 크기에 두려움에서 달아나려고 등을 보이면 두려움은 증폭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이기려면 오히려 똑바로 맞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주시고 모든 상황을 보시고 계십니다. 그 확신을 품고 두려움과 맞서 싸우면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4. 평강으로 인도하심
세례 요한은 일차적으로는 죄 사함의 구원을 알려주는 사명이 있고(77절), 이차적으로는 그 구원이 본문 78절에서 ‘돋는 해’로 묘사된 예수님을 통해 주어짐을 알려주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돋는 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은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또한 영접하는 자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한다고 노래합니다(79절). 그처럼 믿음은 단순히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평강의 길로 인도해줍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앞서서 길을 예비하시기에 우리가 어떤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미 길을 만들고 계십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참 신비합니다. 하나님은 깊은 고난에 빠질 때마다 깨달음과 함께 돕는 사람들을 보내주셨고 길이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신기하게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처럼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위해 최상의 길을 만들고 계십니다.
야곱은 피신하다가 돌베개를 베고 누웠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곳에 주님이 계신 것을 깨달았습니다(창 28:16). 그처럼 현재 우리가 선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계신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인식을 가지고 사셨기에 예수님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병자가 낫고, 귀신들린 자가 온전해지고, 낙심한 자가 살맛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런데 요즘 성도들은 예수님이 길이라고 하면서도 그 길로 걸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불편함과 위험이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신 길을 회피하면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선교하는 마음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존중해줄 때 그 길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삶과 영혼에 지극한 위로와 평강도 넘치게 될 것입니다.
< 광야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그처럼 본문에 나오는 사가랴의 찬양을 보면 메시야에 대한 기대와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일에 자기 아들인 세례 요한이 쓰임 받을 것을 영적으로 감지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또한 그런 사명감으로 아들을 키웠을 것입니다. 결국 그가 기대한 대로 세례 요한은 강한 심령을 가진 아이로 자랐고 빈들에서 고난과 고독을 극복하며 하나님의 쓰임 받는 인물로 자라났습니다(80절).
이 본문을 통해 배우는 또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광야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쓰임 받는 사역자로 준비되었습니다. 길을 예비하는 삶은 쉽지 않은 광야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 삶에는 남다른 축복이 예비되어 있기에 광야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광야는 잘 활용하면 축복을 예비하는 창조적인 장소가 되고, 광야에서 잘 준비하면 언젠가 반드시 크게 쓰임 받는 날이 옵니다.
물론 광야의 삶은 힘듭니다. 광야에는 생명의 냄새가 거의 없고, 갈증을 풀어주는 물도 없고. 포근한 안식처도 없습니다. 광야에 있는 것은 고독에 지친 몇 개의 식물, 독을 품은 전갈, 거친 바람, 그리고 견디기 힘든 일교차 등만 있기에 사람들은 광야를 싫어하지만 공교롭게도 많은 위대한 인물들은 광야로 내몰려 인물 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40년간의 왕자 생활을 뒤로 하고 40년간 광야에서 양치기 생활을 했습니다. 다윗도 왕이 되기 전까지 끊임없이 사울의 손을 피해 광야에서 지내야 했고, 엘리야도 갈멜산에서 하늘의 불을 끌어내리는 기적 직후에 광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지냈고 사도 바울도 은혜 체험 후 3년 동안 아라비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인물을 훈련시킬 때 광야로 내몰았고, 심지어는 예수님조차 공생애 시작 전에 성령에 의해 광야로 내몰리셨습니다(막 1:12).
그처럼 위대한 역사와 인물의 이면에는 늘 ‘광야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자아가 깨졌고, 다윗은 ‘광야’에서 지도자로 성숙되었고, 엘리야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고,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고, 사도 바울은 ‘광야’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원리를 깨달았고,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정수리를 깨고 인류구원의 시발점을 열었습니다.
성도에게 ‘광야’는 우연히 펼쳐진 것이 아니고 자기 혼자만 겪는 외로움의 극치도 아닙니다. 또한 ‘광야’는 나쁜 것만도 아니며 인생길에 늘 ‘광야’만 펼쳐지는 것도 아닙니다. ‘광야’는 창조의 장소이고 ‘광야의 순간’은 인생 발전에 큰 계기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감사하면서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그 길로 은총을 실은 마차를 타고 달려오실 것입니다.
< 너무 섭섭해 하지 마십시오 >
저는 지난 21년 전,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 소속 목사로서 선교의 꿈과 비전을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그 후 그 비전을 끊임없이 미국 선교본부에 도전했지만 미국 본부에서는 한국이 이미 상당히 복음화 되었다는 이유로 한국사역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모든 사역은 스스로 하고 공식적인 도움은 기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때마다 이런 교훈을 얻었습니다. “남의 도움을 기대하고 만나면 항상 실망뿐이다.”
누군가를 만날 때는 어떤 도움을 기대하고 만나지 마십시오. 그러면 항상 실망만 얻습니다. 그저 순수하게 얻겠다는 마음보다는 돕겠다는 마음으로 만나야 맘이 편합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저의 아버님은 미국 총회에 가서 가끔 들리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목사야! 미국에 올 때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라. 미국 교회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더 여유가 없다. 오히려 네가 돕겠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실제로 미국 목사님들도 넉넉하지 않아서 총회에 참석해도 큰 성과 없이 돌아올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섭섭한 감정이 문득 들기도 하지만 실제로 섭섭해 하지는 않았습니다. 최후의 자존감이 그 섭섭한 감정을 눌렀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섭섭해 하면 그처럼 무책임하고 자존감 없는 행위는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고 또한 살면서 섭섭해 하는 것은 인생 최대의 패배라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섭섭해 하는 감정은 대수롭지 않은 감정 같지만 사실상 인생 최대의 패배감입니다. 결국 섭섭해 하는 것은 인생 최대의 실패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섭섭한 현실을 만나도 실제로 섭섭해 함으로 인생 최대의 실패자는 되지 마십시오. 결국 무엇인가 없는 사람이 끝까지 지켜야 것은 ‘섭섭한 감정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비전을 향해 나가면서 많은 섭섭한 일을 당해도 누군가에 대해 섭섭한 감정은 가지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도움을 못 받은 것도 억울한데 섭섭한 감정까지 가져서 비참한 인생 패배자가 되기는 싫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섭섭한 일을 당할 때마다 섭섭한 감정으로 생기는 정신적인 큰 낙차 에너지를 내일을 준비하는 땀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미션퍼블릭, 네트영어, 온라인 새벽기도 등입니다. 그처럼 살면서 섭섭한 감정이 노도처럼 밀려올 때 그 밀물에 마음과 정신이 무너지지 말고 기도하면서 그 에너지를 창조적인 에너지로 승화시켜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에 활용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내일의 인물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오래 전에 미국 총회에 참석할 때 한국에서의 구체적인 사역 계획을 총회 안건으로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총회 첫날 의사 자료를 보니까 감독님이 그 안건을 임의로 기각해서 의사 자료에서 뺐습니다. 멀리 한국에서부터 꿈과 비전을 나누려고 시간과 돈을 들여서 왔는데 너무 무관심한 것 같아서 섭섭했습니다. 그때 섭섭한 감정에 사로잡혀서 바로 다음 날 귀국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호텔에서 기도하면서 생각이 바뀌어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이때 무너지지 말자! 아직 때가 안 되었다. 때를 기다리며 더 준비하자!”
그 후에 비전 문제로 섭섭한 감정이 들 때마다 계속 중얼거린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이때 무너지지 말자! 아직 때가 안 되었다. 때를 기다리며 더 준비하자!” 지나고 보니까 그런 과정들이 있었기에 지금처럼 한국에 지역회도 생기고 여러 목사님들도 동참하게 되었으며, 또한 여러 가지 비전이 점차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한 길을 막으실 때는 반드시 다른 더 좋은 길을 준비해 두십니다. 그러므로 길이 막혀도 믿음과 비전은 잃지 마십시오. 때가 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요새 건강에 관심들이 많지만 사실상 “얼마나 오래 사느냐?” 하는 문제보다 “살면서 어떤 선한 열매를 남기느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교회와 이웃을 섬기며 최선을 다해 선교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은 성도를 바로 천국에 들이지 않고 왜 이 땅에 남겨두셨습니까?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 섬기고 나누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나눌수록 더 풍성해지고 행복해집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눈이 점차 나빠지는 문제로 고민하다가 기발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 동안 오른쪽 눈만 사용하다가 그 눈이 나빠지면 왼쪽 눈을 사용하자고 결심하고 왼쪽 눈을 가리고 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오른쪽 눈이 나빠져서 “이제 왼쪽 눈을 사용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왼쪽 눈을 풀자 왼쪽 눈은 아예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끼는 것’이 아니라 ‘망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동굴에 사는 동물들의 눈은 다 퇴화된 것입니다. 그처럼 구원받은 성도들이 사명을 따라 살지 않으면 인생의 기쁨과 행복은 점차 사라집니다. 왜 우리는 더욱 선교해야 하고 더욱 나누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까? 그것이 내 영혼이 사는 길이고 행복해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앞서서 총대를 메고 닦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약점 때문에 생기는 장점 >
이제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마음으로 현재 작은 일이 맡겨졌어도 그 작은 일에 충성하십시오.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큰일을 맡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얼굴에서 가장 두드러져 있는 코만 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보이지 않는 심장, 폐, 신장 등도 다 중요합니다. 그처럼 은밀한 곳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교회는 건강해집니다. 때로는 은밀하게 펼쳐진 작은 일이 큰일로 판명될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오래전에 두 소년이 한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앉을 자리가 없어서 두리번거리다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한 안내자가 그들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얘들아! 앉을 곳을 한번 찾아볼까?” 그렇게 찾다가 마침내 아래층 구석에 두 자리가 비어 있어서 그곳에 소년들을 앉혔습니다. 그때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그 중의 한 소년이 바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었습니다. 결국 그 무명의 안내자가 빌리 그래함을 만드는데 일조한 것입니다.
사실상 교회 일에는 작은 일이 없습니다. 지금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가장 위대한 일이고 그 일을 감당하는 시간이 가장 위대한 시간입니다. 또한 교회에는 작은 자도 없습니다. 작은 자란 축복 받고 자기만 위해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약한 자는 작은 자가 아닙니다. 없는 자도 작은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한 사람과 없는 사람을 사용하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약함과 없음을 탓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약한 것들을 택해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고전1:27).
하나님은 약점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성을 드러내실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는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일을 멋지게 이룬 얘기들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노인이었고, 모세는 말더듬이였고, 기드온은 가난했습니다. 라합은 창녀였고, 다윗은 간음과 살인을 했고, 엘리야는 자살을 생각했습니다. 요나는 마지못해 일했고, 세례 요한은 행동이 괴팍했고, 베드로는 성격이 불같았습니다. 삭개오는 왕따의 대명사였고, 도마는 의심이 많았고, 바울은 건강이 약했지만 그들 모두 얼마나 멋지게 쓰임을 받았습니까?
이제 자신의 약점 때문에 인물이 못 된다고 핑계하지 마십시오. 약점은 약점대로 인정하면서 약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면 오히려 그 약점을 통해 더욱 멋진 장점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은 약점 때문에 누군가를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약점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함을 드러내시고 큰일을 이뤄주실 것입니다. 또한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약점을 가지고 무엇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큰일을 이룬 것으로 인해 누구보다 더욱 칭찬 받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모습이 연약해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면 하나님이 우리 비전과 사역을 축복해서 많은 선교사를 배출하고 후원하면서 세계선교를 멋지게 하며 재림하실 주님의 길을 누구보다 잘 준비하는 복된 공동체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가 지음 받았고, 구원받았고, 또한 우리 교회가 생긴 줄 믿습니다. 그 창조와 구원의 목적을 멋지게 이루고 재림하실 주님의 길을 잘 예비함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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