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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 내 장자

출애굽기 이성희 목사............... 조회 수 1738 추천 수 0 2013.01.08 19:3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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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4:21-23 
설교자 : 이성희 목사 
참고 : 2002년 06월 02일 연동교회 http://www.ydpc.org 

출4:21-23, 마21장33-41

내 아들 내 장자        

 

심리학자들은 정상아들은 태어날 때 두 종류의 두려움 가지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것은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큰 소리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다른 공포들은 환경적으로 습득되는 것입니다. 떨어지는 것은 반드시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도 두려움의 내용이 됩니다. 현재의 생활에서 더 나빠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데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다 있습니다. 또 큰 소리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아기들은 청각이 완벽한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두려움도 놀라움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모세의 걱정은 유아기적 두려움입니다. 현재의 생활에서 애굽으로 떨어지는 생활에서 겁이 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유아기 같은 모세의 응석을 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의 응석에 대하여 확실한 보장을 주십니다. "불쌍한 아가야, 너는 내 아들이다." 공포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발표는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합니다. 비로소 하나님도 속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세상에 이 이상의 더 큰 보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은 네가 내 아들이야!"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심을 밝히십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내 백성"이라고 하더니 알고 보니 아들이었습니다. 그것도 장자, 맏아들이었습니다. 모세가 더 이상 하나님께 어떤 보증을 요구하거나 변명을 늘어놓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이상의 보증은 없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이다.

 

하나님의 부성이 비로소 선포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란 호칭은 예수님께서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친숙한 신약적 개념입니다. 그러나 구약에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혈연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만민 중에서 선택한 유일하고도 특수한 관계를 일컫습니다. 애굽왕 바로는 태양신 라(Ra)의 아들이라 일컫고 신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바로가 라의 아들이라고 한 것에 비교가 안될 만큼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시편 2:7에는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언의 장입니다. 예수님께 대하여 내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에 대하여 내 아들, 내 장자라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의거한 혈족관계를 의미합니다. 창 15:5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서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자손이 다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리고 시편 89:27에서는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라고 하십니다. 이 이상의 축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들일 뿐만 아니라 장자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장자와 다른 아들들과는 천양지차가 있었습니다. 장자권이란 구약적인 개념에서는 절대적인 은총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권리였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사건에서 보십시오. 에서는 장자권을 소홀히 여기고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팔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저주 아래 살았습니다. 신명기 21:17에 보면 장자에게는 두 몫을 주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절반을 받았습니다. 장자의 권리가 장자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아끼고, 관심을 가지고, 구속하려고 하셨는지 이제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에는 성도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입니다. 요한복음 1:12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합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비결입니다. 로마서 8:14에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릅니다.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아들만의 권리입니다. 아들 외에 누가 그렇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어로 'en'은 하나라는 의미이며, 'theos'란 하나님이란 단어입니다. 'entheos'란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열광하는 자(enthusiasm)란 하나님과 하나가 된 자를 의미합니다. 부자관계가 하나된 관계입니다. 아무리 아들이 아니다 해도 아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가 아니라 해도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놓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종살이하기 때문입니까? 그들의 일이 고생스럽기 때문입니까? 그들의 신분이 비천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애굽의 신을 섬기기 때문에 내어놓아서 하나님을 섬기게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죄악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시는 참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짓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참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 때문입니다. 섬겨야 할 신을 제대로 섬기는 것은 은총입니다. 섬기지 말아야 할 신을 섬기는 내 아들을 놓아 섬겨야 할 신을 섬기게 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애굽의 신을 섬깁니다. 애굽의 문화에 젖어 삽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십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신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섬기다는 '아바드'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말은 '일하다,' '봉사하다' 보다 더 강한 의미로 '노예가 되다', '종살이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살이하면 온전한 자유를 누립니다. 세상의 종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살이하면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란 노예의지라고 합니다. 세상에 대한 종의 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맹목적으로 굴복하고 세상에 기가 죽어 삽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다 변화되신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에 한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이 아버지는 예수님을 만나자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수님께 자기의 아들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이 아버지가 왜 안타까워 합니까? 자신의 아들이 귀신들려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자빠지게 만듭니다. 이 아들은 귀신에게 붙잡혀 있습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저는 귀신에게 하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아들을 놓아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는 명령은 지금도 하나님이 하시는 명령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세상에 물질에 붙잡혀 있습니다. 세상 문화에 붙잡혀 있습니다. 세상 유혹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세상 유행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세상 오락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악마를 친근하게 생각합니다. 악을 선보다 좋아합니다.

 

최첨단 과학시대, 정보시대인 요즘에 아이들은 점에 빠져 있습니다. 역술인들이 호황을 누립니다. 인터넷의 디지털 역술방에서는 온갖 점을 다 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운세를 보는 것은 기본입니다. 압구정동에 가면 신세대 역술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양복에 넥타이를 차려 입고 컴퓨터 앞에 앉아 점을 치는 신세대 점쟁이들입니다. 고객이 끊이질 않는다고 합니다.

 

일본의 한 유명한 과학자가 저술한 '물로부터의 전언'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똑같은 물을 두 개의 크리스탈 컵에 넣고 한쪽 컵의 물에는 '천사'란 글씨를, 다른 컵의 물에는 '악마'란 글씨를 써서 붙였습니다. 하룻밤이 지난 후 두 컵의 물을 얼려서 현미경으로 관찰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천사'란 글씨를 붙여놓은 컵의 물 입자는 아름다운 눈꽃 같은 결정으로 바뀐 반면, '악마'라고 써 붙인 물은 매우 무섭고 흉측한 모습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축구는 이겨야 하지만 붉은 악마는 져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이런데서 놓여서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셋째,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네가 내 장자를 놓아주지 않으니 내가 네 장자를 죽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이 말씀은 10재앙 가운데 마지막 재앙에 대한 첫 경고입니다. 실제로 이 경고는 출애굽기 12:29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오래 전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어떤 미국인이 실수로 차 사고로 아들을 차에 쳐죽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라비아인은 미국인에게 보상도 싫고 옥살이시키는 것도 싫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미국인의 내 아들과 똑같이 자신의 차에 치어 죽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네 아들을 죽이겠다는 것은 너를 죽이겠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벌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늦둥이 아들 이삭을 다시 제물로 드리라는 것은 세상의 무엇보다 심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신 것은 하나님으로서 최고의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보호 의지는 대단합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무섭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외아들을 죽였습니다. 외아들을 죽였으니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은 네 아들을 죽이리라고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탄에게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탄을 결박하고 죽일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사탄을 잡아 1,000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 속에 던져 잠글 것이라고 합니다(계 20:1-3).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사탄에게 내어 주셔서 죽게 하시고 모든 아들들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날에는 사탄을 무저갱에 결박하여 넣고 사탄의 아들들을 죽일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계신다"고 본 휘겔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가시고, 먼저 말씀하시고, 주도권을 가지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보훈의 8복을 보십시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화평케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하나님은 화평케 하는 사람을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3:26에서도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내가 나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시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이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한 남자아이 아버지와 동물원에 갔습니다. 이 아이가 사자 굴 앞을 지나갈 때 사자가 포효하며 어슬렁거리는 사자에 놀라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얘야 무슨 일이 있니?" 새파랗게 질린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아빠, 저 사자가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철장도 함께 보고 있단다."

 

여러분, 사자가 보입니까? 하나님은 철장을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우는 사자 같이 삼길 자를 찾는 세상의 상징인 애굽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종으로 가지 말고 아들로 가십시오. 아버지가 함께 하십니다. 또 한 주간의 삶도 아버지의 자녀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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