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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2:31~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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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08-06-15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은혜와 사랑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12:31~13:1)
Ⅰ. 본문해설
고린도전서 13장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13장을 깊이 탐구하면 나머지 성경 66권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릴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에 들어와 있는 심각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씌어진 편지입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거대한 국제무역시장 있는데다 자신의 철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매우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자연스럽게 고린도 시에는 몇 가지 부패한 정신이 물결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물질주의입니다. 첨예하게 이익이 대립되는 것이 장사이니 당연히 이기심이 근본적으로 깔려 있었습니다. 또 뱃사람들이 오랜 금욕생활 후 항구에 도달하여 육욕을 마음껏 발산하게 되니 향락주의가 팽배했습니다. 세 번째는 철학과 사상을 따라 학파를 형성하고 쟁론을 일삼는 도시의 정신이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고린도 교회가 처음 복음의 감격을 잃고 침체에 빠지게 되자 사명은 고사하고 도시의 정신이 오히려 교회로 흘러들어오게 되었습니다.
Ⅱ. 그리스도의 몸
고린도 전서 12장은 13장의 배경이 됩니다. 사랑을 다루기에 앞서 12장에서 은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사는 성경적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A. 유기적 생명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공유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들의 완전한 연합인 교회의 생명은 곧 그리스도의 생명이요, 그리스도의 생명과 교회의 생명은 하나입니다.
B. 유기적 통치
‘그리스도가 머리이시다’라는 사실은 머리의 의도대로 몸을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은혜의 공급으로 당신의 통치를 따르게 하시기도 하고 종들을 세우심으로 그릇된 자들을 치사 주권을 나타내기도 하십니다.
C. 유기적 봉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께 접붙여져 각자 하나님을 섬기며 살 뿐만 아니라. 그 섬김이 공동체적으로 연결을 이루어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일들을 뒤잇고 있습니다. 이것이 13장과 관련된 교회의 유기적 봉사 혹은 섬김입니다. 은사는 바로 이 일을 하기에 적합하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방언과, 통역함, 병 고치는 은사 등 각자의 사명에 적합하도록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은사가 교회의 섬김에 이바지하지 못하고 서로 충돌을 일으키자 고린도 교회에서는 오히려 그 몸을 찌르는 수단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너희가 은사로 자랑을 하는데 그 은사가 우열을 가리라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라고 말하면서 너희는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한 후, 13장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어떤 이는 13장에 나오는 사랑 역시 12장의 영적 은사의 연결선상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깁니다. 병 고치는 은사가 병자를 섬기기에 적합한 것처럼 각 은사는 대상이 분명하지만 사랑은 독특합니다. 병이 없다면 병 고치는 은사가 필요 없다고 말 할 수 있지만 과연 사랑의 섬김이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은 은사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특별한 영적인 은사를 받았다고 서로 다투는 것은 너희가운데 은사보다 더 좋은 한 가지가 빠졌기 때문인데, 그것을 보여 주겠노라고 하면서 바로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Ⅲ. 은혜와 사랑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사랑은 은사와는 다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를 실천할 수 있도록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키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사실 한 사람의 죄인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나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관심사는 자신이 그려낸 더 행복한 인생입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의지할 데 없이 죄 가운데 있는 비참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이 다가옵니다. 다른 그 무엇이 아닌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십자가는 희미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뚜렷하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이고 방법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그 순간,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 자기는 그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아주 티끌 같은 인간이라는 것, 하나님을 거슬러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죄의 용서의 경험을 통해 가장 깊이 깨닫게 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삼위가 서로 사랑하심으로 자신이 완벽한 사랑이시라는 의미입니다. 그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면 이 사랑은 결국 어디로 가는 사랑일까요? 바로 그 사랑은 당신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은 그가 마지막 목적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또 다른 목적이 있는 사랑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사랑이시고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사랑하셔서 그 사랑받는 것들이 하나님 밖에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자기 회기적’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인간도 사랑을 하긴 합니다. 인류애와 같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사랑의 거리가 멀수록 비교적 고상한 사랑이 되기도 하고 가까울수록 추악한 사랑이 됩니다. 넓은 호수가 있습니다. 바람 한 점 없어 잔잔한 호수입니다. 그 가운데에 헬리콥터가 바위 하나를 풍덩 떨어뜨렸습니다. 출렁하면서 물결이 일더니 정확하게 원을 그리며 호수 전체로 균형 있게 퍼져나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물결처럼 온 세상에 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사랑 자체를 주신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랑으로 하나님 한 분의 사랑을 전달하는 하나의 질서를 이루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주 감미롭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사와 구별되는 은혜가 사랑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터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사랑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질서를 따르는 사랑이었습니다. 하와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니”라는 아담의 사랑 고백도 하와를 향한 사랑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하와를 그렇게 사랑하길 원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이었습니다. 하와를 향한 사랑과 하나님 자신을 향한 사랑은 전혀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하나님 사랑의 연장선상에 있는 질서의 확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은 인간의 사랑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전원이 필요한 전열기구 같아서 하나님이 사랑의 능력과 사랑 자체를 주셨어도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을 뚝 잘라 인간에게 주실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타락으로 영혼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여 그 생명과 사랑의 공급이 중단 되자 인간에게 더 이상 순전한 사랑이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담은 하와를 향해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이 여자가 주므로 내가 먹었습니다”라는 깊은 원망을 쏟아놓는 처지까지 떨어집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사랑 자체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없어져 버렸지만 사랑의 능력이 박탈당할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인간은 아무런 욕망이 없는 핏기 없는 얼굴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 후 인간은 오히려 자기사랑에 열렬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자원이 많으면 자신이 큰 돌이 되어 호수에 풍덩 떨어집니다. 그 파문으로 자기의 질서를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치열한 경쟁, 넘치는 소유욕 등은 그 파문의 확장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떠받들어 줄 때 그 쾌감은 비길 데가 없고 내가 파문을 펼쳤는데도 인간들이 말을 안 들었을 때나 더 큰 파도가 밀려와서 나를 덮어버렸을 때 상처를 받았다고 하기도 합니다. 처음 주님 없이 살 때 우리도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중앙에 떨어져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며 온 호수 위에 잔잔히 펼쳐져가는 단 하나의 사랑의 질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질서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시는 분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도 발견합니다. 또 자신이 이 하나님의 휘돌아오는 큰 사랑의 물줄기, 그 과정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 진정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의 유래를 발견할 수 없는 이 독특한 사랑은 아주 찬란한 햇빛과 같아서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도 없고 그 본질이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러한 아가페의 사랑의 반응으로 ‘까리따스’의 사랑이 인간의 마음속에도 생겨나게 됩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은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으로, 본질적으로 일치를 이룹니다. 이 하나 된 사랑을 갖게 될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과 올바로 사랑하게 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자기를 사랑하라는 주제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성경은 어디에서도 자기를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면 절대로 자기를 올바르게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善)’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이 정하신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리따스’의 사랑의 놀라운 일어남은 은혜가 하는 것이고 그 은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예전에는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사랑의 질서를 그리는 재미로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을 하나님이 중생시키고 회심하게 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거듭날 때 두 가지의 중대한 변화가 영혼 안에 일어납니다. 첫째는 성향의 변화라 할 수 있는 ‘존재론적’ 변화입니다. 이것은 기울어진 표면에 무엇이든지 올려놓으면 굴러 떨어지는 것과 같이 마음의 기울기가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밖에 사랑할 수 없었던 마음이 깨어짐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저는 신자가 된 이후에도 실제 삶에 서 하나님을 거의 사랑하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럼 신자는 왜 범죄 하는 것일까요?” 대답은 이렇습니다. 자기 사랑으로 성향이 확정되어진 중생 이전의 상태에서 죄를 짓게 되면 양심의 빛이 가책을 갖게 할 때는 있지만 의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이러할 때는 의지와 마음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진 ‘단일의지’로 죄를 짓습니다.
하지만 중생한 신자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신자도 불신자와 마찬가지로 죄를 짓게 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성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의 의지가 아니라 균열된 두 가지 의지로 죄를 짓습니다. 이를 ‘복합의지’에 의한 범죄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은사는 기울기 자체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기울기를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옵니다. 찌꺼기와 같은 나를 깨닫고 그리스도 십자가만을 붙들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 인간이 어떻게 살게 되는지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탁월하게 덕스러운 인생을 사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철저한 자기부인을 감히 우리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하나는 할 수 있습니다. 은혜주시기를 바라며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의존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아니면 진리를 듣기 힘든 혼탁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모세 앞에서 애굽의 술사들이 보였던 마술과 같은 신비, 혹은 물리법칙에 믿음에서 믿음 증거를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들의 믿음은 확률을 의지하는 믿음일 뿐이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참된 믿음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영혼이 깊이 젖어 있는 동안에는 더 이상 신비한 것이 부럽지 않습니다. 그 사랑 자체가 탁월한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신비 자체를 갈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대부분 버림받은 느낌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할 때 더 알고 싶은 것은 산을 옮기는 하나님의 능력, 구름과 바람을 몰고 다니시는 하나님의 큰 힘보다 더욱 귀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랑은 지식에 대한 갈망을 부르고 지식에 대한 갈망은 다시 사랑을 불러일으킵니다. 왜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자신과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빨이 금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심오한 관상의 세계에 들어가서 그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모호한 하나님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그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고 은혜에 감격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는 무한하고 놀라운 세계입니다. 그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이 가져다주는 첫 번째 존재론적 변화입니다.
두 번째는 ‘인식론적’ 변화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해서 육신의 생명까지 죽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여전히 오감을 통해 외부 사물과 접촉합니다. 하지만 타락 후, 사물을 인식의 모든 기준은 ‘자기’가 되어버렸습니다. 내가 좋으면 좋은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는 뒷전입니다. 잘못된 질서로 인간 영혼은 찢어지게 되었지만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이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려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인간을 전적인 은혜로 중생시키십니다. 그러면 눈이 열리게 되고 영적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인식의 능력이 사랑의 능력과 함께 생겨납니다. 아름다움의 본체가 영적인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며, 그 아름다움의 정점이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인식의 변화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보고가 ‘성경’입니다. 자연세계도 아름다움을 담고 있지만 희미한데다가 제대로 이해하려면 고도의 학문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가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고난가운데서도 어느 순간 하나님 앞에 나와 조용히 마음을 열고, 성경이 나를 읽으시도록 할 때 나 같은 인간을 위해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셔서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 이 세상에 악인이 나 하나 밖에 없어도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을 그리스도의 큰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은사는 우리의 본성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은혜는 핏줄이 온 몸에 퍼져 생명을 공급하는 것처럼 전 본성에 깊이 파고듭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는 자연적인 성품 역시 문제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어떤 이가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이며 자기 사랑에 가득에 차있다면 그 지식이 칼이 되어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게 되겠지만 자기 깨어짐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차게 되면 진리를 탐구하는데 가장 좋은 성품이 될 것입니다.
Ⅳ. 결론과 적용
신자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상의 섬김은 무엇일까요?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헌신도 좋고, 오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의 삶도 좋을 것입니다. 오해와 핍박 가운데 양떼들을 이끄는 목회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뛰어난 섬김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뼈 속 깊이 사무친 십자가의 그 큰 사랑, 허물과 죄로 죽었고 지금도 죄로 말미암아 죽고 있는 더러운 인간을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자기 안에도 갖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에 자기는 없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만족하는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은 다른 모든 것들보다도 가장 뛰어난 섬김입니다. 사람이 태어나 많은 일을 하지만 대부분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이 일을 할 때 그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때 그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있을 것입니다. 2008-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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