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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손을 내밀라

출애굽기 이성희 목사............... 조회 수 2298 추천 수 0 2013.01.08 19: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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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4:1-4 
설교자 : 이성희 목사 
참고 : 2004년 12월 05일 연동교회 http://www.ydpc.org 

출4:1-4, 마12장9-13

네 손을 내밀라  

 

러 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카 라마조프의 형제들’에는 종교재판을 받으시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심문관은 온갖 잘못을 들어 예수님을 심판합니다. 교묘한 논고와 교활한 고소를 통해 빈틈없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고 위험한 공격자에게 다가가 키스하였습니다. 눈부신 논리나 놀라운 표현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이렇게 단순하지만 의미 깊은 행위, 즉 미움 앞에서 보여주는 사랑 가운데 있습니다. 접촉이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입맞춤은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목회는 접촉의 목회였습니다. 만질 수 없는 예수님은 구원을 주실 수 없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구세주가 되려면 무엇보다 우리를 만지는 분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접촉의 교회입니다. 기독교는 접촉의 문화이며 촉감의 종교입니다. 성경적인 영성은 접촉입니다. 초대 크리스천들에게 입맞춤은 능력과 그 능력을 초월하는 성령을 전달하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사제가 성만찬을 거행한 다음 ‘팍스 보비스쿰(pax vobiscum)’이라고 하면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서로 입맞춤을 나눴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두 번의 위대한 입맞춤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의 위대한 입맞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기운을 불어넣으셨을 때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의 위대한 입맞춤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제자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으셨을 때 일어났습니다.

 

아무도 아기를 만져주지 않는다면 그 아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시닙까? 아기는 죽고맙니다. 아기가 두 살이 되도록 껴안는 것과 입맞추는 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다음 두 가지 문제가 생길 심각한 징조가 나타납니다. 신경학적 손상 또는 자폐증입니다. ‘마라스무스(marasmus)’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유아가 충분한 접촉을 경험하지 못했을 때 쇠약해지는 것을 가리키는 의학 전문 용어입니다. 아기들에게는 만져주는 것이 생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최근의 발표에 의하면 모체 접촉이 많을수록 유아의 지능이 발달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모체접촉이 많은 민족입니다. 아기를 업어서 키우며 젖을 먹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모체접촉이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아마 유아들의 지능도 이전 같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의 한 손에는 약 1500개의 감각 기관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손’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도 손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기적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송사할 혐의를 찾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손 마른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치유하셔서 어울리게 만드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죽일꼬”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살릴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관심은 죽음과 생명의 관심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안식일을 범했다고 고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안식일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일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행동을 중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셨고 단 두 마디 말만 하셨습니다. 첫째는 “일어서라”는 말씀이었고, 둘째는 “네 손을 내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레너드 수윗은 ‘영성과 감성을 하나로 묶는 교회’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 문화는 모든 것을 손을 대지 않고 작동하게 만드는 무접촉의 문화이다. 문화가 접촉에 궁핍하면 할수록 예상할 수 있는 접촉성 범죄는 증가할 것이다”. 점점 무접촉의 시대가 되어갑니다. 이런 시대에 “네 손을 내밀라”는 예수님의 뜻을 알고 접촉하는 교회가 되고 접촉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손이 마르면 안 되는 사람이 손이 말랐습니다.

 

성경에는 안식일에 회당에 손 마른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오른 손이 말랐다고 합니다. 헬라어로는 ‘말랐다’는 말이 분사로 되어 있습니다. 나면서 손 마른 사람이 아니라 병이나 사고로 손이 마른 사람인 것을 의미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사람이 석수였답니다. 돌을 깨고 손질하던 사람의 오른 손이 마른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아픔인 것입니다.

 

손으로 일하는 사람의 손이 말랐다는 것은 일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손이 마른 것은 이 사람의 생계문제입니다. 손이 마른 것은 이 사람의 봉사문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손이란 일, 행위, 노동, 봉사, 때로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볼 때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딱한 처지가 된 것입니다.

 

회당 안에 손 마른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말하면 교회 안에 봉사의 손이 마른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봉사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전혀 일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도를 전혀 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능력의 손이 말라 아무 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잠언 31:20에는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라고 합니다. 칭찬 듣는 사람은 궁핍한 자에게 손을 내미는 자입니다. 신명기 15:11에는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 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는 궁핍한 자에게는 반드시 손을 펴라고 합니다.

 

손이 부지런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1에는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 손은 부지런해야 합니다. 손이 부지런한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디모데전서 2:8에는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손을 드는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손을 드는 것은 분노와 다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손이 마른 것은 기도가 멈춘 것입니다. 두 손을 든다는 것은 회개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항복한다는 뜻입니다. 은혜를 사모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도하는 손은 가장 아름다운 손입니다.

 

손이 마른 자의 손은 보기도 흉합니다. 생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흉해서 보이기 싫은 손입니다. 어떤 분은 손을 가리켜 ‘인체의 마술사’ 또는 ‘역사의 주름잡이’라고 말했습니다. 착한 일도 손이 하고 못된 짓도 손이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손으로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고 원죄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내려오는 원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손으로 행하는 결과에 따라 삶의 질과 무게가 결정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세상에는 손이 말라도 괜찮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관심입니다. 그리고 즉시 고쳐주신 주님의 마음입니다.

 

둘째, 손이 말라 내밀 수 없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손 마른 사람은 손을 내밀기 싫어서, 손을 쓰기 싫어서 움츠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손을 내 밀수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라고 하셨을 때에 “내가 손을 내밀기 싫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아십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인간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주님께는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거기에는 한 간질병 걸린 아이가 물에도 넘어지고 불에도 자빠집니다. 아홉 제자가 고치려고 했지만 고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에 그 아이의 아버지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막 9:22)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엇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능하지 않는 일이지만 예수님께는 능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38년 동안이나 걷지 못하고 베데스다 못가에서 있던 병자에게 예수님은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만약 이 병자가 “난 걸어가지 못해요”라고 했다면 걸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일어나서 상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자신이 걷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어 있던 야이로의 딸, 과인성 과부의 아들 청연에게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난 시체인데 어떻게 일어납니까?”라고 했으면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체가 말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죽은지 나흘이 된 나사로에게는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난 죽었는데 어딜 나갑니까?”라고 했으면 분명히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떤 남편이 대형 패밀리 카에 깔렸습니다. 그 광경을 본 아내가 차를 들어올려 남편을 구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가사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순간적으로 잠재의식이 발동하여 그녀에게 필요한 힘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들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할 수 없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기적은 나타납니다.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작전이나 본심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손바닥은 인간의 심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부위입니다. 손바닥은 마음속입니다. 손바닥을 보이는 것은 마음을 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팔짱을 끼고 상대의 얘기를 듣는 상태는 거부의 포즈라고 합니다. 팔짱 끼는 것은 본심을 숨기기 위한 가림이랍니다. 손바닥을 숨기고, 팔을 양쪽으로 가림으로써 앞에 있는 상대에게 큰 벽을 쌓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만큼 손을 내민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손금을 봐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손바닥을 내밀고 있으면 인간은 곧 정직해집니다. 손금 보는 사람이 묻는 말에 고분고분 모조리 다 숨김없이 대답합니다. 손금 보러 가서 거짓말 하는 사람 봤습니까? 그런데 손금 보러 가지 마세요. 다 털어놔도 덕 될 것이 없어요. 우리의 손을 완전히 펴고 빈손이 될 때에 하나님은 채우십니다.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완전히 빈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38년 병자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비우고 나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 왔던 죄 많은 여인은 자신의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부어 완전히 비우고 드림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 4:13에는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완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완전히 감추는 것 없이 드러내 보이세요. 완전히 항복하세요. 그러면 주님이 채우시고, 치유하십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는 찬송이 있지 않습니까? 손들고 가야 합니다. 손을 들고 항복했습니다. 이제 완전히 맡겼습니다. 이제 졌습니다. 이 때 치유 받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손을 내밀 때에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었습니다.

 

성경은 “다른 손과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손을 내밀고 완전히 비우고 복종할 때 완전히 치유하십니다. 출애굽기 4:4에는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매 그 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고 합니다. 왜 손을 내밀어 잡으라고 했으며 왜 손을 내밀매 그것을 잡았다고 합니까? 왜 “내밀어”를 반복하고 있습니까? 내밀 수 없는 손을 내밀라는 것입니다. 내밀 수 없는 손을 내밀었다는 것입니다. 뱀을 잡으려는데 겁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뱀은 꼬리를 잡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위험하고 겁나는 일이지만 내밀 때에 잡을 수 있습니다. 손을 내밀 때에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될 수 있습니다. 손을 내밀라고 하시는데 내미는 것은 하나님과의 신뢰 회복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20:27에는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손을 내밀어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왜 손을 내밀어 만져보라고 하십니까? 믿음을 회복시켜주시는 말씀입니다. 손을 내밀면 믿음이 회복됩니다.

 

사도행전 4:30에는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사역 기도가 나옵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사도들이 손을 내미는 것은 낫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병자들이 있으면 자신 있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아무리 알아도, 믿어도 손을 내밀지 않으면 낫게 하지 못합니다. 사도행전 9:41에는 도르가를 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손을 내밀 때에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손을 내미는 것은 완전한 회복입니다.

 

손의 힘은 대단합니다. 손은 잘 관리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머지않아 무기로 변합니다. 권세를 얻기 위해 남을 할퀴고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의 목을 죄고, 쾌락을 위해 상대를 유혹하는 손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손을 잘 다스리면 은혜의 도구로 쓰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손안에 든 연장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손을 주님께 내밀어 은혜의 도구가 되게 합시다. 손을 손금 보는 점쟁이에게 내밀 것이 아니라 주님께 내밀어야 합니다.

손은 마음의 대행자입니다. 머리와 손은 짝을 이루어 일합니다. 옛날 베네딕트 수도회에서는 수도사들에게 매일 손을 쓰는 일을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수도원에서는 매일 기도, 학습과 더불어 노동을 일과로 하고 있습니다. 노동은 손을 쓰는 일입니다. 노동은 손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결론

 

1825년 교황 레오 12세는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하나씩 불러 수감된 이유를 물었습니다. 대부분의 죄수들은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재수가 없어서 잡혔습니다. 나 만큼 죄도 안 짓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죄수들은 죄다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유독 어느 한 사람이 자기 죄를 솔직히 시인했습니다. 교황이 감옥소장에게 말했습니다. “즉시 이 악한을 풀어주시오. 살인자가 여기 있으므로 무고한 사람들을 다 타락시키고 말겠소”. 손을 내미는 것은 솔직하게 자신을 내어놓은 일입니다. 손을 내미는 것은 예수님을 의심하지 않고 의지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손을 내미는 것은 자신의 불가능을 극복하고 가능할 것을 믿는 마음입니다.

 

왜 우리의 손이 말라 있습니까? 아직 자신을 솔직하게 주님 앞에 내어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의 손이 말라 있습니까? 아직 우리의 손을 자신있게 주님께 내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솔직하게 주님께 내어놓으세요. 주님께 숨김없이 손을 내미세요. 우리의 무뎌지고 마른 손을 고침 받고 섬김에 앞장서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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