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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소멸시키는 사랑

누가복음 이한규 목사............... 조회 수 2304 추천 수 0 2013.01.07 18:5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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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2:1-14 
설교자 : 이한규 목사 
참고 : 2012.12.26 http://www.john316.or.kr 

자기를 소멸시키는 사랑 (누가복음 2장 1-14절)

 

< 악이란 선의 결핍입니다 >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복을 주신 일입니다(창 1:28). 결국 인간은 원죄가 아닌 원복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로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복하고 다스린다는 말은 ‘조정자’란 뜻이지 ‘지배자’란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조정자로서 만물을 돌보는 책임을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하나님의 문화 사명’ 혹은 ‘하나님의 문화 명령’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파괴하고 복을 차버리는 것이고 자연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을 준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명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축복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잘 낳아 잘 키우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우리를 낳은 분은 부모님이지만 우리를 이 땅에 보낸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도 있고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의 어떤 선하신 뜻이 있어서 이 땅에 태어난 소중한 존재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보고 “누구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누구보다 소중한 하나님의 천사 및 선지자로 여기고 더 나아가 예수님처럼 대할 때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와 구제에 힘을 써야 할 이유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에게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를 먹을거리로 주시고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신다.”고 했습니다(창 1:29-30절). 그처럼 원죄 이전에는 채식을 하고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복을 주셨고 모든 짐승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죄와 폭력이 들어오면서 맹수도 생겼고 사람의 육식 문화도 생겼습니다.
 
사실상 사람의 입은 생명의 무덤입니다. 수많은 생명이 그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살 수밖에 없기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나를 위해 죽어간 그 생명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면 사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은 소박한 밥상 앞에서 경건하게 두 손을 모으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식사를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야 합니다. 모든 식탁이 생명의 희생으로 주어진 것이기에 함부로 음식물을 낭비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남은 음식을 거두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은 결국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일용할 양식을 평화롭게 얻게 된 것도 큰 복입니다. 그런 복들을 주시고 하나님이 흡족하셔서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다.”고 했습니다(창 1:31).
 
사람은 창조 질서대로 살 때 심히 보기 좋게 됩니다. 그런데 그 질서가 깨졌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인간은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즉 뱀의 유혹에 넘어가 본분을 잃고 무한권력을 휘두르려다가 화를 자초한 것입니다. 복은 자유의 한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악이나 악마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세상에 이렇게 악과 악마가 많습니까? 사실상 악마를 만든 것은 사람입니다. 즉 마음속의 교만과 미움과 죄가 형태화된 것도 일종의 악마입니다. 결국 악마를 키우는 것은 사람 자신입니다. 어거스틴은 세상에 있는 악의 현실 때문에 번민하면서 “선한 하나님이 악을 만들지는 않았을 텐데 왜 이렇게 악이 많을까?”하고 고민하다가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악이란 선의 결핍이다.” 결국 성도가 빛을 비추며 살지 않는 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 지나친 죄책감을 버리십시오 >
 
어두운 방에 불을 켜면 금방 밝아집니다. 빛은 어둠을 이깁니다. 아침이 되면 어둠은 사라지고 새벽닭이 울면 도깨비는 물러갑니다. 결국 악의 문제는 빛이 없는 문제입니다. 빛은 사랑과 이해이고 포용인데 죄로 인해 그 빛이 감춰진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원복을 원죄와 바꾼 인간이 다시 원복을 회복하고 빛 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성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신의 부족한 모습으로 인해 너무 죄책감이 빠지지 말고 주님 안에서 원복이 회복된 존재로서 빛을 비추며 사십시오.
 
 일전에 이런 꿈을 꿨습니다. 꿈에서 식사하는데, 갑자기 탁자 밑에 생쥐 한 마리가 나타나 빤히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너무 밥맛이 없어서 신문지를 둘둘 말아서 만든 종이 막대기로 생쥐를 힘껏 때렸습니다. 그러자 그 쥐가 얻어맞고 벌러덩 눕더니 저를 쳐다보며 소리쳤습니다. “당신이 목사야! 목사가 사랑도 없이 소중한 생명을 함부로 해!”
 
 그 말을 듣고 더 약이 올라서 다시 종이 막대기로 쥐를 때렸습니다. 곧 쥐가 완전히 뻗었습니다. 그런데 그 쥐의 말이 맘속에 맴돌면서 약간 자책감이 생겼습니다. “내가 생명을 너무 경시한 죄를 지은 것은 아닐까?” 그런 죄책감이 생기려고 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로마서 8장 1절 말씀이 귓전에 생생하게 들리면서 동시에 고기를 멀리하다가 고기를 먹게 된 때가 꿈속에서 생각났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시골에서 돼지 잡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고기를 거의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은 착한 동물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았고, 약하고 힘없는 동물의 귀한 생명을 취하는 사람이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학 4학년 때 믿음이 깊어지면서 “하나님이 노아의 홍수 후에 동물도 사람의 먹을거리로 주셨으니까 고기를 먹어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조금씩 고기를 먹던 일이 떠오르면서 꿈속에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지금도 수시로 죄책감 속에 눌려 살았겠지.” 그러자 꿈속에서도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사실이 너무 감사하게 느껴져 가슴 벅차게 찬양하다가 꿈에서 깼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이제 살면서 부족한 모습을 보여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담대하게 살자.” 그렇게 다짐하자 새 힘이 났습니다. 적절한 죄의식은 필요하지만 지나친 죄책감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 예수님으로 인한 변화 >
 
 예수님은 생각만 해도 힘이 납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마음에 평안이 생기고, 생각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서 환경도 바뀝니다. 유럽의 이방지역으로 버림받았던 섬에 예수님이 들어가 대영제국이 되었습니다. 떠돌이 게르만 민족에게 예수님이 들어가 놀라운 문명이 꽃피게 되었고, 황무한 미 대륙에 예수님이 들어가 지금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발전한 것도 사실상 복음의 역할이 대단히 컸습니다.
 
 19세기 말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학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우면서 여성도 비로소 교육을 받았습니다. 옛날에는 딸로 태어난 것이 비극이었고, 여자의 삶은 눈물의 연속이었습니다. 태어날 때 울고, 시집살이로 울고, 애 낳을 때 울고, 죽는 날까지 우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런 여성들을 위해 선교사들은 이화, 정신, 숭의 등의 여학교를 세워서 선진문화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관혼상제도 우리 민족의 삶을 짓눌렀습니다. 냉동실이 없어서 시체가 다 썩는데도 9일장, 21일장, 39일장까지 했습니다. 썩어가는 시체 앞에서 계속 울다가 양식이 다 떨어지고 고추장과 된장까지 떨어져야 비로소 장례식이 끝났습니다. 장례 후에도 돌아가신 부모를 생각하며 효도한다고 몇 년간 우니까 발전할 틈이 없었습니다. 그때 선교사들이 3일장을 권하자 다 상놈이라고 욕했지만 지금은 다 잘했다고 합니다. 일 문제에서도 옛날에는 결사적으로 일을 안 해야 양반이었지만 선교사들은 노동은 신성한 것이고 땀을 흘려야 진짜 양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종교 문제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꼭 잡고 있는 것은 귀신이었기에 사실 우리나라를 다스린 존재는 왕이 아닌 귀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귀신에 사로잡혀서 사업도 그냥 못하고, 못도 그냥 못 박고, 땅도 그냥 못 파고, 된장도 그냥 못 담갔습니다. 그처럼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해야 할 존재가 오히려 만물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소나무가 말라죽으면 소나무 귀신이 있다고 무서워서 베어내지도 못하고 구경만 했습니다.
 
어느 날, 한 장로님이 귀신 소나무를 베어내려고 할 때 무속인이 위협했습니다. “너희 집안은 3대가 망해!” 그러나 그 장로님은 태연히 그 소나무를 베어다가 일 년 동안 땔감으로 잘 사용했습니다. 그처럼 귀신과 관습에 매여 두려움에 젖어 살던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져서 사망과 저주가 물러가고 생명과 축복이 왔습니다.
 
 신앙이란 잘못된 것을 고치려는 것도 있지만 좋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있습니다. 사실 잘못된 것을 고치려는 것보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어둠의 세력은 물러갑니다. 결국 성탄절은 이 땅에 어둠이 물러가고 영원한 구원의 빛이 비취게 된 날입니다.
 
< 마음의 빈방을 준비하십시오 >
 
 본문에는 예수님의 탄생상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예수님 탄생 당시 로마의 옥타비아누스 황제는 자신이 이룬 대제국의 유지를 위해 많은 군인과 국방비를 필요로 했습니다. 또한 로마의 여러 시설을 위한 건축비까지 필요해서 인두세를 걷고 군인을 징집하려고 매 14년마다 모든 백성들이 본적지에 가서 호적 정리를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명령이 떨어지자 요셉도 본적지가 다윗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가 징계 받은 역사가 있기에 체질적으로 인구조사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요셉도 가기 싫었겠지만 그 굴욕적인 인구조사 명령은 사실상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을 있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결국 하나님 안에만 있으면 굴욕감을 느끼는 일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선의 재료로 활용됩니다.
 
 그 호적 명령으로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본문 6-7절 말씀을 보면 마침 마리아의 해산할 날이 되어서 요셉은 진통하는 아내를 데리고 여관방을 구하러 다녔지만 메마른 인심에 방을 못 구했습니다. 결국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님을 낳고 구유에 아기 예수님을 눕히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사람이 예수님께 처음으로 드린 것이 구유였고 마지막으로 드린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얼마나 못된 인간입니까?
 
 만약 지금 주님이 이곳에 오셨다면 방을 구하셨을까요? 아마 역사상 어느 때보다 방을 더 못 구하실 것입니다. 그만큼 헌신이 부족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이 될 때마다 마음의 빈방을 겸손하게 준비하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십시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예배와 기도를 위한 시간은 비워 놓고 아무리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헌신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마음의 방이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면 주님이 오셔서 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왜 당시 여관집 주인들은 메시아의 탄생을 맞는 최대의 축복 기회를 놓쳤습니까? 사람들이 몰려드는 상황에서 돈 버는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께 빈방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먹고사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예배와 헌신이 훼손되지는 않게 하십시오. 예배조차 못 드릴 정도로 바쁜 일터는 바른 일터가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과 물질의 대결에서 하나님을 패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빠도 교회와 가정을 위한 시간만은 힘써 내십시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뭔가를 잘해야만 행복을 느낍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안 되면 좌절합니다. 반면에 다른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자체로 행복을 느낍니다. 그래서 즐길 줄 알고, 마음의 여유가 있고, 남을 배려하고, 치열하게 살면서도 묵묵히 앞날을 개척합니다. 또한 그런 사람은 바빠도 교회와 복지시설 등에서 최고의 숨은 봉사자로 탄력 있게 살면서 남들에게도 큰 기쁨을 줍니다. 그처럼 시간의 횡포를 이겨내고 삶을 잘 연출하는 사람이 진짜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대개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할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다음에 하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생이 짧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을 미루지 말고 더욱 하나님 앞에 머물고 숨은 봉사자로 섬기려는 시간을 힘써 내십시오. 하나님이 내 시간을 요구할 때 “하나님! 죄송해요! 다음에 할게요!”라고 하면 그 일을 통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놓치지만 힘들어도 소중한 시간을 드리면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말합니다. “목사님! 바쁘게 살아도 살기 힘든데 주일날 놀면 어떻게 삽니까?” 그리고 주일예배만 나오는 분은 새벽예배까지 나오는 분에게 말합니다. “집사님! 어떻게 새벽예배까지 나옵니까? 그렇게 시간이 많아요?” 그러나 시간이 많아서 나오는 것이 시간을 구별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거북이가 오래 사는 이유는 느리게 걷고 여유 있게 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동차도 천천히 몰면 몸과 마음이 편하지만 조금 빨리 가겠다고 빨리 몰면 몸과 마음이 상하거나 사고가 나서 아주 빨리 가는 수가 있습니다. 이제 예배와 기도와 말씀 묵상과 봉사 시간을 힘써 내고 열심히 나눔을 실천하면서 생업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처럼 돈을 벌 때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벌 때 그 물질적인 축복이 진정한 축복이 될 것입니다.
 
< 예수님처럼 낮아지십시오 >
 
 또한 본문에서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뉘이셨다는 사실은 삶에 실제적인 도전을 줍니다. 즉 주님의 삶의 처음이 구유였고 마지막이 십자가였는데 우리의 삶은 너무 화려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마구간이나 구유보다는 너무 화려한 건물만 좋아하고 교인들은 십자가의 길보다는 명예와 권세와 부를 얻는 길만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러면 하늘에는 영광이 되고 땅에는 평화가 되는 삶이 펼쳐지기 힘듭니다.
 
 이제 구유 및 십자가와 조금 더 가까워지십시오.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고, 봉사 받기보다는 봉사하며 자기를 버리고 죽이려고 하십시오. 성도가 가난하고 병들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조금 더 분담하려고 할 때 마음의 평화도 생기고 그가 속한 교회는 아기 예수님을 오늘날 이 땅에 탄생시키는 복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어떤 노동자는 자기도 힘들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제 가난한 사람들이 살기 힘든 추운 겨울이 왔습니다. 얼어 죽는 사람 없게 하시고, 연탄 때는 사람들이 연탄가스로 중독되지 않게 하시고, 추운 날씨에 일거리가 없어 굶는 가정이 없게 하소서.” 그처럼 이웃을 향해 마음을 줄 줄 아는 사람이 진짜 부요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한 수도사가 추위에 떠는 거지를 보고 외투를 벗어주며 그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날 밤 예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어젯밤 네 덕에 따뜻하게 잘 잤다!” 그처럼 예수님은 작은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면 ‘신비한 어떤 방법’을 찾기보다 ‘작은 사람’을 찾아 사랑을 전달하십시오. 그것이 진짜 예수님을 만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의 메시지를 전할 때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하자 세례 요한은 누가복음 3장 10-11절에서 이런 말했습니다. “옷 두 벌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먹을 것도 그렇게 하라.” 회개 및 주님을 영접한 신앙의 최대 열매는 바로 ‘나눔’입니다. 그처럼 욕망을 낮추고 선교하는 마음을 가질 때 평화가 꽃피게 됩니다. 늘 덜 가진 상황에서도 더 많이 나누고 누리면서 평화롭게 사는 훈련을 끊임없이 하십시오.
 
< 자기를 소멸시키는 사랑 >
 
 주님이 성육신하신 가장 큰 목적은 이 땅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 말씀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과 ‘사람들 중에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하나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평화의 중재자로 살기를 힘쓰십시오. 상처와 갈등을 기도와 감사로 승화시키면 자신도 행복해지고 은혜와 축복도 넘치게 됩니다.
 
 10년 쌓은 우정도 한번 감정이 틀어지면 완전히 망가지지만 10년 틀어진 관계도 주님의 말구유와 십자가를 생각하고 마음만 잘 먹으면 금방 회복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따라 평화의 문을 두드리면 정말 평화의 문이 열리고, 동시에 축복의 문도 열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성도는 용서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처럼 사랑과 용서와 평화를 추구하며 살면 그것이 하나님께 최고로 영광 돌리는 삶이 됩니다. 예수님 믿는 최고의 표적 중의 하나가 바로 평화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맹인이 눈을 뜨면 기적이 일어났다고 대단해하지만 사실상 그런 기적(miracle)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평화의 표적(sign)입니다. 그런 평화의 표적(sign)이 있는 영성이 진실한 영성입니다.
 
 어떻게 해야 평화를 얻습니까? 자기를 소멸시키는 성육신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누구를 뜨겁게 사랑하면 점차 자신이 없어집니다. 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고집이 꺾입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자존심만 내세우는 것은 성격이 더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진짜 사랑하면 자존심은 죽고 자존감만 살아납니다.
 
 저는 유행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유행가 가사 중에 최고로 여기는 가사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애모>라는 노래에 나오는 “그대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는가?”란 가사입니다. 그처럼 누군가를 사랑하면 자기는 작아집니다. 그러다가 그 사랑이 커지면 나중에 자기가 소멸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랑이 깊어지면 알아도 모르는 척 하고, 있어도 없는 척 하고, 유능해도 무능한 척 자기를 감춥니다.
 
목회자도 “못해!”를 잘할 때 ‘목회’도 잘합니다. 목회자가 너무 똑똑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까지 다 꿰뚫고 있으면 오히려 목회를 못합니다. 다 잘할 필요 없이 한두 가지만 잘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목회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능력이 있어도 성육신의 사랑으로 자기를 감출 줄 알아야 누군가의 마음도 얻고 좋은 인맥도 얻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그런 성육신의 사랑을 통해 평화와 행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마음을 항상 베들레헴의 구유로 향하고 낮아지신 아기 예수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경배하십시오. 비유적인 의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은 쉽지만 ‘말구유의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성육신의 사랑에 감동하고 예수님처럼 자기를 소멸시키는 겸손한 성육신의 삶을 추구할 때 하나님이 그 마음과 삶에 찾아와주실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말구유에는 기적도 없고, 화려한 빛도 없고, 영광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박한 구유가 모든 절망을 버리게 한 희망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말구유에서 희망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번 성탄 시즌에 초라한 아기 예수님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보는 믿음의 눈을 회복해서 화려한 바벨탑을 떠나 베들레헴 구유로 내려가는 삶의 결단을 통해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최고의 표적인 평화를 얻고 가는 곳마다 평화를 전해주는 평화의 사자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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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0 누가복음 점점 사랑스러워지는 사람 눅2:40-52  이한규 목사  2013-01-07 2026
8009 출애굽기 금보다 귀한 믿음 출36:8-38  이한규 목사  2013-01-07 2274
8008 출애굽기 감동하면 감당합니다 출36:1-7  이한규 목사  2013-01-07 1901
8007 출애굽기 거룩한 재테크의 은혜 출35:30-35  이한규 목사  2013-01-07 1656
8006 출애굽기 복된 성도가 되는 4대 요소 출35:20-29  이한규 목사  2013-01-07 2126
8005 누가복음 약점 때문에 생기는 장점 눅1:67-80  이한규 목사  2013-01-07 1933
8004 출애굽기 헌신의 7가지 원리 출35:1-19  이한규 목사  2013-01-07 2385
8003 출애굽기 은혜로운 얼굴 관리 출34:29-35  이한규 목사  2013-01-07 1890
8002 출애굽기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출4:1-5  피영민 목사  2013-01-06 2338
8001 출애굽기 열등감을 극복하라 출4:10-17  이중표 목사  2013-01-06 2819
8000 출애굽기 네 손에 있는 것 출4:1-4  이중표 목사  2013-01-06 2100
7999 출애굽기 진실의 힘 출4:10~17  최형묵 목사  2013-01-06 1659
7998 출애굽기 함께 하시는 하나님 출4:1-9  임덕순 목사  2013-01-06 2202
7997 출애굽기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출4:1-9  임덕순 목사  2013-01-06 2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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