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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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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2012.12.11 http://www.john316.or.kr |
천국을 내 안에서 이뤄가라 (요한복음 21장 10절)
미국에 소냐 카슨이라는 흑인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고아로 자라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13세에 처음 동거를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동거남은 유부남이었다. 곧 그 남자는 도망갔고, 그녀는 절망 중에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다.
어느 날, 그녀가 예수님을 만났다. 그때부터 새 삶이 시작되었지만 환경은 좋아지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항상 꼴찌만 하던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11살 때 친구와 말다툼 끝에 칼로 친구의 배를 찔렀다. 다행히 친구는 살았지만 그는 학교에서 살인미수자란 오명을 썼다. 그래도 그녀는 희망을 잃지 않고 아이가 없을 때는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했고, 아이가 있을 때는 웃으며 아이를 위로했다. “벤! 넌 공부 잘 할 수 있어! 힘들면 기도해! 하나님이 너를 도와주실 거야!”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 결국 아들도 예수님을 믿고 꿈을 품었다. 꿈을 품자 공부할 마음이 생겼고, 지혜와 집중력도 생겼다. 결국 그는 예일 대학과 미시간 대학의 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30대 초반의 나이에 세계최고의 병원인 존즈 홉킨즈 병원의 소아외과 과장이 된다. 그가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수술에 성공한 벤 카슨이다. 미국 언론은 그를 ‘기적의 손’이라고 하는데, 그는 수술 때마다 항상 먼저 기도했다. ‘기도의 손’은 ‘기적의 손’을 만든다.
요즘 위기라고 하지만 역사가 위기 아닌 때는 없었다. 요즘 공부가 힘들다지만 옛날도 공부가 힘들었고, 요즘 취직이 힘들다지만 옛날도 취직이 힘들었다. 요즘 진짜 위기는 문제를 극복하는 정신 능력이 과거보다 약해진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기도의 손과 위로의 말이 필요하다.
어느 날, 한 회사 중역이 모처럼 아들에게 말했다. “얘야, 오늘 한 직원이 나보고 감사하다고 이 파랑 리본을 달아주더라. 그리고 리본 하나를 더 주며 소중한 사람에게 달아주라고 해서 소중한 사람을 생각해보니 바로 너였어. 아빠가 회사 일에 바빠 너랑 함께 하지 못하고 야단만 쳤는데 아빠를 용서할 수 있지? 아빠에게는 네가 정말 소중해!”
그리고 아들 가슴에 리본을 달아 주자 아들이 눈물 흘리며 말했다. “아빠, 사실은 아빠가 저를 싫어하는 줄 알고 내일 자살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젠 죽지 않을래요.” 부모가 힘들 듯이 자녀도 힘들다. 그 자녀의 얼굴에 미소를 회복시키려는 부모의 사랑과 관심과 기도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 주님은 어떤 분인가? >
본문에는 그런 주님의 사랑과 관심이 잘 드러나 있다. 7절에서 베드로는 요한의 “주님이다!”라는 소리를 듣고 헤엄쳐 누구보다 먼저 주님께 왔지만 바닷가에 놓인 숯불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얼마 전 숯불 앞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베드로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있자 다른 제자들도 덩달아 아무 말도 못했다.
그 침묵을 깨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와!” 무거운 마음으로 “왜 배반했어! 왜 기다리지 못했어!”라는 책망을 예상했는데 너무 편하고 따뜻한 말씀이었다. 이 한 마디 말씀은 “주님은 어떤 분인가?”를 잘 알려준다. 주님은 어떤 분인가?
1. 위로하시는 주님
주님이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을 위로하려는 주님의 간접적 위로 방법이었다. 위로할 때 ‘위로하는 말’보다 간접적인 위로가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초상집에 가서 “삼가 심히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는 것보다 상주의 손을 한번 꽉 쥐어주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된다.
주님은 ‘생선 얘기’로 제자들을 위로하기를 원하셨다. 그때 제자들은 아무 것도 주님께 내세울 게 없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 마음도 자기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가진 것은 그물에 가득 찬 고기뿐이었다. 그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생선 얘기’를 통해 제자들이 “우리가 아직 주님께 드릴 게 있구나!”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 그들의 자존감을 세워주셨다.
받을 생각만 하면 삶이 공허하지만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묘한 힘이 솟는다. “주님이 나를 필요로 하시고 나의 동역을 원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 힘이 난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맡기신다. 주님의 사명을 외면할수록 공허감과 불안과 우울함은 커지지만 주님의 사명에 헌신할수록 만족과 평안과 기쁨이 커진다.
어느 날,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 얼굴이 어두웠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겠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현명한 부모는 “너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말해 봐!”하고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다. 만약 아이 입에서 “선생님이 너무 불공평해요.”라는 말이 나오고, 그 말을 듣고 부모가 씩씩거리며 “어떻게 그래!”라고 하면 자녀교육에 나쁜 영향을 준다.
그때 현명한 부모는 아이의 어둔 얼굴을 못 본 척 하고, 아이를 격려하려고 아이가 짧은 시간에 가장 잘 할 수 있는 쉬운 부탁을 한다. “얘야! 이것 좀 해줄래!” 아이들에게 그 “해줄래!”라는 말이 때로는 “해리포터 영화 보러 가자!”라는 말보다 아이의 우울한 마음을 털게 하는데 더 큰 힘을 준다. 그 요청을 아이가 들어줄 때 “정말 고맙다!”고 말하며 껴안아주면 금방 아이의 마음이 풀린다.
그처럼 주님은 제자들이 뭘 해야 할지 모를 때 그들이 그 상황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부탁함으로 그들을 위로하셨다. 결국 하나님이 내게 사명을 주시는 것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게 힘과 능력과 자존감과 기쁨과 만족과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실업자는 하나님을 위해 할 일이 없는 영적 실업자이다.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고, 하다못해 교회 청소라도 할 수 있는 것이 내 존재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그 작은 행동조차 큰 행복의 조건이다. 무엇이든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2. 용서하시는 주님
주님이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신 말씀에는 제자들을 위로하려는 마음도 담겨 있지만 “내가 이미 너를 용서했다!”는 뜻도 담겨 있다. 그 용서를 통해 주님은 제자들의 영적 암 덩어리를 제거하고 그들을 위대한 사명자로 만드셨다. 그것이 용서의 힘이다.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고 영적인 거인이 되려면 ‘용서의 용광로’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진정한 용서는 쉽지 않다. 그러나 진정으로 용서받고 용서하면 축복과 신앙성장을 막는 거대한 걸림돌이 제거된다.
용서(forgive)란 말의 원뜻은 ‘풀어놔주는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원수와 원수의 죄까지 붙들고 있는 것’이다. 마치 수류탄을 들고 있는 것과 똑같다. 계속 붙들고 있으면 내가 불안하고 언젠가는 그 수류탄이 터져 원수보다 내가 먼저 죽는다. 용서하는 것은 ‘원수와 원수의 죄까지 내던지는 것’이다. 멀리 내던질수록 마음에 평안이 찾아온다.
복된 삶을 살려면 원수 사랑과 용서는 필수적이다. 장발장에서 장발장을 끈질기게 쫓던 형사 자벨이 프랑스 혁명으로 잡혀 죽게 되자 장발장은 사람들을 설득해 그를 풀어준다. 그때 자벨이 “나를 가장 죽이고 싶을 텐데 왜 살려주느냐?”고 묻자 장발장은 대답했다. “세상도 넓고, 바다도 넓지만 용서하는 마음은 더 넓다.”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삶은 용서하는 삶이다. 죽을 때 가장 후회가 되는 삶은 용서하지 못한 삶이다. 용서와 화해를 모르면 아무리 잘나가는 인생도 불행한 인생이다. 영적인 암 덩어리가 계속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용서를 받고 그 주님사랑을 실천해 모든 사람을 용서한 사람은 누구보다 부자이고 행복한 자이다.
3. 헌신을 원하시는 주님
본문에서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는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이미 숯불 위에 생선을 굽고 계셨다. 그런데 주님이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줄 생선을 다 준비해 구워 놓지 않았다는 말도 된다. 여기서 우리의 동역을 원하는 주님의 뜻을 찾게 된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준비할 수 있지만 내 것을 받으시고 그것을 통해 일을 이루기를 기뻐하신다. 벳새다 광야에서 주님은 친히 오천 명을 먹일 수 있지만 어린아이의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받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다.
주님은 고기를 받고 더 좋은 구운 고기로 되돌려 주시려고 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처럼 주님은 더 큰 축복을 주려고 내 것을 내어드리기를 원하신다. 헌신이 없는 부, 쓰임 받지 못하는 축복은 오히려 진노의 제목이다. 드림이 없는 삶엔 과시는 있어도 보람은 없다. 모험이 없는 성공이 없고, 투자가 없는 이익이 없듯이 영적 세계에서도 드림이 없는 은혜와 축복은 없다.
< 드림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 >
요새 많은 가정이 붕괴되는 가장 큰 이유는 헌신이 없기 때문이다. 요새는 결혼식 때 연주되는 결혼행진곡이 “행복의 문 열려라!”로 들리지 않고 “고생의 문 열렸네!”라고 들려진다. 실제로 믿음과 헌신이 없으면 고생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 결혼생활이다. 왜 어떤 사람은 돈도 많고 행복의 조건이 많은데 이혼하는가?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헌신에 있기 때문이다.
헌신이 없으면 축복도 없고 행복도 없다. 사람은 헌신해야 행복할 수 있다. 헌신해야 사람도 얻고, 행복도 얻고, 성공도 얻는다. 공허감은 헌신하라는 하나님의 싸인(sign)이다. 나로부터 나가는 것이 없으면 내 안에 꽉 차는 느낌이 없다. 외로움도 헌신하라는 싸인이다. 헌신해야 진정한 친구도 생긴다.
행복과 축복은 멀리 있지 않다. “나는 행복의 조건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행복의 조건은 내 안에 있고, 내 태도 속에 있다. 내 안에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행복의 심지를 다듬는 것이 행복의 조건을 찾아 헤매는 것보다 낫다. 행복의 조건이 10개라도 나누지 못하면 행복이 없고, 행복의 조건이 하나라도 나누면 행복이 있다.
행복은 삶의 구조조정에서 나온다. 10개의 축복조건을 5개로 줄이며 드림과 헌신을 실천할 때 행복은 찾아온다. 위인이란 ‘영적 구조조정을 통해 축복받은 사람’이다. 현재의 삶을 떠나야 삶의 지평이 넓어지고, 내 것을 자르는 용기 있는 헌신이 있어야 더 많은 영적인 것을 얻는다.
엘리사가 소명 받을 때, 그는 열 두 겨릿소, 즉 24마리의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다. 그처럼 거부였지만 엘리야가 부르니까 고생길이 훤해도 즉시 응답했다. 그리고 소 두 마리를 잡아 소의 기구를 불사른 불로 고기를 삶아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즉시 엘리야를 따랐다. 미련이 남지 않도록 옛날의 거부생활로 돌아갈 다리를 태워버린 것이다. 결국 그런 헌신으로 그는 엘리야보다 갑절의 영감을 얻게 된다.
‘나’를 드림이 없이 은혜도 없다. 드리지 않고 받기를 원하는 기복주의는 헛된 환상이다. 땀이 없는 성취는 없고, 드림이 없는 은혜는 없다. 반면에 받은 은혜가 감사해 기쁘게 드리면 지금보다 갑절의 영감과 축복과 열매를 얻는다.
< 나눔이 없으면 축복도 없다 >
‘주님께 드림’이 없으면 축복이 없듯이 ‘이웃과 나눔’이 없어도 축복이 없다. 주님께 드리는 것만큼 이웃과 나누는 것도 중요하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받기는 좋아하고 주기는 싫어하기에 ‘주는 삶’은 성숙한 인격과 풍성한 은혜의 표시이다. 믿음의 위대함은 하나님께 좋은 것을 드리고 이웃과 좋은 것을 나눌 때 드러난다.
옛말에 “황금을 돌처럼 보라!”는 말이 있다. 욕심을 버리라는 말이지만 너무 소극적인 말이다. ‘황금을 외면함’으로 욕심이 없는 사람이 되기보다 ‘황금을 나눔’으로 욕심이 없는 사람이 되라. 그런 의미에서 황금을 생명처럼 볼 수도 있어야 한다. 돈을 돌처럼 생각하고 소유 자체를 멀리하지 말고 돈을 생명처럼 생각하고 생명을 나눠주듯이 자기 소유를 나누라.
자세히 보면 돈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돈도 나눠준다. 돈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사치스럽게 돈을 쓰지만 돈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돈을 잘못된 것에 쓰지 않고 좋은 일, 뜻 깊은 일,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쓴다.
가치 있는 삶을 살려면 물질을 생명처럼 보라. 물질을 생명처럼 여길 때, 생명처럼 귀하게 사용한다. 물질을 생명처럼 여기고 나눠주면 물질을 나눔으로 생기는 빈자리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풍성한 것들로 채워주신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생명처럼 귀하게 관리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라. 물질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 물질을 쌓아놓기만 하면 그것은 반드시 독이 된다. 반대로 욕심을 버리고, 돈을 선하게 쓰면 돈은 큰 유익이 된다. 그러므로 선교와 구제는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 큰 관심거리가 되어야 한다.
선한 사람은 돈을 버는 것도 선하게 벌고 쓰는 것도 선하게 쓴다. 악한 사람은 버는 것도 악하게 벌고 쓰는 것도 악하게 쓴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물질을 모으고 사용하는 것을 보면 대개 구분된다. 나누는 삶에 사람다움과 성도다움이 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밥상을 앞에 놓고 함께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 것이 다르다. 천국이 어디인가? 나누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마음의 천국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나눌 때 이루어진다.
조용히 나누는 삶을 최대의 관심거리로 삼으라. 선교와 구제에 최선을 다하고 전방 선교사들을 최선을 다해 후원하라. 선교사는 나를 대신해 안락함을 포기하고 복음의 최전선에 간 분이다. 그를 위해 후방에서 최선을 다해 헌신하라. 소리 없는 헌신을 사람은 기억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반드시 기억해주신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신다.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라!” 그 말씀에 응답해 내 것을 드리고 나눔으로 천국의 삶을 내 안에서부터 이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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