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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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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08-07-13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사랑은 오래 참고2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4)
Ⅰ. 사랑에 대한 두 이해
사랑의 본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성경과 세상의 교훈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랑의 개념은 대부분 ‘정태적’인 개념입니다. 사랑을 자기의 자산처럼 소유하고 마음에서 활용하며, 그것으로서 남을 사랑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신자라 할지라도 이러한 개념으로 하나님 사랑을 해석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계좌에 입금되듯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고 그것들을 자원삼아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 말씀에 나오는 까리따스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적 사랑의 개념은 정태적 개념이 아닌, 훨씬 더 ‘역동적’ 개념입니다.
Ⅱ. 그리스도 사랑의 역동성
A. 새 생명의 원리와 성령
중생하고 회심하기 전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영적으로는 죄와 사망의 법아래 죽은 사람들입니다. 바로 하나님 사랑의 작용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그 때의 영혼은 필연적으로 모든 육욕적인 삶을 행하는데 이것을 죽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사망의 원리를 물레바퀴라고 한다면 죄는 그 물레바퀴를 돌리는 물이고 그 방앗간에서는 수없이 죽은 행실이라는 곡식을 찧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에게 복음을 듣게 하심으로 놀라운 생명의 원리를 심으십니다. 그 법을 생명의 법이라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단절된 상태에서 벗어나 그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좁은 의미의 영생입니다. 생명의 법이 심겨진 사람은 그 열매인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선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안에 심겨진 생명의 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내적 원리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관련 없이 자동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작용할까요? 생명과 성령의 법은 바로 내주 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움직이고 역사하게 됩니다. 생명의 법이 물레바퀴라면 성령의 은혜가 물처럼 흐름으로써 생명의 법이 작동하고, 온갖 선한 행실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B. 십자가 사랑의 현재화
우리가 십자가 사랑을 경험하고 자기사랑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십자가를 붙들게 되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사랑이 현재적으로 재현되는 은혜의 경험이 지속될 때 계속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주님이 나의 전부라”고 고백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변덕스러운 자신의 태도에 혼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떨 때는 정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다른 이를 용서했다가도, 또 어떨 때는 다시 미움을 품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진실일까요? 모두 진실입니다.
진실에 관한 한 우리는 과거의 기억과 현실이 모순을 일으키게 되면 현재의 편을 듭니다. 그러니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 계좌’에 입금시켜서 우리가 받은 것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사랑의 경험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역동적인 흐름을 통해서만 사랑의 수많은 특성이 드러나게 되고 그 특성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 끊임없는 하나님 사랑의 작용을 가장 잘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오래 참음’이라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C. 사랑 - 오래 참음의 동기와 목표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사랑은 오래 참음의 동기이자 목표입니다.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 수많은 핍박을 인내할 수 있었던 동기는 “내일은 나아지겠지”라는 낙관적인 인생관도 “나중에 큰 축복을 있겠지”라는 비전이 주는 희망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으로부터 받은 큰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교인들에게 “너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다만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했습니다. 남이 모르는 사랑을 알게 된 것, 그 사랑의 경험이 오래 참는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Ⅲ. 오래 참게 하는 사랑
또한 사도는 ‘오래 참음’이 결국 하나님께 더 많은 사랑을 받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자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명의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올 때 우리가 즉각적으로 느끼는 영혼의 변화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의 경험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므로 그 누구도 ‘오래 참음’ 없이 자기가 참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지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신자로 하여금 고통가운데서 오래 참게 하심으로써 사랑의 특성을 드러내실까요?
A. 은혜의 지속적 시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졌고 신자의 마음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사랑의 성향을 만들어내어 삶 속에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친절과 사랑을 드러내게 했습니다. 심지어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까지도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긍휼히 여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 안에 있는 사랑은 한 번 물 붓듯이 부어진 것 이상으로 성령의 은혜 안에서 역동적으로 역사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갑자기 사랑이 놀랍게 부어져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한 번에 사랑하게 되는 장면도 나오고, 끊임없이 진리에 인도되고 연단되어 점차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장면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고심하다가 이것이 신자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질문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랑의 형태는 각기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법과 내주하시는 성령의 작용 이 두 사실 안에서 하나의 통합을 이루며 신자 안에서 경험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바로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말했을 때 신자 안에 있는 사랑의 작용에 대한 밑그림이었습니다.
B. 하나님 사랑에 대한 경험의 핵심
영적인 축복은 하나님이 직접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것으로 대표적으로 ‘용서’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진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죄에 대한 심오한 용서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지극히 비참하고 더러운 자신을 죄에서 자유케 해주신 은총이 선명하게 가슴에 새겨졌다는 의미입니다. 사도가 복음 전파를 시작한 후 세상이 좋아하는 헌신의 대가는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원래 어떤 인간인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같은 몹쓸 죄인을 용서하시는 그분의 큰 사랑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은혜 받을 때 한 번 불현듯 떠오른 것이 아니라 백발의 노사도가 되어 순교의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되풀이되던 경험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는 고백은 이러한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용서는 해줄 수 있지만 사랑은 할 수 없다는 말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 복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신 후에도 당신의 그 품에 불러들이시고 그 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더욱 사랑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가 단순히 과거에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사죄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 가기위한 조건이었다는 것을 십자가 안에서 발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질 때 이전에 경험했던 용서와 큰 사랑, 자기겸손의 고백들은 빛이 없어 쓸모없어진 거울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랑은 한 순간의 격렬한 감정의 체험이 아닙니다. 더욱이 자기 안에 일어나는 감정의 고저를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 사랑의 분량의 척도로 삼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무모한 판단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자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까리따스의 사랑은 공동체의 삶의 지평 속에서만 입증될 수 있다”고 단언했던 것입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순간의 감정은 격렬하지만 충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끊임없이 발휘되는 ‘오래 참음’은 그리스도의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신자 스스로는 자신 안에 사랑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사랑의 특성이 발휘되는 것을 보시며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이 의도하셨던 것입니다.
놀라운 영적인 세계를 경험한 사람, 천사의 말과 사람의 방언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작아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신앙의 한 특성이지 본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독교적인 경건의 최고봉, 참된 복음의 영성을 입증하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사랑의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께 사로잡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에 붙들렸다는 것 이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하늘의 영광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주기 위해 전적으로 순종하고 그 마지막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구원하고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게 하고자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타락은 술 취하고, 간통하고, 탈세하고, 살인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신자의 진정한 타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구원받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모든 경건의 비밀인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용서받은 죄인임을 매일 깨닫고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가 분에 넘치는 것임을 경험하여야 합니다. 또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힘겨운 부르심을 예수의 그 사랑 때문에 가볍게 여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짧은 인생을 돌아보면 내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어서 입술을 굳게 깨물고 사명의 자리에서 고난을 감당했더라면 인생을 허비하지 않았을 것인데 하는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오래 참음’에는 열매가 있지만 욕망대로 살면 열매가 없습니다. ‘오래 참음’이 힘겨울 때마다 우리는 사랑 없음을 고백하고 사랑의 원천이신 그리스도께로 돌아가 사랑을 부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달라서 거절하실 수도, 외면하실 수도, 또 다른 것으로 바꿔주실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게 해달라는 그 간절한 기도는 그 사람이 당신 자신을 위해 드리는 가장 핵심적인 기도이기 때문에 항상 들어주십니다. 방황한 날들의 절반이라도 그 분 앞에 엎드려 사랑을 부어달라고 기도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다 태워 사랑의 빛을 발하며 그리스도의 화신처럼 살아도, 인생은 짧고 사랑을 나눠 줄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진리를 먼저 알게 하시고 은혜를 주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이들을 위해 썩어지는 밀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비록 높은 지위, 탁월한 학문, 미모가 없을지라도 모두 자기가 주인인 세상에서 그리스도 사랑을 기억하며 참된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 ‘오래 참음’을 드러내는지 보여줄 때, 그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신자를 이 세상은 주목하지 않을지라도 하늘에 모든 성도들은 그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영혼일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도 그리스도의 피를 먹물 삼아 보낸 핏빛 편지였습니다. ‘오래 참음’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사랑받은 사람임을 보여줄 때 여러분 안에는 그리스도가 살아 계셔서 우리의 희생보다 넘치는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를 영혼에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2008-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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