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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5:1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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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동춘 목사 |
참고 : | 2009-04-27 비전교회 http://www.vision21com.com/ |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현실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등과 같은 말들의 특징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타협에 의한 굴복이라는 겁니다. 물론 타협이라는 말은 적당한 선에서 매듭을 짓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긍정적인 면이 아니라 부정적인 면에서 읽히면,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라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 한 것을 뜻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신앙을 ‘현실을 넘어서기에는 너무 먼 이상’이라며 현실에 타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현실에 타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반드시 지켜야 할 진리와 진실을 포기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만으로는 살 수 없다. 물질이 필요하다.’
‘이 바쁘고 복잡한 세상에 어떻게 주일을 다 지키고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바쁘고 힘든데, 신앙생활이라도 좀 편히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직장은 직장이고, 교회는 교회다.’
‘기독교 세계관을 강요하지 말라. 나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주일은 주님의 날이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내 날이다.’
‘교회가 내 삶에 간섭하지 말라. 내 신앙 내가 지킨다.’
‘신앙이란 필수과목이 아닌 교양과목이고, 교회란 일터가 아닌 쉼터다.’
‘전도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다.’
‘타종교의 구원관을 인정하라.’
저는 여러분에게 10가지의 상황을 예시했습니다. 다소 설정적이고 부정적이지만 이 예시들은 사실입니다. 이런 태도들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타협에 의한 굴복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굴복이 어떤 굴욕을 가져오는지도 보게 될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굴복과 굴욕을 통해 진정한 믿음과 순종이 무엇인지를 반추(反芻)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배경은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찾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달라는 말에 화난 바로가 이스라엘에게 부과된 노역을 중노역을 바꾸게 한 것에 있습니다. 화난 바로는 매일 지급하던 짚을 지급하지 말고 매일 생산하던 벽돌의 수는 그대로 생산하라고 명령을 내린 겁니다. 이는 참으로 황당한 명령이었습니다. 짚을 제공받고 벽돌을 만들어도 그 숫자를 맞춰내는 것이 늘 빠듯했는데, 이제는 짚이 제공되지 않는 상태에서 동일한 벽돌 숫자를 맞춘다는 것은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명령이기에 최선을 다해봤지만 역시 이 일은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벽돌의 숫자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변명에 불과하다며 채찍이 내리쳐지는 겁니다. “백성이 애굽 온 땅에 흩어져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짚을 대신하니 감독들이 그들을 독촉하여 이르되 너희는 짚이 있을 때와 같이 그 날의 일을 그 날에 마치라 하며 바로의 감독들이 자기들이 세운 바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을 때리며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에 만드는 벽돌의 수효를 전과 같이 채우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12-14절)
이 조치는 너무도 황당한 조치였기에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애굽 왕 바로를 찾아갑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이라 함은 우리가 일제강점기에 일본경찰이 우리를 보다 잘 지배하기 위해 세운 한인 순사와 같은 겁니다. 또한 예수님 당시 세리와 같은 겁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은 매국노요 애굽의 앞잡이인 셈이었습니다.
이들이 바로에게 호소합니다.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고 그들(바로의 감독들)이 우리에게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당신의 종들이 매를 맞사오니 이는 당신의 백성의 죄니이다.”(15-16절) 이들은 바로에게 서슴없이 “당신의 종”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대단히 굴욕적인 모습입니다.
분명히 말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람의 종’으로 키우신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오직 ‘하나님의 종’으로 키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만을 신앙하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사라고 하는 독특한 조직을 갖게 하신 겁니다. 사사는 왕이 아닙니다. 사사는 단지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인도자 혹은 지도자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니까 사사는 하나님이 친히 인간을 통치하시는 ‘신정통치’(神政統治)의 심부름꾼인 겁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사사기 8:22-23)
기드온의 고백으로 보건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신정국가’로 남는 일이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아래서 동일하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길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렇게 나를 왕으로 섬기고 아버지로 받들고, 내가 말하는 계시와 법을 따라서 살아가기만 하면, 자유와 평등과 번영과 안정을 내가 주겠다. 군사도 따로 세울 필요가 없다. 내가 다 막아주마. 재판관이나 치안을 유지할 어떤 조직도 필요 없다. 내가 판단해 주리라. 모든 것은 내가 책임져 줄 터이니 너희는 이 말씀과 계명을 준수하여라. 내가 이렇게 친히 너희의 왕이 되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사무엘에게 왕을 달라고 했을 때,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삼상 8:7-8)며 아파하셨던 겁니다. 하나님만이 왕이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종’이 아닌 ‘애굽 왕의 종’으로 사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심지어는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굴욕적 태도를 우리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세상이 세워놓은 기준과 가치에 따라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이는 애굽 왕의 종으로 사는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현실이잖아. 이상만으로는 살 수 없잖아.”라며 믿음의 가치관에 순종하기를 거부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종이 아닌 애굽 왕의 종으로 사는 겁니다.
참으로 세속적인 영광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영적인 영광을 무가치하게 여기게 되고 맙니다. 이것이 참 위험한 일입니다. 교회가, 성도가 그 가치관에 혼란을 일으키고, ‘우리도 세상처럼!’ 하면서 세상적인 길을 걸어가면, 교회는 더 이상 거룩한 본분을 지켜갈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능력은 당연히 사라지고, 더 이상 교회라고 기독교라고 할 수 없는 겁니다. 거룩한 능력이 상실된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애굽 왕 앞에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며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그들을 향해 바로가 무어라 말을 퍼붓는지 보시겠습니까?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17-18절) 당신의 종이라며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는 그들에게 바로가 쏟은 말은 “게으르다”는 호통과 명령에 따르라는 말이었습니다. 인정사정없이 몰아칠 뿐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면 쉼이 있지만, 세상을 왕으로 하면 무거운 짐만이 더해져서 피곤하고 지칠 뿐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면 인자와 자비와 은헤를 만나지만, 세상을 왕으로 하면 모욕과 굴욕만이 주어질 뿐입니다. 여러분이 제발 이 사실을 하루라도 빨리 깨닫기를 바랍니다.
애굽 왕에게 종이 된 이 기록원들이 바로에게 야단을 맞자 속된 말로 완전 깨갱합니다. “너희가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오더라.”(19-20절 상) 바로의 굴욕적인 말에도 굴욕을 느끼지 못하고 쩔쩔매는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나를 보지는 않는지요? 좀 더 세상적이지 못한 나를 반성하지는 않는지요? 기왕 세상을 왕으로 섬긴 바에 더 확실히 섬기겠다고 굴복하겠다고 다짐을 하지는 않는지요?
이 기록원들은 바로 앞을 쩔쩔매며 나오다가 모세와 아론이 길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21절)
여러분은 21절이 오늘 본문의 하이라이트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기록원들이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한 말은 한마디로 원망에 의한 독설입니다. ‘왜 잘 살고 있는 우리를 곤란에 빠트렸느냐? 너희들 아주 못된 놈들이다. 갓 뎀!(God Damn!,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라!)’ 이런 겁니다. 참으로 적반하장(賊反荷杖)입니다.
기억하십니까?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구원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말씀을 전하면서 이적을 행할 때 그들이 믿고 경배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출 4:31) 백성들 중에 기록원들은 없었을까요? 있었습니다. 분명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지금 기록원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해 막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갓 뎀!(God Damn!)”
요즘 우리 사회 안에 회자되는 유행어에 막말과 막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막말>이란, 상대의 인격에 대한 배려 없이 독설과 같은 감정적 언어를 쏟아내는 것입니다. 이는 말하는 사람 위주의 언어소통이고 제3자에게 재미를 주자는 언어소통입니다. <막장>이란, 막말과 마찬가지로 말초적 자극을 위해 민망한 속까지 다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재미와 자극을 위해 리얼을 선택한 방송의 막말과 막장은 한마디로, 막가자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기독교 안에도 난무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이 쏟아내는 막말, 인권침해가 되더라도 리얼을 위해 속을 들추어내는 막장 현상이 우리 기독교 안에도 난무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갱신 혹은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속살을 헤집는 정도가 때론 정도를 지나쳐 세상의 논리에 이용당하는 기묘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배려도 없고, 예의도 없는 비기독교적 현상이 교회공동체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에게는 굴복하면서 모세와 아론에게는 막말과 막장을 보이는 기록원들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논리와 가치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더욱이 세상의 가치와 논리로 교회공동체를 어지럽히는 일은 더욱 용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憑藉)하고, 교회공동체원이라는 이름으로 교회공동체를 향해 막말을 하고 막장을 보이는 것은 더더욱 용인할 수 없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눅12:51) 예수님이 이 말씀도 하셨다는 것을 막말과 막장을 보이는 이들에게 보여주어야겠습니다. 자, 준비들 하십시오. 이제부터 진짜 믿음이 무엇이고, 진짜 순종이 무엇인지를 보여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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